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빛 / 강기석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집이 그리웠다. 자신이 없었다. 수시로 두통약을 먹는 몸으로 여행을 감행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불안과 후회는 비행기가 히드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질척거렸다.
런던 교외에서 1박을 하고 오후 늦게 파리로 향하는 유로스타를 타면서 집에 대한 그리움은 옅어지기 시작했다. 좁은 눈을 비집고 몰려오는 이국의 풍경 때문에 내 생각이 내 안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보고, 듣고 그리고 기분대로 생각했다. 유럽의 충격이 내 정신을 마구 흔들었다.
파리의 불빛은 외로웠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와 문자 그리고 낯선 리듬이 횡행하는 거리는 이방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살갗을 뚫고 들어온 지독한 소외감은 차라리 하루살이가 되어 불빛 속에서 몸을 태우라고 유혹했다.
유혹은 다음날 노트르담 사원으로 이어졌다. 하늘빛이 인간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면서 신의 빛이 되었다. 때로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순수한 고음처럼 붉게, 때로는 파이프 오르간의 웅혼한 저음처럼 내 가슴에 질문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진실했는가? 당신은 진실한가? 그러니까 당신은 진실 할 수 있는가?’
침침한 불빛을 헤치고 백발의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괴고 앉았을 빅토르 위고를 찾았다. 위고에 의해 창조된 빛 속에서 살다 간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와 종루를 지켰던 꼽추 과지모도가 보고 싶어 두 손 모아 기도했지만 부활의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원 옆을 흐르는 센 강변에는 미루나무가 여름 햇빛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고향 마을 큰길가에서 보았던 미루나무와 같은 미루나무인데 도대체 같은 미루나무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색과 형태를 파괴하여 또 다른 미를 추구한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흉내 내고 있었다.
화가들이 건립한 신전으로 갔다. 몽마르트의 화가들은 빛의 향연을 주제했다. 붓이 물감과 기름을 움직여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진리 안으로 안내했다. 건물도 사람도 나무도 그리고 하늘도 모두 빛의 제의에 몰두했다.
지나가던 햇빛 한줄기가 젊은 화가의 비취색 귀걸이를 예리하게 퉁겼다. 귀걸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시선을 안내했다. 나는 그 빛이 비치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곳으로 가야한다는 재촉은 분명했다. 빛은 현재일 뿐인데 때로는 과거가 되기도 한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는 길에 콩코드 광장이 있었다. 녹슨 단두대에는 아직 피비린내가 남아 있었다. 루이14세는 자신의 생각에 갇혀 단두대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향하여 번뜩이는 것을 보지 못한 절대군주였다. 절대는 외롭고 불안하고 그리고 짧았다. 절대는 가장 강한 듯 가장 약하고, 가장 화려한 듯 가장 초라하다는 것을 그는 단두대에서 깨달았을까?
궁전의 화려한 방들을 지나면서 이곳을 굳이 관람해야하는 까닭을 따졌다. 궁전의 빛을 통해서 절대 군주를 찬양하고 있는지 혹은 응징하고 있는지를 시비하고 싶었다. 위대한 유산이라는 미명하에 절대군주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이 용인되는 반면 권력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 따위는 무시되거나 잊혀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거울의 방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해가 지고 궁전이 어두워진다. 하늘에 둥실 뜬 달이 남쪽 연못에 잠겼다가 사뿐히 날아올라 거울의 방에 걸린다. 푸른 달빛이 가득한 방안에는 달빛보다 더 푸른 음악이 흐른다. 음악을 따라 춤사위가 빚어진다. 군주는 절대 강자의 절대 고독을 춤사위 속에 숨기고, 욕망으로 충혈 된 눈으로 달빛을 훔친다.’
나는 왜 거울의 방에서 이런 상상을 하는가? 나는 왜 달빛이 그의 발아래 굴욕하게 하는가? 아니, 내 가슴 깊은 곳에 절대군주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펠탑으로 가면서 내 속에 숨겨진 욕망의 높이를 가늠해보았다.
에펠탑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은 파리의 옷을 벗겼다. 낮은 언덕에 의해 지켜져 왔던 파리의 순결은 침략자의 거만한 시선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나도 에펠탑의 권력을 등에 업고 까마득히 높은 전망대를 돌며 파리를 유린하는 쾌락에 빠졌다.
파리 시가지는 빛이 만든 빛이었다. 광장과 광장에서 뻗어나간 도로가 만든 발산과 수렴의 무한한 연쇄는 수많은 광원에서 방사되는 빛과 빛이 조합하여 만들어낸 위대한 조형품이 되었다. 격한 감동으로 가슴이 뛰면서 현기증이 났다. 혼미한 정신이 나에게 저 빛 속으로 뛰어내려 파리의 역사가 되라고 했다. 파리의 유혹은 그토록 무자비했다.
에펠탑에 조명등이 켜질 시간에 센 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에펠탑에서 바라보았던 센 강과 센 강에서 바라보는 에펠탑은 둘이 아니었다. 유람선 위의 사람들과 에펠탑 위의 사람들은 서로 얼려 하나의 빛을 이루었다. 파리의 여신이 서로가 서로의 영혼 속으로 유영함을 허락한 것일까? 나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침의 덧없음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모나리자를 포기할지라도 오늘밤만은 센 강을 두고 그냥 갈 수 없었다.
루브르박물관은 사각뿔의 날카로운 사선으로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극복하고 있었다. 모나리자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웅얼거리는 가운데서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품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진품이라고 우겼다. 여기까지 와서 진품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진품과 가품을 구별할 능력이 없을 바에야 진품과 가품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동네 이발관에서 처음으로 모나리자를 보았다. 주변 사람과 다른 모습의 얼굴이 신비스럽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하여 오래 쳐다보지 못했다. 중학교 미술시간에 모나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모나리자의 미학을 알지 못했다. 나이 더 들어서도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따라 나도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말할 뿐 내 미감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모나리자의 눈빛이 참 따뜻했다.
스위스로 가는 테제베 안에서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졸다가 흠칫 놀라서 깼다. 파리에 도착한 이후에 두통약 먹는 일을 잊고 있었다. 서둘러 가방을 뒤져서 약을 꺼냈다. 물을 준비하고 입에 약을 넣으려는 순간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통이 없는데 두통약을 먹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파리가 두통을 앗아가 버렸다. 파리의 빛이 알 수 없는 불안과 시름으로 공통 받던 나를 해방시켰다. 파리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두통은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의 빛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