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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창세기 6:1~22 “ 죄악의 관영 ”
세상이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악이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다는 것은 죄가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물이 가득 차면 보이지만, 죄는 가득차도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죄악은 냄새도 안나고 색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가득 차서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도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유황불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롯과 그 아내와 그 딸들이 미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죄악이 가득찼으니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 죄가 가득함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쾌락과 자신들의 정욕을 만족시켜주는 좋은 환경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윤리 도덕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결국은 죄가 관영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가득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셋계열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이 재주가 많았지요? 성벽을 쌓고 악기를 다루고 문명에 앞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골 총각이 서울의 세련된 아가씨를 보게 되면 시골의 옆집 갑순이가 갑자기 촌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시골에 있을 때는 가장 이쁜 줄 알았는데 그러니 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아내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눈에 아름다운 여자를 자기 마음의 소욕대로 아내를 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혼뿐만이 아니겠지요.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쁜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7-39을 봅시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모든 것을 자기의 기쁨을 위하여서만 하였지 주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고 결혼 하는 것을 왜 하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한결같이 왜 한다고 합니까? 자신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와 태도가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니 나의 기쁨을 채우면 되는 것이지 내가 왜 남의 기쁨을 채워 주어야 하는가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남의 기쁨을 채워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로 인하여 궁극적으로는 나의 보람 나의 뿌듯함이라는 대가가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이기적인 움켜짐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지만 결국은 자기 영광입니다. 이런 모습이 죄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이지만 성경이 이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 하고 하늘나라 시민이라고 하면서도 사는 모습이 방금 말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5-35절을 봅시다. “봉독”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처럼 여기고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처럼 하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장가가면 어떻게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고 여자가 시집가면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때 신앙은 못믿는다 그러지요 시집 장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시집을 가든지 장가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오늘 우리는 범사를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가정생활, 직장생활, 자녀교육, 장래계획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점검 하셔야 합니다. 순전히 자기의 안락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면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죄가 관영한 모습입니다. 로마서 14: 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도 나를 위하여 죽어도 나를 위하여 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나쁜 짓하는 것만 죄악이 관영한 것이 아니라 주인을 몰라보고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악이 관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동할 때 욕망에 이끌려 행동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욕망에서 나오는 행동은 결국 어떤 모습으로 가게 됩니까? 소유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길에 가다가 예쁜 꽃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꺽어다가 자기 소유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 때의 사람의 죄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죄도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신문에 나온 이렇게 전면광고를 통하여 목사와 장로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자기거라는 소유욕의 싸움입니다.
이러한 죄악이 관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죄가 관영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되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착한데 죄를 자꾸 지어서 죄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가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통해서 나오는 후손들이 어떤 자들 입니까? 네피림이라고 그 당시의 용사라는 것입니다. 이 네피림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천사에게도 하니까 천사와 사람의 딸들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렇게 보기는 무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결혼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후손을 바보가 되게 하시면 될텐데 오히려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시대의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가 고시를 패스하고 사(師)자 달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저 집이 복 받았다 그러지요. 그런데 청문회 보니까 그렇지도 않은데 자꾸만 그러한 영웅, 유명한 사람을 좋아 하는데 그런 자가 나온다고 죄악이 관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있다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영웅과 유명한 자를 원하여도 이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계획이 어떠합니까?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가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늘 착하다가 한번씩 악한 것이 아니라 항상, 늘, 언제나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세상에는 죄악만 관영한 것입니다. 12절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적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그냥 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람뿐만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다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탄식 앞에서 돌이켜 봅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나의 소유를 확장하면서 그것을 오직 나의 기쁨만을 위하여서만 사용하여 왔습니까? 겨우 십일조하고서 헌금의 의무는 다 한 것처럼 마음 홀가분하게 여기고 나의 나됨을 나의 실력으로 여겨오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전부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러한 세상이기에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심판 하셔도 노아 홍수때 심판당한 사람처럼 아무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나 이것 하였잖아요. 저것도 하였는데요. 그런 것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라야 심판을 면제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 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만큼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아무도 자신있게 나는 나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저주받아 심판받고 멸망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믿으십니까? 기도할 때만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그 말이 이처럼 우리 가까이 우리안에 함께 들어붙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쯤 말씀을 들으시면 우리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그래도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든지 아니면, 그래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심판을 면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가르쳐 다오 그러면 내가 목숨을 걸고라도 내가 이루어 내어 나의 구원을 따 내겠다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경우입니까? 그래도 나는 안심이야 하는 분계십니까? 저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얼마나 내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함께 살아보지 않고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두 번째를 기대 해볼까요? 어떻게 하면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분명한 비결을 알려주거나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는 규칙을 정하여 주는 곳이 이단입니다. 기존의 교회를 부정하고 자신의 또 다른 몇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여 그것을 지키고 이룸으로 심판을 면제 받으려는 발상이 이미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죄를 지적하며 우리의 할 말이 주여 긍휼이 여기소서 라는 말 외에 무슨 할말이 있느냐 그러니까 어떤 집사님이 그 말을 외워 두어야지 그러는 것입니다. 웃으며 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도 그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심판을 받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이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가 무언지를 모르니 은혜받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분의 마음입니다. 우리쪽에서 무엇을 하였기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내는 비결은 없습니다. 무슨 비결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지만 비결은 없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 아는 것이고 은혜를 입은 자만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천하가 물의 심판이 임하여도 노아는 구원받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노아만 구원에 이릅니다. 노아의 가족은 노아의 그 은혜에 함께 참여된 자들입니다. 가정으로 보자면 단 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 시대에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 칭함을 얻고 하나님과 동행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은혜를 입은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참으로 자신이 멸망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생각하기 보다는 범사에 나의 기쁨 나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악의 관영함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세상의 주인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희생당하신 그분이 희생시킨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는 오직 그분의 말씀하나 표정 하나에도 온갖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라면 그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그 머리털, 여인의 면류관이라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맞추는 그 여인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속에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알아가며, 또한 그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1. 창세기 6:13-7:24 “ 방주에 있던 자만 ”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야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도 과학적으로 입증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서 방주의 파편을 찾는 다든지, 방주를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주를 만든 사람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의 쟌센이라는 사람이 성경의 규빗을 환산하여 방주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137m, 폭이 23m, 높이가 14m로 나오는데 톤수로는 약 32.000-35.000톤까지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배의 모양이 상자처럼 생기고 3층이니까 똑 같은 배보다 1/3을 더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하워드 오스굳이라는 박사는 이 방주안에 2,400종의 포유동물, 1만종의 조류, 1천종의 사류, 1250종의 도마뱀류, 10만종의 곤충류와 1년간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여 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군에 있을 때 노아 방주에 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성지공전 조선공학 교수라는 분이 노아 방주에 대하여 상세하게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요즈음도 사람이 손으로 나무를 사용하여 배를 만드는 사람의 하루 작업 분량이 있답니다. 그러므로 그 작업분량을 계산하여 노아 가족 남자 4명 곱하기 120년에서 안식일 빼면 정확한 배의 톤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첨단 과학으로 계산해 보면 폭풍우에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배가 이 정도의 크기이며, 모든 짐승의 무게와 사람이 함께 일년간 먹을 양식을 계산하니 조금 남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배 안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고 또 배가 울렁거리니 육지에서의 절반 정도만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게를 빼니 정확하게 노아 방주의 만든 기간, 톤 수, 먹을 양식까지 정확하게 계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방주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 하고 17일 이지요. (7장 10-11, 8:13-14)
이정도로 노아 방주의 정확한 재원을 설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의 창조과학회 하는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성경을 증명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여 성경이 증명된다고 하여도 예수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강을 듣고 나서 한사람에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니 이 사람이 바닷가 출신이라 직접 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배의 가장 중요한 연결하는 핀이 그 정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겠느냐고 합디다. 상자처럼 지어졌다고 말한다 해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