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현대인의 영성수련장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신정환 토마스(한국외대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서기 813년, 오늘날의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 살던 펠라요라는 은수자가 별빛에 이끌려 무덤 하나를 발견하고 그 지방의 주교였던 테오도미로에게 알린다. 발굴한 결과 그것은 폭 4미터 가량의 정사각형 구조에 지하에는 무덤이, 지상에는 제단이 있는 경당 형태의 유적이었다. 성 야고보, 스페인을 지키소서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어떤 연구자는 이것이 이단으로 박해받았던 프리 실리아노의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고 다른 연구자는 부유한 유다인의 것이라 추정했다. 아무튼 그것이 로마제국 말기의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이에 테오도미로 주교가 역사적인 선포를 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의 무덤이다.” 야고보 사도가 누구인가?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친동생 요한 역시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는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알패오의 아들 소 야고보와 구별해 대 야고보라 불린다.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그는 서기 44년에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열두 사도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갈리시아 지방을 복음화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참수형을 당했으며 이후 제자들이 그 유해를 갈리시아 로 옮겨 안장했다고 한다. 전승으로만 내려오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무덤의 발견은 당시 주교에게 안성맞춤의 호기였을 것이다. 무덤이 발견되기 약 100년 전인 711년, 이베리아 반도는 아프리카 북부에 살던 무어 족의 침략을 받고 불과 7년 만에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당하고 만다. 1492년 이사벨 여왕 때 무어족을 완전히 몰아내기 전까지 스페인은 약800년 동안 국토수복전쟁을 했다. 스페인의 중세를 구성하는 이때는 민족의식이 희박했던 스페인 인들의 정체성이 수립되는 시기였고 서유럽 국가들이 이슬람 교도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에 기반을 두고 결속력을 다지는 기회였다.이베리아 반도의 국토수복 전쟁은 실로 지중해 서쪽에서 벌어진 십자군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유럽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교황 레오 3세 역시 이를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에 일대사건으로 알렸고, 야고보는 곧 성전을 치르고 있던 스페인 군대, 나아가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야고보 성인이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나 무어 족 군대를 무찔렀으며 이에 힘입어 열세에 있던 그리스도교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스페인 병사들은 전투 가 벌어지면 “돌격, 산티아고!(성 야고보의 스페인어 발음) 스페인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야고보 성인은 ‘마타모로스(무어 인을 죽인다는 뜻)’라는 별명을 얻었다. 거룩한 도시, 교류의 통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역화 작업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의 무덤이 있는 곳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성당이 건축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증축된다. 현재의 대성당은 1078년에 짓기 시작해 1124년에 완공된 것이다. 무어 족의 위협이 남쪽으로 물러나는 12-13세기에 이르러 이 도시는 절정기를 맞는다.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이곳을 로마, 예루살렘과 더불어 ‘거룩한 도시’로 명명하였고 갈리스토 2세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줄 수 있는 성지로서의 최고 영예를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야고보 축일인 7월 25일이 주일과 겹치는 성년에 이곳을 순례하면 전대사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614년 예루살렘이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당하는 바람에 그리스도인들의 순례길이 막히자 산티아고는 더욱 각광받았다. 유럽 전역에서 순례객들이 몰려들었고 갈리시아는 세상의 끝(피니스테레)에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고립되어 있던 스페인이 유럽과 연결되고 개방되는 문화와 기술교류의 길이자 상품교역의 길이었다. 이후 산티아고 길을 중심으로 도로가 정비되고 숙박시설과 병원 등 순례자를 위한 많은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순례에 한번 나서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모험이어서 출발하기 전에는 유언장을 작성하곤 했다. 길은 여전히 험했고 풍토병이 돌았으며 산적과 강도가 횡행했다. 때문에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사단도 여럿 생겨났다. 보통 순례자는 거친 옷을 두르고 짧은 망토, 차양 모자, 표주박,그리고 순례자 신분을 표시하는 가리비 껍데기를 몸에 걸쳤다. 왕과 귀족 또는 성직자도 예외가 없었다. 순례를 완수하여 속죄행위를 하고 부과된 일련의 계율을 지키면 순례를 수행한 증거로 ‘콤포스텔라’라는 증서를 받았다. 산티아고에 이르는 순례길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대에 있는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하여 팜플로나, 부르고스를 거쳐 산티아고에 이르는 약 800km의 ‘프랑스 루트’이다. 현대인의 순례길이 된 산티아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20세기 말부터 다시금 대대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13세기 이후 순례자 수가 급감했고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이후 급속히 쇠퇴한 이 길이 1960년대 한 프랑스 사제에 의해 복원이 시도되더니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계기로 새로운 관심을 받았다. 1987년에는 유럽 연합에 의해 유럽 문화길로,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특히 브라질 작가파울로 코엘료가 1986년 이 길을 순례한 뒤 쓴 소설들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산티아고는 이제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곳이 되었다.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산티아고 순례자는 11만 4천 명에 이르며 그 숫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십자군 시대의 순례길이 21세기에 들어 세 속 도시의 순례객으로 넘쳐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중세의 순례와 요즈음의 순례는 목적 자체가 다른 경우도 많다. 어떤 이에게 이 길은 종교적 고행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운동을 겸한 극기체험의 기회이기도 하다. 실제로 순례자들의 상당수가 가톨릭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목적은 달라도 그곳에 이르는 과정 자체는 동일 하고 약 40일간의 고된 일정에서 공유하는 감정도 비슷하다. 그 길은 타인과 좋든 싫든 부대껴야 하는 관계의 장이고, 몸에 있는 것을 최대한 버려야 하는 무소유의 도량이다. 순례의 목적은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받는 증서가 아니라 길을 걷는 과정 자체이며, 길은 곧 하느님 을 향한 인생 여정이다. 그곳의 무덤이 프리실리아노의 것이든 야고보 성인의 것이든 중요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정환 토마스 - 한국외대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저서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지평”, 역서 “현대 카리브의 삶과 문화” 등 많은 책을 쓰고 번역했으며, 바로크 미학과 중남미 문학에 대한 논문들을 썼다. [경향잡지,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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