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사건 -4/6-
할복할 장소로 정해진 곳은 묘우코쿠지였다. 절 입구에는 국화문양이 그려진 휘막을 걸어 놓았으며, 절 경내에는 온통 호소카와, 아사노 두 집안의 문양을 그려 넣은 휘막이 둘러져 이?싶었고, 그 휘막 안에는 새로 짠 멍석이 가득 깔려 있었다.
행렬이 묘우코쿠지 정문 앞에 다다르자, 가마꾼들은 가마를 짊어지고 휘막 안으로 들어가 멍석 위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곧이어 두 영주의 무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가마는 안뜰로 옮겨져, 본당 가장자리에 놓여졌다.
20명의 병사들은 가마에서 나와 본당 앞에 나란히 앉았다. 그 둘레에는 영주의 병졸 수백 명이 무리지어 있다가, 20명의 병사들 중 한 사람이 자리를 뜨면 4명이 그 하나를 에워싸고 따라다녔다. 20명은 모두 평소와 다름없이 담소를 나누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가마를 안내한 무사들 중에는 붓과 종이, 그리고 먹을 준비한 자가 있었다. 그는 병사들 중 우두머리 격인 미노우라 앞에 와, 훗날의 기념으로 한 수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전 제6보병대장이었던 미노우라 이노키치의 성은 미나모토, 이름은 겐쇼우였고 호는 센잔이었다. 그는 홍화 원년(1844) 11월 11일에 토사국 토사군 우시오에 마을에 살며 5명의 몸종을 거느리고, 15석(쌀 등을 세는 단위. 1석은 한 섬에 해당한다:역주)의 녹봉을 받는 가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25살이었다. 조부의 이름은 츄유헤이, 아버지는 반지로우였고, 어머니는 요다 집안의 우메라 하였다. 미노우라는 안정 4년 에도(현 동경:역주)에 나와 수학하였으며, 만연 원년(1860)에는 에도에서 요우도우 영주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같은 해 고향으로 돌아와 문관 조교로 임명되었다. 이어 요우도우 영주의 가신이 되어 7,8년 가량 활동한 뒤 말 탄 장수를 호위하는 무사가 되었다. 이런 그가 진영의 보병 소대 사령으로 임명된 것은 경응 3년(1867) 11월로 근무를 시작한 지 불과 석달이 채 되기도 전에 사카이 사건이 발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력의 소지자였기에 미노우라는 시가에도 능했으며, 글씨 또한 훌륭한 초서체였다.
붓과 종이를 앞에 두고 미노우라는, "부끄럽습니다만 한 수 올려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한 후, 마음 속에 생각해 두었던 칠언절구의 한시를 써 내려갔다.
서양의 요망한 기운을 물리쳐 나라의 은혜에 답하니 어찌 세상 사람들의 개국하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랴
그저 큰 뜻을 몇 번이고 가르쳐 전하고 싶을 뿐이니 본디 한 번은 죽는 것, 활가왈부하지 말지어다
아직도 이 남자는 서양인 배척 운동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본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20명의 병사들이 한동안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게 되자, 호소카와 영주의 무사 한 사람이 다가와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모두는 그 동안 절의 경내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뜰에 나가보니 절 안팎은 사람들로 몹시도 붐비고 있었다. 사카이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오사카, 스미요시, 카와치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와, 아무리 제지하고 막아도 막무가내로 절 안으로 몰려 들어와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루에는 이 절의 승려 몇 명이 올라가, 이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때 이를 본 제8보병대의 카키우치가 종루에 올라가 승려들에게 말했다.
"스님들, 잠시 자리 좀 내주시겠소? 이 몸은 오늘 할복해 이승을 떠날 사람 중 하나요. 우리 중에는 이승을 하직하는 뜻에서 시가를 읊은 사람도 있지만 난 본시 배운 게 없어 그런 재주도 없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황천길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종 한 번 쳐보고 싶구려. 어떻소?"라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매를 걷어부치고 당목을 쥐어들었다. 승려들은 혼비백산하며 양쪽에서 팔을 붙들고 제지하였다.
"아이고, 안됩니다.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가뜩이나 혼잡한데 여기다 종까지 쳐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발 부탁이니 그것만은 참아주십시요."
"시끄럽소!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죽을 무사가 황천길 가는 기념으로 치는 것인데 왜 안된단 말이오!"
카키우치와 승려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이를 아래서 본 동료 병사 두세 명이 달려왔다.
"이보게, 중대한 일을 눈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인가? 도대체 종을 쳐 사람들을 놀라게 해 뭘 어쩌자는 건가? 잘 좀 생각해보게나."라며 말렸다.
"음, 그렇지. 그만 나도 모르게 흥분을 했나보네. 미안하네. 자, 그만 내려들 가세"라며 카키우치는 당목에서 손을 떼었다. 이때 카키우치를 말리던 병사들 중 한 명이 주머니 속을 뒤져 돈을 꺼내 승려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돈이 조금 있소. 뭐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겠지만도... 내가 죽은 후 여러분한테 꽤나 신세를 지게 될 텐데 받아 두시고 잘 좀 빌어주시오." 카키우치와 승려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몰려와 있던 병사들도 이를 보더니
"여기도 있소!"
"나도 내겠소!"
라며 앞다투어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승려들 앞에 내놓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뭐, 꼭 극락에 가게 빌어달라는 건 아니지만..."라며 한 마디 덧붙이는 이도 있었다. 승려들은 돈을 받아들고 종루를 내려갔다. 병사들도 뒤를 따라 내려왔다.
"자, 그럼 우리가 할복할 곳이나 좀 봐둘까"하며 휘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때 호소카와 영주의 무사가 나서, "그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을 듯 하오리다"라며 병사들을 막았다.
"어허,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그저 둘러보기만 할 터이니."
그들은 이렇게 내뱉고 휘막 안으로 들어갔다.
할복하기로 한 장소는 본당 앞의 넓은 마당이었다. 야마우치 집안의 문양을 새겨 넣은 휘막을 빙 둘러 쳐 놓고, 그 안에는 4자루의 대나무 장대를 세워 윗부분을 뜸으로 엮어 놓았다. 바닥에는 꺼칠한 멍석을 두 장 깔고 다시 그위에 새로 짠 다다미 두 장을 뒤집어 깔아 놓았다. 다시 이 다다미를 흰 무명천으로 덮고, 또 그 위에 양탄자 한 장을 덮어 놓았다. 그 옆을 보니 또 다른 양탄자가 수북이 개어져 쌓여 있었다. 아마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할복을 끝낼 때마다 새로 갈아 깔려는 것이리라. 입구 옆에 책상이 있었는데, 그위에는 크고 작은 칼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나가호리에서 압수당한 칼들이었다.
병사들은 그곳에서 나와 기왕 온 김에 우리가 묻힐 곳도 봐두자며 호우쥬인에 있는 무덤을 보러 나섰다. 그곳에는 큼직한 구덩이가 두 줄로 나란히 파여져 있었다. 구덩이 앞에는 높이가 여섯척이 약간 넘는 커다란 옹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옹이 하나하나에는 병사들의 이름이 쓰여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다가 요코다가 도이에게 말했다.
"자네와 난 살아 있을 때도 같이 먹고 자고 했었는데, 지금 이 옹이를 보니 죽어서도 우린 이웃이 되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네 그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도이는 갑자기 몸을 날려 옹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외쳤다.
"어이 요코다, 요코다! 이거 꽤 괜찮은데."
이를 본 타케우치는,
"어허, 그 친구 성미 한 번 급하기도 하구만. 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넣어 줄 테니 어서 나오게나."
도이는 옹이에서 나오려고 했으나 그것이 들어갈 때와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옹이 주둥이가 꽤 높은데다 그 안쪽은 매우 미끌미끌하여 좀처럼 나올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요코다와 타케우치가 옹이를 옆으로 쓰러뜨려 도이를 끄집어냈다.
20명은 다시 본당으로 돌아왔다. 본당 안에는 호소카와, 아사노 두 영주가 준비해 둔 술상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이들의 시중을 들러 수십 명이 와 있었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병사들은 술잔을 들었다.
두 영주의 병졸들은 조금 전 미노우라에게 시가를 받은 무사를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술자리가 어느 정도 돌아가자 다투어 자기에게도 시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또 기념으로 삼겠다며 병사들의 소지품을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20명의 병사들은 돌아가며 한 사람씩 붓을 들어 시가를 썼다. 또 아무것도 줄 기념품이 없는 병사들은 소매나 옷깃을 찢어주기도 하였다.
할복은 오시(낮 12시:역주)로 결정되었다.
휘막 안에는 우선 병사들의 목을 칠 개착인(할복할 때 고통을 덜어 준다는 의미에서 목을 쳐 주던 사람:역주)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어젯밤 오사카 나가호리 진영에서 병사 20명에게 술을 대접했던 보초들로 대접이 끝난 후 자기들끼리 상의를 해 이미 누가 누구를 맡을 것인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병사와 이를 맡을 개착인들의 이름은 이러하였다. 우선 제6보병대를 보면, 미노우라는 바바 타로우, 이케노우에는 키타가와 레이헤이, 스기모토는 이케 시치스케, 카츠가세는 요시무라 사이키치, 야마모토는 모리 쇼우바, 모리모토는 노구치키쿠마, 키타시로는 타케이치 스케고, 이나다는 에하라 겐노스케, 야나세는 콘도우 시게노스케, 하시즈메는 야마다 안노스케, 오카자키는 히지카타 요우고로우, 카와타니는 타케모토 겐노스케가 맡기로 하였다. 한편 제8보병대는, 니시무라는 코사카 이누이, 오오이시는 오치아이 겐로쿠, 타케우치는 쿠스세 류우헤이, 요코다는 마츠다 야히라지, 도이는 이케 시치스케, 카키우치는 쿠몬 사헤이, 카네다는 타니가와 신지,타모리 칸노스케가 맡기로 했다. 이중 이케 시치스케는 스기모토와 도이, 두 사람의 목을 치기로 되었다. 이들 개착인 모두는 칼을 허리춤에 차고 할복장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휘막 바깥에는 별도의 가마 20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시신을 호우쥬인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시신을 우선 이 가마에 옮겨 실고, 호우쥬인으로 가 시신을 꺼내 다시 옹이 안에 넣어 매장하기로 되어 있었다.
임검석에는 외국사무총재 야마시나노 미야를 비롯해, 외국 사쿠께 다테 소장, 역시 같은 외국사무계의 히가시쿠세 소장, 호소카와, 아사노 두 진영의 중역들이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의자에 앉았다.
토사 진영의 후카오는 북쪽에서 동남쪽을 보고 앉았다. 대감찰관 코미나미 이하 감찰관들은 서북쪽에서 동쪽을 보고 앉았고, 프랑스 공사는 무장한 부하 20명을 거느리고 정면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앉았다. 그의 사츠마, 나가토, 이나바, 비젠 등 다른 여러 진영에서도 관리들이 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호소카와, 아사노의 무사들이 나와 준비가 다 되었음을 병사들에게 알렸다. 이에 20명의 병사들은 본당 가장자리로 가 다시 가마에 올라타고 할복 장소로 향했다. 가마 양 옆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병졸들이 따라 붙었다. 할복장에 도착한 가마는 휘막 밖에 줄 지어 섰고, 한 관리가 나와 병사들의 명부를 펼쳐들고 막 호명하려던 참이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하늘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더니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절 안팎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절 처마 밑으로 혹은 나뭇가지 아래로 뛰어들어가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할복은 잠시 미루어졌고 총재 미야를 비롯, 모두는 본당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는 오후 2시쯤이 되어서야 그쳤고, 오후 4시 무렵에야 다시 할복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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