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O 임계 사고> "무지가 원인이었다" 유일한 생존자가 이야기하다
2005.9.3.(마이니치 신문)
인용출처 : http://www.asyura2.com/0505/genpatu3/msg/276.html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의 핵연료 가공회사 "제이. 씨. 오 (JCO)" 도카이 사업소에서 99년도에 일어난 국내 최초의 임계 사고로부터, 30일로 만 6 년. '스페셜 크루'로 현장에서 피폭되어 입원한 3명 중 한명인 요코카와 유타카 씨 (60)가 마이니치 신문의 단독 인터뷰에서 사고의 상황과 당시의 심경을 말했다. [스다 모모코]
"파식-" 99년 9월 30일 오전 10시 35분쯤 JCO 전환시험동. 데스크 작업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던 요코카와씨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건너 방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열려져 있던 문이 파르스름하게 빛이나고 임계 경보가 울렸다. 옆방에서 동료인 시노하라 마사토씨 (당시 39세), 오오치 히사시씨 (35세)가 침전조에 양동이로 우라늄 용액을 넣어 혼합하는 작업중이었다.
임계가 발생하면 푸른 빛과 소리가 나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살수없겠군"이라고 생각했다. 요코카와씨는 방에서 나온 시노하라씨와 오오우치씨에게 "임계다. 즉시 밖으로 나가라"고 외쳤다.
치바시의 방사선 의학 종합 연구소에 옮겨져 곧 인접해 있던 침대위에서 오오치씨와 말을주고 받았다. "히사시, 힘내라" "요코카와씨도" 그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99년 12월에 오오치씨, 이듬해 4월에는 시노하라씨가 숨졌다. "외톨이가 된 느낌. 말하는 것에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없어졌다." 단 한 사람의 '임계 체험자'로 사는 무게와 고독이 짓누르고 있었다.
◇ ◇ ◇ ◇ ◇ ◇
사고로부터 대략 1년 전에 스페셜 크루 부장이 되었고, 연료용 우라늄 용액의 제조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미 양동이의 사용을 비롯해 「자신들만의 매뉴얼」에 의한 불법적인 작업이 일상화됐다. "이런 작업을 능숙하게 해도 자랑할수 없겠지" "도둑질을 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료와 농담을 나누며 이야기했지만, 사고를 초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고원인은 '무지'였다"고 단언하다. 사고 전에는, 그때까지 경험이 없던 고농도 우라늄 용액을 취급하게 되었지만, 회사로부터 임계의 위험성에 대한 지도는 없었다. "우라늄이 액체상태라면 대량으로 침전조에 넣어도 괜찮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퇴원하고 몇달 후 직장에 복귀했다. 환갑을 맞이한 지난해 11월 말 JCO를 은퇴했다. 실버 인재 센터에 등록. 평일은 JCO 부지 내의 잔디를 깎으러 다니고, 2개월에 한번 오오치씨, 시노하라씨의 무덤에 다녀온다.
'원자력으로 생산되는 전기'가 필요한지 어떤지 여부를 국가와 사업자가 위험을 모두 밝히고 주민과 논의해야 한다고 하는 요코카와씨. 사고로부터 6년. 원자력을 둘러싼 국내의 논의는 아직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첨언] JCO 임계사고. 99년 9월 30일,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의 JCO 도카이 사업소의 전환시험동에서 침전조에 작업원이 우라늄 용액을 대량으로 투입.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임계가 되어, JCO 사원과 주변주민 666명이 피폭되어 2명이 사망했다. 미토 지방법원은 2003년 3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등으로 동 사업소 전직 간부들 6명과 법인으로서의 JCO에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
(마이니치 신문) - 9월 30일 15시 6분 갱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