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惡魔)는 있다 - 한 女의사의 경우
엄상익(변호사)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다가가는 계절 한 여의사가 찾아왔었다. 그녀는 내가 석방시킨 죄수를 돕고 싶다고 했다. 절도범이었던 그를 개인적으로 벌써 몇 번 만났던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은 불안했다. 모든 인간이 죄라는 속성이 들어 있지만 세상의 범죄자들의 경우는 절제되지 못한 본능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고 있던 그 여의사는 점차 큰 일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교도소를 찾아가 그 안에 미술반을 만들고 재소자 중에서 그림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 여의사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았다. 여의사는 인사동의 화랑을 빌려 재소자들의 작품전시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나도 그곳에 가서 성경을 그린 작은 작품을 사주기도 했다.
그 여의사는 감옥 안에 있는 몇 명과는 정이 든 것 같았다. 나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감옥이란 어쩌면 깊은 우물 구덩이에 빠져있는 느낌일 수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우물 뚜껑을 열고 빛을 보게 해주고 줄을 내려준다면 그가 천사 같아 보일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범죄인 중에는 더러 속에 악마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앉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우물에서 벗어나면 다시 악마의 본질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나도 몇 번 경험을 했었다. 감옥 안에서 만날 때는 천사 같았다. 석방시키고 시간이 흐르고 그에게 다시 세상의 먼지가 덮이자 그의 숨겨졌던 악마의 꼬리들을 보이기도 했다.
그 여의사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고 그는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는 것 같았다. 그 여의사는 신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서울역 앞쯤 집을 하나 사서 감옥에서 나온 자기 제자들의 공동숙소로 만들어 함께 살고 싶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자기의 제자들은 모두가 착하고 천사 같다고 자랑했다. 정말 항상 그렇기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범죄자들을 보통 때 대하면 정말 좋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야수성이 드러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항상 주의하면서 대해야 하는 면이 있다. 어떤 글에서 호랑이를 키우는 영국인의 모습이 있었다. 그 영국인은 호랑이를 사랑스런 표정으로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쓰다듬는 그의 옆 책상 위에는 실탄을 장전한 권총이 놓여 있었다. 나는 범죄성을 가진 사람들도 그와 유사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여의사의 무모하고 겁없는 행동을 전해 들으면서 걱정이 됐다. 어느 날 그 여의사를 소개한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 여의사가 뒷바라지를 한 죄수 중에 증권거래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대요. 그 사람을 믿고 그 여의사가 자기 돈 몇 억 원을 맡겼는데 당했답니다. 참 어리석은 여자에요.”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녀를 소개한 사람이 다시 나를 찾아와 이런 소식을 전했다.
“범죄자들과 한 집에서 지내던 그 여의사분이 한밤중에 엄청난 폭행을 당했답니다. 제가 여러 번 경고하고 주의를 줬는데도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내가 전과가 많은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심리를 잘 알아요. 그 여의사가 너무 자만했어요. 지금은 사라져서 어디 있는지 몰라요. 연락도 되지 않아요.”
더러 그 여의사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을 보면 뱀에게 물린 마술사나 들짐승이 있는 광야에 나간 사람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예수도 사랑으로 유다를 구원하지 못했다. 은혜를 잊고 배반하는 것은 악마의 특성이다. 악마라고 특별히 뿔이 나고 흉측하게 생긴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멀쩡한 인간의 속에 악령이 들어 그 지배하에 놓이면 그게 악마가 아닐까. 유다가 예수와 마지막 만찬을 하는 순간 악령이 그에게 들어갔었다. 따뜻한 햇볕은 양초를 물렁물렁하게 하지만 진흙은 도리어 딱딱하게 만든다. 사랑과 친절이 악인을 구원하지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악마들을 여러 번 만났다. 악마들은 진리를 말하면 화를 벌컥 냈다.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 더욱 분노하는 것 같았다. 악마는 있다. 천사와 악마를 구별해야 삶이 편한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