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다. 과거에 난 그가 한국을 부유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패기 있는 젊은 세대를 관찰하고 난 후, 나는 박 전 대통령에게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한국인의 가슴에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스며들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명박 정부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G8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이런 목표는 매우 현실적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의 많은 기업의 목표 역시 세계무대에서 정상에 서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기업들은 이런 목적을 달성했다. 삼성과 LG와 현대차를 보라. 많은 한국 학생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은 두 인구 대국인 중국 인도와 함께 상위 5위 안에 든다. 그들은 매우 광범위한 야망을 갖고 있다. 산업 분야, 국제기구, 나노과학, 생명과학에 도전하고 있다. 그들은 전문분야를 세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선진국의 젊은이들과 비슷한 목표를 공유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의 경제적 성취가 갖는 중요성에 동의한다. 그는 30년 전에 사망했다. 그가 숨지면서 그의 권력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 사회와 민간 산업, 그리고 나아가 미래 세대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게다가 이러한 성장 과정은 한국민이 스스로에게 한국은 더이상 가난하거나 약자일 필요가 없으며 한국도 더 낫게 변화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이런 자신감을 자연스럽게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수십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3년, 내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紙)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다. 당시 한국에는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위험스러운 징후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많은 국민은 한국이란 나라를 스스로 피폐한 제3세계 국가로 인식했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한국의 미래에 비관적이었다. 내가 박 전 대통령에게 그 점을 언급하자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이 내보이는, 비생산적이고 부정적인 특성은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과거의 외세 침략과 재난의 결과"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목표는 경제를 튼튼히 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불어 넣어주려 했다.
나는 2년 전, 패기만만한 일단의 한국 젊은이들을 뉴욕 한복판에서 만났다. 바로 한국형 구축함인 '충무공 이순신함'을 타고 입항한 대한민국 해군의 젊은 장교들이었다. 세계의 수도를 장식한 고층빌딩 밑에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한국군 장교들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보호할 수 있는 대양해군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현재 대양해군을 추구하고는 있으나, 한국은 선진국 중에서 그런 해군력을 갖추지 못한 유일한 나라다. 그러나 그날 한국 해군장교들의 눈은 한국 해군이 그런 숭고한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자신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내 인생의 전반부를 일본의 강제점령, 6·25전쟁과 같은 불운으로 점철된 한국을 보면서 보냈다. 인생의 나머지 후반부에서 나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재건해 세계 최대 부국(富國) 중의 하나로 발전하는 한국을 봤다.
한국 역시 다른 선진국들처럼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이 더욱더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다. 모든 한국인은 나처럼 확신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30년 전 오늘 숨진, 비전(vision)을 갖춘 한 애국자 덕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0.26사태에서 목숨을 건졌던 사람들은 지난 30년간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박 전 대통령이 피격, 사망한 만찬 당일 박 전 대통령의 건너편에 앉아있었던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거의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의 시신을 등에 업고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달려갔던 그는 이후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복권됐다.
올해 86세로 건강관리와 신앙생활에 힘쓰며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한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가수 심수봉씨는 만찬에 배석했다는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 한동안 활동을 못하는 ’암흑기’를 거쳐야 했으나 지금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올해초 데뷔 30주년기념 콘서트를 가졌고 8월에는 30주년 기념음반 ’뷰티풀 러브’도 발매했다.
그러나 심씨는 10.26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속사 관계자는 “과거 힘들게 조사를 받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한다”며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더이상 10.26을 기억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당시 광고모델 출신 대학 3년생으로 심씨와 함께 배석했던 신모씨는 사건 직후 미국으로 이민, 결혼했는데 현재 귀국설과 해외체류설이 갈리고 있다.
만찬에 있었던 차지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은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돼 수사를 받았으며,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군법회의에 기소된 뒤 1, 2심을 지나 대법원까지 거쳐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80년 5월24일 사형에 처해졌다.
만찬장 근방에 있다가 사건에 가담했던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과 박홍주 중정부장 수행부관도 모두 김재규와 같은 길을 걸었다.
안가에 있었던 박상범 대통령경호실 수행계장은 김재규의 부하들로부터 우측하복부 등에 4발의 총격을 받았으나 대수술 끝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는 그후 대통령 경호실장, 민주평통자문회의 사무총장에 기용됐다가 김영삼 정부 때인 1997-1998년 국가보훈처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다.
그는 2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요즘은 자연인으로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며 “사건후 정신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경호실 일을 계속한게 극복에 도움을 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인간관계가 좋아 김재규의 부하들이 확인사살을 하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 “나중에 그런 얘기들이 들리더라”며 “서로 호형호제하면서 지내던 후배들이었다”고 회고했다.
박 대통령이 옮겨졌던 경복궁 옆 국군서울지구병원에는 성상철 육군소령이 정형외과 과장으로 있었다. 그는 현재 서울대병원장이다.
당일 안가 근방 별관에 있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2002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0.26 직후 계엄사령관을 맡은 그는 12.12사태 직후인 1980년 내란기도방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불명예 전역했다가 1997년 무죄를 인정받을 때까지 16년간 야인으로 살면서 고통을 겪었다.
10.26사태로 대통령권한대행에 오른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는 같은해 12.12사태 직후인 12월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2006년 별세했다.
10.26사태 직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사건을 수사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1대, 1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김 전 중정부장에 대한 수사와 재판에 참여한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1979년 12월4일 계엄보통군법회의(1심 재판)의 김영선(80) 재판장은 사형을 언도한 뒤 이듬해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중앙정보부 제2차장에 이어 제11, 12, 13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전창렬(69) 전 육군본부 검찰부장은 이 재판에 검찰관으로 참여했다.
1990년 소장으로 예편, 국방부 군사법원장을 지내다 변호사 개업을 한 그는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한국사의 거목이 쓰러진 것은 충격이었다”며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다르다고 일거에 이상 세계를 세우려는 것은 폭력 아닌가”라고 물었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국선 변호인 가운데 한 명인 안동일(69) 변호사는 이후에도 굵직한 사건을 많이 맡아 주목을 받았는데 자신의 재판기록을 토대로 ‘10ㆍ26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책을 내기도 했다.
역시 국선인 신호양(69) 변호사는 1980년대 민정당을 통해 정계에 투신, 1987년 경기도 안성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손해배상이나 부동산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민선 변호사 중에는 우리나라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불리는 이돈명(87) 변호사가 있다. 그는 김 전 부장 변론 이후에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삼민투사건, 권인숙씨 성고문사건 등의 변호사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2006년부터 법무법인 덕수의 대표변호사로 재직하고 있다.
역시 민선 변호인단에 참여했던 홍성우(71) 변호사는 한때 정계에서 활동했으나 2003년 중병을 앓은 이후 요즘은 건강을 돌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선 변호인단의 태윤기(91) 변호사는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지도위원과 부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서민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요즘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것으로 전해졌다.
10ㆍ26사태 당시 사법부 수장이었던 이영섭 대법원장은 1981년 퇴임후 변호사로 활동하다 2000년 작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넘어가기 전 사건을 맡은 대법원 형사3부 유태흥 주심은 이 전 대법원장 퇴임 후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지병으로 투병하다 2005년 1월 한강에 투신해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