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이슬이 젖은 잔디밭에서 퍼팅을 해보지 않고 호치민을 떠난다니...금빛으로 물드는 그린을 모른다니!”
베트남에 근무하면서도 골프는 남의 일로 여기고 학교와 집만 쳇바퀴처럼 다니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선배 교사가 골프를 꼭 배워서 귀국하라고 조언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해외근무를 하는 처지에 골프는 사치스러웠다. 그 시간에 차라리 호치민대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버스로 판티엣, 달랏, 호이안으로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더 가치로워 보여 필드에는 한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2년 근무를 마쳤다.
잔디가 주는 평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봄이면 무덤가에 잔디가 올라오고 그 위를 메뚜기와 방아깨비가 날아다니고 한편에는 할미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뒷산이 좋아 봉분까지 올라가 놀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는 편지봉투나 라면 봉지에 잔디씨를 훑어오라고 종례시간마다 강요를 했다. 빈 병, 폐지, 고철까지 토요일이면 학교에서 내라는 것들을 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교가 파하면 무덤가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잔디씨를 훑던 시절... 푹신한 잔디밭에서 풀향기를 맡으며 저녁노을을 보는 일은 고단한 일을 하면서 맛보는 평화이기도 했다.
마우이에 사는 영 언니집 마당도 잔디가 아름다웠다. 할레아칼라에서 갑자기 날이 흐려 캠핑 대신 언니네 마당에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새벽에 일을 나가는 언니가 잠자리에 들자 우리는 갖고 간 화투로 고스톱을 쳤다. 하루에 딱 세 판! 혹시나 내가 나중에 치매가 걸릴까 걱정하는 아이가 어디서 들었는지 고스톱을 치면 예방할 수 있다면서 시작한 고스톱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를 위해주는 마음이 귀여워 시작한 놀이인데 이것도 어느새 6년이 되었다. 누가 볼새라 몰래 세 판을 치고, 마당으로 난 창문을 여니 하늘에 별들이 듬성듬성 떠 있다. 깔개를 가져와서 그 위에 비치 타올을 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바람에 흩어지더니 북두칠성이 뚜렷이 보인다. 뉴질랜드 마운트 쿡에서 빽빽하게 차 있던 별들과는 비교할 수 없어도 코 끝에 와닿는 풀향기와 하나씩 둘씩 돋아나는 별들은 그 자체로 감미롭다. 타고난 음치임에도 콧노래가 나왔다. 이제 아이가 잠들면 나의 시간이 찾아온다.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마저 읽고 언니에게 선물을 해야 하기에 책장을 폈다. 소품을 즐겨 그리다가 대작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진다. 달팽이 뿔에서 쇠뿔을 봐야 한다지만 대작은 소품이 감히 따를 수 없는 풍모가 있다. 헐먼 멜빌도 모비딕에서 그렇게 말한다. ‘벼룩에 대한 책을 쓰려고 한 사람은 결코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없다’고.
운명을 가르는 수술이 가까워지는데도 그의 일기에는 틀니를 하느라 이를 뺐다는 소소한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1974년 침상에 ‘금식’이란 팻말이 걸려있고 그의 일기는 끝이 난다.
하와이여행길에서 시작한 김환기의 책! 아내 김향안은 남편을 추도하려고 해마다 그의 생일과 또 세상을 떠난 날에 전시회를 연다. 그리고 무덤을 찾는다. 거기에도 여지없이 잔디는 무성하다. 융단처럼 푹신하게 깔린 초록빛 잔디 위에 빨간 꽃다발이 놓였다. 책을 덮고 나도 언젠가는 선배교사가 말한 그 잔디의 기쁨을 맛보는 날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첫댓글 선배교사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
이제부터라도 배우려고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