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江) 2
박두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리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개 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리리.
무재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늘 발콥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 죽징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핏무늿길 바다로 간다.
(시집 『거미와 성좌』, 1962)
[어휘풀이]
-유유한 : 태연하고 느긋한. 침착하고 여유가 있는.
-얼룽대는 : 어룽거리다. 뚜렷하지 않게 어른거리다.
-울대 : 성대(聲帶)
[작품해설]
이 시는 앞선 시대의 작품들이 보여 준 바 있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정서적 감수성은 사라진 대신, 현실적 상황과 그 극복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작품이다. 박두진의 『거미와 성좌』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민족의 비극적 상황을 강한 어조로 고발하고 어두운 민족 현실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통찰력 있게 제시한 시집이다. 「강 2」는 바로 이 시집의 주제 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역사를 상징하는 ‘강’을 통해 고통으로 얼룩진 고난의 시대를 청산하고, 행복으로 가득찬 새로운 미래를 갈망하는 인간 역사를 노래하고 있다.
‘강물은 아침 숲에서 흘러 낭하 꽃에 젖어 흐르며 바다로 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대강의 줄거리이다. 여기에서 숲은 뱀과 독수리, 이리와 비둘기가 서로 죽이고, 할퀴고, 싸우며 살아가는 곳으로 폭력과 파괴, 분열과 증오로 얼룩진 공간의 상징이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강물이 아침 햇살ㅇ르 받으며 숲에서 흘러 나오는 순간, 밤새도록 어둠으로 덮여 침묵하고 있던 강물은 비로소 고운 색채를 띠게 된다. 아침이 돌아와 꽃이 강물에 젖어 흐르게 되자, 밤새도록 울부짖으며 싸우던 짐승들의 울음소리는 마침내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일제히 사라지믄 한편, 피를 흘리며 죽어간 일체의 것들도 흐르는 강물에 씻겨 바다로 떠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바다는 강이 지향하는 목표이자 종착지로서 인간 역사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화해와 합일, 평화와 사랑의 새 시대이지만, 강물은 바다로 쉽게 흘러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 행에서 ‘강 흐름 피무늿길 바다로 간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비장한 어조 속에서는 그러한 고난과 역경들을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고통의 옛 역사를 끝내고 웅비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굳은 의지와 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작가소개]
박두진(朴斗鎭)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0년 『문장』에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56년 제4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70년 3.1문화상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198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임
1984년 박두진 전집 간행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밀림』 (1963), 『하얀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속 수석열전』(1976), 『야생대(野生代)』(1981), 『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 (1981), 『박두진시집』(1983),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1983), 『박두진전집』 (1984), 『별들의 여름』(1986),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 사랑』(1987), 『일어 나는 바다』(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가시 면류관』(1989), 『빙벽을 깬다』(1990), 『폭양에 무릎 꿇고』(1995), 『숲에는 새 소리가』(1996), 『고향에 다시 갔더니』(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