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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묵상글 ( 연중 31주간 금요일. - 선심 쓰는 것을 멈추지 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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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07 03:07
- 선심 쓰는 것을 멈추지 마!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 드신 비유에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고,
그것 때문에 해고될 처지를 맞이했는데 영리하게 대처합니다.
곧 해고될 때 자기를 받아달라고 주인에게 빚진 이들에게
주인의 재산을 갖고 선심을 쓰는데 실은 횡령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인은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칭찬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집사가 주인 것을 횡령한 것이 아니라 선용했다는 것이고,
우리 인간도 본래 하느님 것을 가지고 집사처럼 선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런 영성이 깔려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하느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심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하느님 것을 가지고 선심 써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선심 쓰길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것을 나만을 위해 쓰면 그것은 착복이라고 생각하시고,
이웃을 위해 쓰면 선용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우리 부모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큰아들이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흥청망청 쓰려고 하면 언짢아하시지만
동생들의 환심을 사려고 부모 유산을 동생들과 나눠 쓰는 것은 좋아하지요.
여러분도 제게 그러지 않으십니까?
저는 여러분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많은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제가 한평생 한 좋은 일 중에 여러분 도움 없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그것을
저를 위해서 쓰고 특히 욕망을 채우려고 썼다면
저를 이렇게 계속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여러분도 제가 하느님의 정직하고도 충실한 집사이길 바라시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다른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곧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양식을 제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 정해진 대로 제때 나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것을 가지고 제가 막 선심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백성사 볼 때 특히 가난과 관련하여 성사 볼 때
하느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지만
하느님 것을 내 것인 양 마구 썼다고 고백성사를 보곤 합니다.
그러니까 저의 경우 하느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쓸 때도 곧 선심을 쓸 때도 내 것인 양 쓰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아직도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곧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마치 제 것으로 선심 쓰는 양 아직 으쓱대고
또는 나는 주머니를 따로 차고 있지 않으니 잘하고 있다고 으쓱댑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가난하고 겸손한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마구 선심 쓰는 것을 멈출 생각은 오늘 주님 비유 덕분에 없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하되 선심 쓰는 것은 멈추지 말라!
이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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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진,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
“약은 집사의 비유”
11월 위령성월 깊어가는 만추의 계절, 기도의 계절이자 죽음을, 우리가 돌아갈 뿌리인 하느님을 공부하는, 마냥 겸허하게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예전 <임>이란 글이 좋아 나눕니다. 임이 상징하는 바 물론 하느님이자 예수님입니다.
“임의 얼굴은 하늘같이 맑고
임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임의 영혼은 가을 들꽃처럼 은은하고
임의 마음은 단풍 물든 넉넉한 뜨락이고
임의 몸은 나무 향기처럼 편안하다
임 그리울 때
아름드리 소나무 꼭 껴안아 본다
눈들어 나무 보고 하늘을 본다
가득 차는 가슴이다.”<2000.10.3.>
저는 놀랍게도 오늘 복음의 약은 집사의 비유에서 하느님을,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발견했습니다. 참 멋진, 자비하고 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을 발견했습니다. 약은 집사를 다루는 어떤 부자가 상징하는바 바로 예수님이자 하느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 전에는 그 유명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환히 빛나는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재산을 낭비한다는 집사를 추궁하며 해고할 의사를 넌지시 알리자 집사는 속으로 되뇌인후 참으로 기민하게 대처합니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 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이를 하나씩 불러 참으로 과감하게 많은 양을 탐감해 줍니다. 기름 백 항아리 빚진 자에게는 쉰을, 밀 백 빚진 이는 여든을 적으라 하며 많은 빚을 탕감해 줍니다. 부자의 재산에 비하면 탕감받은 가난한 자들의 빚은 조족지혈 새발의 피일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어떤 부자의 처신에서 저는 참 멋진,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절대 집사의 불의한 사기 행각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의 불의한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불문에 붙이고 묵인하며 오히려 미래의 위험을 대비한 그의 기민한, 민첩한 처사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차마 주인이 이렇게 하라고 말할 수 없는데 스스로 알아 서로 살 길을 찾았으니 부자는 내심 불의한 집사가 고마웠을지도 모릅니다.
주인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처사로 결국은 집사도 살았고 빚진 이들도 모두 살게 된 것이니 주인의 자비는 그대로 지혜가 됩니다. 집사와 빚을 탕감받은 가난한 이들을 살린 것에 비해 축낸 재산은 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대로 어떤 부자의 주인이 상징하는 바 예수님이요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인은 결코 불의한 집사를 무자비하게 추궁하여 단죄하지 않았습니다. 약은 집사의 기민한 위기 대처 방식도 배우지만 주인의 자비와 지혜도 배웁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빚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 믿는 이들은 세상의 어둠의 자녀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의 자녀들입니다. 결코 불의한 집사의 사기 수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대비한 기민한, 유비무환의 대처방식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깨어 준비하면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의 자세입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루카12,41-48)’에서, ‘미나의 비유(루카19,11-27)’에서,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7,24-27)’의 비유에서, ‘열 처녀의 비유’(마태25,1-13)에서, 깨어 준비하며 책임을 다했던, 참으로 올바르고 충실하고 슬기롭게 기민하게 미래를 대비했던 주님의 종들을 배워 닮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도직을 눈부시게 수행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통해 그가 은총에 힘입어 얼마나 충실히 사도직을 수행한 주님의 종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으로서 깨어 책임을 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11월 위령성월, 이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책임을 다하며,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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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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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트 프리스코의 반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그날 나누었던 묵상은 루가복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종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종, 해야 할 일을 다하는 종은 주인에게 칭찬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묵상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믿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모두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쉽게 얻을 수 있어서 물과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주님께서 늘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가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구역장님은 그 주간에 3번의 반 모임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세 번 모두 묵상의 내용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었다고 합니다. 구역장이라서 반 모임을 3번 함께 했는데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감사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능력이 있어야 해야 할 일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하느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선택하면 그에 맞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 새삼 알았다고 합니다. 저도 ‘해야 할 일’에 대한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중남부 사제 모임이 4박 5일 동안 있었는데 중간에 장례미사가 생겼습니다. 손님 신부님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장례미사는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비행기 타고 본당에 와서 장례미사하고, 다시 비행기 타고 사제 모임엘 갔습니다. 하루에 두 번 비행기 타야 했고, 몸은 피곤했지만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할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3가지 서원을 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성직자는 청빈 서약을 하지 않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듯이, 사제는 교회의 재산과 조직을 관리하게 됩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았지만, 사제가 소유에 집착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는 소유보다는 비움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재산을 투명하게 보존하고, 관리하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성당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분들이 10명 정도 되었습니다. 매월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유를 인정하게 되고, 나중에는 성당의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대계약서를 작성했고, 모두에게 서명받아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임대계약서를 토대로 사람들이 이사 가면 땅을 정리 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는 본인을 위해서는 건강, 기도, 학식을 쌓아야 하지만, 재정에 관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어렵게 낸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제가 해야 할 직무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교회의 재정은 세상의 일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의 재정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선교를 하는 곳에 쓰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교육과 피정에 많이 쓰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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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주님께서는 치유자로서 가르치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6일 목요일- 마흔다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산상 수훈을 살아내기
우리는 주님께서 선포하신 진복팔단을 믿고, 그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의 여정을 감행할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어쩌면 이 세상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 중 더 많은 이들이 진복팔단을 믿고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용기를 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메건 맥케나(Megan McKenna), 『Blessings and Woes: 복과 화』 중에서
신학자 메건 맥케나는 루카 복음서가 예수님과 진복팔단을 ‘복과 화’의 형태로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깊이 성찰합니다:
[마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모세로서 율법을 선포하시는 분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시고, 군중은 아래에 머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반면 루카 복음서(6:17–35)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평지로 내려오시며, 그곳은 지역 곳곳과 해안 도시들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신자도, 비신자도, 외부인도 있으며, 종교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가르치시기 전에 치유하셨고, 어쩌면 치유하시면서 동시에 가르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분께 나아온 이들은 병들고, 온갖 질환에 시달리며, 악령에 사로잡히고, 사회로부터 멸시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지려 애썼습니다. 그 장면은 끊임없는 움직임과 손 내밂, 간절한 접촉의 몸짓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복음서는 단순히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힘이 그들 모두를 고쳐 주었다." 그 힘, 곧 그분의 성령과 현존은 치유하고, 위로하며, 진정시키고, 평화를 주며, 희망을 안겨주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가장 놀라운 구절은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계시며, 아마도 땅에 무릎을 꿇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시며, 그분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들의 필요에 깊이 귀 기울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상처 입은 이들과 함께하는 연대의 자리, 취약함의 자리에서 계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 곧 복과 화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라기보다,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며, 논리적 설명보다 마음을 다해 귀 기울이시는 분이시고, 훈계보다 자비로 감싸 안으시는 분이시며, 멀리서 법을 선포하는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품고 함께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복과 화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며 취약함 속에 머무르시는 그 자리에서 선포되었으며, 이는 삶 속에서 실천되도록 주어진 가르침입니다.
복과 화에 관한 이야기 몇 구절 뒤에는… 실천하기에 거의 불가능해 보일 만큼 놀라운 설교가 이어집니다. 그 안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고 헐뜯는 이들에게 선을 행하며, 뺨을 치는 이에게 다른 뺨도 내어주고, 억지로 가게 하는 이에게 더 멀리 동행하라는 권고들이 담겨 있습니다….
진복팔단과 그에 따른 실천적 삶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이루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공동체 질서와 공동선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며, 멸시받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사명 안에서 그들을 지탱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실천될 때, 하느님 나라는 그 가운데에 임하십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푸른 땅 위를 걷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와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1] 우리에게는 진복팔단의 말씀을 읽고 듣는 연습이 필요하며,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죄책감은 제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저의 일반적인 감정 상태였습니다.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죄책감이 곧 겸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 묵상들을 통해, 나는 하느님의 눈으로 저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었고,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조금씩 교만을 내려놓고, 참된 저 자신—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는 창조주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여성—으로 저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Mary P.
References
[1] Thich Nhat Hanh, Touching Peace: Practicing the Art of Mindful Living (Parallax Press, 1992), 1, 2.
Megan McKenna, Blessings and Woes: The Beatitudes and the Sermon on the Plain in the Gospel of Luke (Orbis Books, 1999), 43–44, 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achel Spina,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한 여인이 아이가 꽃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그들 모두가 작고 연약한 것을 알아보고 존중함으로써 진복팔단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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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약은 집사의 예견과 영리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이 비유를 들려주셨을까요? 자기 주인을 속이고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행동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집사는 횡령까지 합니다. 집사 자리를 잃은 뒤 안락을 얻기 위해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기까지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셨을까요? 그것은 집사가 주인을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속임수라도 그 영리한 기지가 칭찬받는 마당에 그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질 노릇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아래 말씀을 덧붙이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들은 미래의 안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기를 치기도 하지요. 그 집사가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 한 것은 어떤 삶입니까? 언제고 끝날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나까?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이제는 밀알이 맺는 둘째 열매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영적 굶주림과 쓰라린 아픔을 끈기 있게 견뎌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안팎으로 다 쏟아 견뎠다 할지라도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가 단죄받는 것을 정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때도 우리는 우리가 받는 단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하느님께서 그것을 떠맡으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다스리는 능력이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이 그분의 창조되지 않은 본성이라도 된다는 듯이 여겨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양상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체의 가난을 없애 버리시고,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은혜와 그분 자신을 선물로 주신다고 해도, 여러분은 그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여러분의 공로로 삼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선물을 거리낌 없이 소유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여러분이 무에서 지어졌음을 명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밀알, 곧 여러분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땅으로부터, 곧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지극히 높은 선을 누리는 영혼으로부터 받는 둘째 열매입니다.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십니다”(요한 8,54).(499)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하느님께 맡겨드림
XVI. 우리 안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 것을 “무지의 지 (知)”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약함을 도우려는 하느님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룰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 8,25-27).
이것을 우리는 성부이신 하느님과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령께서 하느님보다 못하여 신도들을 위해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보다는 이 말씀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성령께서 신도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 신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과연 너희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다(신명 13,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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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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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배가 침몰해서 무인도에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 중 3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들 각 직업은 특전사, 운동선수 그리고 나이 많은 노시인이었습니다. 이들 중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특전사는 무인도의 맹수와 싸우다가 사망했고, 운동선수는 섬을 벗어나겠다고 바다로 뛰어 들어갔다가 익사했습니다. 노시인은 “이것도 인생이다”라며 묵묵히 지내다가 지나가던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약해 보이는 노시인이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기다릴 줄 알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 시인은 구조가 되지 않았어도 “이것도 인생이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어렵고 힘든 일이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를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할 수 없다며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자기 인생인 것입니다. 쉼 없이 24시간 내내 고통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극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매일 재미있는 일을 찾으며 생존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절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인생이니까요.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이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였기에,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게 됩니다. 이제 직업을 잃고 생계가 막막해질 절박한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이때 좌절하고 포기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권한(주인의 이름으로 빚 문서를 관리할 권한)을 창의적이고 과감하게 사용하면서 미래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인이 자기 재산에 손해를 입힌 것이 분명한데도, 자기 미래를 위해 약삭빠르고 단호하게 행동한 집사의 수완을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도 저 집사처럼 사기를 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불의한 집사조차 자기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애쓰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얼마나 더 절박하고 슬기롭게 준비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의 답을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답을 주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어라.”(루카 16,9)
우리가 가진 재물을 움켜쥐고 자기만을 위해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나누고 베풀어서 하늘의 친구들을 사귀라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에 영원한 거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드는 지혜로운 빛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명언: 시련을 이기는 법을 배우면, 더욱 강인해집니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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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주님의 이끄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주님의 뜻이 펼쳐지기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겸손!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약은 집사의 비유는 이해하기에 참으로 까다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이 비유의 의미를 알아듣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도대체 집사가 한 일이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처음에 "재산을 낭비했다는 것"은 단순한 무능함이었고, 이 무능함이 탄로나자 그는 자신의 이 무능함을 은폐하려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은폐가 곧 부정직함의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애초부터 그 낭비가 부정직한 행위였던 걸까요?....
이 이야기의 세부 내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누구도 명확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합니다.
당시 집사들은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을 외부에 빌려주고, 그에 대한 고율의 이자를 받아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이 청지기가 탕감해 준 것은 바로 그 이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손해를 본 것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그의 영리함을 칭찬한 이유는 설명이 되지만, 마지막 구절에서 그가 "불의한 자"로 묘사된 이유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계속되는 것이지요.
어쨌든, "재물의 사용"은 루카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이 비유는 루카 복음서에만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재물이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는 12장 16–2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하겠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16장 19–31절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과 재물에 대한 경고를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중심적 계획과 하느님을 잊은 삶의 허망함을 보여주며,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의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루카 복음 저자는 재물을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할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돈과 관련된 문제에는 민첩하고 날카롭지만, 영적인 문제에는 더디고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세속적으로 재정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일반적으로 "어리석은 자"와는 정반대로 영리하고 지혜로운 자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의 이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우리의 통념, 혹은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세속적 지혜와 영적 지혜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데 있어 더 깊은 통찰과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재물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어리석음의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진정한 지혜는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복음을 따르는 이들을 의미는데, 복음을 따르는 이들은 세속적 계산을 내려놓고 더 깊은 영적 분별과 자비의 실천에 집중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집사의 불의함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위기를 대처하는 방식의 "지혜"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는 빛의 자녀들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만큼의 지혜와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인 지혜(?)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향하는 우리의 복된 여정을 방해하기까지 한다는 진리를 말씀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에서 가르쳐 주시는 지혜는 세상적인 지혜와는 정반대의 지혜가 아닙니까?! 지금은 그것이 지혜롭지 않게 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 너무 어리석게 보일지 몰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 주시는 진복팔단의 지혜에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당신 사랑과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심과 내어맡김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 대한 이런 온전한 신뢰심과 내어맡김이 없이 그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과 모욕과 중상을 받는 것(루카 6,20-22 참조)이라면 그것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할 뿐 아니라 그저 비참한 상태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여정을 해가면서 세상적인 지혜로 판단하며 선택하는 데는 참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만,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심 안에서 하느님의 선이 실현되기를 지긋이 기다리는 지혜를 여전히 견지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이 성찰은 요즘 제가 저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성찰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세상적인 도전이 오면 바로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놓쳐버리는 저 자신을 자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정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일까?" 하는 의구심에서 이런 불안과 초조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의구심은 어쩌면 바른 식별을 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안함과 초조함 그 자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바라시는 것이 절대 아님을 우리는 먼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생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루카 12,25).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작은 양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카 12,32).
그러니 주님의 이끄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주님의 뜻이 펼쳐지기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불의한(약은) 집사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시는 도전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전에 한 번 나누어 드렸던 더글라스 크리스티의 묵상 글 일부에다 그 뒷 부분을 조금 보태어 나누어 드리면서 오늘 복음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가장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 결국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는 통제력 포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솔직하다면 우리 대부분은 이 덕을 수양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덕을 수양하려면 너무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자신의 연약함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통제력을 내려놓고 알지 못하는 그 신비스러움에 자신의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것이 모든 위대한 영성 전통에 있어 심장부이다. 복음 전통에서는 이것을 다시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참신한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나는 저 깊은 곳에 뭔가가 더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뭔가 더 알아야 할 것, 뭔가 더 경험해야 할 것, 하느님에 대한 나의 조심스러운 정의보다 더 큰 현실이었다 …
깨어난다는 것은 같은 장소에 머물며 거기서 새롭고 아름다운 전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또 그것이 깨달음의 통찰력을 갖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생각이나 개념을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전망의 장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나의 삶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내”가 바뀌는 것이고; 내면의 영이 바로 나의 시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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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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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어떤 부자가 자기 집사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 집사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집사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자기가 집사 자리에서 쫓겨나도
자신을 받아줄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재산으로 집사는 호의를 베풀지만
어떻게 보면 또다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지만
결과는 집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주인은 집사를 칭찬합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줄여주지만
주인은 집사가 일을 열심히 해서 빚을 받아온 것으로
그래서 재산이 늘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늘어난 재산은 없지만
아니 오히려 더는 받을 수 없기에 재산이 줄어든 것이지만
주인은 집사를 칭찬합니다.
집사는 주인을 속이면서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고
이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하는 모습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집사의 행동을 영리하다고 표현하십니다.
하지만 그 영리함은 바람직함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즉 우리가 따라야할 모범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세상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구분하시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리한 집사는 빛의 자녀가 아닙니다.
자기의 모습을 끊임없이 감추어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다급한 상황에 있음을 감추면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며
그 호의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임을
주인에게는 감춥니다.
드러내지 못하기에 더욱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빛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우리가 빛으로 나아갈지 아닐지가 결정됩니다.
이 말은
모든 상황에서 긴장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매 순간 우리에게는 빛으로 나아갈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가끔이라도 나의 선택을 점검하면서
나의 삶은 빛으로, 드러내는 쪽으로 가고 있는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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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6,1-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재물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입니다. 재물 그 자체로는 ‘선’ 혹은 ‘악’이라는 가치를 지니지 않으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선한 결과를 낼 수도 있고 악한 결과를 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두고 불의하다고 하십니다. 그건 재물 그 자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집사’로 대표되는 각 사람이 재물을 쓰는 행위가 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쓰는 재물이 그들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을 내가 쓰는 건 다른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나의 권리이기에 정당하지만, 하느님의 소유인 것을 내가 마치 주인처럼 쓰는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겠지요. 하느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허락하신 이유와 뜻을 생각하며 그에 맞게 잘 써야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그분 뜻에 맞게 잘 쓰고 관리해야 할 ‘집사’의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약은 집사의 비유’는 내가 재물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즉 내가 집사로서 관리하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이웃과의 관계,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가 달라짐을 알려줍니다. 비유에서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자기 신원을 망각하고 맡겨진 재물을 함부로 ‘오남용’했습니다. 주인의 뜻과 지향을 따르지 않고 제 뜻대로 썼으니 ‘오용’이고, 꼭 필요한 만큼 아껴쓰지 않고 펑펑 썼으니 ‘남용’이지요. 그 결과 그는 주인으로부터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청산하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간에 채무, 채권 관계를 셈하여 깨끗이 해결하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깨끗이 씻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집사가 오남용한 주인의 재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농사를 지을 힘이나 재주도, 다른 이에게 재물을 빌릴 용기나 의지도 없으니 주인과의 채무관계를 자기 스스로 해결할 방법도 없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부정적 요소를 깨끗이 씻는 길을 선택합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마지막 한 몫이라도 더 챙기려고 들지 않고, 집사로서의 권한을 이용하여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일부 탕감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채무라는 멍에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주면, 그 일을 고맙게 여긴 이들이 나중에 집사 자리에서 쫓겨난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을 거라 기대하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행동은 지향이 순수하지 않았기에 엄밀히 따지면 ‘선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인이 자신에게 재물을 맡긴 뜻, 즉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어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멍에를 풀어주고 삶의 참된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일을 실행하게 되었기에, 그런 집사의 행동은 그가 과거에 주인의 재물을 오남용하는 죄를 지어 생긴 부정을 깨끗하게 씻는 ‘보속’이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주인이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했다고 하십니다. 그런 행동을 한 지향이 선하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의 결과가 선, 즉 하느님의 뜻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인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가 윤리 도덕적으로 잘한 일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닥쳐올 일에 민첩하게 대응하며 꼭 필요한 일을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결단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그를 칭찬했다고 해서 그에게 계속 집사 일을 맡기지는 않았겠지요. 그가 주인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관계를 회복하려면 더 큰 노력이 필요한 겁니다. 그 노력은 마음 속에 품은 뜻과 지향이 주인의 뜻과 일치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또한 꼭 필요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먼저 그것이 주인의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일인지를 제대로 식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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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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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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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7. 연중 31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 대담함과 영리함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때로는 바리사이들에게, 때로는 군중에게, 때로는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나, 오늘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시며, 주님의 집사로서 짊어져야 할 책무에 관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집사는 자기의 세상이 갑자기 마감되어감을 직감합니다. 판결의 날이 다가와, 지위와 명성을 모두 상실할 위기와 함께 물질적인 생존이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사 일을 그만둘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에 처한 집사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생존을 보장하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빠르게 그리고 대담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리고서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 둘을 불러 채무의 일부를 탕감해주고서는, 훗날 그 혜택을 보고자 합니다. 집사의 약삭빠른 행동을 보고서,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 이야기의 집사는 처음부터 불의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자 주인이 들은 소문, 곧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가 보인 행동, 결코 의롭다고 말할 수 없는 행동 역시 이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임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칭찬하는 대상은 집사의 이 교활하고 오만한 행동이 아니라, 시대의 징표를 읽고 대처할 줄 아는 지혜와 능력일 것입니다. 지금 집사는 마지막 시점, 주인이 셈을 요구할 시간 앞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앞날을 보장하기 위해 남아 있는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집사의 대담함을 강조하십니다. 집사처럼 제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며 셈을 요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자들은 주님이 몸소 자신들의 잘못을 탕감해주실 수 있도록, 자신들에게 빚진 사람들만큼은 탕감해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웁니다. 이때 채무자들이 하느님께 빚을 진 사람들이라면, 이웃 형제들을 위해 그 빚을 탕감해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하는 마음도 늘 지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일에서 자기의 물질적 미래를 보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영리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정이 아니라 하늘 사정일 때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빛의 자녀들, 곧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빛의 나라가 오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구원 문제에서 영리함을 구사할 기회와 공간을 찾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의 자녀들이 자랑하는 세상 사정에서의 영리함을 본받아, 남아 있는 시간 동안 하늘 사정에 관한 행동을 보이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소 예외적인 비유 말씀을 통하여, 어떤 자세로 주어진 책무에 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책무 수행을 마지막 때를 맞이하는 자세로 임하고, 세상 사정에서의 영리함을 잘 활용하여 하늘 사정을 희망하고 관리하는 데 적용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오늘 하루, 가정이나 사회나 신앙생활에서 내게 주어진 일들에 성실함을 보이는 가운데, 내가 세상 사정에서 발휘하는 대담함과 영리함을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일조하는 제자로서의 삶에 부족함이 없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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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01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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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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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수원교구 도승현 베드로(시화 성베드로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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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평생토록 가난하고 고통받는 청소년의 따뜻한 동반자요 아버지로 살아가셨던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사무실 문에 걸려있던 글귀가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한국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저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그에게 있어서 청소년 영혼 구원 외에 다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명예, 돈, 부동산, 취미생활, 휴가...그에게는 다 쓰레기였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 한가지,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유사한 돈보스코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라면, 악마에게라도 절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시선은 오로지 한곳, 토리노 뒷골목을 배회하고 방황하던 아이들,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며 서서히 죽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던 아이들에게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에게 있어 세상 좋은 것들, 편한 것들, 재미있는 것들은 일단 관심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고위성직자로 추천하려 하자 펄쩍 뛰며, 내가 있을 장소는 바로 여기, 아이들 사이라며 마다했습니다. 너무 피곤해 보이는 그에게 휴가 좀 다녀오라 권했더니, 도무지 이해안되는 표정으로 “휴가는 천국에서!”라고 외쳤습니다.
한 아이가 악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향할 때 돈보스코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한 아이가 성화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고민하자,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기뻐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지상에 발을 딛고 있었지만, 이미 천상적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가치, 가장 우선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사는 최우선적으로 얻고자 노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꽤 알쏭달쏭합니다. 악하고 불의한 집사의 그릇된 행동을 칭찬하시는 뉘앙스입니다. 그가 저지른 악행은 중한 것이었습니다. 공문서 위조, 공금 횡령이라 최소한 징역 5년입니다. 그런데 그를 두둔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범죄 행위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가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미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를 과연 얼마나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최종적으로 남게 될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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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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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 사람들은 잘 죽는 법도 알았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 16,1-8)에서 우리는 '불의한 집사'라는 당혹스러운 비유를 듣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주인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놀랍게도, 주인은 이 집사를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그의 부정이 아니라, '해고'라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절박하게 움직인 그의 '영리함'입니다.
이 집사와 정반대인 인물이 '부자 바보'(루카 12장)입니다. 둘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심판이 곧 온다고 믿었고, 부자 바보는 더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청지기는 '해고 통지서'를 받자마자, 자신에게 남은 '불의한 재물'로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부자 바보는 '해고 통지서'(죽음)를 상상도 못 하고 재물을 쌓아두다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심판 앞에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너는 더 이상 관리인 노릇을 할 수 없다."라는 '해고 통지서'를 받을 것입니다. 이 통지서를 미리 받아들고 삶을 바꾼 '영리한 집사'들이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은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죽음의 상인'이라 불렸습니다. 1888년, 그의 형이 죽었을 때 한 신문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 라는 부고 기사를 냈습니다. 자신이 '죽음의 상인'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에 전율한 그는, 복음의 집사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해고 통지서'를 미리 읽은 것입니다. 그는 즉시 유언장을 수정하여, 자신의 '불의한 재물'(전 재산 94%)을 기부해 '노벨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상인'이라는 현세의 평판을 '인류의 은인'이라는 영원한 유산으로 바꾼, 가장 영리한 집사였습니다.
1912년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 메이시스 백화점 소유주인 이시도르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가 있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 먼저!"라는 외침 속에서 아이다는 구명보트 탑승을 권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 이시도르 곁에 남았습니다. 이시도르 역시 "다른 남자들보다 먼저 타지 않겠소."라며 거절했습니다. 아이다는 남편의 팔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함께였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소."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갑판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함께 죽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마지막 재산을 '영원한 사랑'과 '부부의 신의'라는 영원한 가치와 맞바꾸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였을지 몰라도, 그들은 영원을 위해 가장 영리한 선택을 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극적인 '해고 통지서'를 받아야만 영리해질 수 있을까요? 성 베네딕토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두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매일 스스로에게 '해고 통지서'를 발부하는 '빛의 자녀들'의 영리함입니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비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죽을 수 있다고 믿을 때, 생명은 물론이요 내가 움켜쥔 이 재물, 이 명예, 이 자존심마저도 곧 사라질 '불의한 재물'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 교수는 '루게릭병(ALS)'이라는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절망하는 대신, "나는 내 죽음을 내 마지막 프로젝트로 삼겠네."라고 결단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의한 재물', 즉 곧 사라질 '육신'과 '남은 시간'을 아낌없이 '사랑'과 '가르침'으로 베풀어 '영원한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그는 제자 미치 앨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알지만, 아무도 그걸 믿지 않아. 하지만 죽는 법을 배우면, 비로소 사는 법을 배우게 되지." 죽음이라는 '해고 통지'는 무엇이 '불의한 재물'이고 무엇이 '영원한 가치'인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죽을 수 있을까요? '오늘 죽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죽음의 상인'으로 남을지, '영원한 사랑'을 완성한 부부로 남을지 결정하게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으로 영리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음이 이득입니다."(필리 1,21)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만 울고 나머지는 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때 우리만 웃고 나머지는 울면 그것이 잘 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잘 사신 분들은 항상 잘 죽는 법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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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트 프리스코의 반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그날 나누었던 묵상은 루가복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종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종, 해야 할 일을 다하는 종은 주인에게 칭찬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묵상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믿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모두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쉽게 얻을 수 있어서 물과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주님께서 늘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가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구역장님은 그 주간에 3번의 반 모임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세 번 모두 묵상의 내용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었다고 합니다. 구역장이라서 반 모임을 3번 함께 했는데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감사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능력이 있어야 해야 할 일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하느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선택하면 그에 맞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 새삼 알았다고 합니다. 저도 ‘해야 할 일’에 대한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중남부 사제 모임이 4박 5일 동안 있었는데 중간에 장례미사가 생겼습니다. 손님 신부님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장례미사는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비행기 타고 본당에 와서 장례미사하고, 다시 비행기 타고 사제 모임엘 갔습니다. 하루에 두 번 비행기 타야 했고, 몸은 피곤했지만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할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3가지 서원을 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성직자는 청빈 서약을 하지 않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듯이, 사제는 교회의 재산과 조직을 관리하게 됩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았지만, 사제가 소유에 집착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는 소유보다는 비움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재산을 투명하게 보존하고, 관리하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성당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분들이 10명 정도 되었습니다. 매월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유를 인정하게 되고, 나중에는 성당의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대계약서를 작성했고, 모두에게 서명받아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임대계약서를 토대로 사람들이 이사 가면 땅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는 본인을 위해서는 건강, 기도, 학식을 쌓아야 하지만, 재정에 관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어렵게 낸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제가 해야 할 직무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교회의 재정은 세상의 일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의 재정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선교를 하는 곳에 쓰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교육과 피정에 많이 쓰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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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루카 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이어 16장에는 ‘약은 집사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지요.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 더 이상 집사 일을 맡기지 않겠으니 일을 정리하라고 이릅니다.
‘낭비’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재물이나 시간 따위를 아껴 쓰지 않고 헛되이 헤프게 씀”이라고 나옵니다. ‘헤프게’ 쓰는 것이 낭비라는 점에는 많이들 동의하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헛되이’ 쓰는 것 또한 낭비라는 점은 쉽게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말하는 낭비가 바로 헛되이 쓴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재산 관리를 맡긴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인의 목적에 맞지 않게 쓰는 것도 헛되이 쓰는 낭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자기의 재산을 맡긴 주인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집사는 빚진 이들을 하나하나 불러 그 빚을 줄여 줍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여, 곧 집사 자리가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나중을 생각하여 주인의 것으로나마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일은 무척이나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의 뜻에 맞게, 곧 자비를 베푸는 데 재산을 썼기에 그가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집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신 까닭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을 배워 오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이 아닐까요? 우리는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제대로 쓰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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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하고 불의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하였고, 주인에게 발각되어 해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발한 수단을 동원한다. 빚진 자들의 채무를 줄여 줌으로써, 장차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안전망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집사의 불의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칭찬하신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8절) 세상의 사람들은 일시적인 이익과 보장을 위해서도 온갖 꾀와 수단을 다 동원한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사도 바오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으로 부른다. 우리가 받은 생명, 은총, 시간, 재능은 모두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것은 그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종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Sermo 359) 우리가 맡은 것을 잘 관리하고, 그것을 통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집사가 된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다가올 일을 내다보는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다. 집사는 해고 이후를 내다보고 준비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삶이 끝난 후에 맞이할 하느님의 나라를 늘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세상일에는 그렇게도 기민하고 영리하면서, 어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게으른가? 영원한 것을 위해 잠시의 것을 사용하라.”(Hom. 19) 우리의 시간과 재능, 재물을 영원한 목적, 곧 사랑과 구원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늘 창고에 쌓이는 보물이 된다.(마태 6,20 참조)
우리는 언제 주님 앞에 서게 될지 모른다. 그날은 도둑처럼 찾아온다(1테살 5,2).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늘 지금 여기에서 준비하는 삶이어야 한다. 주어진 순간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이미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삶 동안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이 행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1021항)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의 계산이나 세속적 보장이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충실히 살고 있는가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맡겨진 집사직임을 기억하자. 불의한 집사가 미래를 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내다보며 지금 여기서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이 될 때, 주님께서 오실 그날 우리는 참으로 충실한 집사로서 칭찬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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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그러해야 하리니>
루카 16,1-8 (약은 집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대, 그러해야 하리니>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그대,
쓰러지지 마라
그대,
쓰러져도
기어이 다시 일어나라
그대,
일으켜야 하리니
그대,
빼앗기지 마라
그대,
빼앗겨도
기어이 다시 가져라
그대,
나누어야 하리니
그대,
죽지 마라
그대,
죽어도
기어이 다시 살아나라
그대,
살려야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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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신속하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1ㄴ-8)
1) ‘약은 집사의 비유’는 글자 그대로 ‘비유’입니다.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만드신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만드신 ‘의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말씀은, “세속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신속하게 대처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는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왜 이리 굼뜨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속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고, 그들의 그런 신속함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본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굼뜨다.’라는 말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예수님께서 탓하시는 것은 ‘지능의 부족함’이 아니라, ‘노력의 부족함’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을 얻는 것만을, 즉 영혼의 구원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데,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도 많고, 다른 것을 바라볼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마음과 정신이 흐트러져 있으면, 최선을 다할 수가 없고, 신앙생활이 자꾸만 굼뜨게 됩니다.
2) 1절에 있는 ‘낭비’ 라는 말은, 비유의 내용 전체를 볼 때 ‘횡령’으로 해석됩니다. 주인에게 가야 할 재물을 집사가 자기 마음대로 가로챈 것, 바로 그 ‘횡령’이 해고 사유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인은 집사가 횡령한 재물을 모두 빼앗을 텐데, 비유의 내용을 보면, 집사는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먹고사는 문제부터 걱정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주인에게 빼앗기고, 무일푼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2절에 있는 ‘청산하게.’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말인데, 뜻으로는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으라는 명령입니다. <횡령한 재물을 모두 내놓는 것을 포함해서, 잘못한 일들을 전부 다 바로잡는 것이 쫓겨나기 전에 집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집사가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자기가 먹고살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심을 사려고 한 일이기도 하고, 잘못한 일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합니다. 정황을 보면, 아마도 집사는 기름이나 곡식을 꾸어 줄 때, 주인의 뜻과는 다르게 대단히 높은 이자를 붙여서 꾸어 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당하게 받은 이자는 자기가 가로챘을 것이고, 사람들은 주인만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주 나쁜 고리대금업자라고...... 그렇다면 집사가 사람들을 불러서 한 일은, 이자를 깎아주거나 없애 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 받았던 이자는 돌려주었을 것이고......
4) ‘이자에 관한 규정’이 신명기 23장에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신명 23,20-21)
집사가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이, 이자를 깎아 주거나 없애 준 일이라면, 집사는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서 먹고살 길을 찾게 되었을 것이고,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좋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일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집사가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다른 잘못을 더 저질렀다면 칭찬할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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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성서를 읽다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인지 의아스러운 대목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그런 대목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속의 청지기는 아주 교활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꽤 많은 횡령을 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쫓아내려고 하자 다시 잔머리를 굴리며 술수를 짜내고 있습니다.
청지기는 빚진 사람을 불러서 그 액수를 고쳐주며 장부를 조작하기 시작하지요. 빚진 사람들은 좋아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렇게 청지기나 빚진 사람이나 교활하게 일을 처리하여 오히려 이 사실을 모르는 주인에게 일을 잘 처리했다는 칭찬을 받는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도대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비윤리적인 일도 얕게 잘 처리하면 괜찮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지기가 윤리적인 인물인지 아닌지, 혹은 살 궁리를 어떻게 해나가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 청지기가 살기 위해서 세속적으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청지기처럼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를 쓰면서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또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얕다고 하신 말씀에는 영적인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적인 이득이나 승진, 또 자녀 교육이나 재산 축적과 같은 일에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또 밤과 낮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무슨 아파트 청약이 있다고 하면 총알같이 달려가서 줄을 서고, 무슨 유치원이 좋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텐트까지도 치고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요.
오늘 복음은 그렇게 수고하고 애를 쓰는 만큼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는 신앙에 있어서는 별 노력 없이 있어도 저절로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시간이 흐르면, 또 주일미사에 빠지지만 않으면 내 신앙이 저절로 성숙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소한 것에 걸려 넘어져 상처를 입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옹졸한 삶을 살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노력한 그만큼 우리는 성장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서 쓰기>에 이어 <100권 신심서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참여하여 성서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일년이 지나서 하늘과 땅 차이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신심 서적 읽기 역시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서를 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성서를 쓰기 전에는 단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책 한 권에 지나지 않았던 성서가 이제는 살아 있는 책이 되어 깊이 있게 내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성서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성서를 쓰느라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심 서적을 읽으면서도 놀라운 변화는 많았습니다. 한 주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어찌보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많은 분들의 높은 참여로 놀라운 영적 성숙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신앙에 대해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이 꽉 채워진 느낌이라는 분, 이제야 신앙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 책을 통해 얻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선정된 도서들을 이웃에게 선물로 전하시는 등 많은 분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모습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있는가 하면 나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방 어디까지 기를 쓰고 내려가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이런 일은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관계되는 일은 놓치면 큰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 일은 나의 영적 생명에 있어 너무나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도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을 하듯이 하느님을 알고 따르기 위해서도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면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아마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질 것입니다. 똑같이 세상을 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도 품위가 다르고 지혜와 삶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듯이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서도 부단히 노력을 하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밤 낮 없이 연구하고 애를 쓰며 살아가듯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이런 노력들 역시 우리의 삶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분명 하느님은 노력하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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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열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고 칭찬하신다. 이것은 청지기의 속임수나 뻔뻔스러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장래를 대비하여 현재의 위치를 이용한 대담한 수완에 대한 칭찬이다. 예수님은 청지기의 부정직한 행동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장래를 대비한 기지를 칭찬하고 계신 것이다.
청지기는 세속의 자녀이다. 세속의 자녀는 오직 현세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하느님의 뜻이나 약속, 종말에 대한 준비는 안중에도 없다.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것만을 얻기 위해 모험도 하고 단호한 처신도 한다. 그에 비해 빛의 자녀들은 현세의 삶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다가올 세상, 이 현세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약삭빠르지만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빛의 자녀들보다 약삭빠르지 못하다.
세속의 자녀들의 시야는 이 세상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보다 더 어리석다.
하느님의 일에도 세속에서 거래할 때처럼 모든 노력과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내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당히, 대충 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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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약삭빠른 청지기>
오늘 복음은 꾀많고 교활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노예이긴 했지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횡령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것을 알고 그 사람을 파면 시키려고 하자 그 관리인은 자기가 그 직책에서 쫓겨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일자리가 떨어지게 됐을 때 그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하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러한 능력있는 직책을 맞고 있는 동안 최소한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 그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주인은 그의 약삭빠른 행동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속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할짓, 못할짓을 다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의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얼마전에 신문에 어떤 중공사람의 생활을 소개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도 역시 이러한 생활의 유형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공사람은 극장에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관리인이었는데, 그는 그 입장권을 잘 이용하여 많은 친구를 갖게되고 아쉬울 것 없이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빵집에 가서 빵을 먹을 수 있었고 고급식당에 가서 값비싼 음식도 무료로 먹을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때 역시 중공이라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유형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능력을 갖고 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저마다 서로를 필요로하고 협력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맡고 있는 직분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남을 도와줄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책과 재산은 가지고 많은 친구를 만든다는것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현명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물질과 재산을 받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물질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사용함으로써 영신적인 이익을 구해야 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자선행위, 남을 돕는 행위를 통해 많은 친구를 만들수 있고 또 그것은 어느날엔가 저 세상에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각자 갖고 있는 직책과 재산을 유용하게 이용함으로써 영신적 이익을 얻도록 힘씁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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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청산하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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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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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선심 쓰는 것을 멈추지 마!>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 드신 비유에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고,.그것 때문에 해고될 처지를 맞이했는데 영리하게 대처합니다.
곧 해고될 때 자기를 받아달라고 주인에게 빚진 이들에게 주인의 재산을 갖고 선심을 쓰는데 실은 횡령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인은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칭찬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집사가 주인 것을 횡령한 것이 아니라 선용했다는 것이고, 우리 인간도 본래 하느님 것을 가지고 집사처럼 선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런 영성이 깔려있습니다..이 세상에서 하느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하느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심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하느님 것을 가지고 선심 써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선심 쓰길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것을 나만을 위해 쓰면 그것은 착복이라고 생각하시고, 이웃을 위해 쓰면 선용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우리 부모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큰아들이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흥청망청 쓰려고 하면 언짢아하시지만 동생들의 환심을 사려고 부모 유산을 동생들과 나눠 쓰는 것은 좋아하지요.
여러분도 제게 그러지 않으십니까? 저는 여러분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많은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제가 한평생 한 좋은 일 중에 여러분 도움 없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그것을
저를 위해서 쓰고 특히 욕망을 채우려고 썼다면
저를 이렇게 계속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여러분도 제가 하느님의 정직하고도 충실한 집사이길 바라시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다른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곧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양식을 제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 정해진 대로 제때 나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것을 가지고 제가 막 선심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백성사 볼 때 특히 가난과 관련하여 성사 볼 때 하느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지만 하느님 것을 내 것인 양 마구 썼다고 고백성사를 보곤 합니다.
그러니까 저의 경우 하느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쓸 때도 곧 선심을 쓸 때도 내 것인 양 쓰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아직도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곧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마치 제 것으로 선심 쓰는 양 아직 으쓱대고 또는 나는 주머니를 따로 차고 있지 않으니 잘하고 있다고 으쓱댑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가난하고 겸손한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마구 선심 쓰는 것을 멈출 생각은 오늘 주님 비유 덕분에 없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하되 선심 쓰는 것은 멈추지 말라! 이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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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루카16,1-8)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비유에는 전하는 메시지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드러난 글자 안에서만 바라보면, 그리고 세상 기준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비유의 끝 말씀에 드러나 있습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16,8)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세상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리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빛의 자녀들인 하느님의 자녀들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영리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 일 지 몰라, 늘 깨어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임박한 현세적 종말론 신앙'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언제나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아합 임금처럼(1열왕21,1-29 참조), 요나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요나3,1-10 참조), 우리도 지금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영리한 대처이며,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로마15,16)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나의 회개를 너와 세상에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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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위기 속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혜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관계와 미래를
살리는
통찰입니다.
그만큼
관계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주인이 불의한
관리인을
칭찬했다는 것은
그의 속임수를
칭찬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지혜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세속의 재물도
하느님 나라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위기 속에서
배우는
지혜로운
새로운 길입니다.
빛의 자녀들도
세상을 향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지혜롭게 식별하는
적극적 실천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실천적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지혜는 단순히
세속의 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복음의
지혜입니다.
세속의 계산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세상을
피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현실을
지혜롭게 읽고
대응할 줄 아는
우리들이길
바라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예수님과 함께
사랑과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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