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무악산, 무악 산
김 난 석
동지도 지났으니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이 해도 다 가게 된다.
왠지 쓸쓸하고 허전하게만 느껴져 사방을 둘러보게 된다.
이런 땐 누굴 불러내어 밥이라도 함께 먹고 싶지만
이물 없는 이웃이 그리 많지 않기도 하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나들이나 해봐야겠다.
날이 추워지더라도 열차와 승용차를 이용하면
심한 추위는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제의 모악산에 가보고 싶다.
거기 가면 백제 법왕 때 창건되었다는 금산사가 있고
그 안엔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이 있다.
미륵불은 지금 도솔천에 상주하지만
인간세계가 정토화 되면 부처님으로 오신다니
언제쯤이나 오시려는지 살짝 엿보고 와야겠다.
모악산엔 김일성의 조상 묘도 있다 한다.
터가 어떻게 생겼기에 그 후손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김제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가 있다.
제천의 의림지와 어떻게 다른지도 보고 싶다.
’김제, 광양, 수안, 옹진, 운산, 성천, 대유동‘
이건 내가 초등학교 때 배운 사금(砂金) 생산지이다.
오랜 이름을 내가 어떻게 지금도 외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배금(拜金) 사상에 젖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그곳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김제엔 글벗 무악 산 님이 머물고 있다.
이민생활 말년에 노모를 모시겠다고 홀로 귀국했다는데
인연이 되면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 전엔 한양에서 글벗들 모임이 있다기로
그게 무어라고 모악산에서 올라와 두 시간 남짓 머물다 갔는데
이런 게 바로 가는 정 오는 정이리라.(2021. 12. 21.)
전라북도 김제와 전주, 완주를 아우르는 곳에 무악산이 있다.
해발 7백여 미터로, 서쪽으론 광활한 김제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은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 영주시 풍기읍 금계동과 더불어
대표적인 명당이라 하여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각종 무속신앙의 집단지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사회적, 사상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동학혁명이 일어나 후천개벽을 외쳐댔지만 실패로 끝나자
정읍 출신의 강일순이 무악산 기슭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天地公事를 외쳐대며 사람의 노력에 의해
자연, 문화, 사회가 재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른 살 때까지 전국 팔도를 돌며 수행하다가
무악산 동편 대원사에 들려 道를 이룬 뒤에
무악산 서편 금산사에 이르러 미륵불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포교활동을 했다.
39세에 생을 마쳤지만 조선 후기에 동학사상과 함께
종교를 넘어 근세사회 한 지류의 사상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뒤에 그 후계자들에 의해 여러 계파의
종교집단(증산교, 대순진리회 등)으로 형성해나갔지만
나는 시대적 사회적 혼란기에 종교의 형식을 빌어 사회운동을 해나간
그의 흔적을 단편이나마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무악산 인근엔 나의 문우인 무악 산 님이 머물고 있다.
논과 밭, 그리고 멀리 떨어진 무악산 밖에 보이는 게 없는
김제 뜰에서 태어나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해
자리 잡은 뒤 가족은 놔두고 귀국해서
노모와 함께 지내고 있다 한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정리도 해볼 겸
무슨 전기를 마련할게라고 집을 잠시 떠나보는 게
오랜 습관이 되어왔는데,
이번엔 무악산과 금산사를 둘러보고 무악 산 님을 만나보고 왔다.
열차를 타고 김제에 내리니 무악 산 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두툼한 동복에 배낭을 메고,
배낭 한 귀퉁이엔 스틱을 꽂아놓은 것을 보면
완전 군장한 탐색조의 초병 같았다.
어디에 떨어뜨려도 금방 작전에 들어갈 수 있는 듯한 모습이,
아마도 저런 모습으로 이민생활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내 아내가 하는 말이
"겨울 들판에 발가벗겨서 어디에 세워 둬도
뿌리를 내릴 분" 이라 했다.
그네의 안내에 따라 일단 무악산 금산사로 갔다.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반기는 것인지 훼방을 놓는 것인지 모르지만
경내로 들어 한 바퀴 돌아본 뒤에
미륵전과 미륵불을 참배하려니 눈구름이 어느새 개이고 있었다.
이어서 김제 벽골제로 가려니
다시 눈발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놀고먹는 農事는 없다고 일깨워주는 것이었으리라.
신축 년 한 해가 혼란스러웠다.
돌아오는 임인년은 어떨지 모르지만
분열된 국론이 하나로 모아지려는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조선 말 서학 동학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일본이냐 청국이냐로 나뉘어 갈등하고,
시아버지냐 며느리냐로 나뉘어 갈등하고
지배자냐 백성이냐로 나뉘어 갈등하던 어지러운 시국에
피맺힌 절규를 하다 스러져간 최제우며 나철이며 전봉준이며
강일순의 얼이 눈보라가 되어 김제 평야에 내리고 있는 모습을,
또 소리를 듣고 왔다.
미국의 시애틀과 김제에 각각 두 살림을 차리고 있는
무 악산 님이 코로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향리의 들판을 헤매고 있는 모습도 보고 왔는데,
부디 나라도 무악산도 무악 산 님도 평안하길 바라노라.
(2021. 12. 31.)
가다 오다 보면 스치는 사람이 있다.
그걸 인연이라 한다지만
이곳에서 다시 무악 산 님을 글로 만났다.
회자정리요 원증회고라 하기도 하나
회자정리 되었다가 원증 없이 다시 만났으니
때론 佛家에서 말하는 苦가 틀릴 때도 있다.
무악 산 님과의 인연뿐 아니라
이곳에서 함께 어울리는 인연들이여!
만났다 헤어지더라도 등에 칼은 꽂지 말자.
2023. 1. 7.
첫댓글 무악산은 말로만 들었지
한번도 안 가 봤네요
언제 한번 가 봐야 겠는데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김제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그게 완공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무악 산 님도 만날 수 있을 테고요..
제 고향에선 모악산이라 부르는데 ....
무악산님을 보고 황급히 눈에 띠었지요
고향 동네 아저씨같은 사투리가 정겨운 분입니다
두분이 그런 인연이 있으시군요
그러게요 . 노모 때문에 씨애틀에 갈수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난석 선배님
귀하신글에 처음으로 댓글을 달고있습니다
늘건강하셔서 좋은글 많이 올려 주십시요
감사 합니다,
좋은곳을 고향으로 두고 계시군요.
한번 초대하세요
달걀꾸러미라도 한꾸러미 들고 찾아가게요.
무악 산님을 잘도 아십니다.
전 우리 고향분이라
친근감이 들어서 이따끔 삶의 이야기방에 글이 올라오면 답글 주고 받고 하던분이신데 김난석님 무악 산님을 많이 아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향분이 많네요.
여기서 향우회 해도 되겠네요
저도 옵저버로라도 참여하게요.
저도 무악산은 한번도 안가봤네요.
노모를 모신다고
두집살림 하신다니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아무나 못하지요.
난석선배님의 글은
진한 삶의 향기가 풍겨서
제 고향같아요
차분히 써내려가신 글이
제마음 움직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청담골 여사님..
무악 산 님은, 그의 글을 통해서 만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었지요,
그래서 무작정 달려갔었습니다.
노모를 모시기 위해 홀로 귀국했다는 글에 감동을 받았지요.
글에서 풍기는 정서가 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하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