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님 영전에서
- 강 문 석 -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지만 큰 사랑과 은혜를 주신 은사님 영전에 서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인생 구순을 살아낸 사진 속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에서 지난 세월이 읽혀진다. 눈이 많은 고장 대구에 때 아닌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면서 처연함까지 더하고 있었다. 생전의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동족상잔의 6.25가 휴전으로 막을 내린 후였다. 당시에도 철길은 닿았지만 경북의 북단 오지였던 문경에서 선생님은 도내 제2의 도시였던 김천으로 전근을 오셨다.
전쟁이 터지기 전 도시 한복판의 김천초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동란에서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변방에 가교사로 얼키설키 지은 학교로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피란민 중에 빨갱이가 섞였다고 아군기가 퍼붓는 기관총에 억울한 최후를 맞으셨고 가장을 잃은 우리 가족은 포성은 멎었지만 살던 도시로 돌아가질 못하고 외가가 있는 시골지역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난 동네 청년들의 야학서당에 붙어서 천자문을 배웠다. 동란 전 살던 도시로 돌아왔을 때 1학년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학교에서는 바로 3학년을 시작토록 해주었고 그 다음해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무렵 대구매일신문이 매주 꾸미는 '아동문화란'에 산문과 동시를 자주 발표하면서 가끔씩 학교의 연극무대에도 섰다. 3남2여 자녀를 두신 선생님 댁에 가정교사로 기숙을 했던 것도 그때였다. 내가 특별히 가르칠 만한 실력이 되어서가 아니라 딱한 사정을 알고 선생님이 그렇게 배려해주신 덕분이었다. 그러곤 중학진학을 못하자 선생님은 입학금까지 대어주셨다.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맏이를 영안실에서 만나자 "아버지께서는 평소 친자식들보다 형을 더 사랑하셨다"는 말을 담담하게 전하면서 고인을 회고했다. 예순 중반의 셋째도 추억 속 앨범을 펼치듯 그때 자기에게 노래를 자주 가르쳐주곤 했다는 말을 꺼냈다. 숱한 세월 동안 부산에서 관세사로 일해 왔다는 둘째를 모르고 지냈던 게 미안했다. 직장에 첫발을 디뎠던 53년 전 성탄절에 작은 선물꾸러미를 들고 대전에서 대구를 찾았다. 대구역에서도 멀지 않은 종로초등학교에 선생님은 봉직하고 계셨다.
오륙 년 만에 뵌 때문인지 선생님께선 무척 반겨주셨고 더욱 정진하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그러곤 근무지를 부산으로 옮겼고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대구에서 뵌 날로부터는 8년이 흐른 후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러곤 다시 20여 년 세월이 꿈같이 흘렀다.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시던 23년 전, 부부가 작은 행운의 열쇠를 들고 교직을 명예롭게 마치는 선생님을 축하하면서 만수무강을 빌어드렸다. 쉰에 이른 때라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뜨였던 모양이다. 대구 변방의 고산초등학교였고 선생님께서 이룬 업적들을 두루 들을 수 있었다.
여선생님들은 퇴임하는 선생님에게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교실마다 붙은 ‘우리들 솜씨’에도 고사리 손들이 꾹꾹 눌러쓴 글씨로 선생님께 작별인사를 올리는 글들이 보였다. 서너 차례 그것도 짧게 뵈었지만 아내는 지금도 생전의 사모님이 잘 웃으며 성격이 서글서글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한 사모님께서 뭣이 그리도 급해 8년 전 먼저 이승을 등지셨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떠나보내고 그 세월을 혼자 살아내느라 선생님은 또 얼마나 적적하셨을까. 오래 전 선생님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건강기구를 지금도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다.
팔뚝 굵기의 통나무를 여러 개 뗏목처럼 엮어 만든 지압용 디딤틀이다. 선생님 모습이 담긴 사진앨범을 매일 꺼내보기란 어렵지만 거실의 한 공간을 차지한 헬스기구는 눈에서 멀어질 수 없으니 좋다. 비록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기구를 통해 살아있는 날까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대구역에서 오른 버스는 빗길을 한참 내달렸지만 목적지에 닿질 못했다. 버스에 붙은 노선도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엔 ‘대구대학병원’이 들어있질 않았다. 운전기사에게 물었더니 그는 짜증부터 냈다.
“대구대학은요, 경산에 있어요. 그라고 그긴 병원도 없어요.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쯧쯧쯧…” 상주가 일러준 '대구병원'에다 ‘대학’을 갖다 붙인 게 화근이었다. 새벽까지 카페에 올리는 글 한 편을 마무리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때문에 차를 몰 수 없어 열차를 탔는데 후회가 몰려왔다. 장례식장은 기존 병원건물 지하에 추가로 만든 것 같았고 단 하나 독실이었다. 도심에서 좀 먼 것 말고는 조용해서 좋았다. 선생님은 이제 세상의 모든 번민 잊고 먼저 영면해 계신 사모님 곁으로 떠나신다. 해인사 암자까지 동행해서 마지막 배웅을 해드려야 하지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간을 재촉해서 영안실을 나섰다.
“신호야, 마지막까지 수고 좀 해다오. 삼우제 지나고 부산에서 만나 생전의 아버님 회고하면서 옛 이야기 나누도록 하자. 신경 신웅과 가족들 함께 만날 수 있도록 네가 주선해다오.” 아직 백세시대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먼저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떠오를 때마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 같고 또 축복이란 생각까지 든다. 특히 오늘처럼 평생을 잊지 못하는 은사님이나 살아오면서 은혜를 입은 분들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지켜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열차에 올라 조용히 묵주를 꺼내들고 두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