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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Ⅰ. 문제 제기.
가톨릭교회는 동방 정교회. 개신교와 더불어 기독교의 3대 교회 전통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 조직이나 역사적 전통 및 신학적 체계성과 교회 구조의 체계성으로 해서 그 선교나 신앙의 활동이 활력에 차 있는 교회로 지목되고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도록 하신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를 구성한 추진력이 그 바탕이 되어 있고 따라서 교회사 2천년의 전 흐름을 지속한 훌륭한 신앙공동체로 승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 교회는 6세기에 이미 동방교회와의 분열 조짐을 보이다가 12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갈라 섰고. 16세기 초반에는 역시 마틴 루터 (M. Luther) 존 칼빈 (J. Calvin) 및 존 녹스 (J. Knox)가 이끄는 개신교 운동과 필경 결별하는 엄청난 역사적 시련도 겪어야 했다. 그것은 긍정적 가치로 평가되는 면도 있겠고 장차 각기 특수한 공헌 기능으로 상호 보완되는 기능 분담 이론에 적응되기도 하겠지만. 분열 당시의 수치나 증오 및 세계에 대한 교회 이미지 훼손이라는 면에서는 되돌아 보아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가톨릭교회는 세계 도처에서와 한국 안에서 불의에 도전하는 막강한 정신적 차원의 힘 곧 세계 구원의 선교 작업에서. 엄청난 세력으로 조직화된 세속 세계에 대해 함께 응전하는 동맹자로서 연대를 다지고 함께 출행(出行)하는 일치와 에큐메니칼 협력의 역사적 요청을 묵과할 수 없는 처지에 다다라 있다.
상당한 수준에서 신 릴냅텝대화가 진행되고 WCC (World Counil of Churches)에서는 동방 정교회가 이미 회원으로 있다. 교회간의 거리가 교회와 세속과의 거리처럼 멀었던 수치는 땅 속에 묻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그대로 묻어 두어서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밝혀지는 것이며 그런 불명예를 낳았던 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끈질긴 과정없이는 망각의 편의와 감상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 한국에도 쓰라린 과거가 있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못미더운 원수처럼 서로 반목하던 비(非)가 없지 않았다. 이제 그 역사. 그리고 그들의 가능성과 유산. 미래의 전망을 함께 그려 나갈 때가 온 것이다.
Ⅱ. 가톨릭교회의 생성. 분열과 자기 보존
가톨릭 초대교회는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후. 재림의 시기가 늦어진다고 생각한 이들에게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기록으로 남겨지고.
이처럼 초대교회는 필요에 의해 오랜 작업을 통해서 서서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 로마와 희랍의 자리 다툼
그 이후 가톨릭교회는 베드로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했다는 사실에서 로마에 주재한 주교의 권위를 높이기 시작하여
마침내 로마의 주교가 교회의 대표성과 권위의 상징으로 굳혀지게 되었고. 교회 조직의 구조도 제국(帝國)의 지방 행정 구조를 그대로 따라 주교구 대주교구 등으로 고정시킴으로써 '로마 가톨릭'이란 구체적인 교회 구조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이 로마의 머리 글자는 우연히 들어 간 것이 아니었다. 사실 콘스탄틴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오늘의 이스탄불인 당시 콘스탄티노 폴리스로 옮겼을 때. 그 수도의 주교가 전 세계 교회의 수장 (首長)이라는 주장을 당연히 하게 되었고, 그래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양 주교는 서로의 정통과 수장성(首長性)을 계속 주장하여 그 갈등의 씨앗이 이미 깊이 뿌리 박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까닭에 동방교회(콘스탄티노 폴리스주변)와 서방 가톨릭교회와의 분열이 초래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초대교회의 살아 있는 터전은 유대와 소아시아 카파도기아 지방 곧 오늘의 터어키 지방으로. 희랍인들의 중심적 생활권에서 였다. 거기서 교회가 자라고 성장하여 선교해서 세계로 뻗는 교회의 동력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라틴 사람 중심의 서방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제국의 .로마. 후광을 업고. 또 베드로의 로마 참형을 근거로 그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함에 따라 두 교회 곧 희랍인들의 교회와 로마인들의 교회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런데 희랍인들은 천성이 철학적이라 신학적 노작으로 영일 (寧日)이 없었는데 로마사람들은 현실적 조직. 정치. 행정력에 뛰어난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로 야기된 갈등에서는 항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교회 권위와 신학적 교리적 정통의 대립이 동방, 서방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저 유명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이란 유명한 인물을 낳게 한 것이다. 대심문관은 지상에 다시 오신 예수님을 잡아 이단 심문소 감옥에 가두고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이 옛날 말씀하신 것에 더 이상 무엇을 부가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다시 오셔서 우리(교회)의 일을 방해하십니까.”
이것은 물론 냉소주의자인 이반을 통해서 한 말인데 실상은 동방 정교회가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느꼈던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가 대변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3. 자기 보존을 위한 방편들
종교개혁을 겪으면서 가톨릭교회는 실제로 개선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고 보았고 세계에 대한 개신교의 확장을 막기 위해 강력한 반 종교개혁 (Conter Refomation)운동을 전개해야겠다고 여겨 때마침 세계 항해국가로 부상해 5대양에 진출하던 가톨릭 국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하여금 예수회 (Jeuits) 신부들과 함께 세계 선교의 사명 수행에 나서도록 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주요 인사 가운데 하나인 프랜시스 싸비에르(F. Xavier)가 일본에 도착한 것이 1548년 이었으니 그들의 해외 선교 열의는 실로 경탄할 만하였다. 17세기 이후 가톨릭교회는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그리고 과학 기술과 산업의 발전 등으로 중세기의 교회 이미지 보존이 수세에 몰렸던 때가 없지 아니하였고.
그러나 그레고리 16세는 우리 교회사에서는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으로 즉위한 1831년 9월 9일에 조선교구(朝鮮敎區)를 청나라에서 독립시키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던 인물이다. 가톨릭의 전통화 의식은 비오 9세 (1846―1878)때에 이르러 그 극에 다다른 인상이었다.
그가 1870년 7월에 공포한 <교황무오설―Infallbty of Pope>도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절대권 수립을 지향한 것이었으며 가톨릭의 발전을 위한 위기 처방식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교황으로 추앙된 레오 13세는 훌륭한 일을 하나 남겨 놓았다. 가톨릭 사회참여의 비전과 문호를 처음 개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Reum Novarum>이란 회람 (回覽)을 발표하여 교회에 노사분규의 문제 해결에의 참여를 강력히 시사하고 교회가 사회정의 실현에 임하도록 박력과 확신을 불어 넣어 주었다. 얼마 후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세계대전의 참화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범교회적인 구제 사업을 벌이기도 하여 사회정의 실현의 교회 이미지를 확고히 세워 놓았다. 그다음 교황 비오 11세는 이태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1929년 라테란 협약 (Latean Pacts)을 맺어 바티칸 령(領)을 매입. 바티칸 공화국 형태로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와 그 환경은 파쇼 이태리. 나치 독일의 와중이었다. 이 가공할 만한 상황에서 그는 이들의 영향권 아래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일본. 독일. 이태리의 주축국 판도 안에서 피할 수 없이 일본에 있는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神社參拜)의 애국적 의식성을 시달하여 다른 모든 교회가 순교자를 낼 때 가톨릭교회는 신사참배 행렬에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Ⅲ. 한국의 가톨릭교회
19년에 대구에 있던 가톨릭 신부 불란서인 안세화는 '新敎之起源'이란 책을 간행하였다. 그 책은 당시 서울의 주교이며 한국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였던 민덕훈(閔德豪―G. C. Mutel)이 발행하였다.
이 안세화의 책에 이런 글이 있었다.
“뎌 루테르 (M. Luther)는 1545년에 교황을 훼방하고 릉욕하기 위하야 온갓 욕셜과 악담이 가득한 책과 부정하고 부끄러운 그림을 만들어 독일 온 나라에 전파할 새, 그 무례하고 더러움과 설독하고 참함함은 사람의로의 모양으로는 부끄러워서 도져히 바로 읽지 못할 만큼 되었으므로 그 때 사람들은 다 <루테르는 발광하지 아니하였는가> 하야 저를 괴악하게 여기게 되었더라"
그러나 이 신부의 루터 비난은 끝이 없었다. 루터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이런 글을 썼다. "뎌는 죽던 날 저녁 망스필드 (Manfild) 쟉의 집에서 저녁 쟌치에 취도록 잘 먹고 놀다가 제 방에 드러 가셔 갑작이 죽었는대 목매여 죽었다 그 하인은 그 참경을 보고 즉시 뎐쥬교로 회두였으며. 예수교인들은 그 조샹 루테르의 평언을 깁히 연구야 어두움을 물리치고 진리의 광명으로 나아오기를 라노라 …텬쥬교회에 드러와 잇서야 하리로다.”
개신교 역시 가톨릭에 대한 매도를 심하게 한 것이 그 처음부터의 자세였다. 언더우드 (H. G. Underwood)는 1892년에 열린 개혁교회연맹 세계대회 (WARC)에 참석하여 한국의 가톨릭을 비방하여 <이교(異敎)와의 결탁>이라 한 일이 있었다.
이런 신, 구교간의 갈등은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그 유래를 살펴 볼 수 있다. 1801년 천주교인 황사영(黃嗣永)이 백서(帛書)를 북경주재 주교에게 밀송하여 조선을 침공하되 병선 수백척에 정병 (精兵) 수만명으로 하고 조선의 개종을 실현하라고 하고자 하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혹심한 신유 (辛酉) 교난이 교회를 휩쓴 일이 있었다. 1831년에 황사영과는 4촌 매부지간에 있던 정하상 (丁夏祥)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써 겨례의 교회로서의 가톨릭의 가능성을 논증하였지만 황사영의 비도(非道)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아니하였다. 한국 개신교가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 초기부터 가톨릭과 개신교가 비록 같은 기독교이기는 하지만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재삼 재사 우리 겨레들에게 천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인상은 기독교회 안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일반 사람의 눈에도 그런 형식으로 비치고 있었다. 가령 유길준(兪吉濬)은 1895년 그의 <西遊見聞―서유견문>이란 책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그 교를 복(腹) 하는 자는 교황을 상천(上天)같이 신의(信依)하야 외구(畏懼)하기를 자기의 정부 (政府)에 과(過)하고 애모하기를 자기의 부모에 가(加)하야… 또 그 교를 숭고하는 국(國)은 타방 (他邦)의 토지와 인민을 침탈 음계(陰計)를 행하나니 가히 신구(愼懼)할 자가 차(此)라.”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던 것은 1898년 황해도 재령에서 천주교인들이 그들 성당 건축에 개신교인들을 강제 동원하거나 금품을 강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당 건물 동량 (棟樑)에 거꾸로 매달고 태형까지 가한 사건들이 빈번히 있었던 것이다.
독닙신문은 이런 불행을 고발하여 천주교인들 중에 탐관 토색에 못이겨 입교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범법하고 망명하기를 위하여 이름을 교(敎)에 걸고 외국인 보호만 밋고 겁없이 작란하는 자들”이라 분석하였다. 개항기에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는 외국 신부들 비호 밑에서 범법이 감행되었다는 해석이었다. 이 불행한 사건은 오랜 조사 끝에 1903년 9월에야 고종(高宗)의 특명으로 재판에 넘겨져 10월에 실형이 선고됨으로 인단락을 지었다.
이런 사태로 신, 구교간의 갈등과 무관계는 오래 계속되고. 전술한 안세화 신부의 루터 비난이 다시 한번 그 불길을 당겼던 것이다. 1937년부터 한국교회를 가혹하게 박해한 신사참배 때에도 기독교의 통일된 충성과 순교는 성사되지 못했다. 가톨릭이 교황의 명령에 따라 그것이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다만 애국적 행위라 해서 신사참배 대열에 섰을 때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이 순교의 모진 길을 가고 있었다. 6.25 전란 중에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공산군의 가공할 만한 종교인 처단 때문이었다. 여럿이 .죽음의 북행. 행렬에 끌려가다가 죽었고 성직자들이 처형되었다. 개신교의 피해도 엄청났다. 교회가 소실되고 교인들은 우물 속에 수없이 던져졌다. 이 시련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한국 기독교의 공동체로서의 한 연대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966년은 기념할 말한 해였다. 그 때 천주교와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이 강단 교류를 단행한 것이다. 그것이 한 이벤트로 끝나긴 했으나 신, 구교간의 거리를 옛날의 적대관계에서 살폈을
때와는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었고 그것은 장차 대화와 협력의 문호를 넓게 연 혁신적 사건이었다. 1971년에는 마침내 신, 구교합동의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 중반부터 교회의 노도같은 정치 참여의 물결에 신교와 구교도 똑같은 역사적 부름을 받은 것 같았다. 가톨릭의 노동농민 운동과 사회정의 운동은 개신교의 물결에 앞서 있었다.
Ⅳ.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
1. 재일치의 가능성
1964년 가톨릭의 박양운 (朴養雲) 신부는 향후 50년 100년.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미워하지 않고 부드러운 대화로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교회 재일치 운동은 꼭 성공하고 말 것이라고 전망한 일이 있었다. 그는 후에 통일교계와 먼 거리를 두지 않고 지낸 일도 있는 인물이어서 종교 통일문제 전반에 낙관적이었는지. 아니면 신구교의 일치를 개신교의 입장을 무시하지 않는 신학적 입장에서 낙관한 것인 지는 따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1962년 제2차바티칸 공의회에서 <에큐메니칼 율령(律令)>을 발표하여 교회 분열 (종교개혁)의 책임이 양교회에 똑같이 있으며 구원의 방도 (方道)와 진리의 소장 (depoitory)이 일부 비가톨릭 교회에도 있다는 양보적 언사는 일단 고무적이었다. 개신교를 가르켜 옛날의 이단이라든가. 열교(裂敎)란 말을 버리고 떨어져 나간 형제들 이라 부른 것도 관계 개선의 한 거보였다. WCC에도 가톨릭이 옵저버로 참관하게 된 것 역시 희망 찬 발걸음이었다. 더구나 사회정의에 대한 투쟁에서의 신, 구교협력은 눈부신바 있다. 해방신학은 원래 남미 가톨릭교회의 선교신학이다. 그 방법론이 흑인신학 그리고 민중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신학적 교류가 신, 구교사이에 이만큼 거대하고 확실했던 일이 전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대외적 외연적 (外延的) 활동이나 투쟁에서의 일치를 내적 본질적 간격의 해소 형태로 보는데 위험이 있다. 국공합작(國共合作)은 일제의 패망으로 분열되고 결국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문제는 그 내적 관계의 일치를 위한 끝없는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가톨릭이 개신교를 볼 때에 비판할 요소들은 많다. 그 가장 큰 것이 아마 교회의 분열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성경 해석상의 차이에로 연결되고 따라서 성경 해석으로 인한 분열은 성경의 근본적 메시지에 대한 난립화라는 가톨릭의 의구심은 한편 일리가 있다. 결국 교회의 정통성 확보를 지탱하는 성직계급의 부재가 교회와 성경의 분열과 난립을 조장한다는 비판일 것이다. 루터가 최고의 권위로 내세운 성서와 양심에서 양심의 다양성이 일률성으로 통제되지 못한다는 것이 개신교의 결함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은 주체적인 체험에서 서고 내적 체험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확인되는 것이라야만 한다. 가톨릭은 객관성이 개신교의 주관성과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와 재일치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준한가 하는 것을 당장 알 수 있다. 그뿐이랴. 개신교 안에서도 일치의 가능성은 현재 난망이고 같은 교파 안의 분열조차도 같은 신학 같은 제도로 재일치시키지 못하는 비신학적 요소들 때문에 시달리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기대는 지나친 것이고 분에 넘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개신교 내의 일치조차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우리 입장을 염치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2, 인정과 동행으로
시카고 대학교의 펠리칸 교수는 가톨릭교회의 수수께끼란 책에서 가톨릭의 교황무오설. 마리아의 무흠잉태설과 마리아 숭배. 이 두가지는 다른 것이 다 접근 가능할 때에도 개신교측에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마지막 걸림돌이라고 천명한 일이 있었다. 더구나 신부가 죄 용서의 권한을 행사하고 고해를 들으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행권을 행사하는 일들을 기독교의 복음적 신앙에서는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섭섭해 한 일이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태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따라서 대화는 하겠지만 로마나 희랍. 독일과 스코들랜드와 마찬가지로 일치의 꿈은 구체적 성사가 어려운 주제임에 틀림 없다.
EC 국가가 탄생하고 세계국가가 탄생되면 그 주도세력이 민족 차이를 제거하고 언어를 통일하면서 세계 기독교회의 단일 구성이 가능할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일을 바라 볼 필요도 없고 또 무슨 큰 잘못으로 자책할 필요도 없다. 가톨릭은 가톨릭교회로서 엄청난 역사적 공헌과 구속의 사업을 수행하여 역사적 교회로서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가톨릭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한국문화에 끼친 그들의 공로는 한글 사용이나 성당 건축에서의 근대화 추진, 수 없는 순교자를 내어 초대 로마제국 시대 교회가 18, 19세기의 한국 천주교회만큼의 핍박을 받았을까 단언하기 힘들다.는 세계 선교사가 (宣敎史家) 스티분 니일 (S. C. Nell) 교수의 판단. 그들의 끝없는 사회적 봉사와 정의를 위한 투쟁. 신부와 수녀들의 헌신적인 인간애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긴다는 신념있는 삶의 모습들. 그 밖에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 가는 모습들을 우리는 감격과 감동으로 바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회 역사 전통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오랜 전통과 교회적
유산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개신교보다 백년 전에 들어와 온갖 수난과 박해를 이겨 내고 기독교의 구원의 빛을 드러낸 선구적 역할을 다한 것이 가톨릭교회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요. 따라서 오래토록 기념될 것이다.신학적인 근본적 차이의 해소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로서의 동행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이 시대 기독교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