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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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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헤리티지 시즌2: 알면 더 보인다…‘기막힌 유물’의 재발견
도대체 이 유물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걸까. 박물관이나 문화유산 현장을 다니다 이런 궁금증 가져보신 적 있으시죠. ‘더 헤리티지’가 시즌2에서 이 같은 유물들의 ‘기막힌 사연’을 소개합니다. 원래는 우리 삶의 한순간에 있다가 세월 속에 박물관 ‘보물’이 되기까지 스토리&히스토리를 캐냅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박물관의 흥미진진 뒷얘기도 함께 만납니다.
봄볕 좋은 연세대 신촌 캠퍼스를 거닐다 북쪽 숲 오솔길로 접어들면 단출한 2층 벽돌집이 보인다. 1927년 지어진 언더우드가(家) 사택(현재는 기념관)이다. 2021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의 1층 응접실 진열장에 진녹색 상어가죽 손잡이가 멋들어진 은빛 검 한 자루(복제품)가 전시돼 있다. “증조할아버지가 고종(재위 1897~1907)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칼입니다. 정식 명칭은 ‘사인검’이라고 하더군요.” 이곳에서 만난 피터 언더우드(한국명 원한석·69)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 겸 IRC컨설팅 대표이사가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사인검(四寅劍)이란 조선 왕실에서 벽사(辟邪·재앙을 막고 액운을 극복하는 행위) 용도로 특수 제작해 보관하거나 공신에게 하사한 도검이다. 원한석 이사의 증조부는 1885년 우리나라 첫 복음선교사로 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1859~1916)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설립자로 잘 알려져 있다. 원 이사는 이 검을 TV쇼 ‘진품명품’에 가져가 소개한 바 있는데 당시 감정가가 3억원에 이르렀다.
언더우드 가문의 4대손 원한석(피터 언더우드) 박사가 서울 신촌 연세대캠퍼스의 언더우드가 기념관에서 고종 황제 하사품 기증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진열장에 든 것은 그의 증조할아버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1859~1916)가 받은 왕실 사인검의 복제품으로 진품은 연세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강정현 기자
언더우드의 검이 연세대박물관에 기증된 건 2016년 그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다. 언더우드 후손은 이 밖에도 여러 해에 걸쳐 민비(명성황후)로부터 받았다는 장식손거울과 금팔찌 한 쌍도 기증했다. 이들 진품은 연세대박물관 상설전시실 2층에 전시돼 있다.
고종은 왜 언더우드에게 이 검을 수여했을까. 아무리 이들 부부가 척박한 조선 땅에서 교육·보건에 힘썼다 해도 왕실 보물을 이렇듯 여러 건 하사받은 외국인은 드물다. 게다가 이 검이 연세대로 오기까지 대한제국-일제강점기-광복-한국전쟁 등 근현대사의 파란은 유물을 대하는 옷깃을 새로 여미게 한다. “우리 것이라기보다 한국 것, 개인이 아니라 국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증했다”는 원 이사의 말처럼, 역사는 진한 흔적을 유물에 새겼다. 먼저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을미사변(1895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사인검(四寅劍)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1859~1916)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사인검(四寅劍). 칼집과 칼자루 등 장식까지 온전히 보관된 모습이다. 언더우드 가문에 전해져오다 2016년 연세대박물관에 기증됐다. 사진 연세대박물관
십이지 중에 인(寅·호랑이)이 네 번 겹치는, 즉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만든다 해서 사인검이라 불린다. 조선왕조 내내 궁중과 민간에서 만들었던 벽사용 도검으로 인의 양기를 빌려 사귀를 베고 재앙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일정한 자격을 거친 사람이 준비된 의식을 거친 뒤 주조했는데, 인시에 해당하는 2시간 동안 전체 검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핵심 공정 외에 나머지는 전후 수개월에 걸쳐 작업했다. 칼날이나 자루에 사인검 또는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이라고 새겼다.
언더우드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사인검의 길이는 72.5㎝, 칼집까지 하면 약 80㎝다. 한쪽 면엔 검명(사인참사검)을 포함해 총 30자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는 검결(검이 가진 힘을 발휘하기 위한 비결을 적어두는 것)로서 일종의 주문 같은 것인데 천기를 강림하여 땅의 신령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뒷면에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연세대박물관에 기증된 뒤 연세대동문이자 도검 전문가인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이 보존처리를 맡아 현재 깨끗한 모습으로 복원됐다.
불안에 떨던 고종, 궁 밖으로 탈출 기도
한 나라의 왕비가 침실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궁에는 총칼을 든 일본 군인들이 감시하듯 활보했고 내각은 반역 공모자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이 다음에 노리는 건 내가 아닐까. 왕은 불안하고 두려웠다. 나인들이 바치는 수랏상에 독이 들었을지 몰랐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바로 딴 통조림이나 날달걀 요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외국 공사나 선교사의 부인이 집에서 조리한 음식을 양철통에 담아 자물쇠로 잠가 보내자 겨우 입을 댔다. 외국 공사들이 대궐을 방문했지만 그의 말을 옮기는 조선인 통역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정상적인 정무가 불가능한 나날이었다.
우리 역사교과서는 이로 인해 아관파천(1896~1897)이 벌어졌다고 기술한다. 경복궁에 있던 고종이 친러 세력 도움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1년간 피신한 사건이다. 이후 경운궁(덕수궁)으로 귀환한 고종은 광무개혁을 선포하고 러일전쟁(1904~1905) 전까지 내정개혁을 도모한다.
세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관파천 수개월 전 ‘미관파천계획’이란 게 있었다. 말 그대로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빼내려 한 모의다. 궐 밖에서 무장 병사를 인솔해 오면 궐 안의 내통자가 문을 열기로 작전을 짰는데, 거사 직전 내부 밀고가 있었다. 1895년 11월 28일 현재의 청와대 인근인 북쪽 춘생문을 통과하려던 쿠데타군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주모자들은 죽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른바 ‘춘생문 사건’이다.
1885년 우리나라 첫 복음선교사로 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1859~1916, 왼쪽)와 그의 아내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사진 연세대학교
그런데 이 사건의 배후를 쫓던 당시 사법기관에 고소가 들어온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춘생문 사건 모의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혐의다. 현재 전해지는 사료를 토대로 김도형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전 연세대박물관장, 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가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제소자 본인이 춘생문 사건의 연루자로서 언더우드를 끌어들임으로써 본인의 죄과를 감추거나 감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일종의 ‘플리바게닝’(감형 협상) 수법이다.
이게 통한 것 같진 않다. 당시 고등재판소장(현재의 고등법원 격)이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보낸 공식 문서가 전해지는데, 이러저러한 고소가 들어왔으니 미국 공사관에서 이 사람을 불러 신분 조사하고 처리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다. 미국인 언더우드가 치외법권 대상이라 조선 측이 손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미국 공사는 언더우드는 물론 그와 가깝게 활동하던 선교사 겸 교육자들(아펜젤러, 애비슨 등)에게 ‘근신하라’는 주의를 내렸다고 한다.
손가방만 들고 추방당한 언더우드 가문
실제로 언더우드가 춘생문 사건을 모의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건 당일 언더우드가 그 같은 계획을 알았고 만약을 대비해 입궐해 고종을 보호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전부터 이들 부부는 고종과 무척 가까웠고 그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겼다. “황후 폐하의 야만적인 시해가 있은 후에 악랄한 행위로 최소한 이익을 보려는 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던 국왕은 신뢰할 자가 없었다.”(언더우드, 개인 연례 보고서 1895) “전하는 언더우드 씨의 손바닥에다 은밀한 전갈을 적은 쪽지를 전해 주곤 하였다.(중략) 임금은 언제나 독살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 195쪽)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는 여덟살 연상이었고 시카고 여자의과대학을 나와 1888년 조선에 왔다. 이 땅에 온 첫 여의사로 민비의 시의(侍醫)로 활동했다. 민비는 종종 그를 대궐에 불러들여 대화를 청했고 언더우드 부인은 그런 민비를 높이 평가했다. 회고록에서 “진보와 문명과 개혁의 벗이었던 총명하고 진보적인 왕비” “총명한 외교관”이라고 표현했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에 대해 “그가 우상처럼 여기는 왕비의 무참한 죽음을 겪은 뒤의 그의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쓰기도 했다.(같은 회고록, 194쪽)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1859~1916)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가 민비로부터 받은 손거울의 뒷면(왼쪽)과 앞면. 언더우드 가문에 전해져오다 연세대박물관에 기증됐다. 사진 연세대박물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1859~1916)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가 민비로부터 받은 팔찌. 한 쌍이 따로 떨어져 언더우드 후손에 전해져오다 모두 연세대박물관에 기증됐다. 사진 연세대박물관
왕비를 잃은 고종에게 선교사 언더우드 부부는 붙잡고 싶은 지푸라기였다. 수시로 언더우드를 불러 통역을 맡기고 은밀한 쪽지를 전했다. 독살 공포에 시달릴 땐 언더우드 부인이 싸서 보낸 도시락으로 연명했다. 춘생문 사건 직후에 다섯째 아들 의화군(훗날 의친왕에 봉해짐)을 언더우드 집에 피신시켰고 훗날 미국 유학 보내는 문제를 부탁하기도 했다. 왕실의 사인검과 민비의 손거울, 팔찌 한 쌍은 그런 우호와 신뢰 속에 건네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조선의 운명은 언더우드 가문에도 시련이 됐다. 일본 측의 감시 속에 고초를 겪던 언더우드는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16년 숨을 거뒀고 부인도 1921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이들의 외동아들 원한경(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1890~1951)은 부친이 창립한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총장)을 맡고 있던 중에 1942년 추방당했다. 진주만폭격(1941년)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일본의 적국이 됐기 때문이다. 자산을 몰수당한 원한경 가족은 손가방만 달랑 들고 이 땅에서 쫓기듯 떠났다. 1927년 원한경이 사택으로 지었던 2층 벽돌집의 세간살이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이리저리 사라졌다. 그나마 남은 것도 한국전쟁 때 불타거나 없어졌다.
1915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서울 종로 YMCA 건물에서 창립된 것을 기념하는 창립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11번째가 언더우드 선교사이고 둘째 줄 맨 왼쪽이 그의 아들 원한경이다. 사진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가문의 4대손 원한석(피터 언더우드) 박사가 언더우드가 기념관에 설치된 증조부·조부·부친의 사진 입간판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가운데 앉은 이가 1885년 우리나라 첫 복음선교사로 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1859~1916)이고 왼쪽이 그의 외아들 원한경(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1890~1951)이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 원한경의 아들이자 원한석의 부친인 원일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1917~2004)의 모습을 합성한 것으로 실제 이들 3대손이 함께 찍은 건 아니다. 강정현 기자
사택과 1만 평 부지 연세대에 기증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늘 하신 말씀이 ‘주는 만큼 나중에 돌려받는다’였는데, 살면서 실감합니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원한경)가 일본한테서 쫓겨났을 때 손가방에 뭘 챙겨 갈 수 있었겠어요. 천만다행인 게 그 전부터 미국의 친척들에게 ‘우리 이렇게 산다’고 소식 전하면서 사진도 보내고 조선의 물품도 보냈나 봐요.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그들이 유품들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 우리에게로, 한국으로 되돌려줬어요. 어머니 말씀처럼 주는 만큼 돌려받은 거죠.”
원한석 이사의 부친은 원한경의 장남 원일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1917~2004) 박사다. 원 이사에 따르면 부친 작고 후에 그가 남긴 금고를 열어보니 예사롭지 않은 금팔찌가 있었다. 부친 생전에 명성황후 하사품이라고 들었던 원 이사와 유족들은 이 유품을 연세대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미 언더우드 가문은 수차례 각종 석조 문화유산과 기록물을 기증했고 손거울도 2000년대 초반 박물관에 기증됐다. 무엇보다 원일한 박사는 1974년 사택과 주변 부지 1만여 평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덕분에 연세대 신촌 캠퍼스가 오늘날 규모로 확장됐다. 사택은 2003년부터 언더우드가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언더우드 가문의 4대손 원한석(피터 언더우드) 박사가 연세대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기증 유품을 둘러보고 있다. 그의 증조할머니이자 민비의 시의로 활동했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가 민비로부터 받은 손거울과 금팔찌 한 쌍이다. 강정현 기자
“할아버지 땅을 시가로 환산하면 수천억원이라지만 그거 팔아서 뭐 해요. (우리 가문이) 여기에 왔던 이유가 선교사 활동하려는 것이었는데, 그때 땅 산 게 올라서 부자 되는 건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는 거죠. 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얘기 들었기 때문에 한국에 기증할 때 아무 생각 없었어요. 아깝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원한석)
그렇다면 사인검은 어디서 왔을까. 언더우드가 하사받은 사인검은 외아들 원한경을 거쳐 그의 넷째이자 원일한의 동생인 원득한(1927~2023)에게 가 있었다. 2016년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흩어진 그의 후손들이 연세대학교 초청으로 기념행사를 했는데, 이를 계기로 사인검을 기증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던 원득한 박사가 자택에서 검을 가져와 연세대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 측은 공항까지 마중 가서 검을 안전하게 옮겨 오는 등 예우를 다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원칙이 가장 중요”
역사의 아이러니는 애초 원한경 가족이 이 땅에서 쫓겨났을 때 이들이 한국이나 연세대로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1944년 연희전문학교를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세브란스 의전을 아사히 의학 전문학교로 바꾸면서 설립자인 미국 선교사들의 색채를 지웠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정이 실시되자 연희전문학교가 ‘적산(敵産)’으로 분류됐다. 미군정은 적산을 불하하면서 엄정한 자격이 있는 원주인에게만 되돌려준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연희전문 동문들은 학교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원주인인 언더우드 일가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한경 박사가 한국에 돌아오게 된 이유다. 태평양전쟁 말미에 미 육군성을 도와 일했던 그는 1946년 한국에 돌아와 미군정 고문을 맡았고 돌려받은 연희대학교의 명예총장을 지냈다. 다시 미국에 가 있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민간 고문 자격으로 내한해 부산 일대에서 활동하다 과로가 겹쳐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의 아들 원일한과 원득한도 각각 미 해군과 미 육군 소속 통역장교로 활약하며 군사 용어 번역노트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 형제가 정전협정서 초안을 타이핑하는 장면이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다.
1951년 정전협정서(의정 초안)를 작성 중인 원일한(오른쪽), 원득한 형제. 이 의정 초안을 시작으로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사진 연세대학교
원한석 이사는 증조부 언더우드로부터 4대째에 해당한다. 한국어를 영어 못지않게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평생 한국인 못지않은 애착심으로 살았지만 이게 자녀 세대까지 이어진다고 장담하진 못한다. “우리 이후 5세대, 6세대는 한국에 와서 살겠다고 하는 이가 없다. 딸도 지금 사우디에 살고 있는데 남편 직장 문제로 한국에 살긴 어려워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언더우드가의 한국 사랑이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은퇴한 사촌도 워싱턴 DC에 살면서 매일 한국 뉴스 챙겨 보고 어떨 땐 나보다 더 잘 안다”고 하면서다.
“사실 많은 사람이 저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저도 똑같이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뿐이에요. 제일 큰 혜택이랄까 선물은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훈을 받은 거죠. 어떻게 올바르게 살 것인가는 되게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먹을 게 있는 수준만 되면 1000억이 더 있은들 뭐가 달라질까요. 제가 부모님이나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건 원래 목적, 원래 생각, 원칙을 지켜가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요새는 뭐, 요만한 것 때문에 막 싸우는데, 이해가 안 가요 진짜.”
2016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1859~1916)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그의 후손들이 연세대 언더우드 동상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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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