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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보이심(4)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9 / 조상호 목사
지난 21일 출국했다가 어제 오후에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위하여, 또한 저의 선교 여행을 위하여기도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말씀을 나누기 전에 11박 12일 동안의 한국 체류기간 동안 경험한 잊지 못할 몇 가지를 먼저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로 저는 순복음대구교회 성도님들의 헌신을 잊지 못합니다. 40여명의 여선교회 회원들과 15여명의 남선교회 회원들 가운데 몇몇 분들만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했을 뿐, 대부분의 회원들이 수련원에서 거하며 선교사 수련회 3박4일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 섬겨 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교사 수련회와 선교대회가 계획되자, 고건일 담임목사님과 모든 성도님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선교사들을 섬기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교회 재정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든 식사준비, 간식준비, 행사준비를 자비량으로 부담하며 섬기셨습니다. 또 모 장로님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책 한권과 도서를 구입하라고 도서구입비까지 제공하며 섬겨주셨습니다. 대구교회 성도님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섬기셨습니다. 항상 기쁨의 얼굴로 “저희들에게 선교사님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오히려 저희들에게 감사하는 모습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의 주일 설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재적 성도 75만명의 세계최대의 교회 아닙니까? 또 대성전에서 아무나 말씀을 전하지 못합니다. 지난 주 주일인 27일에도 1부 예배는 오세아니아총회장이신 정바울목사님께서 전하시고, 2부와 3부 예배에서는 조용기목사님께서, 4부 예배에서는 북미총회장이신 이태근목사님께서, 또 제가 드린 5부 다음의, 6부 예배에서는 유럽. 러시아 총회장이신 하용달목사님께서 전할 정도로 대성전은 아무나 설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유명한 부흥사들도 그곳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소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제가 그곳에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사실 처음 3월 중순경에 “주일 예배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전갈을 받았을 때에는 어느 소예배실에서 2~300명쯤 모여서 드리는 예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출국하기 며칠 전에 연락오기를 “5부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십시오. 5부 예배는 대성전에서 드립니다.”라는 전갈을 받고나서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선교사 수련회 때에도 부담감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일 날 당회장 목사님 비서실에서 부목사님으로부터 총회장 목사님들도 그곳에 서면 떤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긴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시작 5분전, 강단에 오르면서 눈에 보이는 대성전은 사람을 완전히 주눅 들게 했습니다. 얼마나 넓은지 제가 있는 곳에서 대성전 저 뒤쪽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옆으로도 거의 180도 가깝게 넓다보니, 한 눈에 회중들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대성전에 올라갔으니 긴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강단에 오르지 마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1980년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 3월 셋째주 목요일 저녁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고 나서, 제 기억으로는 그 해 8월12일에 처음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 갔는데, 거기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았지만, 찬양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내 일생에서 1년 이상 해외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했는데, 그 일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청년들이 인도하는 찬양을 함께 드리는데 마지막 찬양에서는 급기야 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많은 청년들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후에 많은 청년들이 저의 얼굴을 알아보고 “고맙습니다. 선교사님의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인사하기도 하고, 제가 건전지를 사기 위해 들른 편의점에서 만난 어느 자매는 “제가 일본과 뉴질랜드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뉴질랜드에 가면 크라이스트처치에 갈 것이고, 크라이스트처치에 가면 순복음에 갈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느 자매는 저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하는 등, 주일 5부 예배 후에 많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를 위해 중보해 주시고, 5부 예배를 위해 이곳에서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째로 목숨을 걸고 사역지로 돌아가는 선교사님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중국과 동남아시아는 사스라는 괴질 때문에 난리들입니다. 매일 중국에서는 수백명씩 사스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매일 수십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유학 갔던 수천명의 학생들이 매일 인천공항으로 돌아오고, 현지에 상사 주재원으로 갔던 분들이 사스를 피해 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스크를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두 겹, 어느 분들은 TV를 통해서 보니까 세 겹의 마스크를 한 채 공항에 입국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사스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홍콩과 중국 등지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모 선교사님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빨리 중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사역하는 교회들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저는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스를 피해 한국으로 피난 나오는 판에, 그 선교사님들은 오히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을 보면서 저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단지 “승리하십시오. 그리고 내년 선교대회에서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밖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목숨을 걸고 사스의 공포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국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선교사 수련회와 선교대회 기간 동안 크게 세 가지를 느꼈는데, 앞으로 기회가 되는대로 선교대회 기간 중에 받은 은혜를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죠수아 리프맨이라는 소설가가 쓴 < 마음의 평안(peace of mind)>라는 베스트셀러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젊은 주인공이 어떤 노인을 찾아가자, 그 노인이 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인공인 젊은이가 말합니다.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며, 넷째는 재능이고,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 그러나 평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즐길 수 없다네.”
그렇습니다. 평안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인기도, 학벌도,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평안이 없이 돈만 많으면 뭐합니까? 평안을 빼앗긴 채로 인기가 많아져도, 평안을 상실해 버린 채로 권력을 잡고 있어도,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평안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평안이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우리들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안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평안의 삶의 중요성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히브리 말로 “샬롬!”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인사가 변하는데 반해, 그들의 ‘샬롬’이라는 인사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인사를 보십시오. 과거 옛날에는 하도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는다든지, 병들어 변고가 많이 생기다보니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변고 없으십니까?”였습니다. 또 먹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 식사하셨습니까?”였습니다.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로토 열풍이 불어 “이번 주는 얼마야?”라는 인사를 하며 로토당첨금액을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무슨 인사가 유행하는 줄 아십니까? “또 몇 명이야?” 사스가 수그러들지 모르고 사스환자가 많아지자 걱정이 된 시민들이 사스환자 숫자를 물어보는 것이 질문 겸 인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인사가 변하였고, 또 현재에도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똑같은 인사를 합니다. 예나 지금에나 변함없이 ‘샬롬’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유대인들이 ‘샬롬’이라고 인사할 때, 여기에는 단순한 인사치레의 인사가 아닙니다. ‘평안’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샬롬’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 ’ 무슨 말입니까? 평안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평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19절 하반절을 보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란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을 의미합니다. 이 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며 기쁨으로 주님의 부활 소식을 증거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처럼 자기들도 유대인들에게 해를 당할까 염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겁을 먹고 있었는지 그들은 ‘문들을 닫고’있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의 문만을 잠가 놓은 것이 아니라, 이중, 삼중, 사중으로 된 문들을 겹겹이 걸어 잠근 상태에서 그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과거 창녀라고 손가락질 받고 왕따를 당하던 아낙네보다도 못했습니다. 담대하게 주님의 부활소식을 증거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는 대조적으로 3년 동안이나 제자훈련을 받았던 그들은 겁쟁이가 되어 숨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초청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꼭꼭 닫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세상 말로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두려움은 더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7절을 보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고 표현되었는데, 여기 “영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귀신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꼭 잠근 문을 열고 나타나지 아니하고 그냥 방에 나타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 스스로도 더 이상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19절 하반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두려워서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의례적인 인사였다면 한번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또 26절을 보겠습니다. 8일 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역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배반하며 도망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는 제자들의 불신앙을 나무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주려고 했던 것은 ‘평강’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왕으로서 어찌하든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매 주일 축도 전에 제가 낭송하는 기도문인 민수기 6장 26절을 보면 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평강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평강을 누리려고 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내가 평안의 삶을 누리고 싶은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평안의 삶을 누리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대구에서 있었던 선교사 수련회 마지막 날 저녁에 모든 일과를 마치고 황토 참숯 찜질방이란 곳을 갔습니다. 저는 그 동안 ‘OOO방’이라는 말이 붙은 업소는 괜히 찜찜해서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OOO방’이라고 하면 꼭 퇴폐적인 기분이 들어서 노래 부르는 노래방이나, 런닝 머신을 달리는 달리기방이나, 빨래를 하는 빨래방이나, 피곤을 풀게 해주는 찜질방을 과거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대구교회의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 몇 분들이 모든 선교사들을 안내해주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탈의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눈에 띠는 글씨가 있었습니다. “귀중품은 카운터에 맡기십시오.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인 줄 아시죠? 맡긴 것만 책임져 준다는 것입니다. 귀중품을 맡기지 않으면 주인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간 그 찜질방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가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지만,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를 혼자서 껴안고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에서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거리를 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염려했던 모든 일이 사라진다거나 잘 해결된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기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전혀 불가능한 것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해결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 7절 말씀은 그러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염려스러운 일들을 다 맡기면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말미암아 걱정거리 앞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담대하게 생활할 수 있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모 선교사님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한번은 이 선교사님이 어느 분의 초청으로 엄청나게 큰 선박을 구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구경한 후에 지하로 내려가서 선장실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배이 방향을 조정하는 키 외에 원형장치가 하나 있더랍니다. 그것이 궁금해서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저것은 자이로스코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높고 물살이 험해도 배의 수평과 안전을 유지해 주는 장치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선교사님은 ‘내 인생에서 기도는 바로 저 자이로스코프와 같구나. 물살과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내 인생의 수평과 안전을 유지하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장치, 그것이 바로 기도의 자리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자이로스코프인 기도를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음에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진 스펄젼 목사님은 다니엘을 묵상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평안히 잠을 자는 동안, 저 하늘의 궁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다니엘을 지키기 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셨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성령으로 항상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굳세게 하시며 참으로 의로운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환경만 바라보지 말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비행기를 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비행기가 이륙해서 적정 고도의 높이로 올라가기 전에는 매우 흔들립니다. 이번에 한국에 갈 때도 얼마나 흔들리던지 저절로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행기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겸손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는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지 그렇게 요동을 치던 비행기가 하늘로 높이 올라 약 27,000피트, 9,000 미터 이상의 고도를 유지하니까,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만들었던 먹구름도 비행기 저 밑에 깔린 것처럼 보이고, 비행기가 꼭 제자리에 멈춘 것처럼 아무 요동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먹구름이 우리 주위에 있다 할지라도 먹구름만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구름 위에는 평안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아시나? 저는 예수님 믿고 나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두려워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한 가지 배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암을 주시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근신하는 마음, 다시 말하면 Self- Control, 절제하는 마음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평강의 삶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서도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조목사야, 김집사야, 이형제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들 위에, 여러분들 자녀 위에, 여러분들의 가정과 삶 위에 주님의 평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요 20:19-29 / 김태환 목사
20세기의 최대의 신학자라고 하면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듭니다. 그만큼 바르트가 현대 신학 사상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13권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은 특히 유명합니다. 바르트가 활동하던 시대는 자유주의 신학이 팽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나 그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거장(巨匠)인 궁켈(Herman Gunkel)과 하르낙(Adolf von Harnack), 헤르만(Herrmann) 등에게서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하고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은 안셀름(Anselm von Canterbury)이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썼던 책 「프로스로기온(Proslogion : '훈시'라는 뜻)」에서 주장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읽고 나서입니다. 바르트는 1928-1938년 사이에「나의 입장은 어떻게 변화했는가?」라는 자서전적인 언급에서 안셀름의 책이 미친 영향을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심화되었다. 즉 이 기간 동안에 나는 기독교 교리의 철학적, 즉 인본주의적 기초와 해석을 모두 벗어버렸다. 내가 인본주의와 작별하게 된 것은 1931년에 출판된 영국 켄터베리의 안셀름(1033-1109)의 신 증명에 관한 책이다." 바르트가 안셀름으로부터 새롭게 배운 사실은, 기독교 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신앙과 지성(知性), 혹은 계시(啓示)와 이성(理性)과의 관계를 말할 때 두가지 입장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셀름이나 어거스틴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입니다. 이 말을 알기 쉽게 말한다면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셀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로 당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고 내가 당신을 찾을 때 당신을 내게 드러내 주소서. 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가르치지 않으면 당신을 찾을 수도 없고 당신 자신이 나에게 드러내 주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신앙을 선행(先行)시키지 않음은 교만이다. 다음에 이성에 호소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이와 정반대로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I understand in order to believe.)."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이성적 사고에 의한 논증(論證)을 통해서 절대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BC 384~BC 322)의 철학에 근거한 주장이라고 보겠습니다. 중세기의 피터 아벨라드(Peter Abelard, 1079-?)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전자를 진리에 대한 신본주의적인 접근(approach)라고 한다면, 후자는 진리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네번째 사람은 도마입니다. 도마는 흔히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찬송가 133장「어저께나 오늘이나」가사에도 보면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 주셨네."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도마를 의심장이로,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로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마에게 대해서 그렇게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간단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마는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師徒)로 임명하셨습니다. 도마가 12 제자 중에 끼어 있는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마는 흔히 생각하는대로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사건이 있은 후에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유대로로 들어가시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거기는 위험하다고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그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복음 11:16)."고 했던 사람이 도마입니다.
요한복음 13-14장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잠시 동안은 너희와 같이 있겠지만 이제 얼만 있지 않아 너희가 나를 찾더라도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 내가 와서 너희를 데려 갈 것이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이 때 도마가 말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도마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만 우리는 그 길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도마에 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문들을 닫았다"는 말 속에서 그 당시 제자들의 형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얼마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마당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엄습해 오는 불안과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문에는 최근 예루살렘 근처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대량 학살 매장지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1 이 동굴은 예루살렘 통곡(痛哭)의 벽에서 700m 떨어진 마밀라라는 거리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그 거리의 도시 계획에 따라 공사가 진행되면서 성도들의 순교 현장이 발굴된 것입니다. 약 40 feet의 긴 자연 동굴 속에서 약 37,585개에서 66,262개 정도로 추정되는 유골(遺骨)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매장된 직후 살아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동굴 입구의 바위를 깨고 예배처를 만든 후 그 바닥에 모자이크 형식으로 “저들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저들의 이름을 아시리.”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이 글자는 발굴 당시 심하게 파손되어서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학자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판독(判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신문 기사는 아마도 이 무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집집마다 숨어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성급하게 밖으로 뛰쳐 나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치다가 유대인들에게 맞아 죽은 것이 틀림 없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평강을 빌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샬롬(Shalom)"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못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 없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히 도마는 처음에는 제자들과 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 흐르는 소름끼치는 침묵과 적막을 참지 못하고 그는 뛰쳐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홀로 고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8일 후에 도마가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10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도마의 말이 단순히 냉소적(冷笑的)으로 들립니까? 그의 말이 단순히 의심장이의 말로 들립니까? 단순히 그의 말이 불신(不信)의 말로 들립니까? 도마 뿐만이 아닙니다. 제자 중의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니까 비로서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절)" 라고 했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믿었던 제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은 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도마는 자기 마음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내가 그분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노라."
이런 점에서 도마는 매우 실제적인(practical)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정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도마에게는 자신의 무지와 불신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지 않으면서 경건한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장(假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태도는 선생님에게 계속해서 질문하는 학생과도 같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이슈가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해서 그의 삶 전체가 회의적이었다든지, 그의 life style 자체가 항상 부정적(negative)이었다든지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미안한 말입니다만, 저는 어느 목사님에게서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목사님 입에서는 거의 한번도 긍정적인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반대 얘기를 합니다.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아예 사고 구조가 그렇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 지역에 새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축사(祝辭)는 분 중에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라고 축사했습니다. 그 다음에 매사에 회의적인 이 목사님이 나가서 "먼저 목사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지만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살도록 충성하십시오." 이렇게 축사했습니다. 그분이 고혈압으로 쓰러 지셨는데 문병간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후회가 됩니다."
미안합니다만, 여러분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사고 구조와 삶의 스타일 자체가 회의적인 사람이 없습니까? 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가 ……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노라."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의 삶의 스타일 자체가 회의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도마가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입에서 "주의 함께 죽자" 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한가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마를 대해주시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도마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다른 제자들을 보아라. 그들처럼 너도 믿을 수 없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진지하게, 인내를 가지고 들어 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을 때 도마만 "주님,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예수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씀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는 말씀 중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회의주의자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친절하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의 믿음을 한 단계 끌어 올려 주셨습니다.
6가지 형태의 믿음이 있습니다.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믿음(faith seeking)이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faith confessing )이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약한 믿음(faith faltering)이 있습니다. 의심하는 믿음(faith questioning(이 있습니다. 찬양하는 믿음(faith praising)도 있습니다 그리고 깊고 성숙한 믿음(faith deepening)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이런 믿음 저런 믿음이 있습니다.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강한 믿음을 가지라고 열변(熱辯)을 토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대신 우리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친절하게 붙들어 주고 도와 주어야 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굳이 대입(代入)을 해 본다면 도마의 믿음은 어떤 형태의 믿음입니까? faith seeking이나 faith questioning 형태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I understand in order to believe.)." 는 인본주의 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Stop doubting and believe.)." 제가 이 말씀을 이렇게 의역(意譯)해 보았습니다. “도마야, 너의 의심은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다. 믿음을 가져라.”
의심(疑心, doubt)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도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을 의심해 봄을써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의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대답을 얻습니다. 의심을 해 봄으로써 내가 알고 있던 것이 더 견고하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냥 모르는 것을 덮어 놓지 마십시오. 신앙의 문제로 질문이 생길 때 여러분은 도마를 보면서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가 도마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도마는 언제까지 의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실 때에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언제까지 질문에만 매달려 있지 마십시오. 그걸 발판으로 해서 결단과 믿음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의심이 고집(stubbornness)이 되지 않고, 여러분의 삶의 스타일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도마의 의심이 기쁨과 환희(歡喜)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도마의 마음을 가리고 있던 의심의 안개가 걷히고 참으로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도마의 faith questioning 이 faith praising으로 바뀌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도마의 의심하는 신앙은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들의 증언(證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렸습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산 소망(a living hope)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 열려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베드로전서 1:8).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혹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길에서 암중모색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혹 도마와 같이 doubting하는 믿음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그 문제들을 피하지 말고 정직하게 직면(直面)하세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 가세요. 그러나 여러분의 의심과 질문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결단과 믿음으로 옮겨 가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그 때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 때 그 사람의 faith doubting은 faith praising으로, faith deepnin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 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다락방까지
요 20:19-29 / 이필재 목사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40일 동안 지상 활동을 더 하시다가 승천하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라고 나타나신 시간까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닥쳐온 핍박과 환란을 생각해서 한 곳에 모였습니다. 우선 모인 장소가 며칠 전 유월절 행사를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던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이 장소는 기독교 역사의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성만찬 예식을 행하던 장소,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모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현장에 나타나신 장소, 26절에 보면 여드레가 지나 제자들이 다시 모였을 때 또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신 곳, 또한 사도행전에서 120문도가 열심히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기독교를 탄생시킨 역사 유적지라고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았더니” 모여 있는 자들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죽을까봐 겁이 나서 숨을 죽이고 모여 있습니다. 그때의 다락방이 원형 그대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현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제가 들어가 봤는데 빈틈없이 들어가면 100여명 정도 모일 수 있는 공간에 방이 하나가 아니고 몇 개가 붙어있습니다. 또, 집안의 구조가 조금 복잡해서 2층으로 되어 있고 안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내다볼 수도 있고 도망갈 수 있는 뒷문도 마련되어 있는 구조였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그 자체가 제자들에게는 불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제자들이 밤에 와서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해갔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다”라는 거짓말을 퍼뜨리라고 해서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이 다 퍼져서 잡히기만 하면 이중삼중의 고난이 생기는 상태에 이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종교적 사건이면서 정치적 사건입니다. 한 정치 권력이 무너질 때 거기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얼마나 겁에 질려 무서워하고 있을까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지나간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열심히 노력해 온 신앙 운동이 인간적으로 보면 나약한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우선 그 시대 유대 나라에는 벌써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대교가 버티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 제사장 그룹,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은 막강한 실력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이 당해내기는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역부족인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게다가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헬라 철학이 세계의 정신사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바로 헬라 철학이 “예수의 복음은 미련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파인 스토익 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은 어리석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규정한 상태였습니다. 더 무서운 세력은 500년 동안 물리적 힘을 자랑하는 로마의 정치권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몇몇의 제자들은 3년이란 짧은 시간동안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해 몸을 던졌으나 종교, 문화, 정치적으로 막강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이제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이제는 자신들의 목숨을 걱정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말씀에는 이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들이 귀로만 들었던 예수님 부활 사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확실해 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을 재확인시켜주시고 계십니다. 21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분명해진 사도직에 대한 정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도의 직분은 예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계획인 인간 구원의 사역은 내가 없어도 너희들끼리 각각 흩어져서 하라. 온 세상에 너희는 흩어져 디아스포라 되어 내가 너희에게 준 복음을 전하라. 이게 사도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더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나는 이제 아버지께로 가니까 너희들끼리 이 일을 감당하라.” 더 무섭지 않겠습니까? 저는 신학교를 다닐 때 소명을 받아 같은 뜻을 가진 동급생 친구들이 서로 모여 공부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제가 낙심할 때면 친구들이 힘을 주고 친구들이 낙심할 때는 제가 힘을 주고 날마다 학교 가는 것이 기쁘고 힘이 나고 용기가 나고 게다가 영적 충만한 교수님들이 우리들의 불타는 가슴 속에 열정적으로 신앙을 채워주시고 너무나도 좋은 추억들이 생각납니다. “졸업하면 이제 제군들은 각기 온 세상으로 흩어지라. 이제는 흩어져서 이 선지학교에서 배운 모든 진리를 가지고 혼자 나가서 사역에 충실하라.” 이런 졸업 설교를 듣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신앙 사역이 만만치 않단 말입니다. 저는 졸업식 날 얼굴 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친구들이 한 절반은 됩니다. 제가 외국에 오래 있다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이 공부한 동창생들을 보면 온 세계 6대주에 안 흩어진 곳이 없습니다. 다 흩어져서 자기 몫을 감당하고 어떤 친구들은 목회를 열심히 하다가 이미 소천한, 하늘나라로 간 친구들도 10여명이나 되고 그렇습니다. “이제 나는 내가 하던 일을 너희에게 맡기겠다. 나는 나의 사명을 끝내고 이제 본향인 아버지께로 가노라.” “예수님이 앞장을 서시고 우리들이 그 뒤를 따른 일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우리들만 두고 가시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겁이 나서 물었을 때 예수님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고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공포심에 두렵고 떨리지만 너희가 가는 길에 성령님이 역사하실 것이니 다소 고난스러운 일을 만나도 능히 해낼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에 마음의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여 있지 말고 문을 열고 나가서 온 세상에 흩어져 내가 너희에게 준 복음을 전하라.”
그런데 이 공동체에 작은 일이 하나 생깁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다른 제자들의 이름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아니하는데 도마의 이름만이 몇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같은 장소에 여드레를 지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도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본래 아람어로 토마라고 부르고 히브리어로 톤, 헬라어로 디두모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여러 이름으로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 이렇게 총 열 세 명인데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이고 가룟 유다는 자살해 죽었고 도마는 이 자리에 없고 10명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 나중에 온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도마가 여기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나는 믿지 못하겠다.” 그러면 왜 도마만 믿지 못하였는가? 그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아니한 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10명의 제자가 왜 함께 모여 있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죽어도 같이 죽자는 겁니다. “틀림없이 우리에게는 어떤 불이익적 심판이 다가와서 죽게 될 것이다. 분위기를 봐라. 우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우리가 도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의심이 많은 제자였다고 평가합니다. 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는 아무래도 화를 만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슬며시 빠져나간 것입니다. 아마 살 길을 찾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가보니까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을 모두 다 압니다. 더 위험한 겁니다. “어휴! 안 되겠다.” 다시 돌아와서 왔다 갔다 하다가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다른 제자들은 열심히 증거합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다.” “나는 못 믿겠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승천하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500여명이라고 성경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부탁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말씀 그대로 실천에 들어갑니다.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며 한 곳에 모여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를 기다리면서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오순절 성령 강림의 큰 역사가 일어나 성령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을 감당하게 되는 사람들로 변합니다.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성경에 밝혀졌습니다. 120명이라고 그랬습니다. 500명이 똑같은 현장에서 똑같은 부탁을 받았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믿지 못한 겁니다. 의심이 생긴 겁니다. 120명만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교회 공동체는 예배 모임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교인들에게 목사들은 부탁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면 할 수 없지만 성의만 기울이면 교회 예배에는 모두다 열심히 참석을 하십시오.” 우리 갈보리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서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우선 주일 저녁 예배도 드리지 않습니다. 금요철야예배도 지금 하지 않고 성경공부도 그렇게 많이 만들지 않고 간략하게 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지면 가정과 사회생활에 소홀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모이는데 목회 철학을 두고 이 정도만 모여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자라서 신앙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모이면 그 자체가 오락이 되어서 오락 중심의 문화로 변해가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아는 것만도 행하기에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최소한의 공중 예배는 열심히 드리고 조금 알고 많이 행해면서 살자는 뜻입니다.
지금 도마는 10명이 열심히 증거하여 주는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해서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믿지 못하겠다. 정 믿으라면 내 손으로 못 자국, 창 자국을 만져봐야 믿겠어.” “우리 10명이 다 확인했단 말이야.” “나는 믿을 수 없어.” 혼자 따로 놀다가 소외감이 생겼는데 이것이 반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믿음이라는 것은 직접 경험, 간접 경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직접 경험은 아주 적습니다. 지금 예수님 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다 믿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베드로전서 1장 8~9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다른 제자들은 함께 예수님을 다 봤다고 말하는데 자기만 빠졌으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한번 자존심을 부려보는 겁니다. “너희들 말을 내가 어떻게 믿으란 말이야?” 이 도마가 말하는 것은 현대 과학 즉, 사실주의자들의 말입니다. 현대 과학은 도마와 같은 말을 항상 합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첨단 과학의 시대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는 한 가지만 믿습니다. “과학적인것 외에는 다 미신이다.” 이것이 사실주의입니다. 도마와 21세기는 통하는 맥락입니다. “세상에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간 사람이 3일 만에 살아났다는 도깨비 같은 이야기가 진리냐?” 헬라 철학이 반대하고 나섰고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과학적인 증거로서 내 손으로 만져보고 사실을 확인한 후 과학적 근거에 의해서만 내가 믿음을 가지겠노라.” 이것이 현대인의 생각입니다. 도마는 아주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어떤 답변을 하셨는가? 오늘 본문에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 앞에 일부러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실주의자 앞에 사실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성경 다음으로 재미있게 읽는 책이 과학서적입니다. 과학서적을 많이 읽다가 저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언젠가는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증거할 날이 올 것이다.’ 저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과학이여! 네 손을 내밀어 나를 만져보라.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이것입니다. “아니, 너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요셉의 아들인 네가 어찌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하느냐?” 이것 때문에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과학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를 다 만듭니다. 벌써 실험이 다 끝나고 “어떻게 할 것인가?” 윤리적 결정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나와 하나이니라. 영적으로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너희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목사 되고 저런 사람이 목사 되고 교인들이 거기에 맞추기에 힘들고 목회 생활이 잘 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말이 많은데 그러지 말고 우리 중에서 최고 훌륭한 인격자, 목회 잘하시는 목사님 한 분을 복제해서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을 똑같이 만들면 교인들이 이 교회 갔다 저 교회 갔다 할 것도 없고 어디 가나 다 똑같고 좋을 텐데….’ 하나가 되는 일, 생각도 못한 일이 벌써 과학으로 우리 눈앞에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너희와 나는 하나야. 그러면서 아버지와 우리는 하나야.” 앞으로 과학이 고백할 날이 올 것입니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집 사람 같은 사람을 똑같이 만들면 해결되는 문제이고 일본 여자들이 욘사마를 미치도록 좋아한다고 그러는데 수천 명 만들어서 수출하면 다 끝나는 것이고…. 안 해서 그렇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도마가 예수님을 만져보고 나서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언젠가는 과학이 하나님 앞에 “창조주시며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고백할 날이 올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너보다 더 복되겠다.” 유세비우스라는 유명한 역사학자 기록에 도마는 이 사건 이후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아! 내가 왜 주님에 대해서 그런 의심을 가졌는가? 부끄럽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잘 지키는 제자가 되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으니까 나는 우리 11명의 제자 가운데 가장 땅 끝을 찾아가자.’ 그래서 인도까지 갔다는 겁니다. 인도에 가면 서남해안 케랄라주 기독교를 도마교라고 부릅니다. 도마가 와서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도마 기념 교회도 갔다 왔습니다. 평생을 가도 못갈 길을 이때 이 일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는 가장 먼 곳을 찾아가자.’ 그래서 인도 선교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가거라. 혼자 가라. 성령을 받으라. 죽을 수 있는 고난이 오거든 죽어라. 괜찮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는 장소를 두 곳으로 전하셨습니다. 하나는 갈릴리요 하나는 다락방입니다. 갈릴리는 그들과 처음으로 만나서 사명을 받던 첫 장소요, 다락방은 마지막 장소입니다. “이 두 곳만 잊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사역은 너희들을 통해서 이 땅에 훌륭하게 성취될 것이다. 가라. 갈릴리에서 다락방까지 너희가 왔다. 이제는 이 다락방에서 세계를 향하여 가라.” 기독교 진리는 받은 자는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세계로 가야합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독립교회선교단체 연합회에서 154명의 목사 안수를 했습니다. 선교사 파트는 제가 사회를 보면서 진행했는데 미국에서 신학자 한 분이 축사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아직까지는 세계 선교를 위해서 미국이 가장 많은 선교사와 선교비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퍼센트로 나가면 20년 후에는 분명히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미국보다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세계영혼의 구원의 문제는 한국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축사하러 온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유럽의 그 많은 기독교 국가들은 선교 생각도 안합니다. 미국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세계에서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두 번째인데, 앞으로 21세기는 땅 덩어리로 봐서는 94분의 1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의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남기신 사명의 초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의 모든 철학적 신학적 초점을 여기다 맞춰서 가면 틀림없습니다. 우리 모두 보내심의 제자 사역에 이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다시 열한 제자를 만나주신 사명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진리 안에서 저희들이 영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떻게 반영시킬 것인가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명을 잘 감당해 가는 우리 한국 교회가 갈보리 교회가 되게 하시고 또 나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주간 동안 계획되어진 모든 사역의 현장의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절대 절망에서 절대 소망으로
정영도 목사
▣ / 부활의 영광의 소망
▣ 요 절 /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도 입> <대저 의인은....>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百折不屈-백번 꺾여저도 굴복하지 않는 삶의 투지
이 세상에 백번을 꺾어도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연약하여 3-4번 꺾이어지면 다 굴복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아주 엎드러져 망하고 만다. 그러나 백번 꺾어도 넘어지지 않고, 천번 꺾어도 넘어지지 않으며, 만번 꺾어도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간이가 천상천하 오직 한분이 있었다. 그가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제자들을 향하여 교훈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하셨는데, 당신께서 친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다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친히 보여주셨다.
몸 속에 있는 피를 다 쏟고 운명하시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분은 그분의 뜻이 꺾이지 아니하시므로, 인류의 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架上 七言>
第一言; <용서의기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第二言; <구원을 선포> 함께 십자가의 우편 매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第三言; <그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6,27)
第四言: <버림받은 자의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第五言: <지옥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음>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第六言; <언약 성취에 대한 선포> "다 이루었다!" (요 19:30)
第七言; <운명을 위한 기도>
"아버지의 나의 영혼을 아버지 부탁하나이다" (눅 23:46)
1, 절대 절망의 위기 상황 (19절 상)
십자가 상에서 주님이 절명하셨을 때에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1> 운명하실 때에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던 유대 기득권 층들은 "이제 싸움은 끝났다. 우리가 그 예수를 이겼다."
이제는 유월절 절기가 끝나는 대로 예수의 추종자들 처리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한 부류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그렇게도 믿었던 예수님, 십자가에 메달리신 후에도, 그들은 이런 기대를 가졌으리라.
아마 주님은 그 놀라운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실꺼야,
반드시 십자가상에서 양손에 박힌 못과, 양발에 박힌 못을 뽑으시고,
틀림없이 꼭 내려오실꺼야, 주님을 결코 죽지 않으실꺼야
틀림없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죽으신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 암 말도 안되고 말고.
①그런데, 왠일인가?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히신 후에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세 시간이 지나도, 주님은 고통하고 신음하시면서 간간히 몇 마디 말씀만 하실 뿐 도무지 내려오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제 9시에 큰 소리를 내시고는 운명하시고 숨이 끊어지신 것이다.
②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주님의 기막힌 모습을 본 제자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이다.틀림없이 주님의 추종자들을 색출할 것인데....?
고향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나머지 예루살렘에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사도이다.
그들은 주님의 운명을 멀리서 본 것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슬며시 도망하여 주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마가의 다락방에 웅크리고 모여 앉아서 한숨만 쉬고 두려워 떨며 앉은 것이다. - 이것이 시험이라는 것이다.
온 사방에 우겨 쌈을 당하여 어찌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 빠진 것이다. 시간이 경과될수록 주님의 죽으심으로 오는 정신적, 심적인 충격은 점점 더하여 갔다. 이것이 절망이라는 것이다. <절대 절망>
③ 엄청난 충격을 받고 절망 중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 주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11-15) 정상인이 아니다. 멍청해져버렸다. 전후 사정이 연결이 안 된다. 이 정도 되면 헛것을 보게 되고, 실체도 허개비로 보게 된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 이러한 처참하고 참담한 제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 19절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해도 여전히 멍청하다. 절망에 빠진 사람의 모습들이다.
주님이 지난 금요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곧 안식일 때문에 무덤에 장사지낸 후부터, 이제 안식일이 지나고, 이날 안식후 첫날까지 두문 불출하고 두려워 떨며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마냥 웅크리고 한숨만 쉬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 이런 면에서는 도마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마다 그 중에서 극히 이지적인 사람이라 그래도 다른 제자들보다 더 나은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주님 죽으신 후에 예루살렘의 적정을 살펴보고자 나갔던 같다. 그 사이에 주님은 오셨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했을 때에 그는 그 말을 결코 믿을 수 없다. 이것이 도마가 받은 충격의 결과이다.
예화> 絶望 -링컨의 절망의 편지
젊은 시절에 무서운 우울증에 빠짐, 그는 한 편지에서 "나는 지금 지극히 불행한 존재이다. 만일 내가 느끼는 것을 온 인류에게 나누어 준다면 이 땅에는 즐거운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아길 수 없을까 두렵다. 이대로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죽든지 아니면 나아져야 한다"
<적 용>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그 충격으로 스스로의 생명의 끊던지-이런 사람은 그래도 정신이 좀 있는 사람이다. 심한 경우에는 정신이 돌아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어떤 절대 절망의 위기 속에서도 소망이 있다.
절대 절망의 밤이 지나면 절대 소망의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죽음의 십자가의 절망의 밤이 지나면, 부활의 영광의 아침이 밝아 온다.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를 몇 번 반복했는가?
더디어 절대소망의 부활의 아침이 환히 밝아 올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다.
예수님 부활했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2. 절대 소망의 부활의 날은 밝아왔다
1) 더디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의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 성경 이야기
2) 그런데 아직도 주님의 제자들은 절망 속에 헤메고 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제자들은 저녁이 되었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절망 속에 헤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이 꼭 우리들 모습 같지 않는가?
두려워 말고,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라.
3) 상한마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부활의 영광을 증거하시는 예수님 (19-22)
①제자들의 심령을 위해서: 평강이 있으라 / 성령을 받으라
②몸소 주님께서 부활을 확증하여 주셨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다.
3. 부활의 역사적 교훈
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오묘하여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다 측량할 수 없다.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상 최대의 이적, 걸작품
2)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세례의 인침이다.
3)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그 어떤 시련과 절망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투지를 갖게 되고, 실패하는 자가 같으나 성공할 수 있다는 전투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할하신 주님이 주신 것
요 20:19-29 / 이용효 목사
자동차 사고로 죽은 세 사람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천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장례식을 하면서 당신이 관 속에 들어 있을 때, 친구나 가족들이 애도하면서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소?”
첫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저는 아주 유능한 의사였으며 훌륭한 가장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저는 아주 좋은 남편이었으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훌륭한 교사였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사람이 말했습니다.“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앗, 저 사람이 움직인다!”
죽음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천안함 침몰 뒤 해군 병사들의 실종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하였고, 실종자를 구출하려고 시도하다 순직한 한준위의 사망소식은 국민 모두를 슬프게 하였습니다. 최진실씨의 동생 최진영군의 자살 소식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죽음은 죽은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통곡하게 만듭니다.
뉴스를 통해 천안함 실종자들의 가족들의 통곡소리를 들었습니다. 해군UDT 베테랑으로 이번 실종자 수색작업 중 순직한 한준위 부인의 통곡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죽음이 덮쳐올 때 우리는 아무 방비도 할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가옵니다. 어린 아이들도 죽고 노인들도 죽습니다. 죽음은 추미를 가리지 않고 다가옵니다. 절세미인들도 죽고 호호백발의 사람들도 죽습니다.
죽음은 영웅호걸이나 부자나 권력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죽음은 집단적으로 오기도 합니다. 아이티에서는 한 순간에 17만에서 25만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죽음은 또 개인적으로 찾아옵니다.
지금도 백제 화장장의 불타는 화구에 들어가는 많은 시신을 보고 가족들이 통곡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용미리 공동묘지의 땅속에 들어가는 망자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가족들의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철학도 과학의 힘도 교육과 권력과 제국의 힘도 죽음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은 인류 최고의 적이요/ 죽음은 인간이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가장 무서운 병이요/ 죽음은 인류의 영원한 불안이요/ 죽음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요/ 슬픔이요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이긴 사람이 없고 죽음을 정복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결과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사람의 영원한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가 성경적으로 사실에 입각하여 잘 만들어 진 것은 너무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도 강조가 되었다면 너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기쁨도 동시에 강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승리하신 주님을 기쁘게 찬양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들 안에 좀 더 부활의 기쁨이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모두 웃음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 주셨고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에게 4가지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에 잡힌 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19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셨고 (21절)에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성공학으로 유명한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 이라는 분은 현대인들의 삶을 두렵게 하는 요인들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1) 먼저 사람들은 경제적인 궁핍에 대하여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직장을 잃거나 명퇴당하여 가난할 것에 대한 염려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명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인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욕을 먹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3) 나아가서 질병의 공포입니다. 혹시 치명적인 병에 걸리지 아니할까? 두려워하는 하는 마음입니다.
4) 그리고 노쇠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늙어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소외될까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젊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젊게 보인다는 말을 매우 좋아 합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5) 그리고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할까봐 두려워합니다.
6) 또한 사람들은 사랑의 상실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사랑이 식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사랑이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는 말입니다.
일본에서는 요즘 황혼 이혼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50대 이상 된 남자들은 부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여자들은 상처를 속으로 감추고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복수의 칼을 품고 있다가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퇴직금을 손에 넣은 다음 바로 이혼 소송을 내고 남편을 팽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엄처가 유머가 있습니다.
50대 남자들은 이사 갈 때 부인이 좋아하는 강아지를 안고 이삿짐 차 조수석에 먼저 올라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은 장롱 속에 숨어 있다가 이사 간 집에 도착하면 나타난다고 합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유머로 표현한 것입니다.
7) 또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 내일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떨고 있습니다.
불안이 안개처럼 심연 깊게 드리워져 있고 두려움이 스모그처럼 내려 앉아 있습니다.
이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보려 하지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실존 그 자체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야 말로 인생제일의 행복입니다. 평강이 인생최고의 축복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환경이 변하고 세상에 환란이 일어나고 우리를 두렵게 하여도 변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평강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사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 평강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한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 절망합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면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에반스라는 의학박사가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때의 자신의 경험담을 글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병이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으로 호송되어 왔습니다. 군의관 한 사람이 바쁘게 지나가다가 이 환자를 잠깐 들여다보고 무심코 말했습니다. "이 친구, 내일 새벽까지만 죽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 신음하던 사병의 귀에 이 한 마디가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춥고 긴 밤을 잘 견뎠습니다. 왜냐하면 해가 뜰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밤새 고통을 잘 견디어 살아나게 되고 나중에는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희망만 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사람을 살 맛 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절망은 삶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절망은 산 사람도 죽음으로 재촉합니다. 그래서 절망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절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를 예수님께 맡겨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죽자 살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각종 질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여러 가지 기적과 이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슈퍼맨 같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자신들의 출세는 이제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 신들의 눈앞에서 힘없이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가 결국 십자가 위에서 맥없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대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무기력하게 달려 죽으시자 그들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처음에 믿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8,39)
고 하신다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하시자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그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에 슬픔과 절망이 사라지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현제 미국에서 목회하고 계신 <패트 번즈> 목사님이 간증하셨습니다.
교인은 점점 줄어들고 그는 목회 의욕을 완전히 잃고 절망 가운데 교회당 계단을 내려가는데 꽃을 파는 할머니가 싱글 벙글 웃으며 다가 왔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즐겁습니까? 걱정이 없나요?” 그러자 그 할머니는 “이 나이가 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걱정이 트럭 100대 분은 더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싱글 벙글 입니까?” “ 예 고민과 절망이 오면 그래 사흘만 기다리자 내 주님도 사흘은 무덤 속에 갇혀 지냈지 주님의 사흘은 고통이었지만 부활을 기다리던 사흘이었지”하고 생각하면 기운이 납니다. <패트 번즈> 목사님은 꽃을 사들고 예배당에 들어가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죽음에 매여 절망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영원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요 영원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은 무기력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본문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백성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3:16절)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하셨고 (요한복음7:37~39절)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시어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오순절에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수많은 영혼들을 추수하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살아계셔서 그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게 되고, 교회와 성도들을 잘 섬기게 되고,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고, 직장과 사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게 되고 장래 소망을 가지고 힘 있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받으라고 하신 분이 주님이시니 우리는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의심도 사라지고 평강과 기쁨과 확신이 넘치게 되고 분명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확연히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이 충만하여져서 전에 할 수 없다고 하던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에 여러분 모두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4. 부활하신 주님은 의심하던 제자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처음 마가다락방에 오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고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어찌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십자가위에서 물과 피를 완전히 다 쏟아서 죽어 무덤에 묻힌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그가 의심하였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드레 후에 도마도 있을 때에 다시 찾아 오셔서 도마에게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뵙고 그 분을 만진 다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백하기를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 속에서 놀라운 영향력과 자취를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60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부활을 확신하였기에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순교의 제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로마에 가서 본 카타콤 지하묘지를 예를 들어도 공동묘지에 지하 땅굴을 파고 들어가 그곳에서 250년 동안 숨어 지내며 대를 이어가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곳에서 발굴된 시신만 25만구가 나왔습니다.
이 놀라운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와 같은 힘이 혹 단순한 공상이나 착각에서 비롯되었을까요? 날조된 기만적인 이야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기꺼이 목숨을 던질 정도로 어리석었을까요? 자기의 목숨도 재산도 명예도 아낌없이 내던진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신과 이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의심하는 자들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하십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 믿는 자들은 보고 믿는 자 보다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네 가지를 주셨습니다. 평강과 희망과 성령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이 모두가 우리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박덕기 목사
오늘은 우리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부활주일입니다. 금년에도 우리 다 같이 찬송가 작시자 Robert Rowry처럼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소리 높여 찬양합시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할렐루야 ! 아멘!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19세기에 쓰여진 작자 미상의 글입니다. <1900여 년 전 인간의 생명법칙과는 다르게 한 사람이 태어났다. 이 사람은 가난하고 미천하게 자랐다. 그는 여러 곳으로 여행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 그가 살던 나라의 경계선을 넘었을 뿐이다. 그는 부도 권세도 지니지 않았다. 그의 친척들은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훈련을 받거나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에는 임금을 놀라게 했고, 소년 시절에는 박사들을 당황케 했다. 장성한 후에는 자연의 법칙을 지배했고, 바다 위를 포장도로인양 걸었고 바다를 잠잠케 했다. 그는 약도 없이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고, 그의 봉사에 대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결코 책을 쓰지는 않았으나 각 나라의 도서관에서는 그에 관해 쓰여 진 책을 다 보관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작곡을 하지 않았으나, 모든 작곡가들이 이룬 것 이상으로 주제를 풍부하게 했다. 그가 대학을 설립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학교를 다 합쳐도 그의 앞에서 학생수가 많다고 자랑할 수가 없다. 그는 결코 군대를 규합하지 않았고, 병사를 소집하지도 않았으나, 어느 누구보다 지원병을 많이 가졌고, 그의 명령 하에서는 총을 멘 많은 반역자들이 한 방의 총도 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다. 의술을 배워본 적이 없었으나, 곳곳의 많은 의사들보다 더 많은 상한 심령들을 고쳐 주셨다. 매주일 마다 상거래들이 중지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찬양을 올리기 위해 예배하는 집회에 모인다. 과거에 로마에서 자랑스러운 정치가들의 이름이 많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과학자들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으나, 이 사람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있으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의 십자가 사건과 이 시대 사람들과는 1900년이란 차이가 있지만, 그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헤롯이 그를 꺾을 수 없었고, 무덤도 그를 붙잡아 놓을 수 없었다. 하나님으로 선포되었고, 천사들이 경배하였고, 성도들이 찬양하였고, 마귀가 두려워한 그는 살아계신 인격적 그리스도로서, 우리 주님과 구세주로서 하늘 영광의 최상에 서 계신다.>
로마 황제가 꺾을 수 없었고, 무덤이 붙잡아 놓을 수 없었던 분, 성도들이 찬양하였고, 천사들이 경배하였고, 마귀가 두려워하였고, 하나님으로 선포되었던 분,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인간 언어의 모든 형용사, 모든 감탄사, 모든 수사를 다 동원해도, 그 놀라움과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토록 놀랍고 기쁘고 즐거운 부활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을 보는 것보다 더 명약관화한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의심이 많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뵙고 난 후,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 볼 필요도 없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고백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지 3일 만인 안식 후 첫날 곧 오늘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무덤을 항하며 가면서 여인들은 서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하면서 걱정을 하였습니다. 바위동굴의 무덤 문을 막아 놓은 돌은 심히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이르고 보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러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사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용감한 로마 병사들이 그 정도이니 여자들이야 그 놀라움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 때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무서움과 함께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젊으니까 베드로 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선뜻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구푸려서 세마포가 놓인 것만 보며 머뭇거렸습니다. 뒤 따라 오던 베드로가 곧장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몸을 염했던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잘 개어져 있는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제자들은 성경에 예수께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주일 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하시며 못박히신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이 예수님처럼 자기들을 체포하고 또 십자가에 못 박을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두렵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몰래 숨어서 모이고 방문을 꼭 잠그고 두려워 떨며 있었던 형편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듣는 첫 마디였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는 어디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범죄 한 후에는 마음속에 참된 평화가 사라지고 불안과 공포만이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살았던 인간이, 범죄 한 후에는 부끄러워 무화과로 몸을 가렸고, 두려워서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을 당하였고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인간은 항상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인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고, 인간의 삶에는 전쟁과 불안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영웅인 처칠은 말하기를 “인류역사가 내려오는 동안 단 20년간도 계속하여 평화를 누리며 산적이 없다”고 하면서 그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믿지 못하여 밤에는 항상 권총을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죽이고 자식이 친어머니를 죽이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어디에 평안이 있고 평화가 있겠습니까?
죄인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불안해합니다. 고통, 위험, 질병, 죽음 등에 대해 항상 불안해합니다. 심지어 아무 탈 없이 모든 것들이 잘 되어 가도 불안해합니다. 인간 자체가 불안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 평강을 원하게 됩니다.
그러한 인생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내가 진정한 평강을 너희에게 주겠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땅의 평강이 아니라 하늘의 평강이다. 순간적인 평강이 아니라 영원한 평강이다. 너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과 실직, 질병과 사고, 사업의 실패, 사랑의 상실, 죽음 등으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평강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입니다. 인간은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주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첫 머리에서 항상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사람에게는 평강과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평강이 사랑하는 성도들 심령과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았고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그 주님은 이제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평강이라는 축복이 주어지고 그 뒤에 따르는 것이 파송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곧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곧 의식주를 해결하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하나님의 일에 헌금하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보면 대체로 악한 사람들이 건강한 것 같습니다. 나쁜 짓을 하라고 건강을 주신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돈, 명예, 지위, 권력 등을 주신 이유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 영광은 하나님의 대사로 파송 받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활신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만난 예수, 나를 변화시킨 예수, 내 삶을 바꿔준 예수, 인생을 바꿔준 예수,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진실로 부활신앙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 뭡니까? 그것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천사들 역시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빨리 가서 아직도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가족들에게, 친척들에게, 친구들에게, 이웃들에게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내가 은혜 받았다고, ‘나만 좋다’ ‘우리만 좋다’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 최고의 가장 큰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죄와 죽음, 가난과 저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 하는 인생들에게 부활의 소식보다 더 좋은 희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총동원 전도 주일을 앞두고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으며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고 이웃에게 힘써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단순히 ‘중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는 세상에 파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효과적으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과 능력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세상에 나가 담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본 제자들은 모두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하니까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도마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믿음 없는 인간적인 완고함과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증거를 요구하는 의심 많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진정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도마는 동료 제자들이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았다고 하니까 한술 더 떠서 눈으로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아야 하겠노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서 그 후 8일 만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도마의 회의적인 반응에 동료 제자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비난했을지도 모르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돕고자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약한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함으로 전전긍긍할 때에도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신을 갖도록 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찾아오신 주님은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신의 손으로 만져 보아야만 믿겠다고 하였는데, 주님께서는 나타나시자마자 그의 의심을 해소시키는 일을 가장 먼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는 즉시 고백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 볼 필요도 없이 그의 모든 의심들이 눈 녹듯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기보다는 너무도 경이롭고 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에게 있어서 한낱 랍비 곧 선생님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도마의 주시며 도마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2006년 부활절 아침을 당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마음과 입에서도 진심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도마의 신앙고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도마의 고백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의 인생에서 예수님이 어떤 위치에 계시는지를 잘 알게 합니다. 도마는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께 굴복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곧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인생을 임의로 주장하시도록 위임한다는 뜻입니다. 도마는 지금 예수님께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오니 원하는 대로 사용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이제 무엇이든지 주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그것을 온전히 따르고자 결심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하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 도마는, 전설에 의하면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 때 도마는 의심 많은 자로서 제자의 반열에 끼기에도 부끄러운 사람이었으나, 변화된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충성되이 살다간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이 바로 오늘 신실한 성도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또한 도마가 주님께 고백한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은, 세례 요한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이나,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한 고백과 함께,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도마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된 문맥에서 고백된 내용이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첫 시작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도마의 고백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강조점을 잘 드러내 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에릭 사우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도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면 먼저 떠난 부모님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내 아내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을 찢어 놓고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불구의 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부활 생명을 다 얻게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부활의 승리
요 20:19-31 / 엄기호 목사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불안과 공포가 닥쳐옵니다. 생명의 위기의식과 죽음의 절박감에서 불안과 공포가 찾아오고, 다음은 현재 생활의 외로움과 고독한 감정에서 엄습하는 불안이요, 나아가서는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운명적 어떤 불행을 예감하며 불신과 회의 속에서 불안해하는 시험이 엄습하게 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이 불안 속에 사무친 제자들에게 각각 다른 장면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 보이심으로 생명의 평강을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구원과 평강을 주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그 날부터 십자가의 생활을 시작하사, 오직 가난한 자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상한 자에게 치료를, 심령이 죄에 매인 자에게는 해결과 자유를, 마귀에 얽매인 자에게는 해방을 해주시고 천국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주님은 만민의 죄를 대속하시사, 시기와 오만에 찬 유대인 지도자들과 종교가들로 인하여 고난 받으시고, 욕심과 변심으로 배반한 제자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우고, 인기주의 재판장 빌라도의 불법적 언도를 받으시고 무자비하고 무심한 로마 병정의 손에 잡히셨고, 시대의 풍조만 따르는 무모한 군중들의 조롱 속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금요일 오전 9시에 못박하신 예수님은 오후 3시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일 새벽,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무섭고 두렵던지 낙심천만하여 혹은 도망, 혹은 멀리서 수난의 주님을 바라다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옥에도 갇히고 죽음도 사양치 않겠다며 그토록 장담하던 베드로마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심령에는 생명의 어두움이 깃들었고 저녁때의 불안 공포가 엄습해왔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 사람들이 무섭고 세상의 두려움과 마귀의 역사가 겁이나 모인 곳에 문을 굳게 닫고 떨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슬픔과 실망으로 가득했고 세상으로 인한 두려움이 넘쳤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평강을 말씀하시며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위기에 떠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평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할 때 연약하고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자는 구원의 감격과 평강을 얻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두려움, 공포, 불안은 사라지고 평강이 가득찼습니다.
오늘날까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인생들, 생명의 죽음을 위협받아오는 공포와 영벌의 지옥을 생각하여 떨던 인생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어두운 세상 두려운 세대에 마음에 문을 닫고 있는 영혼들에게 하늘의 기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근심과 초조, 생명의 위기에 쓰러져가는 영혼에게 구원의 평강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과 평강이 여러분의 생애를 지배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신앙의 능력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자는 물질의 힘을 이길 수 있습니다(막 16:3). 예수님은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돌문을 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부활신앙을 믿는 자들은 돌문을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의 돌문을 옮기고, 과학의 돌문을 옮기고, 사업의 돌문 옮기고, 질병의 돌문도 옮겨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자는 어떤 문제의 돌문이라도 옮길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자는 세상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마 27:66). 이 돌문은 가시아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印)으로 봉했습니다. 당시의 로마 가이사 황제는 천하의 권세를 자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가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기만 하면, 모든 권세, 명예, 지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자는 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파수꾼들이 주님의 무덤을 4명씩 4조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즉 다수의 힘이 소수의 진리를 이길 수 없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부활 신앙은 무조건 다수를 따르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세상이 다 바알을 섬겨도 오직 홀로 섰던 엘리야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힘껏 싸울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따를 때 여러분 개인, 가정의 모든 돌문이 옮겨질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신앙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을 체험하시고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이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수학적이 과학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부활은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패배자는 승리자로, 불가능이 가능한 역사가 임하게 합니다.
부활의 승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죽으셨지만 원수 마귀를 짓밟고 죽음에서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인류의 영원한 원수인 사망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되셨습니다. 죽음이란 인생 최대의 원수이며 일찍부터 인생들은 이 죽음을 피하여 보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욥은 욥기 14장 14절에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겠느냐”라고 탄식했고, 동양의 위인 한무제는 장생불사를 바라고 소반에 찬이슬을 받아먹었으며,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려고 동남동녀 5백인을 삼신산(三神山)에 보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인생의 죽음의 해답은 찾을 길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증거가 되셨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에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나가노 목사는 교회를 개척할 장소를 위해, 일본지도를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동서남북 100km이내에 단 1명의 교인도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마음먹은 다음, 기도를 하면서 찾았는데 바로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젊은 목사는 곧 그 지역으로 가서 텐트를 치고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교인이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1년이 가고, 5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주신 것을 믿기에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 그 교회에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감격했습니다. 5년 동안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욱’ 하더니 식탁에 피를 쏟았습니다. 그 청년은 폐병환자였던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을 지금 당장 쫓아 버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씻어내고 계속 밥을 함께 먹어야 하나?” 그런데 이때 “주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첫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피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한 정치인의 사생아였는데 자신의 출신 때문에 어려서부터 고민과 괴로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신학하는 도중에 그만 폐병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정학을 당했고 다니던 교회에서는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도 거짓말이고, 예수도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치료비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내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싫어한다. 아,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한 사람도 그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청년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또 우연히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고 하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 번 찾아가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왔고 그날 저녁 밥을 먹다가 피를 쏟은 것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닦아내고 다시 밥을 차려왔습니다. 그 순간 이 청년이 다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폐병도 낫게 하셨습니다. 이튿날 새벽, 청년은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입니다. 도요히코 목사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자기는 죽고 사선(死線)에서 재출발하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그 후의 생명은 덤으로 사는 것이니 아까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구원과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호멧도, 부처도, 공자도 모두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예수님만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승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산 자로서 승리생활의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성도가 됩시다
최창훈 목사
여러분,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부활의 주님은 현실적인 사건이며 실존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 박히신 그 손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영의 손으로 만져야 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사실을 확인해 보면서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고 교제하면서 사는 증거가 있는가?"를 조명하여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집니다.
눅23: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무리들 가운데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섞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는 여자들의 무리 속에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도 슬픔을 가누지 못한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흘 전에 예수님을 장례하는 그 자리에서 마리아의 마음은 무척이나 상처를 입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해가 기울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밖에 안 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또 몇몇 여인네들이 서로 손을 모아 죽은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료를 그 몸에 덮고, 베옷을 감고 하는 이런 절차를 다 끝내는 데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얼마나 서둘렀겠습니까?
제대로 하는 장례 절차라면 이틀이나 사흘 걸리는 예식을 한두 시간 안에 대충 끝내고 무덤 안에 안치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마리아로서는 그 일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간 마리아는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향유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장사 지낼 때 좀 미비했다 싶은 부분을 자기 혼자라도 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앞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마리아는 간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슬픔을 눈물로 씻어 내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슬픔의 여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리아가 "당신이 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으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다시 가지고 오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주 듣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리아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리아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리고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을까요?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강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하던 마리아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61:3절의 말씀대로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는 축복과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하는 큰 은혜를 그가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슬픔을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 그 자체가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가슴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뒤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표현했듯이 낮에도 슬픔과 걱정에 싸인 채 살아야 하고, 밤에조차 쉬지 못하고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리아처럼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나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경쟁 대열에서 밀려나 이제는 정말 고개 숙인 아버지로, 고개 숙인 남편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고,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그렇게 밝고 자신만만하던 아버지가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말못할 비탄에 젖게 되어 온 가족이 깊은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면 이 세상에서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를 가지고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얼마만큼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 인생이 어떤 면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었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 살아 계신 주님을 매일 만나면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집니다.
다음으로 살펴 볼 것은 열 명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참 인기를 얻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때는 제자들도 우쭐거렸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때는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은 간사합니다.
한때는 그렇게 "호산나"하고 열광했었지만 예수님이 맥없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모습을 보자 군중들은 한순간에 돌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공포 분위기가 제자들의 주변을 점점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를 가만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말 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 불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와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주님이 눈앞에 서 계시고, 그분이 "샬롬"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공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은 "샬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보라"하시며 자기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지만 제자들이 그래도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너희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잡수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신 몸인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21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들을 영적으로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22-23절을 보면 "성령을 받으라. 너희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외치면 그 용서를 받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받지 아니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고문하던 공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졌습니다. 평안 이 찾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세상은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에 은근한 공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본능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포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욥3:25절을 보면 욥같은 위대한 사람도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에 욥은 십 남매를 거느리고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양의 최대 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으며 성공자였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그것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 주일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 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만나면 그 모든 공포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11:25절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질병의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어떻게 살까, 앞날이 어떻게 될까"하는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16:33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삶을 인정하시며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도 당할 수 있고, 실패 할 수 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모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좌절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샬롬. 평안이 있을 지어다"하시는 주의 음성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날마다 듣는다면,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사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도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무슨 일로 나갔는지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볼 때 도마가 "왜 예수님은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오셨지?"하는 섭섭한 생각에 기분이 좀 상해서 그것 때문에 약간의 거부 반응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기가 만든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이 잣대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자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잣대가 무엇입니까?
25절을 보면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의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서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600여명의 사람들에게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일일이 개인마다 찾아다니며, 보여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잣대를 고집하며,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도마는 28절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27절에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 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나지 못하여 날마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용기가 생기고,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요 20:19-31 / 김태환 목사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458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1절 가사에 보면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3절 가사에 보면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 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겁과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찬송가 가사에 보면 “What have I to dread, what have I to fear, Leaning on the everlasting arms I have blessed peace with my Lord so near, Leaning on the everlasting arms.”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두려움과 공포가 있어도 영원하신 팔에 안기면 우리 주님과 함께 복된 평화를 얻네. 주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사흘 째 되는 날……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도 지나가고, 사흘 째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그 동안 첫 날 밤, 그리고 둘째 날을 지나 오면서, 겁과 두려움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을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다행히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있을 사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제자들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겁과 두려움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이 찬송 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팔을 어떻게 하시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찬송가 458장 가사를 쓴 E. A. Hofman(1839-1929)은 주님께서 팔을 벌리셨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겁과 두려움은 인간 실존(實存)의 문제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겁과 두려움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두려운 것입니다. 골리앗처럼 등치가 크고 우람한 사람에게도 겁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시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이 시작될 것 같더니만, 다시 3일 간 휴전한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라크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 것 같습니까? 자살 특공대들에게는 두려움이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히 전쟁은 인간을 겁과 두려움으로 몰아 넣습니다. 이 겁과 두려움의 실존에서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대안(代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자기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기뻐했다는 것은 제자들이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3일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이 걸어 잠근 문을 어떻게 들어오셨는지 자기들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놀라 간이 떨어질 것 같았겠지요?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기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내 손을 보아라. 여기 못을 박았던 자국이 있지 않느냐? 내 옆구리도 보아라. 창으로 찌를 자국이 있지 않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겁과 두려움으로 떨던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證人)들로 삼으셨습니다.
제자 요한도 이 일로 인해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쓴 요한일서 1:1-2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은 주님을 만져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요한도 그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손을 만져 보고 옆구리를 만져 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나가서 최초로 설교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사도행전 2:22-24, 34).” 이미 베드로는 겁과 두려움에 문을 잠그고 있던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자기 동족들 앞에 서서 증거했을 때,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담대했겠습니까? 얼마나 확신에 차 있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겁쟁이 제자들을 겁 없는 부활의 증인들로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첫 번 부활의 증인들의 고백 위에 세워진 증인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증인 공동체의 한 지체(肢體)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派送)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좀 찬찬히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As the Father has sent me)”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3:21-22에 그 이유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差別)이 없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새로운 길(the new way to salvation, 히브리서 10:20)”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구원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구원의 새 길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I am sending you).”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구원의 새 길”을 선포할 사명자들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선언(宣言)입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일개 어부들을 불러서 자기 제자로 삼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 주님은 이제 자신의 엄청난 사명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위임(委任)해 주십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뭘 믿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사명을 위임해 주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 제자들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들을 말할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구원의 새 길”을 선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그럴만한 능력과 자질(資質)이 있단 말입니까?
「파송(派送)의 노래」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단기 선교사를 파송할 때 한 두 번 불렀던 노래입니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라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 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 손 널 이끄시리
너의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 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칠은 광야 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 안에서 주님의 영광 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 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 힘 늘 주시리
이 노래는 고형원 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인데, 다 좋은데 전체적으로 곡조가 슬퍼요. 곡조가 슬퍼서 부르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립니다. 부르는 사람들은 이제 가면 못 돌아 올 길을 가는 것만 같고, 듣는 사람들은 이제 지금 저 사람들을 보면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아 눈물이 납니다. 사람들은 눈물만 나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구원의 새 길을 선포할 사명자로 이 세상에 파송될 때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러 가는 것입니다.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주려고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파송의 노래는 승리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말씀은 죄를 사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새롭게 나온 말씀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6:7에 보면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만일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돕는 분)께서 오실 수 없다. 내가 가야 그 분이 오신다. 내가 가서 그분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오시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성령과 동의어(同義語)로 “돕기 위해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위임해 주시고, 우리를 파송하실 때 그냥 우리를 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함께 우리를 보내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이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지시에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고 약속하신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즉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새 길”을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닙니다. 죽을 일도 아닙니다. 이 일은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파송(派送)의 노래」는 구성진 단조(短調, minor)의 노래가 아니라 밝고 힘찬 장조(長調, major)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이 한 사람에게 주목하셨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고 말하는 도마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각별한 애정(愛情)을 보이셨습니다. 믿지 못하겠다고 우기는 도마에게서 주님은 무슨 작은 가능성이라도 보신 것일까요? 주님은 도마에게 개인적으로(personally) 손의 못자국을 보여 주시고,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Stop doubting and believe.)!”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뒤에 나오는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복되도다”라고 하신 말씀과 대조(對照)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눈으로 보고, 만져 보고, 들어봐서 믿는 믿음은 초보적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자기 눈으로 보았고, 만져 보았고, 들어 보았고, 확인하고 나서 이제는 믿겠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을 대단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까?
정말 위대한 믿음은 그렇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만져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 과정을 보면 꼭 초보적인 단계를 거치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위대한 두 교부(敎父, church fathers)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안셀름(Anselm, 1033-1109)이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어거스틴(Augustine, 354-439)입니다. 안셀름은 신학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하니까 신학이 존재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믿음으로써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정의가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先進)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써(by faith) 알 수 있습니다.
도마는 매우 lucky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지만, 다행하게도 주님께서 손의 못자국을 보여 주시고, 옆구리를 보여 주시는 바람에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손의 못자국도 볼 수 없고, 주님의 옆구리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보지 않고 믿는 큰 믿음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다행하게도 오늘 우리에게는 두가지 부활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根據)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 2,000년의 교회 역사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처음부터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증인들의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증언을 이어온 역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처음 만난 여자들의 입에서, 부활의 주님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또 고린도전서 15:6에 보면 “500명이 넘는 형제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사도 바울이 또 주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8)” 라고, 자신의 이름이 증인들 리스트에 오른 하나님의 은혜를 그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증인들의 고백의 전통 속에서 다음 세대에게 이 고백을 전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참 믿음은 어떤 것인지를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참 믿음은 눈으로 보고, 확인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린도전서 15:3-4)”는 말씀을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 들이십시오. 그러면 이해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알 수 있고, 이해하게 됩니다.
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주님께 대한 고백은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고백은 여러분과 저의 입에서 나와야 할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 많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기에, 그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에, 당신은 나를 구원하셨기에, 당신은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기에, 당신은 인류의 희망이시기에, 나의 인생의 주인(the Lord)이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십니다.” 이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부활하신 몸에 남은 고난의 흔적
요 20:20 / 김남준 목사
오늘 이 장면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두 번째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처음 본 사람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두 여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때는 안식 후 첫날이었으니 지금 우리의 주력으로 말하면 주일날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발견한 것이 환하게 밝아오는 새벽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이 장면은 저녁때입니다.
앞절에서 제자들이 모여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평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시체가 그 무덤에서 사라진 것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가르침을 합리화하려는 제자들의 소행이라고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일차적으로 수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시체를 본 적도 없는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감추고 허망한 풍설을 세상에 퍼트리는 종교적인 이단자들로 낙인이 찍힐 판이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사실을 제자들 자신도 반신반의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문을 굳게 잠그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포와 침묵만 가득한 그곳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많은 제자들은 이것이 상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은 굳게 닫혔고, 어디로도 들어올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자기들 한가운데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부활체의 신비입니다. 부활이 때는 단순히 영혼의 부활만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육체가 지금 우리들이 숨쉬고 먹고 마시는 이 육체와 다릅니다. 지금의 이 육체 안에 있는 동안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가 없지만 부활체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있고 벽을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이런 부활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낙원에서, 불신자들은 음부에서 모두 나와 부활한 몸을 입고 그 부활한 몸으로 불신자들은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고, 신자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후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과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비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못 박힌 속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마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영광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시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되었을 것이고 어떤 바하된 모습도 읽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찬란한 영광 가운데 계신 분이 옆구리를 열어 창에 찔린 자국울 보이시고 손을 내밀어 못 박힌 자국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찬란하게 눈부신 영광의 광채에 제자들이 압도당하고 있을 때에 인간에게 찔린 부끄러운 그 창 자국과 그 못 자국을 보여주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고난 후의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은 찬란한 하늘의 영광으로 변화되시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차마 마주 대할 수 없는 지존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그 화려하고 영광스런 부활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가지 사명을 지향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용서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사명,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자기를 제물로 바침으로 화목의 길을 여시는 이 사명을 감당해나가시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께서는 부활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며 부활하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많고 자랑할 것도 많고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반드시 다시 살아나서 우리 주님과 같은 찬란한 형상을 입고 그분 앞에 설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는 벌의 심판은 없을지 모르나 성경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을 위해 어떻게 인생을 사용하였는지를 검사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행했던지 선악간에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서 사는 날들을 두 손에 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회계하시는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자랑이 무엇일까요? 찬란한 영광 가운데 부활하신 그 주님이 우리들에게 그 찔리신 옆구리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못 박히신 손을 보여주실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릴 수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그 은혜의 감격을 유지하면서 일평생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보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얻고 쓸모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고귀하신 몸으로 자기를 제물 삼아 이루신 그 구원을 우리의 영광을 취하는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몰랐을 때에는 몰랐으니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게끔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의 옆구리에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심으로 자신이 환상이 아니라 정말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 찬란한 부활은 바로 육체의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육체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찬란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참고 기다리며 감당해나가야 할 우리 나름대로의 고유한 사명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위해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 때에 부활의 찬란한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고 절규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나타날 부활의 영광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고난과 핍박을 통해 간직하게 된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찬란한 부활의 날에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 못 자국과 창 자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흔적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드린 고난의 흔적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처럼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 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도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 날에 우리의 자랑거리는 주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사용해서 일생동안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나에게 주신 독특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며 시련의 파도를 헤치고 살아온 흔적, 그리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오는 가운데 난 수많은 상처 자국,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박해 받고 고난 당한 그 흔적들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현장,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영광 가운데 옷섶을 열어서 뚫어진 창 자국을 보여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현장을 대하며 우리는 내 몸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정말 부인할 수 없는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니고 있는가, 이렇게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많은 날들을 주님의 일과 사역을 빙자해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며 안일하게 살아온 날들을 모두 제하고 나면 정말 순수한 가슴, 타는 듯한 열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만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 하나에 인생의 가치를 걸면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영광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그 고난도 나의 고난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인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치,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받는 능욕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크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으며 산 사람들은 그 부활의 날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유일한 목표이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볼 것이며 복음과 함께 살아온 날들 동안에 받은 수많은 상처와 못 자국을 주님께 보여드리며 제자로서 충성스럽게 살았던 지난날들에 대해서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베푸셨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한번만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도 뉘우치고 참회하는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구원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자기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쓸모 없는 인생들을 위해 아버지가 되시고 싶어 하셨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많은 날들은 오히료 두 마음을 품은 날들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서도 주님만을 위해서 살수는 없었던 많은 날들이 오늘 우리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부끄러움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을 때에 오직 한마음을 품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드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 영광스러운 부활을 사모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감화를 입은 주님의 자녀들로 살아서 인생에 어느 땐가 한번쯤은 그렇게 우리의 온 마음과 생각 속에 예수밖에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날들을 주님께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주께서 구속의 은혜로 주신 보석과 같이 소중한 날들을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사람은 주께서 주신 날 동안에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이 오로지 인생 전체를 드려서 주님을 위해서 능욕을 받으며 영문 밖에까지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거룩한 은혜에 넘치는 교회 생활을 가슴에 간직하고 영문 밖에 있는 이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그 사람들, 그래서 살아온 인생의 모든 날들이 눈물과 피로 얼룩진 날들이었지만 그 모든 날들을 통해 사명을 감당하고 마지막에는 주와 함께 그 사랑이신 주님 때문에 죽는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렇게 자기의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살아나신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이 저의 설교를 통해 듣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체에 새겨진 그 창 자국과 못 자국의 신비한 비밀들에 대해서 이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기뻐할 수 있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찬란한 그 부활에 몸에 어찌하여 부끄러운 고난의 흔적을 간직하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는지를 알게 된 우리들은 이 제자들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부활의 놀라운 영광에 참예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수치의 날들이 영광으로 변했으니 오늘 우리들도 주의 사랑을 간직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사는 날 동안 받는 모든 능력과 부끄러움이 언젠가는 그 찬란한 영광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면서 단지 우리들이 부활할 것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를 위해서 고통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흘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물이 언젠가는 알알이 보석이 되고 주를 위해서 당하는 이 고난이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상처가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이렇게 사명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서 우리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시련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고 심지어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으며 사는 날들도 많지만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에는 우리 모두 일생동안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피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살았기에 그분 앞에서 영광의 상급을 받고 주와 함께 섬기며 사는 날들을 기쁘게 회상하는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
요 20:21 / 정근두 목사
변함없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복된 자리에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우리 울산교회의 올해 주제는 “직분을 새롭게, 교회를 건강하게”입니다. 1월 첫 주에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강론한 셈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를 살피려고 합니다.
지난달에 살핀 대로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본질로 사도신경은 고백합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교회론은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특권만을 강조하는데 치우쳐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가 세상을 향한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평신도가 교회 안과 밖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평신도를 소명 받은 자로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훈련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의 제목을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라고 잡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회복하기 위해, 달리 말해 “교회를 건강하게”하기 위해서 교회의 사도성을 잘 살펴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 전통적인 교회 정의에는 교회의 소명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교회론은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특권만을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교회의 명확한 본질과 소명을 흐리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역사적인 배경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주관심사가 오늘 우리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사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차별성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씀의 선포, 성례전과 권징의 실시라는 외적인 표지에만 관심을 가졌지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독특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자기들의 몫을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관심사가 오늘 우리와 달랐기 때문뿐 아니라 그들이 살던 세상이 달랐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교회론은 중세기의 옷을 입고 중세적인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천하가 기독교문화로 채색되어 있던 신성 로마 제국시대에서 교회를 바라보던 시각을 오늘 우리 시대가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동의할 것입니다.
알다시피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아들입니다. 주후 395년을 기점으로 그들이 살던 시대까지 누구든지 교회를 이탈하면 체형을 가해도 될 만큼 교회는 국가와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온 천하가 기독교로 채색되어 있어서 선교라는 것은 절박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은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는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이 만든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초대교회는 전투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교적인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기에 생사를 건 투쟁만이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마치 정글 속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공인으로 교회는 화해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5세기 이후 점점 교회는 세상과 동화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목회자의 이미지는 예수님 시대의 회당장처럼 그 동네 동장 역할과 그 지역 목사의 일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교회가 점점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남아공에서의 경험>
그렇게 천년을 지내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서 세속적인 교회에서 순수한 교회로 지향하는 분리적인 이미지를 비로소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는 어떤 자기 이미지를 떠올릴까요?
오늘 대한민국 성도들은 그 어떤 때보다 적대적인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기독교 인구는 엄청나지만 문화, 사상적으로 보면 중세보다는 초대교회와 오히려 비슷합니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수는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터넷의 악플과 반기독교적 성격이 점점 짙어가는 이방문화에 포위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다시 한 번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시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성도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사랑의 봉사자로, 무장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깨워서 일선에 세우기 위해 교회의 사도성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를 살피려고 합니다.
2. 전통적인 교회론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국의 신학자인 Stephen Neil은 정적 개념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낙후된 교회론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공화국의 Harry Boer 교수는 자기 책 [오순절과 선교]에서 전통적인 교회론은 주님이 주신 대사명을 계승하지 못한 교회론이라고 비판합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들과 다수의 17세기 신학자들은 대위임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자연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명의 명령도 함께 죽어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미국의 John Piet교수는 전통적 교회론을 선교적인 Context에서 나오지 아니한 교회론이라고 비판합니다. 종교 개혁 당시와 지금의 세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종교 개혁 당시에는 사회구조가 대부분 정적이고 교착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그 구조가 유동적이며 동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전 시대의 산물인 전통적 교회론은 우리가 사는 현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경적인 교회론은 선교를 전제로 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로는 중세 사회를 전제한 교회론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상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고취시키는 데는 심각한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취약한 교회론으로는 현대사회를 책임지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놀랍게도 이런 교회론이 지배하는 개혁교회는 자라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더 나아가 당시 종교개혁의 대표주자인 루터와 칼빈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루터/“사도들은 낯선 집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목적을 위해 지명을 받아 부름을 입었으며 또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그대로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전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아무도 다시 그와 같은 사도적인 명령을 받은 일이 없다. 감독이나 목사는 다 자신이 맡은 특정 교구를 가지고 있다”
● 칼빈/“주님께서 사도직을 제정하셨다. 그것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모든 족속과 방언 가운데서 대사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당시의) 사도와 (오늘날) 목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목사는 어느 한 지역 교회에 매여 있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목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지 않고 그가 맡은 교회를 목양하게 하셨다.” 이런 설명은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정답이었습니다! 유아세례, 결혼주례, 장례집전을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위대한 두 종교개혁자가 사도직과 목사직이 어떻게 다른지를 바로 설명하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대위임명령을 당대의 사도들에게만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 평신도를 사명자로 구비시키는 일을 소극적으로 하게 만든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목사도 자기가 맡은 교구만 잘 목양하면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도록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한국 교회의 일반적 모습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교회 정의에는 교회의 소명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바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기본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고전 1:1~2, 엡 2:19)이라는 것입니다.
백가지가 넘는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와 비유와 상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에클레시아(eklesia) 즉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교회를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개혁자들의 귀한 유산이지만 완전한 정의라곤 할 수가 없습니다. 평신도를 깨우기 위해서는 교회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구별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유대인의 회당과도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살전 1:1). 지금의 교회는 종말을 알리는 방향표시판이며 앞으로 무엇이 도래할 것인가를 알리는 전광판과 같습니다. 왕이 다시 오실 때는 교회는 왕국을 물려받을 것이고 그 왕국은 온 우주에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그 크기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될 때 어떤 후유증이 나타날까요?
첫째로는 내향적 성격을 띠고, 성도는 주요관심이 자기 경건에 있고 교회는 내부 싸움에 치중하게 됩니다.
둘째로는 평신도의 무력화를 초래합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대다수의 성도들이 다만 교역자에게 의존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고 동시에 교역자의 권위주의가 득세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시대적응을 제대로 못하여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우리는 2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를 이제 본격적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2.1 교회의 네 가지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네 가지 고유한 속성을 가르칩니다.
1) 거룩성 (Holiness)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2) 통일성 (Unity)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점에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보편성 (Catholicity)
시대와 족속과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닙니다.
4) 사도성 (Apostolicity)
동시에 이 교회가 사도들이 증거한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2.2 사도성이란 무엇인가?라고 다시금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지상의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사도성은 예수님께서 그의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의 터 위에 그의 몸된 교회를 세우셨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성경은 지상의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던 증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이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교회의 시작이며 영구한 기초석입니다.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성은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보다 사도적일 때는 그 교회는 정말 하나되고 거룩하며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라는 점에서 거룩합니다. 시대와 족속과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점에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교회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도 자기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지만 기초가 다릅니다. 신약성경 대신 원리강론을 그들은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성은 다른 본질에 비해 기본적인 것이요 다른 본질을 평가할 수 있는 표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한스 큉이 사도성을 단순히 교회의 본질의 하나로 보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속성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라고 본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교회가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있어야 그 교회는 사도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 2.3 어떻게 사도성은 계승됩니까?
1)참된 계승자는 전(全) 교회입니다. 사도직은 독특한 것이어서 반복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임명을 받았다는 특권 때문에 예수님이 승천하자마다 바울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열두 사도들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그러므로 이제는 사도직을 어느 개인이 대신하거나 대표할 없습니다. 교황이나 특정 교회가 계승한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사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지금은 사도의 교훈과 사역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누가 사도들의 계승자가 될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의 기본적인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소수의 개인이 아닌 전 교회가 그 계승자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도적 교회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전 교회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 세상으로부터 불러 모은 하나님의 새 백성입니다. 전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성령의 전입니다. 전 교회는 사도의 사역에 의해 하나를 이룬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 . 이 계승은 단지 역사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속에는 참된 내적 연속성이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연속성은 교회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들과 그들의 사도적 증거를 충만하게 하셨고 지금도 사도들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교회를 감동하시고 격려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구별 없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백성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도의 계승자가 되기 위해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특정 그룹이 나설 수 없습니다. 성직자나 평신도를 가릴 것 없이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가 그 계승자로서 자격을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전 교회가 유일한 계승자라는 말은 옳습니다.
2)무엇을 근거해서 사도적 계승은 되는가?라는 그 답은 성령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계승이 된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교황처럼 베드로로부터 이어오는 계보를 가지고 그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다면 몰라도 교회는 사도의 몇 대손이라는 식의 족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것을 중시하지도 않습니다. 믿는 자는 다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성의 계승을 유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사도들을 감동시키고 증인되게 하신 성령께서 지금은 교회 안에서 성도로 하여금 사도가 전해 준 복음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은 내면적인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성령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면 계승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계승에서 제외될 평신도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8:9)
2.4 사도적 교회는 사도의 교훈을 계승합니다. 첫째는 사도들의 교훈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을 통해 전수된 사도들의 증거를 그대로 받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사도들의 신앙과 고백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되고 일꾼된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을 그대로 계승하는 사도적 본질 때문입니다(엡 4:13, 눅 1:2). 교회는 예수님의 감동적인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단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들을 뿐입니다.
한스 큉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사도 자신들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주님께서 친히 교회 가운데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 . . 그러므로 사도적 계승이라는 것은 교회와 거기에 속한 신자들이 사도적 증거와 함께 갖게 되는 살아있고 계속적인 만남의 문제이다. 사도적 계승은 이 사도들의 증거를 듣고 존경하며 믿고 고백하며 따를 때 성취되는 것이다.”
2.5 사도적 교회는 사도의 사역을 계승합니다. 사도적 사역은 단순한 전도 행위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이 순종하던 형태의 모든 봉사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세상을 향한 사도적 사명을 완성하는데 집중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한국교회는 말씀에 대한 사도적 계승은 강조했으나 사역에 대한 사도적 계승은 강조하지 않았고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장점이자 천주교의 약점! 그러나 치명적 약점은 사역계승 실패!!
2.6 성도는 보냄 받은 소명자입니다. 소명을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로 여기지 말고 평신도가 대위임사명을 받은 것을 바로 인식해야 교회는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성직자가 평신도와 다른 특별한 사명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성도들은 모두 본질상 사도적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고 있다는 소명의식을 일깨워주지 않고 헌신을 강요하는 것은 마치 길가는 젊은이를 붙잡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가르쳐주지 않고 국방의 의무를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불완전한 교회론은 세상을 향한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안과 밖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 결과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성도들을 소명 받은 자로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훈련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새롭게, 교회를 건강하게”를 지향하는 울산교회는 성도들을 훈련 공동체입니다. 올해도 성경대학을 통해서, 제자훈련을 통해서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도록 훈련을 시키려고 합니다. 먼저는 성경대학의 과정을 하나 이상 수료하고 이어서 제자초급, 사역훈련 과정을 각각 이수토록 합니다.
사도적 교회의 일원이 되길 원하면 매일성경이란 말씀묵상을 통해서 사도들의 교훈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을 통해 전수된 사도들의 증거를 그대로 받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사도들의 신앙과 고백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적 계승이라는 것은 교회와 거기에 속한 신자들이 사도적 증거와 함께 갖게 되는 살아있고 계속적인 만남의 문제입니다. 사도적 계승은 이 사도들의 증거를 듣고 존경하며 믿고 고백하며 따를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적 교회의 일원이 되길 원하면 사도들의 사역에 동참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사도적 사역이란 단순한 전도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순종하던 형태의 모든 봉사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성도들은 사도적 사역에 참여함으로 사도성은 계승됩니다. 그러므로 사도적 교회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복음을 나누며 봉사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올해는 자신을 먼저 훈련에 드리는 모든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먼저는 훈련을 받고 다음은 사역에 동참하는 건강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사역을 하든지 훈련을 받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직분을 새롭게, 교회를 건강하게”하는 일에 동참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