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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여행] 몽골제국의 영원한 칸 칭기즈칸 신 박물관 편.............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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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여행] 몽골제국의 영원한 칸 칭기즈칸 신 박물관 편.............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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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체험에서 배운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는 말. 젊어서는 사서 고생도 한다는 말, 특히 칭기즈칸
의 전쟁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부친이 암살당한다. 버려진다. 납치되고, 배다른 남동생에게 습격당한다. 칭기즈칸
의 유소년 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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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패는 그를 강철로 만들었다. 그에게 실패는 여럿 체험의 장이었다. 우린 성공을 실패보다 더 높게 산다.
하지만 때론 실패가 성공보다 더 값질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실패는 많은 피드백을 제공한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체험, 과거의 나 에게서 배운다" 어떻게 생각하면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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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1*몽골의 황제 칭기즈칸은 세계 역사상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야기
되고 연구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절반을 지배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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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실패는, 좋은 滋養分[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칭기즈 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
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그의 본명인 테무친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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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친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피 한 움큼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 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
골 왕족 보르지긴 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
다. 이때부터 테무친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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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2*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불평도 하지 마라.
나는 9살 때 아버지가 독살당했고, 부족에게 버림받아 살아갈 길조차 막막했다. 매일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불
타는 태양과 눈보라 몰아치는 초원에서 풀뿌리와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내겐 하루하루가 목숨을 건 전쟁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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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3*가진 게 적다고 탓하지마라.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자신을 비아냥거리지 말고, 친구가 없다고 해서 외로움에 슬퍼하지도 말라. 나는 내
그림자 말고는 친구가 없었고, 백성은 어린애와 노인까지 합쳐 200만이 채 되지 않았으나 결국 세상의 절반을 내
발밑에 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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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
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
무친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
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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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은 먹어 본 사람만이 안다, 안먹어 본 사람은 그 비참함을 알턱이 없다. 이렇게 살아 남기위한 처절한
몸부림 속에 좌절하지 않은 사나이 칭기즈칸은 결국 씨족사회에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혈연을 넘어서 씨족사
회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전략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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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4*배운 게 없다고 탓하지 말라.
배운 게 없고 아는 게 없다고 스스로를 원망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제대로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
울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치를 배우고, 나 자신도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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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지역을, 더 많은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선 혈연보다 더 범용성이 큰 무언가가 필요함을 알았다. 그는 유목
민들을 모아 '철의 단결'을 만든다. 법률과 문자를 제정하여 민족을 통일시킨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보상을 제공
한다. 복종자에겐 관용을 배신자에겐 보복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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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효율적으로 제국을 통치한다. 국가, 직장, 학교 등에선 항상 '비전'을 수립한다. 무용해 보이는 이 장치
는 사실 큰 힘을 지닌다. 깊이 박힌 비전은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한다. 몇 십 몇 백 명이 바라보는 하나의 방향
은, 생각보다 큰 힘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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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5*쉽게 포기하지 마라: 삶이 막막해도 절대 쉽게 포기하지 마라. 나는 살고자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작열하
는 태양 아래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양털 속에 숨어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
도 했다. 살고자 하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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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금나라 정복시 성체 도시의 공격 방법과 중국의 기술을 배운다. 호라즘 샤 왕국 정복시 공포를 활용
한 심리전을 배운다. 동유럽 정복시 기동력, 투석기 사용법 등을 배운다. 칭기즈칸은 매번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피드백'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마 유년기의 처절했던 DNA가 뼛속 깊이 박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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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는 매번 실패했고 매번 처절하게 당하며 살았다. 성인이 된 그는 매번 성공했지만 피드백을 손에 놓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의 명언이 기억난다. "발전하기 위해선 변화해야 한다. 완벽해지기 위해선 더 많이 변화해야
한다." 여기 한마디를 덧붙여 본다. "변화하기 위해선 피드백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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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6*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실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무릇 사람은 넘어지도록 태어났다. 그런데도 사람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실수를 거듭하여 넘어지면서도 스스로 판단하여 일어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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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단맛에 취해있는 것은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피드백 하라. 삼성 고 이건
희 회장도 자식과 마누라만 빼놓고 모두 바꾸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냉정했다. 조금의 의심만 있어도 철저하게
힘을 가해 망가트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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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장 손쉽게 느끼는 감정이 뭐라 생각하는가? '공포'다. 인간의 뇌는 생존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진화했다.
자연스럽게 많은 것을 조심해야 했고, 많은 순간 두려움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100번 조심해도 1번 실수하면
죽음이기에, 계속 조심하도록 스스로 세뇌 시키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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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7*넘어졌을 때 멀리, 크게 보라
자연은 신이 만들었지만, 운명은 각자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신은 종종 역경을 주지만 그것을 극복할 힘도 준
다. 만약 지금 넘어져 있다면, 자신을 돌아볼 기회로 삼아라. 역경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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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도 확인했다.
테무친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 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씨를 말려버릴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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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 일종의 심리전 이었다고
이야기 되어 왔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은 20세기에 저질러진 학살에 비교될 만큼 잔인했다. 지구가 생긴이래 두
번째로 많은 학살을 자행 했기 때문이다. [약 60.00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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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8*걸림돌을 징검다리로 만들어라.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고 있는 걸림돌은 바로 '할 수 없다'는 너의 마음이다. 창고의 벽이 견고하고 높다는 것
은 그 너머에 큰 것이 있다는 뜻이다. 거대한 산 뒤에 놓인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려 보라. 산을 넘어야만 그 풍경
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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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친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보전과 심리전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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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에 미리 유언비어로 공포심을 심는 것이 그들의 주 전략이었다. 학살정책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저항의식
을 꺾고자 한 것이었지만 학살을 위한 학살도 많이 자행되었다. 조금은 얍삽해 보일지라도 이는 자신만이 살아남
아야 한다는 원칙.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바로 내가 죽는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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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9*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말라
인생이 고달프면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 마련이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며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는
모습에 끌리게 되면, 자신이 원하던 천하를 잊어버리고 천하를 쥐고자 했던 내 모든 감각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
한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결코 세상을 다스릴 수가 없다. 절제하고 또 절제해야 한다. 지난날 나를
돌이켜보면 적은 밖이 아니라 늘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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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당해왔던 배신에 대한 처절했던 몸부림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암튼 글도 모르는 칭기즈칸의 대단한 발상
이다. 공포 분위기와. 두려움을 심어놓은 것이다. 상대를 깊은 공포의 수령으로 밀어 넣어라. 오줌을 질질 흘리는
상대는 칼을 휘두를 수 없다. 회의 시에도 공포 전략은 활용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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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질문으로 상대를 당혹케 하라. 공개석상에서 한 팀을 질타하라. 물론 주의할 점도 존재한다. 이런 전
략은 '짧게 보면' 효과적이다. 하지만 다음날 공포가 풀린 상대는, 전날의 수치를 떠올리며 복수를 다짐할 것이다.
'길게 보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따라서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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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어록
10*나는 천하를 얻고자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없애 버렸다.
적을 용서하되 믿지는 말라. 그렇게 모든 것을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 칸이 되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칭기
즈 칸의 명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길잡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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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쿠릴타이 부족 대 회의에서 테무친은 칭기즈 칸['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
었다.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칭기즈칸은 칸에 오르자마자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야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군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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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세력을 확장해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
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 간의 세력다툼 재연, 식
민통치]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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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군대는 기강이 엄한 데다 정복지의 귀족들은 물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 버렸
다. 그러한 잔인함에 사람들은 칭기즈 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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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제압된 각 부족들을 향해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 하였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중앙아시아]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몽골 자체의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칸은 1207년은 서하국, 1211년은 금나라, 1218년은 서요, 1219년은 호라즘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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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년 마침내 북경을 포함한 금을 정복한 후 몽골족은 인근 여러 나라를 휩쓸었다. 1226~27년 2번째 서하를 상
대로 마지막 戰役[전역]에 나설 때까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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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
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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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1227년에 3남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임명하고는, 서하를 2번째 점령하고 몽골로 귀환하던 중 쓰러졌
고 합병증으로 8월 18~25일, 66세[4개국 공동연구팀]의 나이로 서하 부근의 영주 육반산의 군영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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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은 칭기즈 칸의 관을 들고 회군을 개시하여 초원으로 돌아와 대칸이 생전에 자신의 매장지로 선택한 부르
칸 칼둔에 매장했다. 칭기즈 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미스터리인데 보르항 산 등 여러 후보지가 있지만 전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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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0만의 병사로 세계를 정복한 그의 리더십!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던 그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었던"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
웠고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며 자신을 극복했다. "집안을 탓하지 말고 가난이나 나라도 탓하지
말라"던 그의 강인한 정신력이 국경선도 없고 비자도 필요 없는 자유무역지대의 세계제국을 일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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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선 좀 으스스한 전설이 하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칭기즈 칸의 무덤은 시신을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
이 짓밟음으로써, 무덤을 평지로 만들어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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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돌아온 기수들도 미리 준비해둔 자들에 의해 몰살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전설일 뿐 사실인지는 밝혀
지지 않아 학계에서도 실체성 논란이 있다. 아무튼 칭기즈 칸의 업적은 위대했다. 그는 유목민 부족을 모두 통일
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호라즘 샤나 금 같은 대 제국을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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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유목 민족이었던 몽골을 통일하고 칸에 올라 몽골 영토를 중국 대륙에서부터 아드리아 해까지 확
장시켰다.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는 없다. 그의 출생 연도와 생애의 많은 부분이 지금까지도 불확실하며, 무덤의
위치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칭기즈 칸의 자손으로 밝혀진 사람은 직·방계를 통틀어 1,600만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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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부족들을 피폐시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하고, 다른 아
들들이 오고타이의 말에 따르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으며, 오고타이에게 강성한 군대와 국가를 물려주었다.
칭기즈 칸이 죽었을 때, 베이징에서부터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그
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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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에까지 세력의 판도를 넓혔다. 그들은 칭기즈 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정복지역을 잘 조직된 제국으로 개편하는 일을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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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만 해도 우리나라의 인구수인 약 6000만 명[세계사 역대2위]에 달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1위는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 약 7천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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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칭기즈 칸은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으나 그가 벌인 정복전은 몽골 제국의 출현을 처음으로 알렸다는 점에
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 제국은 중세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큰 제국이었다. 그러나 달도차면 기운
다고 했다. 세상 만물에는 흥망성쇠가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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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몽골 제국의 분열이 시작된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의 통치 아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칭기즈
칸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면서, 몽골 제국의 통일성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1241년 몽골의 대칸인 오고타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인 구육, 몽케, 쿠빌라이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
고 다툼은 1264년 몽케가 대칸으로 선출되면서 끝났지만, 몽골 제국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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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이 점령한 땅은 약 777만 제곱킬로미터로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이 차지한 땅의 합보다 훨씬 넓
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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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수직이 아닌 수평적 리더십과 슈퍼 리더십 글로벌 리더십을 무려 800년 전에 실천한 그의 능력은
수많은 하층민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알렉산드로스, 히틀러, 나폴레옹 이 세 사람이 차지한 영토 보다
더 많은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만나면 개처럼 서로 으르렁 대는 우리의 청치와는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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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년 몽케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가 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쿠빌라이는 1260년 쿠릴
타이에서 대칸으로 선출되었지만, 몽골의 여러 부족들은 쿠빌라이의 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1271
년 자신의 간국을 원으로 개칭하고,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으며 1279년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고,
원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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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쿠빌라이의 사망 후, 원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면서, 원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1368년에는
명나라가 원을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하였고, 원은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몽골 고원으로 쫓겨난 원은 4
개 칸국으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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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서쪽으로는 호라즘 왕국을 정복하러 원정을 떠나다가 전쟁도중 사망하게 된다. 호라즘 왕국은 신
흥 강국인데 결국 몽골에 의해 정복당한다. 그리고 호라즘 왕국은 백성까지 모조리 학살해버려 씨를 말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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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개 칸국은 서로 경쟁하였고, 몽골 제국의 영토는 점차 축소되어만 갔다. 결론 적으로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의
통치 아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칭기즈칸의 사망 후에는 후계자 다툼, 몽골의 정치적 구조, 유럽 침략
의 영향 등으로 인해 분열하게 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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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9년 약했던 오스만튀르크가 침략하여 훌라구칸[일칸국, 울루스]이 먼저 망하고 몽골제국은 분열된다. 티무르
[1369~1500]가 몽골제국의 옛 명예 회복을 꿈꾸며 중앙아시아 쪽에 티무르제국을 세우지만 단합이 안 되고 왕좌
싸움을 두고 계속된 분열과 반란이 일어나고 혼란의 시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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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죽음에 대해 여담 하나.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전염병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거나 벼락 맞아 죽었다거나 말에 떨어져
죽었다거나 심지어 복상사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여러 설들이 많은 편이다. 칭기즈 칸에게 원한을 품은 여인이 자
신의 중요 부위에 날카로운 비수를 넣어두고, 성관계를 할 때 칭기즈 칸의 성기가 잘려 죽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그러나 일단은 [원조비사]에서 기록된 대로 말에서 떨어진 후 그 부상과 합병증으로 죽었다는 설이 정설로 취급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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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기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이 사파비 왕조(1502~1736)가 세운다. 1459년부터 오스만튀르크가 세력을 넓히
며 오스만제국이 세워진다. 1368년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세워졌고, 몽골 제국을 공격했다. 명나라는 강력한 군
사력과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몽골군을 격퇴했고, 몽골 제국은 점차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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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몽골 제국은 북원과 오이라트로 분열되었는데 북원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1634년 청나라에
멸망했다. 결과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은게 오늘날의 몽골 땅이다. 몽골 자체가 사라지지않고 남았다는 게 중요
하다. 그렇다. 배우 김범수의 말처럼 오래 살아 남아있는 자가 이기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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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명열을 어긴 2번째 서하 정벌 중 고령의 나이에 낙마사고가 일어나는데 이낙 마사고로 인해 몇 가
지 염증이 큰 병이 되고 투병 중에 우연히 꿈을 꾸게 되는데 악몽이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후
계자를 정하고 서하를 공격하고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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