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품은 ‘사연(事緣)의 장(章)’, 즉 ‘실마리의 장’이라는 뜻으로 이제부터 시작되는 매우 긴 설법의 실마리가 되는 부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법화경>을 설하게 된 이유 또는 내력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결코 얕은 것은 아니며 지금부터 설해지려는 진리에 대한 암시(暗示)와 복선(伏線)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 경을 거듭 배우고 또는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암시나 복선을 확실히 잡아내어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무량의경>의 설법을 마친 석가모니세존께서는 그대로 깊은 삼매(三昧) 즉 명상에 드셨습니다. 그때 보살들을 비롯하여 출가, 재가의 수행자뿐만 아니라 바라문의 신들과 인간이외의 귀신(鬼靈)들까지 포함된 대중 일동이 합장하며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우러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연히 석가모니세존께서 두 눈썹 사이(眉間)에 있는 하얀 털이 둥글게 말린 백호상(白毫相)으로부터 한 줄기 큰 광명이 뻗어 나와 지구상의 구석구석은 물론 하늘 저쪽에 있는 모든 세계와 땅속의 무간 지옥까지 낱낱이 비추어 보이고, 저 모든 세계의 육도 중생들을 다 볼 수 있었고, 저 국토에 현재 계신 부처님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 부처님들께서 설하시는 법문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저 국토의 출가, 재가의 수행자들이 여러 가지로 마음을 닦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보이며, 여러 보살이 보살도를 행하는 것도 보이는가 하면, 부처님이 입멸하시자 그 불사리(佛舍利)를 모신 칠보탑을 세우는 모습도 보였던 것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보고 미륵보살은 ‘무슨 연고로 부처님께서는 매우 신비한 신통변화의 모습을 나타내시어 이와 같은 상서로움을 일으키시는 것일까? 이를 부처님께 여쭤보려 했으나 삼매에 드셨으니 물어볼 수 없고, 혹시 문수사리보살께서 과거 오랫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며 공양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신비한 상서를 보았을 것이니 지금 이일을 물어보리라’하고 문수보살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아득한 옛날에 계셨던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이라는 부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부처님은 완전무결한 덕을 갖추신 분으로서 올바른 법을 설함에 있어,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중생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참다운 정법 이였습니다. 그 가르침의 의미는 깊고, 그 방법은 매우 자상하고 알기 쉬웠으며, 또 설하신 것은 완전무결해서 순수하고 훌륭한 가르침이었으며, 좋은 행을 실행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미혹됨이 없는 마음을 얻고 싶은 사람에게는 사제(四諦)의 법을 설하시어, 생노병사의 인생의 괴로움에 구애받지 않는 마음과 인생의 변화에 놀라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벽지불(辟支佛:연각(緣覺))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십이인연법을 설하시고, 여러 보살들을 위해서는 육바라밀을 설하여 최고의 지혜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제’와 ‘육바라밀’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괴로움과 번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절대 안온의 경지를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신 법문으로서, 석존의 가르침의 큰 중심을 이루는 것이므로,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제(四諦)
사제라고 하는 것은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의 네 가지 깨달음입니다.
‘고제(苦諦)’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 경제적인 고통, 그 밖에 여러 가지 고통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인생고로부터 피해 달아나지 않고 그 실태를 직시하고 꿰뚫어 보는 것이 ‘고제’입니다.
‘집제(集諦)’란, 이러한 인생고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원인을 성찰하고 탐구하여 그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성유품 제7’에서 자세하게 ‘십이인연’과 다음에 설명할 제법실상(諸法實相), 십여시(十如是)에 아주 확실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멸제(滅諦)’,란, 그러한 인생의 괴로움이 소멸된 안온의 경지입니다. 정신적인 괴로움, 육체적인 괴로움, 경제적인 괴로움, 그 밖의 모든 괴로움을 끊어 버리고 이 세상이 적광토(寂光土)를 출현시킨 모습입니다. 이것은 석존께서 깨달으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3대 진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도달 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이 3대 진리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므로 조금 후에 곧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제(道諦)’란, 위의 3대 진리를 깨닫기 위해 끝임 없는 수행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묘(妙:마음), 체(體:모습), 진(振:행동)의 3면으로 보살도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더 깊이 말한다면 다음에 나오는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六波羅密)’로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고를 없애는 길의 가르침인 ‘도제’입니다.
이렇게 인생은 고통의 세계임을 직시하고(고제), 그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며(집제), 그리고 매일매일 수행에 의해서(도제), 모든 고뇌를 소멸하라(멸제) 하는 가르침이 사제의 법문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에 대하여 가장 잘못 인식하고, 오류를 범하는 것이 바로 이 ‘제행무상’입니다.
‘세상은 모두 헛된 것이다’라고 하며 염세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오류와 ‘이 세상은 부질없는 것이므로, 내세(미래세상)에서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오로지 염원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라고 불교에 대한 큰 오해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를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제행무상’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부터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제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라는 의미이고, ‘무상’이란 뜻은 글자 그대로 ‘한결같지 않다’, 즉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변화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제행무상’이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늘 저편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태양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과학이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자신의 몸과 오늘의 몸은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실은 세포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소멸되고 또 생겨나고를 반복하면서 약 7년 동안에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고 하기 때문에 몸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마음으로 느끼는 즐거움이나 기쁨, 괴로움이나 슬픔 등이 실로 부질없이 변해 버린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제행무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이다. 믿을 수 없으니 단념하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큰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제행무상’은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눈앞의 작은 변화에 놀라거나 조급해 하지 않는 마음을 지녀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몇 십억년 전의 지구는 화산으로부터 솟아 오른 몇 천도나 되는 용암이 가득하고, 하늘에는 수증기와 가스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서 생물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약 20억년 전쯤 지구가 점점 차가워지면서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세균과 같은 것 이였습니다. 그 작고 작은 생명체는 대홍수나 대지진, 대화산의 폭발이나 지독한 추위에 끊임없이 시달렸으나, 끝내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화하여 아메바에서, 곤충류, 어류, 양서류, 패류, 조류, 포유류로 점점 진화하여 마침내 인간으로 까지 발전해 왔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의 강인함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은 자칫 잃어버릴 수 있는 생명력에 대한 신념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눈앞의 병이나 생활의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인 우리는 이러한 큰 박해와 큰 고난을 헤쳐 나와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 생명력이 나의 이 몸에도 깃들어 있다.’ 라는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아메바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아도, 한발 한발 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 머무르거나 퇴보하는 것은 인간이 나갈 길에 어긋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경지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경지라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부처님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마다 원하고,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이 인간이 걸어가야 할 방향인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간으로서의 가야할 길과 어긋나 있는 건강이라든가 생활이 올바른 길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또 최초의 생명이라는 것도 즐비하게 녹아 있는 용암이나 금속, 가스나 수증기와 같은 것에서 발생하여 그것이 분해 되고 진화하여 한편으로 식물이 되고 또 한편에서는 동물이 되며, 벌레도 되고 어류도 되고, 양서류도 되고, 조류도 되고, 포유류가 되어 결국에는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나무도, 돌도, 금속도, 천지만물 모두 조상은 다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식물도, 새도, 야생 동물도 모두 형제라고 하는 친근감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이나마 생기게 되지요. 그러니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부모, 조부모, 그 이외의 선조의 제령(諸靈)에 대하여서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은 더욱 당연합니다.
실로 일체 만물은 모두 형제입니다. 하물며,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대립하고 미워하며, 빼앗으며 결국에는 서로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곧 눈앞의 변화에 사로잡혀 눈앞의 이해득실에 눈이 멀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제행무상’을 확실히 관(觀)한다면, 그 미혹은 저절로 사라지고 평화롭고 올바른 인간의 삶의 방식이 이 세상에 실현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는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제행무상..가슴에 새기며 처렴상정님의 수고로움에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후련해지는 그런 기분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