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김천우체국(모암동)
천환의 돈과 차장 아가씨
이영숙
사랑도 모르고 철없이 뛰어 놀기만 했던 국민학교 5-6학년 때, 나는 자주 버스를 타고 대한교통 터미널까지 갔다 오곤 했었다. 물론 공짜였다. 우리집 바로 옆이 시외로 나가는 버스 정류소였고, 길 건너편이 터미널로 가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60년대의 나의 놀이중 하나였다. 요즘처럼 텔레비젼, 컴퓨터가 없는 시대여서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에서, 보도블록이 아닌 흙인도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오자미차기, 깡통차기 공기등으로 놀이를 하다가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면 친구들과 아니면 혼자 버스를 타고 터미널까지 갔다 오는 것이다.
물론 아는 차장 언니가 오면 탄다. 가게를 하는 우리집에 자주 들렸기 때문에 내가 타면 그냥 눈 감아 주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면 나는 꼭 천환짜리 오백환짜리 십환짜리 한 두장을 줍는다. 빈 의자에 앉는 순간 손수건에 쌓여 있거나 그냥 붉는색 파란색이 눈에 들어 오는 것이다. 나는 길에서도 돈을 잘 주었다. 어느땐 바람에 날리는 돈을 잡느라 춤을 추는 돈을 따라 펄쩍펄쩍 뛰기도 했었다. 길에서 돈을 주었을 땐 돌아봐도 주인이 없으면 내가 가졌지만, 버스에서 돈을 주었을 땐, 차장 언니한테 주곤 했었다. 그런데 주고나면 내 기분이 너무 허전해서 다음부터는 슬쩍 내 주머니에 넣곤 했었다. 자주 돈을 잘 주으니까 나는 오빠가 학교 숙제로 만들어 놓은 나무 저금통을 달라해서 저금을 했었다.
그렇게 모으다 보니, 칠천 오백환이란 큰 돈이 모였다. 그 돈을 엄마한테 상의해서 언니와 내 옷을 사 입었다. 그렇게 입고 싶었던 스웨터를 사 입은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말씀이 아버지는 내가 돈통에서 꺼내 갔다는 것이란다. 나는 참 서운 했었다. 그러나 잠시 서운함을 접었다. 몇 번 아버지 몰래 돈통에서 돈을 훔쳐서 고무줄과 과자를 사 먹었기 때문이다.
그 때 주은 돈을 차장 언니한테 다 주었더라면 언니에게 스웨터 선물도 못했을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것 같다. 언니는 기억을 못하지만 꼬마인 내가 언니에게 큰 선물을 했다는 것이.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주은 돈은 성당에 헌금을 했었다. 백원이든 천원이든 만원이든. 사람들의 말이 있다. 주은 돈은 빨리 써 버려야 한다고. 아니면 꼭 잊어 버린다고 했다.
50년 만의 회고, 상상보다 더 감미로운 추억이다.
주머니가 불룩하고 발랄하게 보였던 차장 아가씨들이 30년 전부터 사라졌다. 대신 기사 아저씨들이 차표를 받아 챙겼다. 그 이후로는 돈통이 생겨서, 승객들이 직접 돈통에 차비를 넣고 하더니, 요즘은 시스템으로 카드가 차비를 대신 지불하는 시대 변천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저만큼 흘렀어도 지금도 내 귀에 들린다. 그 카랑카랑한 그 목소리가.
버스에 문이 닫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타면, 억지로 밀어넣고 차장 아가씨는 문에 매달려 버스를 손으로 탕탕 치면서 큰 소리로 "오라이" 하고는 자기 몸을 겨우 문 안으로 넣고 승객들의 목적지로 떠나곤 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신나게 보였는지, 나도 저렇게 크면 차장 아가씨가 되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희망사항은 희망일 뿐인가 보다. 세월 속임수에 나는 잘 속았고 또 속으면서 살고 있으니. 그렇다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건 나만의 삶이라고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기쁨과 슬픔이 짬뽕이 되어도 숨을 쉬기위해 잘 견디며 밤을 맞이 하고 또 그 이튿 날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가 문명개화가 되었지만, 사람들 옷 스타일과 머리 스타일만은 복고풍으로 유행을 잘도 바꾼다. 경인년 올해는 완전히 바뀌었다. 20년간 넣지 않았던 어깨 봉이 비행기 날개처럼 만들어서 유행을 뒤바꿔 놓은 것이다. 그러면 버스에 차장 아가씨도 복고로 유행시키면 안될까.
첫댓글 나는 1968년 봄 서울 한남동(지금의 단국대입구)면허시험장에서 제1종 운전면허를 받아 열아홉 어린나이에 김천역 앞에서 직지사,감문,대방,아포,남면,봉곡,조마,등을 운행하는 합승(김천첫 시내버스)을 운전했다..그때는 아릿다운 여차장도 있었고 조수도 있었다...그때 첫월급이 11.000원이었는데..그땐 그돈으로 대구 교동에서 한창 유행하던 미제 쌍마 청바지도 한벌사입고 금반지도 3돈이나 할수있었단다...지금 생각해보니 까마득한 옛날일이네..
68년도라면 졸업하고난 뒤에구나. 그때만해도 멋진 직업이라고 했었지...그라면 나도 철규가 모는 버스를 탓겠네.....눈 감고 더듬더듬.......ㅎㅎ......얼굴이 쬐꼼 기억날려고하네..........^^
17세던가 18세땐가 시외로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자주 놀러를 갔을때 우리 이웃에 살던 또래의 아가씨가 차장을 하고있었는데 다른친구들은 돈을받고 나에게만 유독 차비를 받지않고 수줍은듯 웃곤했다 그럴대마다 친구들은 나에게 야유를 보냈다 지금도 그 시절만 생각하면 그 아가씨가 그리워진다
조항조의 "누구나 이런저런 사연 있겠지만" 가사처럼 그리운 추억이 있을 게야. 나도 참 그리운 여인이 있다. 마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울 엄마가 젤 보고 싶다. "강남 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속에...."를 즐겨부르시던 울 엄마가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