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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3일 이탈리아
호화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좌초
전복된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13일(현지시각) 오후 8시 이탈리아 근해
에서 승객과 승무원 4229명을 태운 유람
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가 좌초돼 32명
의 희생되고 4000여명이 목숨을 건졌다.
대다수 승객은 구명정을 이용하거나 헤
엄쳐 사고 해역 인근에 있는 질리오 섬으
로 대피했다.이 선박에는23명의 한국인
승객이 타고 있었지만 모두 안전하게 구
조됐다.
지중해를 운항 중이던 코스타 콩크르디
아호는 이탈리아 서해안 티레니아해 질
리오 섬 인근 해상에서 암초와 충돌한 뒤
좌초됐다.
사고는 저녁 식사 시간에 발생했다. 한
승객은 이탈리아 안사(ANS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저녁을 먹던 중 불이 갑자기
꺼지고 ‘꽝’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기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다른
승객은 “당시 패닉 상태에 빠졌다”면서
“드레스를 입고 식사 중이어서 (바다에
빠지면) 얼어 죽을 것 같아 두려웠다.
뭔가를 가져올 시간이 없었다. 담요가
지급됐지만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타이타닉 선상과 같은 공포스런 장면이
재현됐다”고 말한 승객도 있었다.
밑에서부터 물이 차기 시작하자 290m
길이의 크루즈선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
작했다.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
고,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이 구명정을
타고 안전하게 대피했다. 몇몇 승객들은
바다로 바로 뛰어들기도 했다. 배에 갇혔
던 50여명은 헬리콥터를 통해 구조됐다.
유람선 탑승자 가운데 승객은3200여명
이며, 선원은 1000여명이다. 승객 중 이
탈리아인이 1000여명, 독일인 500여명,
프랑스인 160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유람선은 2006년에 건조된 선박으
로 이탈리아 로마 인근 치비타베키아 항
구를 출발해 사보나, 치비타베키아, 시칠
리아, 사르데냐, 팔레르모, 칼리아리, 팔
마, 바르셀로나를 거쳐 프랑스 마르세유
로 가던 중이었다. 무게가 11만 4500t인
코스타 콩코르디아호는 스위트룸 58개,
레스토랑 5개, 각종 음료를 제공하는 바
13개, 온천탕 5개, 수영장 4개 등을 갖췄
다.
'이탈리아판 세월호'로 불리는 코스타 콩
코르디아호는 좌초한 뒤 2년6개월 만인
2014년 7월 14일 인양되었다.지난 20
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졌을 때
콩코르디아호는 국내 언론에 자주 오르
내렸다.
세월호 선장처럼 콩코르디아호 선장도
사고가 나자 승객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
문이다. 이탈리아 검찰은 당시 선장에게
유기치사와 수난구호법 위반 등의 혐의
를 적용해 징역 2697년을 구형했다.
▶2012년 '한국 사상 전도사' 세종대 필립 티에보 교수 별세
▶2011년 뉴욕 '실험극 대모' 엘렌 스튜어트 별세
▶2009년 LG화학, GM에 전기차 배터리 독점공급
김반석LG화학 부회장과 GM회장
▶2006년 대원군 별장 63억, 유형문화재 26호
'석파정' 경매 통해 새 주인 맞아
▶2002년 군번1번 예비역 대장 이형근씨 별세
▶2001년 엘살바도르 규모 7.6 강진으로 1700여명 사망·실종
▶2000년 박태준 제32대 국무총리 취임
▶2000년 원로 연극인 강계식씨 별세
▶1994년 중동평화협정을 중재한
홀스트 노르웨이 외무장관 사망
▶1993년화학무기의 전면금지를 위한 국제협정 조인식(파리)
▶1990년 윌더, 미국 역사상 첫번째 흑인 주지사로 취임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에 다당제 도입 선언
▶1986년 대입논술고사 첫 실시
▶1984년 문교부, 로마자 표기를 25년 만에 정자법에서 표음주의표기법으로 통일
▶1983년 동아건설, 원효대교 서울시에 헌납
▶1982년 미국 여객기 워싱턴포토맥강에 추락, 대참사
▶1981년 월탄 박종화 별세
▶1978년 미국의 제38대 부통령(1965-69) 험프리 사망
▶1971년 대구고등법원 판사들 자체정화운동
▶1969년 서독특별사절단 내한. 동백림 사건을 둘러싼 양국관계 협의
▶1969년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삼성물산공사 시절 이병철 창업주가
전화를 받는 모습.
▶1967년 토고 군부 무혈쿠데타, 육군참모총장 정권 장악
▶1964년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씨 별세
▶1964년 제3공화국 대법원장에 조진만씨 선출
▶1963년 토고 군사쿠데타, 올림피오대통령 피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상공부 화학과장은 갱지 10여 장에다 사인펜으로 그린 차트를 들고 최고회의에 갔다. 장성들 앞에서 브리핑을 했는데 화학공업 부문에 대한 내용이었다. 공장별로 생산 제품명, 규모, 국내 수요, 건설비, 건설기간, 외화 절약액, 고용증대 효과를 정리했다. 재정위원장인 김동하 해병소장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화학공업 부문 5개년 계획이 통과됐다는 소문이 정부청사 안에 퍼지자 중공업을 담당하는 다른 과(課)는 물론 다른 부처에서 사람이 달려왔다. 계획서는 부처의 모범답안이 됐다.
오원철 전 대통령경제수석이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라는 회고록에서 소개한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의 모습이다.
군사정부는 경제발전에 사활을 걸었다. 쿠데타의 명분을 위해서도, 북한과의 대결에 승리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공약이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관료들이 만든 계획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기 위해 쿠데타 직후인 7월 22일 경제기획원이 생겼다.
경제기획원은 부처별 초안을 확대 보완해서 1962년 1월 13일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이란 이름으로 공식 발표했다.
‘三兆二千億 投入, 年平均 七·一% 成長. 投資財源 民間 44%·政府 56%, 失業率 24%를 15%로. 二次産業에 重點, 國民總生産 一人當 19% 增加’
다음 날 동아일보 1면 제목을 보면 야심 찬 국가발전전략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외환 보유액이 바닥나자 정부는 1년 뒤에 계획을 축소했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5%로 하향 조정하고 총투자를 줄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부와 기업이 총력을 기울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났다. 1960년 3283만 달러이던 수출액이 1966년 2억5575만 달러로 늘었다. 다음 해에는 3억5859만 달러, 1970년에는 10억380만 달러를 기록했다.
▶1962년 미국, 쿠바가 소련과 단교하지 않으면 국교와 통상을 단절하도록 중남미 제국에 제안 각서
▶1962년 문맹퇴치운동 실시
▶1958년 진보당 사건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전 간부가 북한 간첩과 내통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1958년 1월 13일 구속 기소됐다. 1956년 5.15 선거에서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조봉암이 비록 2위로 낙선은 했지만,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진보당 사건’ 으로 재판정에 선 조봉암(왼쪽). 결국, 이듬해 ‘간첩죄’ 로 사형 당했다.
검찰은 진보당 간부들이 박정호 등 14명의 간첩단과 접선한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그들과 내통한 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전간부를 검거, 송치했다. 조봉암은 1심은 간첩혐의 무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으나, 2심과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은 7월 30일 조봉암이 낸 재심을 기각하고, 다음 날인 7월 31일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 사건을 전기로 혁신정당의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조봉암은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으나, 전향해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고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한 거물 정치인이었다.
2010년 10월 29일 조봉암 전 진보당 당수 유족들의 신청으로 대법원은 전원합의채를 통해 “피고인(조봉암)의 혐의는 군부대에 간첩으로 잠복하거나 군에서 간첩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므로 국방경비법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고, 군인이나 군속이 아닌 일반인은 육군 특무부대가 수사할 권한이 없다” 고 밝히며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11월 18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재심이 열렸다.
▶1958년 세계저명과학자들 핵실험 정지 청원서를 유엔에 제출
▶1957년 유도회(儒道會) 분규 격화
김창숙 위원장.
▶1957년 영국 맥밀런 내각 성립
▶1957년 유엔총회에서 통일한국 미국 결의안 가결
▶1950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자유중국 제명의 소련안 부결
▶1941년 ‘율리시즈’의 작가,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사망
‘율리시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1941년 1월 13일 위궤양 수술의 후유증으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했다.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이스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예비학교에서 수학했으나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문학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00년 4월 그가 나름의 미학이론으로 입센을 해석한 ‘입센의 새로운 드라마’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됐다. 조이스의 첫 소설인 ‘더블린 사람들’은 1904년 더블린의 한 신문에 연재됐으나, 작품의 외설성과 더블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영국 왕을 모욕하는 듯한 내용 등으로 책을 출판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그는 8년 안이나 책 출간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결국 1912년 책 출간을 포기하고 아일랜드를 등진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조국을 찾지 않았다.
1916년 뉴욕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출판되고 1918년부터 미국의 한 잡지에 ‘율리시즈’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율리시즈’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한 동안 연재와 출판을 금지당하는 바람에 1922년 파리에서 초판을 출판했다. 그가 당시 세계문학의 수도였던 파리로 이주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한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세계 문학의 큰 별로 군림하던 그가 파리를 떠난 것은 파리가 2차대전으로 독일에 함락된 1940년이었다.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결국 이날 사망했다.
▶1938년 장편만화영화 `백설공주` 첫방영
▶1930년 영국의 전기공학자 페란티 사망
▶1929년 원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1926년 영국과 이라크 우호조약 성립
▶1916년 멕시코 대통령을 지낸 독재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사망
▶1915년 이탈리아 아베자노 대지진으로 3만명 사망
▶1910년 대한협회 등에서 국민대회연설회 개최,
합방반대 재천명
▶1908년 청나라,영국,독일,프랑스로부터 진포철도 차관 도입
▶1906년 에콰도르와 콜럼비아 해안에서
진도 8.8 지진 발생
▶1903년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호`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한인 미주이민 시작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Gaelic)호`가 102명의 한인 이민들을 태우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로써 미주를 향한 한인 이민이 시작됐다.
1903년 1월 13일, 한국 이민 102명을 태우고 호놀룰루항으로 향하는 갤릭(Gaelic)호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갔고, 그 사이 이민선 132편이 태평양을 오갔다. 하와이 이민의 배경은 조선 왕조 말기의 혼란과, 1901년 함경도 지역을 휩쓴 가뭄과 홍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멀리 시베리아나 만주로, 또는 서울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이주했다. 마침 183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도 이 무렵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이미 받아들인 중국인·일본인 노동자들의 규모가 커지고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그 해결책으로 한국·필리핀·포르투갈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수민원(綬民院)’이란 담당기관을 설립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송출이기 때문이다. 초기 이민자 중 84%가 20대 남자였고, 이들의 결혼 문제가 큰 현안이었다. 결국 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하는 ‘사진 신부’들이 1910년부터 하와이로 이민가게 된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모든 형태의 한인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떠났다.
1903년 1월 13일, 한국 이민 102명을 태우고
호놀룰루항으로 향하는 갤릭(Gaelic)호.
이들 첫 이민자들 가운데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1978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파악된 이민 동기(動機)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하와이에 가면 빗자루로 땅을 쓸기만 해도 돈이 생긴다기에 그 돈으로 친정 식구들을 살리려고, 서자라고 설움받아서, 예수쟁이라고 놀림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일본인의 압박을 참을 수 없어서, 자손들을 좋은 나라에서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싶어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의 미주이민이 2003년을 기해 100주년을 맞았다.
▶1898년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에밀 졸라의 기고문 `나는 고발한다...`가 신문 `여명`에 게재
파리의 `여명`이라는 조간신문 1면에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6단짜리 기고문이 실려, 잊혀져 가던 `드레퓌스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속으로 등장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10월 드레퓌스 대위가 프랑스의 군 기밀문서를 독일대사관에 제공했다며 대독 간첩혐의로 체포되 프랑스 전역을 들끓게 했던 진실을 향한 투쟁의 기록이다. 드레퓌스 대위는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무죄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남미 기아나 군도의 `암사`섬에 종신수로 추방됐다.
프랑스 소설가 에밀졸라
당시의 프랑스는 패전으로 반 독일 감정이 팽배해 있었고 내부는 공화파와 왕정파로 대립하고 있었다. 왕정파들은 드레퓌스 대위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며 범인으로 몰고갔다.
당시 작품활동에 몰두하던 졸라는 상징주의 시인 베르나르 라자르의 방문을 받고 여러사람을 접촉한 결과,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게 됐다. 드레퓌스 대위가 수감 중일 때 진짜 범인이 밝혀졌으나 군부가 은폐하려 한 것이다. 졸라는 1898년 1월 12일 재판에서 범인인 에스테라지에게 각본대로 무죄판결이 내려지자 분격, 조르쥬 클레망소(후에 총리가 됨)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여명` 13일자에 육필원고 39장에 이르는 `펠릭스 포르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게재한 것이다.
그는 기고문에서 비열한 책임자들을 거명하며 `나는 ~를 고발한다, 나는 ~를 고발한다`는 표현을 10번이나 반복했다. 클레망소는 이에 착안,`나는 고발한다...`를 이 글의 제목으로 달았다. 도발적인 제목은 글을 더욱 강하게 대중에게 전달했고 '여명'지는 평소의 10배나 되는 30만부를 판매했다. 이튿날부터 각계각층에서 졸라의 고발에 동참하는 서명과 지지가 '여명'에 잇따랐다.
결국 필화를 자초한 셈인 졸라는 그해 2월 추방령을 선고받고 1년 동안 런던에서 유배생활을 한 끝에 1902년 프랑스에서 의문사했다. 드레퓌스는 이후 석방돼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를 인정받았다.
ㆍ행동하는 지성
민주노동당 문화정책연구원을 지낸 목수정씨가 쓴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에는 ‘지식인과 예술가 여러분들!’이라는 표현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프랑스의 시위 광경이 나온다. 저자는 이에 대해 “지식인과 예술인이 동류 집단이며 사회참여에 있어서 이들이 그 나름의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대혁명 이래 프랑스에서는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일은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드레퓌스 사건의 흐름을 단숨에 바꾼 문호 에밀 졸라일 것이다. 졸라는 1898년 1월13일 일간지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진실이 땅에 묻히면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하고, 그것이 터지면 세상 모든 것을 날려 보낸다’는 그 유명한 사자후를 토했다.
1894년 9월 프랑스군 육군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군의 기밀문서를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에 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군 당국은 드레퓌스의 필적이 첩자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를 진범으로 지목한 뒤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흐지부지되는 듯했던 사건은 진범이 따로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양심적 지식인,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등은 사건의 재심을 강력히 요구했다. 반면 왕정복고주의자, 군부, 반유대주의자 등은 국가안보와 군의 사기를 내세우며 결사적으로 재심을 반대했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완전히 둘로 나뉘었으며, 유럽 전역이 숨을 죽이며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절대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재심 반대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 바로 졸라의 글이었다. 그의 논설 한편으로 여론의 향방은 역전되기 시작했고, 1906년 7월 드레퓌스가 최고재판소에서 무죄선고를 받음으로써 이 역사적인 사건은 발생 12년 만에 막을 내렸다.
▶1888년 미국지리학회 창립
▶1879년 독립운동가 신규식 출생
▶1874년 러시아 군제개혁 후 징병제 실시
▶1864년 미국 작곡가 포스터 사망
▶1627년 후금, 3만명의 병력으로 조선 침입 (정묘호란)
▶1572년 이퇴계 사망
▶785년 신라, 선덕왕 사망, 원성왕 즉위
▶771년 경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완성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