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 학생여러분!
11월 3일, 팔십년 전 선배들의
그 뜨거웠던 함성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64년 전, 바로 어제는 우리 곁에 있는 양금덕 할머니가 구사일생으로 고향 땅을 밟은 날입니다. 그날 밤 양금덕 할머니의 어머니는, 11시 40분 나주역에 도착하는 마지막 열차만을 목 놓아 기다리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제나 저제나 오나’, 막차까지 보고서야 비로써 집으로 발길을 돌리시던 그 어머님의 흰 고무신이 어느새 다 닳아 없어졌더라고 합니다.
해방 64년이 지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여의셨고, 초등학교 6학년 그 어린 소녀 양금덕은, 이제 여든 한 살 인생의 황혼녘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아직 배상은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여생을 달리하셨습니다. 살아계신 몇 몇 분들 역시, 안타깝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심지어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13살 나이 어린 여학생까지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킨 미쓰비시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있습니다. 인권이니, 생명이니 하는 말을 더 해 무엇 하겠습니까?
‘돈’ 몇 푼이 아닙니다. 시비삼아 민족 감정을 앞세우자는 것도 아닙니다. 고국에 돌아와서까지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받아 손가락질을 당하고, 온전한 가정마저도 꾸리지 못한 이 팔순 할머니의 손에, 당장 억만금을 쥐어 준들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에 의해 이미 뒤 바뀌어 버린 한 인생이 보상 될 수 있겠습니까? 죽기 전에 ‘사죄’ 한 마디는 들어야겠다는 것이 과연 과분합니까?
어제까지 양금덕 할머니는 일당 3만8천원짜리 어느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라였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도 이럴 수는 없습니다. 바로 1인 시위가 벌이지고 있는 이곳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바로 맞은편에서의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64년 전의 임금도 아직 돌려주고 있지 않는 미쓰비시는 보란 듯이 피해자들 면전인 광주시청 앞에 버젓이 자동차 전시장을 열고 있고, 그 맞은편 몇 십 미터 거리에서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여든 한 살 노인이, 일당 3만8천을 벌기 위해서 촬영장 감독의 지시대로, ‘이리 가라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는’ 1회용 엑스트라가 되는, 이 역사의 비극을 보고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호소하고자 합니다. 오는 11월 3일은, 80년 전 1929년 우리 선배들이 일제의 폭압에 맞서 분연히 떨쳐나선,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외친, 80년 전 우리 선배들의 그 뜨거운 가슴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날만큼은 잠시 펜을 놓고, 이곳 역사의 현장으로 나와 주십시오. 할머니들에게도 여러분들처럼 꿈 많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날만큼은 할머니들의 아픔과 함께 해 주십시오!
어쩌면 할머니들한테는 일본정부나 미쓰비시로부터 듣는 그 어떠한 사죄나 배상보다도, 함께 마음 아파하며, 촛불로 함께하는, 여러분들의 그 가슴이 더 따뜻하고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
해방 64년이 되도록 마르지 않는, 할머니들의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
11월 3일, 80년 전 선배들의 그 뜨거웠던 함성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10월 22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http://cafe.daum.net/1945-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