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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도마
요 20:24-31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24-31 / [도마의 불신앙] 제자 가운데 쌍둥이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마침 그 자리에 없었다. 25) 그들이 도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다오' 하고 말하자 도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거기에 손가락을 넣어 보며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후에 제자들이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들과 같이 있었다. 문은 역시 잠겨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번과 같이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내 손에 넣어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28) 도마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외치자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31) [이 책를 쓴 목적] 예수의 제자들은 이 책에 기록된 것 외에도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다른 이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을 기록해 두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고 또 그분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제의 본문에서 모인 곳의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손과 옆구리를 직접 확인하며 부활의 주님에게 사명을 받았습니다.
함께 있지 않은 제자 도마(24-25) 사실 도마의 문제는 다른 제자들보다 유달리 의심이 많았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여 있는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의 본문에서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자리에 도마가 있었다면 도마도 부활하신 주님을 함께 만났을 것이고, 손과 옆구리에 있는 주님의 상처도 함께 확인해 보았을 것입니다. 도마의 진짜 문제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라는 말에도 도마는 “내 손을 직접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답합니다. 당시에 예수의 부활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나 도마처럼 반응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기 전까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간 줄로 알았습니다. 도마를 믿음이 없다고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자리싸움’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은혜의 자리에 있으면 믿음이 생기고 그 자리에 내가 없으면 은혜도 없고, 도마처럼 의심과 불신이 생기는 것 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6-28)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는 도마가 없었지만, 여드레를 지난 지금은 도마도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문들이 닫혀 있는데 예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로 다시 들어오십니다. 이미 ‘여드레’ 전에 제자들을 위해서 하셨던 일을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다시 연출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도마의 손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대보라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예수를 확인한 도마는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도마의 고백은 신앙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도마에게 예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스승이나 선생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와 3년 반 동행하면서 베드로 외에 아무도 하지 못했던 고백이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29-31) 31절은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도마처럼 직접 확인하지는 못해도 성경을 통해 부활을 믿고, 생명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 은혜의 자리에 있지 않아서 의심과 불신만 쌓여가는 신앙인은 아닙니까?
어느 궁인이 압바 미오스에게 “정말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느냐?”고 물었다. 얼마쯤 대답을 이어가던 노인은 군인에게 물었다. “여보게, 그대는 겉옷이 해지면 당장 내다 버리는가?” 젊은이가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지요. 잘 고쳐서 다시 입을 겁니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그렇군. 자네가 구멍 난 외투를 그렇게 애지중지할 정도인데,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시겠는가?” – 유시 노무라, <사막의 지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규현 목사
우리는 불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불안합니다. 그리고 불안은 점점 깊어집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13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2위 국가와 차이가 큽니다.
불신앙의 시대에 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만,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물의 안전장치를 점검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우리의 믿음은 건강한가 수시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우리의 삶에 믿음보다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가, 이것이 삶과 행동과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각 나라마다 문화가 있습니다.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종교입니다. 종교의 힘이 큽니다. 무엇을 믿는가가 문화를 결정합니다.
좋은 것을 믿으면, 삶의 질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을 믿으면, 그것이 삶을 불행으로 몰아갑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믿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교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학생들은 배울 수 있습니다. 거짓을 가르친다고 생각한다면, 교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의부증(疑夫症), 의처증(疑妻症)은 무서운 정신질환입니다. 약도 없습니다. 남편을 의심하는 것, 아내를 의심하는 것, 무서운 질환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불확실함으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도마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했을 때, 아마 제자들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할 것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의심한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의심을 거쳐 믿음이 생깁니다.
고민하며 자라는 믿음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얼마든지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질문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의심의 안개가 걷어지면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의심의 안개가 짙은 사람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반면 의심을 빨리 극복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는 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지성, 자신의 경험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아담은 자신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지성사회라고 합니다. 고도의 지식사회입니다.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해서 똑똑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성의 작용이 중요합니다. 의심하는 것도 일종의 이성의 작용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지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무지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공부하려면, 지성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학문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학문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죄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중세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시대가 함께 열렸습니다.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문학입니다.
신의 구속을 불편해하는 문화가 봇물 터지듯이 일어났습니다.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진리에 대한 오류를 바로 잡는 일도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성역을 훼손하려고 하는 의
도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성의 작용입니다. 종교개혁과 인문주의가 같이 일어난 것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지성을 닦으면,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성경을 읽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 대들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벤 허(Ben Hur)〉의 작가 루이스 월리스(Lewis Wallace)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심히 읽다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지식이 점점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한 영역을 깊이 파고들어갑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자신이 전공한 것 외에는 잘 모릅니다.
많이 아는 것 같은데, 한 영역 밖에 알지 못합니다. 한 영역만 연구하다 보니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객관성이 없습니다.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예측이 빗나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성의 한계입니다.
지성이 강조되고 인간의 지식이 고도화되는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불안이 넘쳐납니다. 너무 많이 알아서 행동하지 못합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근심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용기를 점점 잃습니다. 용기가 없으니 행동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점점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살아가기 편하면 행복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공황장애를 앓습니다. 겉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공황장애를 앓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고 인기도 있고 돈도 벌고 어려움이 전혀 없는데, 갑자기 공황장애가 다가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하여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 외에도 지속적으로 불안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벌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며 살지만 불안은 커져갑니다.
이전보다 더 좋은 자리에 앉아있는데, 마음은 불안합니다. 사회는 고도화되고 전문화되어가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허무 속에 살아갑니다.
사람의 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는 지식과 지성이 믿음을 몰아냅니다. 믿음의 자리에 인간의 지성이 자리 잡습니다. 사람이 너무 똑똑해졌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엄청난 일을 만들어냅니다. 가상을 현실로 바꾸어놓습니다.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유전공학에서는 인간복제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현대과학 안에는 진화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합니다. 과학자들은 미래가 자신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부하면, 인간의 지성은 모순에 빠집니다. 잠언 1장 17~18절에 보면,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닌 세상의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아집니다. 세상의 지식을 더하는 것은 근심을 더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은 것으로 인해 갈등이 많아졌습니다. 잘 몰랐을 때가 오히려 나았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니 걱정이 많아졌습니다. 지식이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무시한 지성의 한계입니다.
지성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고, 강하게 자기를 방어하게 합니다. 지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석하게 하고 따지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행동을 가로막습니다. 이것은 믿음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많이 알수록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소극적으로 행동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지식, 지성은 합리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기독교는 합리성을 거부하거나 상식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합리성과 상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해되어야 믿으려고 합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마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믿는가를 강조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믿는가보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마가 맞이한 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부활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을 뛰어넘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부활은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여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말했습니다.
부활은 구약시대부터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최고의 기적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비밀이 부활 안에 감추어져있습니다.
4복음서를 보면, 수많은 기적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바람을 잠잠하게 하신 것, 오병이어의 기적, 나사로를 살리신 것, 물 위를 걸으신 것, 물이 포도주 되게 하신 것 등 모든 기적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마는 자신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못했습니다. 사실이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성경을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마는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지 않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보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믿을 때, 마귀가 춤을 춥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살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도마의 눈이 열렸습니다.
오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날 형식적 신자, 가짜 신자가 많은 시대입니다. 껍데기 신앙이 많습니다. 유사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런 시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20장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신뢰가 쌓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머리로 지식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경험이 쌓여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자칫하면 지적 유희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1세기 그리스도인 가운데 영지주의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적 탐닉에 빠져 만족했습니다. 경험적인 것을 강조하면, 신비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기설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다’보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믿게 하셨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믿어진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알고 이해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진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했을 때, 성경의 내용이 이해됩니까? 성경의 내용이 이해되지는 않지만 믿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이해되어져서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어집니다.
우리가 안다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리가 확인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을 검증하려 해보세요. 검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검증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어지게 하셔서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놀랍게 바꾸어놓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보다 확실하게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면 강력해집니다. 후에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도마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놓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환난과 시련을 뚫고 나아가게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세상을 능히 이깁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훈련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연연해합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매이고, 그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자유를 경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쇠퇴하고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고 믿으면,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엄청난 것입니다. 눈이 바뀝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환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부활 이후에 주어질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본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에 매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짓눌리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환난을 이기고 나아갑니다.
믿음의 길로 들어선 이후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믿음의 길로 들어서면 삶이 달라집니다. 물 위에 떠있던 배가 모터를 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을 밀고 나아갑니다.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습니다.
참된 믿음은 행동을 이끌어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삶이 달라집니다.
믿음이 생기면, 삶이 달라집니다. 믿음을 가졌다면 이전처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생각이 바뀝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생각합니다.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도, 부활 신앙이 있으면 승리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행동하게 합니다. 추진력을 갖게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면, 우울증에 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외쳐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문화의 지배를 많이 받습니다. 문화가 무엇입니까? 그 시대가 가진 보편적 흐름, 생각입니다. 우리가 시대의 주류적 생각, 사고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의 주된 사고방식에 휩쓸리지 않고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행동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환경에 떠밀려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우리를 행동하게 해야 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롬 14:23).
상황의 피해자가 많습니다. 상황이 이러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동하면, 상황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상황이 아닙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경험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이 많은 사람은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경험한 것은 강합니다. 경험한 것이 기억 속에서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기억을 극복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기억에 매이지 않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생기면 반응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확신이 생기게 합니다. 그래서 행동하게 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기도하셔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소극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평안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행동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각을 사용하시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세요.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강력한 확신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쉬운 길로 가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욘 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가는 것을 도와주시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우리의 행동 기준이어야 합니다. 경험을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말을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지식을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을 분석하여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저주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순종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믿음을 낳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더 큰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삶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순종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축복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활력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넘칩니다. 대화하다 보면, 열기를 느낍니다. 매력적입니다.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쁨이 넘칩니다.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 은사, 재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압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데,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있어야 행동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삶의 방향을 정해줍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행동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인해 주저앉고 움츠러드는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과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믿음이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그냥 두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다시 일으키시고, 도마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탁월하십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는 탕자를 기다렸습니다. 탕자가 자신의 길을 돌이키려고 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셔서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결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눈을 떠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인생의 에너지를 한 곳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의심하게 합니다. 움츠러들게 합니다.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장난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끙끙 앓고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환경에 휘둘리며 꼼짝하지 못하고 참된 고백이 없는 신앙으로는 이 시대에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신앙은 엄청난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는 것보다 확실히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의해 구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 이후에 어마어마한 세계가 우리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세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세요.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고후 6:10).
우리에게 돈이 없어서, 지식이 없어서, 방법이 부족해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분명히 가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막히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환경이 열악해도 상관없습니다. 약점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의심하는 시대, 부정(否定)하는 시대, 반역하는 시대, 모든 것을 머리로 판단하는 시대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바닥납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믿음이 없으면 바닥을 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지면 죽는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봅니다. 믿음이 삶을 이끄는 동력이 되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이 특권입니다. 믿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눈으로 볼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두려움 없이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것
요 20:24-27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과 일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까지 무엇을 하셨습니까? 복음서들의 증언 속에서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일을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평강을 비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가르치시고 설득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먼저 하신 일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도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첫 안식일이 다 지나려고 하는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제일 먼저 찾아갔던 여자들을 만나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평안하냐” 하신 것입니다(마28:1, 8-9). 도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도마도 함께 있을 때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절망과 회의와 불안과 슬픔과 후한과 죄의식과 자괴감을 일시에 씻어주는 해방과 구원의 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절망과 회의와 불안과 슬픔과 후한과 죄의식과 자괴감으로 인해 제자들 스스로는 가질 수 없었던 평강을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확실히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평강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셨음을 알리시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셨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주님께서 부활하시자 제자들은 그 사실을 금방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만나 뵈었다는 다른 사람의 말도 믿지 못했고, 자기 눈앞에 와계신 주님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것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만져 봐라. 내 손과 발을 봐라” 하셨고, 그래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어디 먹을 것 없느냐” 하시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진짜 몸으로 다시 사신 주님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풀어서 당신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 당신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깨닫게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으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집 안에 있을 때에 다시 그들 가운데 오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하실 만큼 제자들이 부활하신 당신을 믿게 하시려 애쓰셨습니다(요20:24-27). 왜 이렇게 열심히 부활을 믿게 하려 하셨습니까?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활은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이 헛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바로 참 메시야이시고 그의 십자가가 참 구원의 능력임을 확증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며 십자가가 구원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구원의 성취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가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다 메어야 할 것임을 확신시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2-19)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또 훗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믿음을 헛되지 않게 해주는 힘이고 따라서 크나큰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전하시고 당신의 부활을 확신케 하신 후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부활의 주님과 그를 통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하시고 그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능력으로 입히실 때까지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고 지시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49절을 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본문의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앞머리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신 승천하시기 직전의 예수님의 말씀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보다 분명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는 그것을 전하는 사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비시고 당신의 부활을 믿게 하시며 전도의 사명을 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일체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시고 어떤 죽음을 죽으셨습니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의 지도층의 음모와 허위고발과 거짓증언, 매수되었거나 선동에 넘어간 군중들의 배신, 거기에 제자들의 배신까지 더해져 이루어진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복수심에 불타오를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십자가의 처형에 넘겨준 모든 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불의와 비겁함을 비웃고 조롱과 저주를 퍼부으며 의의 심판을 선언하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홀연히 나타나셨다가 홀연히 사라지시듯 그들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밤 그들의 잠자리에까지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곤 함으로써 잠을 이룰 수 없는 극도의 불안과 번민으로 그들을 괴롭힐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그들에 대한 그 어떤 원한이나 증오심이나 복수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어찌 날 그렇게 다 버릴 수 있었느냐?” 물으신 일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 한 대로 됐지?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는데 기분이 어떠냐?” 빈정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와의 첫 만남의 장소로 그를 다시 찾아가셔서 그에게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시고는 그 때마다 “내 양을 쳐라. 내 양을 먹여라” 말씀하시며 그에 대한 당신의 신뢰를 재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0-5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52-53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돌아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과 함께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며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축복을 주시고 경배와 기쁨과 찬송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평강과 믿음과 사명과 복과 경배와 기쁨과 찬송의 근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 부활절이 그저 부활에 관한 찬송 몇 장 부르고 지나가는 연례행사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기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얻으신 승리가 우리 가슴 속에서 확신되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확신과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거짓과 불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승리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지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온갖 일들로 인하여 우리의 가슴에 가득 차있었던 절망과 회의와 불안과 슬픔과 후한과 자괴감을 깨끗이 떨어버릴 수 있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 스스로는 가질 수 없는 평강이 주님으로부터 임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온 국민의 마음에서 모든 미움과 원한과 복수심이 사라지고 오직 평강과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나흘 후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총선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나, 여야의 세력구도가 뒤바뀌는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기존 정치판이 뒤집히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더러운 돈과 모략과 음해공작과 허위폭로로 정치생명을 유지해오던 자들이나 그런 당들이 몰락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정치생명이 다 끊어진 줄 알았던 인사나 당이 부활하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결과여하에 따라서는 일련의 정치보복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정치인들은 투표 전에는 집권하게 되더라도 절대 정치보복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골적으로든 교묘한 방법으로든, 언제나 가차 없는 보복이 행해지곤 했습니다. 이번 총선 후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총선은 진실로 한국정치가 깨끗하게 태어나는 역사적 기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당도 신뢰 받는 여당으로 부활해야 하고, 야당도 사랑 받는 야당으로 부활해야 하겠습니다. 국민의 건강한 정치의식이 살아나는 새 출발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것처럼 온 국민에게 오직 평강과 행복과 기쁨을 주는 대한민국의 부활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떼~한민국이 사라지고 대한민국이 튼튼히 서야 하겠습니다. 거리의 정치가 물러가고 의회정치가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법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 일을 위하여 이번 총선에서 각자의 참정정권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번 부활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정치의 부활, 대한민국의 부활을 선물로 받는 감격의 계절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도마를 찾아 오신 예수님의 사랑
김명혁 목사
지난 주일 “래방 삼언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주일 저녁 문들을 닫아 걸고 방안에 숨어 있던 10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하신 세 마디 말씀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도마를 찾아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도마는 부활주일 저녁 그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열 제자들에게 주신 평강도 사명도 성령도 받지 못하고 도마는 의심과 허탈감과 절망 가운데서 한 주간을 지냈습니다. 주일 저녁에 성도들과 함께 모여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주간이 지난, 그 다음 주일 저녁에 10 제자들이 다시 함께 방에 모였는데 그 곳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11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에 다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곳에 오신 주 목적은 도마를 만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불안과 어두움 가운데 있는 도마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도마를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허물 많은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의심 많은 도마를 찾아오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제 도마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주님에 대한 도마의 태도와 모습을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도마는 주님에 대한 불신앙과 자포자기의 사람이었습니다(요11:16).
도마는 요11:15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살리려 베다니로 가자고 했을 때 도마는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요11:14,15). 도마는 예수님의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기쁨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5). 이 말은 불신앙과 자포자기의 말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방금 신앙 연단을 위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하셨는데 그는 그 말씀 끝에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불신앙은 도마의 근성이다.” 도마는 불신앙과 자포자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믿음을 저버리고 곧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14장에 나타난 도마는 여전히 불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는 말씀을 했지만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했지만 도마는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 도마는 박윤선 목사님의 표현대로, 영성이 둔하고 더딘 불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믿지 않는 영성이 둔하고 더딘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도마는 주님에 대한 의심과 고집불통의 사람이었습니다(요20:25).
도마는 요20:25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제자들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증언했지만 도마는 제자들의 증언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과 손가락으로 주님을 만져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당연한 말 같기도 했지만 주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던 제자치고는 좀 지나친 의심과 고집불통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마를 의심하는 사람의 모델로 삼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도마를 가리켜 ‘의심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윌리암 헨드릭슨은 도마를 가리켜 stubborn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Thomas remained stubborn, 이라고 했습니다. Stubborn 이란 말은 ‘완고한’ ‘고집이 센’ 이란 말입니다. ‘고집불통’이란 말도 됩니다.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간증을 아무리 들어도, 권면을 아무리 들어도, 그 마음이 완고하고 고집이 세어서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셋째 도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항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요20:28).
도마는 요20:2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 월등한 신앙고백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도마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주님이 도마를 찾아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도마의 불신앙과 의심과 완고함을 책망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도마의 요구를 그대로 다 들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도마가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 세 가지 요구를 주님께서 다 들어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은 불신앙과 자포자기의 사람, 의심과 고집불통의 사람인 도마의 죄와 허물을 책망하시지 않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만지게 하시므로 그의 마음과 생각과 인격과 기질을 바꾸어주셨습니다. 결국 도마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이제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항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거기서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진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저와 여러분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진 일은 없지만 오늘 아침 도마처럼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제 강변교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강변교회의 장로님들께서 지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시옵소서.” “우리의 의심과 고집불통을 용서하시옵소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요 20:24-30 / 오창우 목사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급하지요 소방서에 빨리 연락을 해야 됩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물어보는데 “여보 119가 몇 번이지?” 엄마 “나도 모르겠어요. 아들한테 물어보세요.” 침착한 아들 “아빠, 114에 물어 보세요. ”
언젠가 지붕위에 있는 닭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붕 위를 노닐던 닭이 큼지막한 고양이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라 지붕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뛰어 내립니다. 어떻게 내리는지 아세요? 그래요. 날개를 푸드득거리면서 사뿐히 내립니다. 전 그때 알았어요. 닭이 날개있는 짐승인지. 땅에 구구하면서 다닐때는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는데 다급해지니까 숨겨진 날개로 납니다. 잠재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지난주 목요일이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신문 방송에 보니 대단한 분들이 많더라구요. 전 감동 많이 받았습니다. 그중에 영국사람으로 화가, 사진작가인 “엘리스 래퍼”이야기는 압권이었습니다. 이 여자분인데 두팔이 없고 다리도 중간이 없고 넓적다리에 발이 붙어 있습니다. ‘포크메리아’라는 병입니다. 해표지증이라고 우리가 말을 합니다. 기형아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두팔이 없고 다리는 짧고 여러분들도 TV나 신문에서 보신 분들 계실겁니다. 태어난지 6주만에 엄마가 도망을 갔습니다. 왜? 사람구실 못한 것 뻔하니까요. 그런데요. 이분은 대단하시더라구요. 열심히 공부해서 화가가 되어서 그림을 그립니다.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기르기도 합니다. 남편은 도망갔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엄마인지 놀랠노자입니다.
저런 장애의 몸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우리 곁에는 이렇듯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분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이클 선수 암스트롱은 거의 죽게 된 암을 극복하고 세계 사이클 선수권대회 5연패를 달성했잖아요. 엘리스 래퍼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좌절이 아닌 극복을 선택했다” 누가 앨리스 래퍼나 암스트롱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겠어요?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어섰습니다. 우리에겐 이처럼 장애나 죽을병이라도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닭이 땅에만 다니니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 평소엔 모릅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이길 수 있는 날개가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잉게 보르크 바하만의 시에 나오는 한 소절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추락할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간 사람은, 즉 능력이 있는 사람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추락한다 할지라도 솟아날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이와 같습니다. 평소엔 모릅니다. 그러나 날개를 펴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자기 능력 여하에 따라 시련이 오더라도 해쳐나갈 방법의 방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패도, 실패의 극복도 모두 자기 능력에 다른 것입니다. 그 속에 깃든 의미는 희망입니다. 추락은 절망이요, 포기라고 한다면 날개는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좀 더 너그러워지길 바랍니다.
이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날개가 있는 것은 날 수 있고 날다가 언젠가는 추락할 수도 있으며, 추락했을지라도 날개가 있기 때문에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귀한 진리가 남겨 있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추락을 경험했고 이제는 날개 짓으로 올라갈 곳 밖에는 없습니다. 추락한 그 시점에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날개가 우리에겐 있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땅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을 날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하는 날개!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 후의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유독 도마만은 똑똑한 척하고 ‘난 믿지 못한다. 예수님의 상처가 난 옆구리를 만져 보아 부활을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만져보고 믿어라. 그런데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하십니다. 복이 되는 신앙, 복 있는 신앙생활은 어떤 것이냐? 첫째는 보지 못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복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고 또한 믿음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날개, 그 복이 되는 2가지 인생의 날개가 될 2가지는 무엇입니까?
1. 은혜의 날개입니다.
이 은혜의 날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날개는 하도 커서 비밀스러워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보고 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 믿어야 복입니다.
일본 과학자들이 땅을 팠습니다. 50m를 팠더니 ‘구리’를 발견했습니다. 연구해서 발표하기를 “고대 일본인은 2500년 전에 구리선을 이용해서 전화기를 사용했다”
중국이 불끈하고는 땅을 팠습니다. ‘유리조각’을 발견했습니다. 발표하기를 “중국 고대인들은 3500여년 전에 유리를 이용해서 광케이블을 이용해 전화기를 사용했다.”
한국의 과학자들이 격노했습니다. 그보다 더 깊이 땅을 200m이상을 팠습니다. 그런데 구리, 유리등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발표하기를 “고대 한국인들은 5500여년 전부터 무선 전화기를 사용했다.”
전화기도 유선보다 무선 핸드폰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는 겁니다.
1980년경 미국에선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흑인 노예 해방하기 전입니다.
한 부자가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샀습니다. 이 노예는 미국에 와서 노예 생활을 오래한 거의 쓸모없는 노예입니다. 그런데 이 노예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난 당신을 위해 일하지 않는데 난 당신들을 증오한다”
부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집에 도착해서는 그의 발에 있는 사슬, 착고를 풀어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일을 시킬 수 없는 쓸모없는 당신을 비싸게 산 것은 부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젠 자유의 몸이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흑인 노예는 부자의 마음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 나를 사가는지... 그러나 순간 깨닫기는 ‘이것은 은혜다’ 이처럼 은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혀 다르고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죄인은 죽어야 하는데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를 얻은 흑인노예는 너무 놀랍고 감사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인님, 이젠 제가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당신의 노예로 살겠습니다. 이 은혜감사하며 평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집에서 사랑 받으며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아 갈 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즘 “유다복음”으로 화제입니다. 가롯유다를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가롯유다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롯유다는 기독교회의 공헌자(?)라는 것입니다. 배신자가 아니구요.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12:6에 가롯유다의 동료인 요한은 동료들은 회계를 받은 유다를 도둑놈이라고 했습니다. 막14:12 가롯유다는 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자기의 필요를 위해 이용하려했던 사람이지 예수님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보세요. 예수님이 가롯유다의 배반 사실을 인지하시고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십니다. 간접적(요13:10, 막14:18) 직접적(요13:26)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회개할 기회에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요일1:9, 롬13:10)
205장을 보게 되면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겠네 예수앞에 나와서 음성을 받으면 마음의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나오면 은혜 받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으니 회개하고 용서받고 위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탕자도 회개하고 아버지 가니까 새로운 삶을 삽니다. 세리와 창기도 죄가 많았지만 예수님께 나오니까 새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마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축복에 나오는 다말, 다말 , 롯 우리아의 아내로 다 죄인들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의 씨를 받았고 라합은 창기요 기생이었고 롯은 이방여인이었고 우리인의 아내는 다윗과 간음하고 남편을 죽게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가롯유다는 이 은혜를 몰랐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자살을 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는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순종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살리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저 태평양보다도 넓고 무궁무진하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예비된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받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난 3월 16일 권오승 공정거래 위원장이 취임식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취임사를 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해도 하나님만이 인정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연설을 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큽니다. 특정종교를 찬양했다. 특정종교를 이용해서 표를 얻으려 한다. 특정 종교의 세력을 규탄하려 합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라는 말을 들고 사도바울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얘기를 아무리 잘 들어도 목사세금안내니까 세금낸다고 하니까 법적으로 못 받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터넷에 리플이 수백 개가 달렸습니다. 거기에는 세금을 안내다가 낸다고 하니까 “잘했다. 어서 법개정하자!” 그럴 줄 알았지요. 아니에요.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욕설들이 많이 있는지... 여러분 속지마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육체의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믿는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날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날개를 펴십시오.
2. 믿음의 날개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켜서 믿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중국의 지혜서 “여씨춘추”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랬는데 이 사람은 이웃집 아이를 의심했습니다. 이웃집 아이가 도끼를 훔쳐갔다가 생각을 하니까 그 아이의 말하는 것이나 일생, 걸음걸이를 보니까 틀림없다고 믿었습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습니다. 분명히 도둑놈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며칠 후 산골짜기로 나무하러 갔다가 그 도끼를 찾았습니다. 그 후 이 이웃집아이를 보았더니 그의 얼굴이나 말, 행동을 어디를 보아도 남의 도끼를 훔칠 그런 아이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순진한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이웃집아이는 변한 것이 없고 단지 내가 변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한대로 믿고 믿음대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는 생각이 변하는 사람입니다. 믿음과 환경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난한자. 높은자리-낮은자리, 건강- 병햑함... 이것으로 믿음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백인과 흑인, 황인종, 키 큰사람이나 작은 사람, 뚱뚱한사람이나 마른사람... 누가 더 믿음이 좋은가의 질문과도 같습니다. 환경과 믿음은 다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의 양극화가 문제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IMF이후 중산층은 무너지고 극빈자, 서민, 부자..... 모순된 구조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양극화는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조시대에는 양극화가 없었습니까? 더 했습니다. 양반에 상민에.... 여러분 문제는 이런 사회속에서 이런 것을 논의 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잘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잘 산다고, 세상이 균등하다고 내가 잘사는 것은 없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도 양극화가 있습니다. 살 사람은 어디서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극복합니다.
최근에 인터넷에 서민이 하지 말아야 할 5가지습관이라는 글이 떴습니다. 이름없는 한 사람이 글을 썼는데 호소력이 있더라구요.
1) 차를 먼저 구입하지 말라 - 나는 10년만에 샀다. 그때는 결혼했고 아파트도 장만했다. 결혼한자로 아파트가 자동차보다 우선이다.
우리는 돈을 벌면 쓸궁리 먼저 하잖아요.
2) 할부인생으로 살지 말라=외상으로 살지 말라. - 최소 70% 자기 돈으로 사야지 빚지고 살면 정말 어려울때 힘들다.
3) 쓰고 남은 돈으로 저축하지 말라 - 얼마를 벌든지 먼저 저축해놓는 가능한 쓰지않는 것이 버는 것이다.
4) 기분으로 소비하지 말라. 충동구매하지마라 - 특별한 일이 아니면 1차로 끝내라.
5) 실천없는 계획을 세우지 말라. - 생각만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오늘 이시대의 환경 때문에 못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환경이 좋고 나쁜 것에 나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아야 합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는 절제력,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환경이든 극복하려는 사람만이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생활, 감옥생활하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형통케 하셔서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다윗도 사울왕에게 쫒겨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원수삼지 않고 하나님앞에서 행동합니다. 죽일 수 있어도 죽이지 않습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쫒겨나 피난살이를 하면서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도 감옥에 갇히는 고통과 슬픔속에서도 한숨 쉬거나 절망하지 않고 찬송과 기도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 사람들은 원망하지 않고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지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봅니다. 믿음은 우리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이라고 하면서 형편이 좋아지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형편이 나빠지면 믿음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분이 좋으면 믿음있는 척하다가 나쁘면 없는척하면 안됩니다. 누가 칭찬이나 격려해주면 믿음있는 척하다가 비난이라도 들으면 믿음이 사라져버리고 여러분 너무 환경에 좌우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창17장에 하나님을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나이 100세에 사라90세에 자녀 생산능력이 없어질 때에 자녀를 주겠다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100세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해도 바칠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환경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년전 학교에서 교목으로 있을 때,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설교가 학생만을 위한설교가 아니라 교사만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이다음에 담임목회로 나갈 때 그때 써야지 하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 어느날 교목으로 나간지 2년이 안되서 한남제일교회에서 설교를 해달라고해서 그때 그동안 했던 설교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 설교가 사도행전 《 일어나 걸어라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그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담임목사로 오게 됐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설교가로서의 꿈말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게 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한남동의 한남제일교회의 담임목사 설교보다 세계적인 부흥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을 위해서 세계적인 부흥사의 꿈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갈라지기를 바라고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홍해를 가리켰습니다. 그랬더니 갈라졌습니다. 여러분 이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받느냐? 좋다!! 교훈의 의미로 들어서 지식의 하나로 쌓아놓습니까? 그리고는 목사님 나는 다 잃어 버렸습니다. 지식은 잃어 버려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주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다! 내가 이 약속을 지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약속의 말씀! 약속의 의미를 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게 은혜의 날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를 주시옵소서. ”
이번 사순절 고난주간 기도회를 통해서 응답받은 이들의 기쁨이 참으로 큽니다. 희망을 갖더니 남편이 직장에 나가고 빈집에 세들어 오고 병든 자가 낫고, 돈문제로 고민하던 분이 해결받고....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때 그리고 기도할 때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 자비를 주십니다. 때문에 응답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필요로 응답하십니다.
다윗의 성전건축소원은 그러니까 건축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전쟁승리의 경험은 많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승리의 확신은 있습니다. 그런데 평안할 때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싸울 때는 잘 싸우는데 모든 것이 해결될 때는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평안할 때 간음도하고 살인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 염려한대로 염려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평안할 때 잘 살수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을 내가 늘 모시고 살면 좋겠다고 해서 백향목궁에 평안이 거할때에 하나님의 성전건축에 소원을 담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 멋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성전건축을 한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다윗은 그럼 성전건축할 수 있는 건축재료라도 마련하겠다는 다윗을 축복하시잖아요. “네 자손만대까지 복을 주겠노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가 얼마나 평안하게 잘 사는지... 건축재료를 준비하는 것에 복을 주시니까 나라에 복을 주시고 물질의 복도 주시고 평안의 복을 주시고 형통케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준비를 하면서 인터넷에서 2006년 1월에 생명수교회의 장성희씨라고 하는 분이 글을 올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성희씨는 생명수교회 건축한다는 말에 당황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믿고 나에게 주신 분깃으로 믿고 기도하고 기쁜 마음으로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돈을 헌금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회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몇 군데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더랍니다. 한 회사를 정하고 연봉협상했는데 정확히 전직장 연봉에 건축헌금을 더한 것이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은 나를 위한 것 같지만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저는 교회건축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다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건축에 대한 꿈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무조건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의 상황을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된다, 안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비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돼서 우리로 하여금 믿는 자의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제 2의 한남제일교회를 건축하기 원합니다. 또 우리 교역자 가운데 한사람이 거기에 가서 파송받아서 큰 교회 이루기를 바랍니다. 나는 많은 선교사가 파송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선교사를 해외에도 보내고 우리 신학교에도 보내지기를 원합니다. 꿈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감당할 만한 능력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축복받기를 원하십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받고 된다 안된다 불평하지 말고 그 일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헌신해보시기바랍니다. 심는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신줄로 믿습니다.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우리는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의 날개입니다. 분명한 것은 날개는 두 개가 있어야 날아갈 수 있듯이 하나만가지고 가는 새는 본적이 없습니다. 은혜의 날개, 믿음의 날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날개,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개를 통해서 이 한주간도 승리케하실 줄로 믿습니다.
도마의 재발견
요 20:24-29 / 홍문수 목사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른다”는 말은 무식한 사람을 가리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신앙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참 모습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잘 몰랐습니다. 지독한 영적 무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 못 박힐 때 배반하고 도망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고 신앙생활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수박겉핥기 식으로 알고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질이 천양지차가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부활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을 알아도 피상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때면 감탄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그 믿음은 곧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은 정말 이제는 전혀 의심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른바 예수님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참 믿음’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합당합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그 이전의 그들의 삶과 그 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도 그런 것 아닙니까?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를 믿노라 하지만 정말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무기력하고, 재미없고, 확신이 없고, 삶 속에서 실패하고 ... 그렇지 않은가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때 질적으로 성숙해지고 살아 약동하는 신앙이 될 수 있습 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특별히 도마에게 나타나신 사건의 기록입니다. 도마는 이 사건을 계기로 때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항상 동일하지만, 도마가 예수님의 참 모습을 이제야 발견하게 된 것이죠. 이른바 예수님을 재발견한 셈입니다. 이것이 도마의 신앙을 변화시켰고, 그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변화되고, 우리 인생이 새로워지기를 소원합니다.
[1] 의심했던 도마 : 상식으로 사는 사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확신이 없었습니다. 설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려고 ... ?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한 가운데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19절 보면 “안식 후 첫날 ... ”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은 지금의 주일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겁니다.) 문을 닫아 놓았는데 예수님이 불현듯 나타나신 겁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예수님이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자 믿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도마가 출타 중이었습니다. 24절.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그가 돌아오자 제자들이 야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녀갔다는 겁니다.
어쩌면 도마가 약이 올랐을지 모릅니다. 하필이면 자기기 없을 때 다녀가시다니 ... 한편으로는 도저히 자기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뭐라고 말하며 투정을 부립니까? 25절(하). “ ...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
얼른 보면 도마가 아주 똑똑한 사람 같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성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증주의자, 경험주의자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면 아주 멍청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사람의 감각, 인지 기능이 진리에 대한 최종 판단 기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거야 말로 착각입니다. 감각 기능, 인지 기능이 별 게 아닙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게 과연 얼마나 됩니까? 너 무 큰 것도 안 보이고, 너무 작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망원경, 현미경 등의 보조 기구를 사용합니다. 그래도 안 보이는 게 많습니다. 또 인간의 경험이 얼마나 됩니까? 어떤 사람이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다닌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단해 보여도 세계 지도에 표시해 보십시오. 그게 얼마나 될지 ... 별 게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전해 들음으로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겁니다.
이 점에 있어서 도마가 착각을 한 겁니다. 아니, 교만했던 겁니다. 평소 동고동락하던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겸손히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자세입니다. 물론 도마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났지만 만약 그러지 않으셨다면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경우 도마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알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가능한 겁니다. 그것이 곧 성경 말씀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으로 남긴 그 말씀을 지금 우리가 전해 듣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여러분, 세종대왕 보셨나요? 매일 지갑 속에서 보신다구요? 우리가 그분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역사적 실존에 대해 1%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전해 듣고 그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정말 맞나요? 언제 나를 낳는 것 보았나요? 기억이 납니까? 그렇지 않아도 부모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우리를 사랑해 주니까 그대로 믿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런 겁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보고 체험한 사람들이 남긴 성경 말씀을 통해 얼마든지 믿고 따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9절. “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 벧전1:8~9 에도 보면 그런 원리를 언급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여러분, 의심이 생기는 것 자체야 탓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의심을 마냥 방치하면 불신앙이 되고, 결국은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의심의 문제는 속히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에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신지 아닌지, 구주인지 아닌지 결판을 내야합니다. 막말로 아니면 걷어치우고, 진리라면 열심히 신앙 생활해야 마땅합니다.
의심의 문제는 심지어 부정적으로 접근해도 말씀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분명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벤허>라는 영화를 아시죠? 본래는 류 월리스(장군, 소설가)가 쓴 소설이죠. 그는 무신론자 친구 잉거솔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기독교의 거짓됨을 증명해내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2년 동안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2장에 접어들면서 펜을 꺾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후에 쓴 소설이 바로 <벤허>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겸손함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의심을 이기고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확신하는 도마 : 신앙으로 사는 사람
의심하던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26절~27절. ‘여드레 지나 ...’라는 말은 예수님이 1주일 후에 다시 나타나셨음을 의미합니다. 처음 나타나신 것이 안식 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주일에 나타나신 겁니다. 주일은 부활 기념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도마가 얼마나 질겁했을까요? 마치 자기가 한 말을 옆에서 엿들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대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 앞에 도마가 예수님을 직접 만져봤는지 아닌지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부인할 수 없었고, 이내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28절. “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 이것은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도마가 이전에도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만난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그는 그동안 예수님을 단지 좋은 선생, 훌륭한 분,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에게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 준 것이요, 더 나아가 가치 있는 인생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이제 도마는 ‘상식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변화된 도마 : 새 신앙, 새 사람
예수님이 하나님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신앙과 인생이 변화됩니다. 도마는 예수님 앞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이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과연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을까요? 도마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지 않아 유감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을 통해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① 기쁨이 있는 사람 :
도마는 다른 제자들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지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쁨으로 감격하며 외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인간에게서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가는 것은 죄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입니다. 여러 가지 증세가 나타나지만 그 원인이 되는 병원균은 한 가지인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서 속죄의 은혜를 받으면 영혼에 기쁨이 넘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고달픈 인생이었습니다. 행복을 찾아다녔지만 죄의식과 수치심만 남아 동네 사람들도 만나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을 피해 한낮 정오에 우물가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평범한 유대인 남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깨닫게 됩니다. 재발견한 겁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사람들에게 가서 전합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너무 기뻐서 ... 그럼ㄴ 무슨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졌나요? 걱정거리, 문제가 해결됐나요? 아닙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모든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충만해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다 이렇게 됩니다.
② 용기가 있는 사람 :
도마는 예수님을 다시 만난 이후 겁이 없어집니다. 제자들과 함께 담대히 복음을 증거합니다. 세상에는 두려운 게 많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권세를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유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더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이런 희한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지갑에 빨간 딱지를 넣고 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무식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들도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학박사가 ... 권세자가 ... 재산가가 ... 그러고 다닙니다. 세상 것들은 두려움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 담대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 이야기입니다. 그는 나치의 독재에 항거하다 처형된 순교자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처형 직전 동료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광명과 소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끌려가면서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이제 여러분과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 생명이 시작됩니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용기입니다.
③ 능력이 있는 사람 :
도마가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행적을 통해 도마의 활동상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도마의 이름이 따로 거명되지 않았어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기록들을 자주 봅니다. 거기에 도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할 때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마 도마도 이와 비슷한 능력을 많이 행했을 겁니다. 사도들 자신이 능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리 과거에 대단했더라도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대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 보면 바울이 능력을 행한 것을 봅니다. 심지어 그의 손수건만 지나가도 병이 낫고 악한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그때 마술하는 자들이 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흉내 냅니다. 그랬더니 “귀신이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덮쳐버렸고, 그들은 혼비백산 도망가 버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부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를 때라야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여러분,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그 이름을 의지하며 그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있는 질병도, 문제도, 고통도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④ 목적이 있는 사람 :
도마는 예수님을 재발견한 후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관심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먹고 사는 문제나 해결하고, 예수님이 혹시 왕이라도 되면 출세할 수 있으려나 그런 궁리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살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체포되었고,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2년 전엔가 우리교회 와서 말씀을 전했던 김태식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본래 의사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아들이 병에 걸려 일찍 죽게 되었습니다. 보통 부모들도 다 그렇지만 특히 의사인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고 보내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아빠, 천국에서 만나요! 이제 바쁘게 돈만 벌지 마시고, 선교하세요!” 그 전에도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후 그분은 의사 일을 보는 것보다 복음 전하는 일에 더 바빠졌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이 세상 것에 매달려 살면 곤란합니다. 세상 것은 다 수단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게 영원히 후회 없는 인생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하셨습니까? 중요한 것은 연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셨습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처음 교회 나오신 분들은 물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오래 된 분들도 다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났는가? 만약 이 질문에 불분명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면 도마처럼 예수님을 재발견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부디 그런 생생한 신앙생활을 하심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도마의 고민 이야기
김명혁 목사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고민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고민도 있고 어른이 되어서는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한 고민도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 여자들에게는 좀 더 예쁘지 못한 고민도 있을 것이고 중년 여자들에게는 좀더 날씬하지 못한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에게 “집사님의 고민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자기의 고민은 남편이 신앙 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것과 부모님들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올바르고 정당한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저는 가장 심각한 근원적인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고민입니다. 남편이 믿어지지 않고 아내가 믿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고민일 것입니다. 부모가 믿어지지 않고 자식들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고민일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회가 믿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고민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심각한 고민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고민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도마가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심각한 고민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도마와 같이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불행하게 사는 신자들 특히 남 신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도마의 믿어지지 않는 고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 도마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또한 유대인들의 박해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 베다니로 향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11:8).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자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1:11,14,15).
이 말씀에 대한 도마의 응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이 말이 용기 있는 말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불신앙과 자포자기와 절망의 말이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절망하고 맙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도마의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방금 신앙 연단을 위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하셨는데, 그는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도마는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면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도마의 근원적인 고민이었습니다. 도마는 참으로 불행한 제자였습니다. 결국 도마는 ‘자포자기의’ 사람이 되었고 ‘절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자포자기’하며 불행하게 살아가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도마는 하늘에 아버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신 다음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러나 도마는 하늘에 아버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만 보이고 하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
도마는 박윤선 목사님이 지적하신 대로 영적으로 ‘둔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믿으려고 하는 마음도 갖지 않은 ‘완고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믿으려고 하는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마음과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에 집착하거나 자기 자신에 집착하거나 땅에 집착하는 ‘완고한’ 사람은 믿음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하면서 주님 발 아래 겸손히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훌훌 다 털어버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도마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고 ‘완고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마는 하늘에 아버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다가 죽게 되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회의적으로만 보였습니다. 그것이 도마의 근원적인 고민이었습니다. 도마는 참으로 불행한 제자였습니다. 결국 ‘완고한’ 도마는 절망의 사람이 되었고 회의의 사람이 되었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절망적이고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도마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십자가도 부활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도마는 ‘반항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후 도망갔던 열 한 제자들은 다시 돌아와서 한 곳에 함께 모여 앞 날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도마는 혼자서 다른 곳에 가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반항적인 방황’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었습니다. 부모가 믿어지지 않을 때 아이들이 반항하는 뜻으로 가출하는 것처럼, 도마는 예수님과 관련한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도마는 가출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가출한 후 그래도 다른 제자들의 소식이 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제자들 몇 명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나무 밑에서 만났는지 길가에서 만났는지 주막에서 만났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가출했던 도마는 몇몇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동료 제자들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서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20:25). 그러나 이에 대한 도마의 반응은 여전히 부정적이었고 ‘반항적’이었습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I will not believe.” 이것이 도마의 부정적이고 ‘반항적인’ 반응이었습니다. “I will not believe.”
얼마나 서글픈 고백이었는지 모릅니다. 일 주일쯤 전에 사도 베드로가 비슷한 말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I do not know the man.”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2).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도마가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떠들면서 반항을 했습니다. 얼마나 서글픈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주님을 슬프게 만든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요 고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 그래서 반항하기까지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요 고민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근원적인 슬픔이요 아픔이요 고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셨고 예수님께서 우셨고 성령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종들인 목회자들의 근원적인 슬픔이요 아픔이요 고민이기도 합니다.
도마는 아무 것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가시는 주님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아버지 집을 가리켜 보여주시는 주님의 모습과 말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동료 제자들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근원적인 문제와 고민이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이와 같은 믿어지지 않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포자기와 회의와 냉소와 반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형식적인 신자들의 고민이고 목회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이 우셨고 김치선 목사님이 우셨고 한경직 목사님이 우셨습니다. 저도 요사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울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도마의 고민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마무리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도마의 고민 이야기는 두 고민자들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마무리되었습니다. 고민의 벼랑에 갔던 도마가 ‘집’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요20:26). 또 다른 고민자이신 예수님께서도 믿지 않겠다고 반항하던 도마를 찾아 ‘집’으로 오셨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저는 그 ‘집’을 만남의 집, 기도의 집, 회개의 집, 예배의 집,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자들과 도마가 ‘집’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집’에 찾아오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도마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 가락을 이리 내 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예수님께서 여드레를 지나서 만남의 집으로 찾아오신 것은 도마를 만나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도마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포자기와 회의와 냉소와 반항 가운데 있던 자기를 찾아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도마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도마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두 손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떨면서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
도마는 길고 긴, 캄캄하게 어두운, 불신앙과 고민의 터널을 지나, 이제 항복과 믿음의 종착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불신앙과 고민과 불안으로 파도 치는 험한 바다로부터 믿음과 평강의 항구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아주 간단한 신앙 고백을 했지만 그 신앙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 되었고, 예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도마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도에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고 인도 교회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도마의 고민 이야기는 도마의 순교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근원적인 고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옵니까? 믿음은 예수님을 만남에서 옵니다.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을 눈으로 몸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눈으로 몸으로 보고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예수님을 지금은 영적으로 만납니다. 때로는 영음이 들리기도 합니다. '길선주야' 라고 부르시는 영음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면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바로 이 자리에도 함께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영적으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셔야 내가 주님을 만나고 내가 주님께로 돌아가야 내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야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들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고민자가 되지 마시고 믿어지는 행복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신 일이 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회개와 믿음을 지닌 자는 천국으로 가게 되고 회개와 믿음을 지니지 못한 자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와 믿음을 지니고 살다가 모두 천국으로,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다 올라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신앙을 소유하자
문기태 목사
할렐루야!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다시는 죽지 아니할 변화된 신비한 몸을 입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무덤에 꽁꽁 묶어 영원히 가두어 두려던 마귀의 궤계를 다 깨트려 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에 완벽하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려도 의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죽음의 권세를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예수라고 해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이런 의심이 계속 올라오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왜 힘이 없고 능력이 없이 사는지 아십니까? 신앙 생활하면서도 왜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는지 아십니까? 신앙 생활하면서 늘 번민과 고민 가운데 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신앙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왜 부활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화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말하면 잘 믿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어떤 전문가가 나와 채소가 좋다하면 무조건 채소를 먹습니다. 건강에 걷기 운동이 좋다고하면 만보기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립니다. 건강에 비타민이 좋다고 하면 약국에 비타민 사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잘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믿기를 망설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젼보다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활의 증인들의 부활에 관한 수많은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예루살렘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던 제자들도 예수 부활의 증거인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과 열 한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열 한제자들뿐만 아니라 500명의 형제들에게도 나타났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의 부활을 매우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 부활 사건을 어느 누구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에 기초해서 교회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이들이 확신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 기쁨이 충만하여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되었습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는 결코 생성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셨으나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한 젊은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동료들이 입을 모아 "우리가 주님을 보았노라."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여도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의 손에 못자국을 확인하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의심하던 제자 도마도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다."라고 확신에 차서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도마는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우며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신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29).
부활신앙은 말 그대로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계신 것은 믿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도 믿겠다.'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은 믿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으니까 믿었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으라는 말이냐?' 라고 말합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직접 보면 잘 믿어지겟지요! 그러나 보고 믿는 것은 사도시대에 끝이 났습니다.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인 성경의 기자들의 증거를 통해 부활의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성경의 증거들을 보면서도 의심한다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아도 끝까지 의심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 묻자 예수님은 "오직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우리가 믿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소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는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도마 자신의 연약한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이해할 수 없는 한계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절대절 생명력을 깨닫지 못하는 한계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이러한 도마의 인생 등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것과 자기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 부정하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 믿음을 가지려면 그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좁은 우물속에 갇혀있지 말고 자기를 깨고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할 때 "하나님을 보여주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 중에서도 말씀보다는 꿈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천사나 귀신을 보거나, 기사와 이적을 보는 데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그러므로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는 거지요. 알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지식이지요. 믿음은 달라요. 믿음이 뭐냐고요? 안 보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엇인가를 보고 믿기 원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아직 못 봤어요. 그래도 믿어요. 천국을 안 가봤어요. 그래도 믿어요. 우리는 다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도마보다도 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도마보다도 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에요. 도마보다도 더 복도 있고, 믿음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2. 부활의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2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땅끝까지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두고 서로 다른 길을 떠나버린 부모님, 그 빈자리를 할머니의 사랑으로 대신 채워가며 가슴 한구석에 아픔을 키우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해마다 돌아오는 어버이날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할머니, 저 서울 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할 거예요."
부모님과 세상을 향해 복수하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결심한 후, 그는 할머니 곁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공부에만 매달렸고 결국 어려운 고시에도 합격하여 검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후배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는데 장로님들이 무척 사랑해주더랍니다. 교회생활은 그 동안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기에 교회 출석과 성경공부에 열심을 내었지만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구?... 정말 날 위해..' 그런데 마음 속의 외침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어 기도하러 교회로 달려갔지만 뭐라고 해야할지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전심으로, 온몸으로 그렇게 간절함을 터뜨렸을 때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믿으려고 할 때는 어려웠지만 성령으로 역사하시니 쉽게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고백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또한 당신이 부활하셨기에 이젠 소망이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도대체 자신이, 더군다나 죄인을 가려내는 검사인 자신이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죄를 밝혀내는 검사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니 정말 흠 많고 상처 투성이인 죄인임이 깨달아졌습니다. 그 뒤로 피의자가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면,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을 소개해 드리지요." 하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제가 이렇게 변했는데 어떻게 나와 같은 처지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 침례교단의 목사가 되어 목회와 변호사의 일을 다 열심히하는 주명수변호사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가까이는 내 가족,부모,형제에게 부활을 자랑해야 합니다. 친구들과 이웃들과 아는 이들에게 부활을 확신을 가지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도 부활을 믿고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3.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의 여인들과 사도들은 새로운 삶,변화의 삶을 살았습니다.마귀와 사망의 저주 아래 있던 삶이 구원과 생명,자유와 승리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울프하르트 파넨버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도 확실하기에 거기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외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부활은 대단히 보기 드문 사건이란 점이요, 둘째는 만일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인생관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바꾸어야만 하게 만듭니다. 베드로의 삶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후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성격이 급한 어부출신 제자로 예수님이 붙잡히신 후 예수를 전혀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가 예수님을 담대히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켰습니까? 여러분의 인생목표와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까? 여러분은 좀 더 친절해지고, 좀 더 참으며, 좀 더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고, 그렇게 변화되도록 하나님과 협력하십시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우산도 없이 다리를 질질 끌며 산책을 하고 있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초라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유럽 일대를 40년간이나 뒤흔들었던 작곡가 헨델이었습니다. 그는 걸으며 지금까지 자기가 누렸던 영광과 버림받은 오늘의 모습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병든 몸에 갚지 못한 빚에, 이웃으로부터 외면당함에... 그가 깊은 탄식을 하며 하늘을 쳐다보려는 순간, 십자가 불빛이 반짝거리며 그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습니다.
"나는 길가의 돌멩이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팽개쳐진 신세지요. 주님마저도 저를 버리시나이까."
헨델의 기도는 피눈물 나는 내면의 절규였습니다. 그 후 산책에서 돌아온 핸델이 시인이며 친구인 찰스 제넨스가 보낸 준 성담 곡을 읽는데, 가슴이 떨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그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줄 사람을 찾았건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외에는..."
이것을 읽는 순간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경험을 느꼈습니다. 그는 다음날 아침 하인이 조반상을 들여올 때까지도 그 자리에 앉아 음표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악보를 그리다가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방안을 큰 걸음으로 왔다갔다 서성거리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팔을 쳐들어 허공을 후려치기도 하고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무려 24일간이나 그의 이러한 행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무섭게 일에 몰두하더니 드디어 침대 위에 나가 떨어져 14시간이나 잠을 잤습니다.
헨델은 외쳤습니다. "메시야는 나를 가장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낸 기적이었다. 마치 부활의 소식처럼... 이제 이것은 온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심연의 깊은 수렁 속에서 헨델이 사라지지 않는 명곡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이 인생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소유하여 이처럼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사건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부활할 것을 믿고 소망중에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목격한 후 변화되어 부활의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살다가 부활의 소망에 사로잡혀 순교한 사도들처럼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가 되라
조재진 목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마음의 질병 중의 하나가 “의심”이라는 병입니다. 금방 보기에는 의심이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미움과 증오, 살인 같은 무서운 죄가 의심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불화의 가장 큰 원인도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함으로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의처증, 의부증이라는 정신적인 질환도 의심 때문에 오는 것이지요.
요즘 병원에서는 친자확인 검사가 유행한다고 하지요. 침이나 지문에서 DNA를 추출하여 간단한 방법으로 친자를 손쉽게 확인하는 유전자 감식방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사이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녀가 어느 날 의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정말 내 자식이 맞나?” 의심이 되니까 유전자 검사를 하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통계에 의하면 검사를 의뢰한 건수의 20%가 친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이라는 것은 사단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무기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의심이라는 병에 걸리면 그때부터 기도도 안 되고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이 병들게 하는 virus와 같습니다.
맨 사람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도 바로 이 의심 때문입니다. 사단이 여자를 유혹할 때에 쓴 전략이 바로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단의 이 말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 때 여자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하면 될텐데, 여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지만...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먹지 말라’고 했지 ‘만지지도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또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이런 의심하는 마음을 곧 바로 공격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라고 유혹합니다. 결국에는 여자가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사단에게 노출되기 쉽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혹시 믿음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가 믿음을 잃어버리면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제일 먼저 오는 현상은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믿음과 염려는 반대개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염려하게 됩니다. 여러분 문제가 많아서 염려하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삶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어 왔습니다. 삶의 문제가 있던 없든, 또 크든 작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모든 것이 염려거리가 됩니다.
눅21:34에 보면 주님께서는 말세 때에 성도들이 조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둔하게 만드는 것들이고, 성도들을 방황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방탕과 술취함, 생활의 염려입니다. ‘방탕’과 ‘술취함’은 성도들의 영성을 둔하게 만듭니다. 성도들이 방탕하고 술에 취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염려’ 역시 영적인 삶을 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생활에 대한 염려에 붙잡히게 되면 정상적인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일반 제자반 교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상 물질 염려로 사시는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재산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도 언제나 “돈, 돈” 하면서 염려와 걱정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고 늘 힘든 삶을 삽니다.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지?” 늘 염려에 매여 있는 자신이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이 권사님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그 때의 충격은 대단히 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큰일 났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사니? 돈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로부터 늘 이 말을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돈, 돈 하고 산 것입니다.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그 마음은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당시 10대 때의 마음으로 사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가 계심을 알았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깊이 체험하고는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고침을 받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물질에 대한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믿음을 잃어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야고보서1:6-7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가고 말씀하십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으면 능력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있는데 능력은 없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 하나님의 역사는 체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빨 빠진 호랑이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겉모습은 호랑이지만 토끼하나 잡아먹을 수 없는 것이 이빨 빠진 호랑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을 잃으면 그렇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권세를 하나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약속한 하늘의 신령한 축복들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 도마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는 사람은 전형적인 회의주의자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니까 그는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느냐?’ ‘잘못 본 것이겠지’ 제자들이 아무리 ‘우리가 직접 보았다’고 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믿음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활에 대해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믿음이 충만한 다른 제자들과 도마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부활을 주님을 만나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잃었던 평안을 회복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했을 때 제자들의 가슴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에겐 기쁨도, 평안도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사명으로 불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회의주의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중에는 의심에 빠져있는 도마처럼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아요, 그래서 불신자처럼 삶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도마의 모습은 불신앙에 빠져서 방황하는 성도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도마처럼 의심하지 않습니까? 도마처럼 능력을 잃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쓰시기 어려운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믿음 대신에 자꾸 다른 것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식을 내세웁니다. 이들은 늘 하는 말이 “상식적으로 생각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겐 믿음이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 경험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쓰시기 어렵습니다. 늘 하는 말이 “옛날에 다 해봤는데 안돼” 이런 분은 늘 자기 경험만을 내세웁니다. 또 자기 생각이 중심이 된 사람들도 하나님이 쓰시기 어렵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들면 다 틀렸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 안들어” “내 생각에는...”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상식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고 자기생각도 아닙니다. 바로 믿음입니다.(히11:6) 믿음은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하기를 “믿음이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상식을 말하는 사람들이나 경험, 자기 생각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 지식, 내 경험, 내 능력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 크기의 일을 체험하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11:1-2에 보면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첫째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실상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휘포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래서부터 받쳐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기초, 즉 희망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바랄 수 있습니다. 모세는 홍해가 갈라질 것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홍해가 갈라질 수 있습니까? 바라지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 밀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홍해는 갈라졌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두 번째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희랍어로 “엘렉코스”라는 단어로 ‘확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계시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애굽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로보다 더 강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일종의 영적인 감각입니다. 우리 육신에는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을 봅니다. 그것처럼 믿음은 영적인 것을 보거나 듣게 하는 중요한 감각기관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듣습니다. 또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왜 천국이 안보입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립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들리지도 않습니다. 앞길이 캄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없는 사람은 방황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엘리사의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나라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가 머무르고 있는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섭니다. 엘리사의 종은 아람나라 군대를 보고 두려워 벌벌 떱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는 더 많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종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기도가 끝나자 종의 눈에는 하늘의 군대, 천군과 천사들이 불 병거와 불 말을 타고 엘리사를 둘러 선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로소 눈이 열린 것입니다. 믿음은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면 어떤 문제도,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생긴다
그렇다면 언제 우리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불신앙에 빠져있는 도마를 만나서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직접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머리로만 알지 말고 정말로 만져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언제 믿음이 생깁니까? 부활의 주님을 실제적으로 만나면 됩니다. 손에 난 못 자국에 손을 대고 옆구리에 난 창 자국에 손을 넣고 확인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내 죄를 사했는지, 부활하심으로 어떻게 죽음에서 나를 살렸는지 실제로 확인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사변과 관념의 종교가 아닙니다. 응답의 종교라고 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체험하는 것만큼 자랄 수 있습니다. 언제 의심이 살아집니까? 예수 만져보면 됩니다. 체험하면 의심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도마처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왜 안 믿어집니까? 체험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너무 잘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수박서리를 하다가 주인에게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고 저보다 힘센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서 갔는데, 주인이 나타나자 다 잽싸게 도망하고 바보같이 저만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좀 악랄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희 집으로 저를 끌고 가서는 수박밭 전체를 다 물어내라고 말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해주기로 하고 저는 겨우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주인은 학교에 가서 제가 수박서리해서 수박밭을 다 망쳤다고 교장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완전히 제 스타일이 구겨졌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착한 아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공부는 좀 못하고, 힘은 좀 없어서 친구들하고 싸우면 매일 졌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라는 칭찬 때문에 살았는데 그런 일을 당했으니 참 한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안에는 죄책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죄에 대한 눌림, 죄인이라는 의식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주눅 든 것이지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열심히 부흥회에 참석한 것 같습니다. 집에도 가지 않고 교회에서 잠을 자면서 어른들 틈에 끼어 기도하던 제가 그날 밤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너무 생생합니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이 close-up 되어 저에게 보였습니다. 피흘리시며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던 핏방울이 저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마치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마치 때를 밀듯이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네 죄를 사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죄 사함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죄 사함의 감격,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김 받은 것이지요. 저는 그 때 ‘아 죄 사함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체험을 통해 비로소 안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저는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로 저처럼 잘 못 믿는 사람들은 체험을 해야 겨우 믿습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고 그의 못자국과 창자국에 손을 대는 순간 모든 불신앙과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도마가 한 고백이 바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못자국, 창자국을 만지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1-4에 보면 기도하다가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비로소 그들 속에 있던 염려와 모든 불신앙은 사라졌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을 믿음의 사람,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령 체험이 그들에겐 모든 문제의 답이었습니다.
성찬식도 주님을 체험하는 한 방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성찬식입니다. 떡을 먹습니다.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몸을 십자가 찟어 진 것을 우리 몸으로 기억합니다. 또 포도즙을 마십니다. 주님이 피흘리신 것이 우리 죄때문인 것을 깊이 새깁니다. 그리고 주님과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해 주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보는 것,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말만 들어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자꾸 보려고 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자꾸 보여주려고 합니다. 뭔가 화려하게 꾸미고, 기가 막힌 디자인을 합니다.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가짜일수록 더 진짜처럼 화려합니다. 너무 화려하고, 너무 멋있으면 오히려 일단 의심해봐야 합니다.
가짜 믿음, 가짜 종교도 자꾸 보여주려고 합니다. 복잡한 의식, 이상하고 요란한 옷을 입은 사제, 이상한 행위 등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말씀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크기의 일들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언제 믿음이 생깁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롬10:17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듣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굳게 닫쳐있는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 내 속에 있는 불신앙을 깨드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벧전1:23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믿음도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그 분의 전능하심과 창조주 되심,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와 믿음으로 살아간 믿음의 선배들에 대해서 압니다. 말씀을 대할 때 마다 우리의 믿음의 영역이 더 넓어지고 더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음식에 비유했습니다. 단단한 식물, 고기, 젖, 꿀, 송이꿀, 생명의 양식 등의 표현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젖과 밥을 먹으면서 자라나듯이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의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병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사실 도마가 회의주의자가 된 것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을 때 공교롭게도 도마만 빠졌습니다. 그는 은혜의 자리, 말씀 듣는 자리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자 그는 회의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혹시 믿음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도마처럼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염려되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와도 끄덕 없는 사람이 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손에 난 못자국을 만져보아야 합니다. 그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만져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위에 우리들의 믿음이 굳게 세워지고 믿음의 영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의 자리, 말씀 듣는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그대로 믿고 승리 하십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다 Seeing Is Not Believing
<들어가는 말: "보는 것이 믿는 것인가?">
알칸사 폿 스미스(Fort Smith)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경찰이 구멍가게를 턴 강도 한 사람을 추적하다가 잡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뉴썸(James Newsome)으로서 37살 먹은 남자였습니다. 경찰이 이 사람이 강도라고 확신한 이유는 여러 가지 증거들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그의 얼굴이 구멍 가게의 감시 화면에 잡혔습니다. 거기에다가 강도가 입었던 것과 똑같은 코트가 이 남자의 차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뉴썸의 부인이 자기 집의 자동차의 레디에이터가 샌다고 증언했는데 강도가 차를 파킹한 장소에서 부동액이 떨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더 확실한 것은 강도가 구멍가게를 털 때 안전 헬멧을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헬멧 정면에 'James Newsome'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서양 사람들은 'Seeing is Believing,'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속담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도마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일이 다 확인해보고 믿는 것은 복된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자연과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현대인들은 직접 자기 눈으로 확증하지 않는 것은 잘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언제나 "증거를 대라," "직접 보여 달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고, 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못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doubting Thomas)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도마의 모습이 무엇이든지 증거가 없으면 잘 믿지 않으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의 부활 체험기>
① 도마는 반드시 있어야만 할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도마는 열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으며(마 10: 3 참조), '디두모'(Didymu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디두모'라는 헬라어 이름의 뜻은 '쌍둥이'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도마가 쌍둥이로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요 11: 6에 보면 도마는 예수님을 매우 사랑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도마는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비관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드려야 할 시간에 딴 곳에 있으면 안됩니다. 은혜 받아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성도가 은혜 없는 곳에서 방황하면 안됩니다. 성도는 모든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가 있어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처럼 창립 25주년을 맞아 전 교인들이 한데 모여 기념 사진을 촬영한다고 몇 번씩이나 광고를 했지만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이나 지난 뒤에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부활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고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서 다른 제자들과 헤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함께 어울리고 교제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는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드시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② 도마는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세요.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우리는 도마와 같은 사람을 실증주의자(positivist)라고 말합니다. 결코 얼렁뚱땅 어설프게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자기가 의심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도마야말로 매우 정직한 사람입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서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내가 믿을 수 없어!" 이런 도마의 태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설프게 "무조건 믿습니다!" 하는 신자보다 정직한 의심을 거쳐서 확신에 이르는 신자가 훨씬 더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직한 회의, 양심적인 의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즉 '이해를 구하는 신앙'이 되어야지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믿음도 세상 사람들이 "왜 믿느냐?"하고 물을 때,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있는 믿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③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본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면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도마는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8일이 지나서 도마가 제자들과 다 함께 집안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정중앙에 서셔서 의심하는 도마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27절을 보세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집에 문이 잠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들어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고서도 저절로 통과해서 제자들에게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문의 빗장만 통과해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의심으로 마음의 빗장을 굳게 잠근 도마의 마음의 문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마는 예수님의 손에 박힌 못자국과 옆구리에 깊게 패인 창자국을 직접 자기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의 처절한 상처를 확인하자 도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이니다!"--"My Lord and My God!"--라는 신앙 고백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일찍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인칭 단수의 소유격, MY다"--"The most important thing is the possessive pronoun, first person singular, MY"--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주님이요, 인류의 구주로 말하는 것과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구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우리 자신이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해서 바로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남군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잔 고든(John B. Gordon)이 상원 의원직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상원의원직을 위한 지명 투표가 있는 날, 한 때 고든 장군 밑에서 일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고든 장군의 정치적 입장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고든 장군이 상원 의원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지명 투표가 시작되었을 때 이 남자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진 가운데 고든 장군의 지명을 반대하는 표를 가지고 단상 앞으로 걸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단상 정면에 앉아 있는 고든 장군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 얼굴은 그 옛날 잘생긴 고든 장군의 얼굴이 아니라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흉측해진 얼굴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남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고든 장군을 반대하려던 생각을 즉시 바꾸고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고든 장군을 반대해서 결코 안 돼! 나는 고든 장군을 지명하는 투표를 던져야만 해!" 그런 뒤 이 사람은 고든 장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장군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장군님 얼굴에 깊이 패인 상처를 잠시 잊었습니다!"--"General, forgive me! I forgot about the scars!"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마가 예수님의 손바닥에 깊이 패인 못자국을 만져 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참혹하게 일그러진 창자국을 만졌을 때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들 모두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의 상처를 기억하며 그 주님을 여러분의 개인적인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④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됩니다. 예수님의 손에 박힌 못자국과 옆구리에 찍힌 창자국을 직접 만져 본 다음에서야 예수님을 알아 본 도마에게 예수님은 따끔한 충고를 한 마디 던지십니다. 29절을 보세요.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진정으로 축복 받은 사람들은 보지 않고서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지식의 세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세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 보지 않아도 천국이 있고 부활이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어떤 원주민 부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던 선교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그리스도를 믿는다' 라는 표현을 그 부족의 언어로 번역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 선교사님이 요 3: 16을 번역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동네 사람 하나가 자기가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에 갖게 된 신앙에 대해서 말하려고 찾아 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선교사님이 '믿는다'는 말을 부족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좋은 표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잠시 동안 생각하던 원주민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믿는다'는 말을 묘사하기 위하여 우리말로 제일 좋은 방법은 '앉으라'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I think the best way to describe the word 'believe' would be to say, 'to sit down.'" 깜짝 놀란 선교사님은 왜 이 말을 떠올리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뜸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선교사님이 지금 의자 위에 앉아 계시지요. 이것은 이 의자가 선교사님을 지탱해준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You are sitting on a chair. Therefore, you must believe the chair will hold you." 선교사님은 이 남자의 대답에 은혜를 받고 요 3: 16을 즉시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 위에 앉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sits down on (believes o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시퍼런 면도날을 든 이발사에게 우리의 얼굴을 맡깁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돌아다닙니다. 이 세상에 되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믿음 없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고 손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제자들이 변화되고 초대교회가 생겨나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믿을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나오는 말: 믿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자!>
도마에 관해서 많은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나중에 도마는 특히「도마복음」(The Gospel of Thomas)과 「도마 행전」(Acts of Thomas)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한 가지 믿을만한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어느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비를 뽑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도마에게 떨어진 선교지는 인도였습니다. 도마는 처음에 자기는 몸이 약하기 때문에 인도까지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결국 꿈에 나타난 예수님의 설득으로 도마는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오늘날 남인도 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마는 쉽게 확신이 서고, 쉽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확실하게 해내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어떤 일을 너무 쉽게 성급하게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보다 분명 도마가 더 낫습니다!
오늘 이 좋은 부활절 아침에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종류의 불신앙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시기 원하십니다. 찬송가 340장의 후렴 가사처럼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증거 없이도, 보지 않고서도, 만지지 않고서도 주님의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훨씬 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활을 마음 깊은 곳에서 믿을 수 있는, 축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최응희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기록입니다. 도마가 어떻게 해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가? 이 말씀 속에서 은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도마의 믿음
도마는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기억하거나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도마는 제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리가 분명하고, 의리가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그중에 제일 빛나는 모습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도마가 제자의 도리로 확끈하게 나섰을 때입니다.
어느 날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로 다시 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선듯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돌팔매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 도마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복음11:16
이렇게 도마는 용기와 의리가 넘치는 제자였습니다. 모두 두려워 할 때에 도마는 주님을 생각하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주님이 가자고 하시면 제자인 우리는 따라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비록 죽음이 기다린다고 해도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이렇게 용기 있게 앞장섬으로서 다른 제자들도 용기를 내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가게 된 것입니다.
2. 도마의 불신
그러나 이런 도마에게 위기가 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며칠이 지나간 어느 주일 저녁, 제자들이 뒤숭숭한 마음으로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평안으로 축복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놀라움과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을 증언 하였을 때, 도마는 퉁명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20:27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여도 도마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내가 예수님의 두 손에 못이 박히는 것을 보았고, 심지어 죽음을 확인하느라 로마병사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을 보았거늘 어찌 그렇게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너희들의 환상이거나 다만 그러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나온 환영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도마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손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그 옆구리에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그가 정말 예수님인지 믿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얼마나 분명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확실한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분명 불신앙이었습니다. 믿음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던 의리와 믿음의 사람 도마는 어디가고, 어찌해서 이번에는 다른 제자들이 다 믿고 증거 하는 주님의 부활에 불신과 의심의 찬물을 끼얹는 불신앙의 도마만 남게 된 것일까요?
①인간적인 의리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의리가 믿음보다 강한 듯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의리는 확끈한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먹세계에서 의리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보스나 동료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리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향한 뜨거운 사명이 아니라 단순한 자기들만의 불의의 동맹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의리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주님과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놓친 채 갖고 있는 습관적 예배, 교회에 나가주기, 분위기로 함께 하기,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경력, 등등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것들이 아닐까요? 주님과 개인적이요, 직접적인 만남이 없는 모든 믿음의 행위들이 아마도 여기에 속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의리에 속한 믿음들은 실상 그 깊은 곳에 불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마의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이런 인간적인 의리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다가 실패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베드로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마가14:27-31) 그러나 베드로는 그 밤에 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맹세까지 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베드로나 도마, 모두 인간적인 의리로 주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②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것만을 믿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모든 것에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흑과 백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고, 아니면 아니고, 그러면 그런 것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확끈하고 시원시원해서 다른 사람에게 매력적이기까지 합니다. 도마는 자신의 눈에 보여야 믿고, 손에 잡혀야 확신하는 그런 분명한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은 모두가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것에만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담는다면 그것은 그 물질과 함께 소망도 믿음도 다 낡아지고, 사라지고, 허무해질 것입니다.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 치고 가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 치고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11:1-2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4:18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믿고 소망 삼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믿음은 영혼이 있음을 믿는 것이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어느 것 하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 추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그 어느 것 하나도 손에 잡히는 가치들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렇게 보이지 않으나 영원한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것만을 믿고자 했던 그 똑똑한 도마를 향해서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20:29
③믿음의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도마 불신의 또 한가지 분명한 원인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음’에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이 모여 두려움도 함께 나누고, 어려움도 함께 나누고, 믿음도 함께 나누는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의 사실을 깨닫습니다. 성도는 항상 신앙의 자리에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가까이 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고, 성도를 가까이 하는 데서 성장합니다. 믿음은 홀로 명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람자나 손님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혼자서는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스스로 고갈되어, 있던 믿음도 증발해버리게 됩니다. 믿음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조금 부대끼고, 귀찮은 듯 해도 믿음은 함께 있음으로서 불을 붙이고, 위로받고, 위로하고, 격려 받고, 격려하며, 함께 힘을 북돋고, 배우고, 성장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바로 이점에서 실패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실망 때문이었는지, 세상 다른 일에 바빴는지, 도마는 다른 모든 제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3. 도마의 변화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불완전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주 실수합니다.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수하지 않는 것, 죄를 짓지 않는 것,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 변화되는 것,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실제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패 속에서 자신의 잘못과 불신앙을 깨닫고 돌이키고, 변화되어 다시 일어남으로서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요나도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삭개오도 그러했습니다. 물론 도마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또 다른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다만 그 또 다른 기회를 놓지지 말고 잘 붙잡아야 합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여드레 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도마도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그 때에 도마의 표정이 어떠하였을까! 예수님의 이 사랑에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한 부끄러움과 주님의 깊으신 사랑을 도마는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확실한 성격과 흑백이 분명한 생각으로만 보면, ‘그럴까요, 어디 정말 예수님이신지 확인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했을 법 한데, 오히려 그 똑똑한 도마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8
아마도 도마는 감당할 수 없는 감격에 주님 앞에 엎드러져 울먹이며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며 우리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이후에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마는 한 번 실패하였지만 그러나 결국은 더 큰 믿음을 얻게 되어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의리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는 것도 아니고, 나 홀로 외로이 가는 길도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슨 헌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아는 지식도 아니고, 오랜 경력도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시고 그 말씀으로 사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여러분의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의심을 극복하고 확신에 서려면
문기태 목사
인류 최초의 부부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늘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던 아담이 하루는 밖에서 아주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하와는 매우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죠!"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세상에 여자라고는 당신뿐이잖아?" 하지만 한 번 의심한 하와의 의심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와는 의심의 병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와가 의심하든 말든 아담은 잠을 잤는데 누군가 가슴을 콕콕 찌르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하와였습니다. "당신 뭐하는 거야? 자지 않고."
"말시키지 말아요! 지금 갈비뼈 숫자를 세고 있으니까!"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결혼하는 날부터 신혼이 아니라 감옥이 됩니다. 의처증이 지나친 남편은 이웃 아저씨를 만나 인사하면 "저 남자 몇 번 만났느냐?"고 따집니다. 의부증이 심한 아내는 매사에 남편을 의심하고 추궁합니다. 그러면 결국 가정이 지옥같이 될 것입니다. 인생이 지옥같이 불행합니다.
공자의 수제자인 자공이 어느 날 공자에게 질문했답니다. "나라가 잘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족식(足食), 족병(足兵), 신(信)이니라."라고 대답했답니다. 생활의 안정, 자주국방, 정부의 공신력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라고 하자 "병을 버리겠다"라고 했고 "남은 두 가지 중 하나를 더 버려야 하신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식을 버리겠다."라고 하였답니다. 나라는 경제력이 없어도 살고 군대가 없어도 살 수 있으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라의 경제가 튼튼하고 강력한 군대가 있어도 백성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으면 나라는 흔들리고 불안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심각한 위기가 이것입니다. 국민이 매사에 정부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료를 공개해도 의심을 풀지 않습니다. 권위가 있고 책임 있는 이가 나서서 해명을 해도 끝까지 의심하기에 혼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병중에 의심병이 가장 무섭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스럽고, 하나님의 말씀도 의심스럽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의심을 벗겨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의심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의심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처음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믿음이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위기를 만나면 의심합니다. 갑자기 질병을 만나거나 환경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고 의심합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고 의심합니다.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나 잘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정말 약속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수많은 의심이 밀려오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심을 극복하고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담대해 질 수 있을까요? 믿음의 여정에서 만나는 회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1. 의심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의심의 표현을 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아예 의심을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에 대한 의심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속으로 누르고 있다가 어느날 그대로 터져버리면 매우 불행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예 불신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의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참된 믿음을 찾는 지름길입니다.
진지하게 의심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결국 믿음의 해답을 얻고 믿음의 진보를 경험합니다. 저도 스무살을 전후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의심을 풀고자 열심히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의심에 가득찬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이 의심의 구름을 한순간에 거두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의심을 앞세우는 질문이 신앙의 선배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의심스런 성경의 문제들을 시원하게 답변하지도 못하면 믿음 좋은채 하는 그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문점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몸부림쳤기에 하나님께서 어느날 모든 의심을 풀어주시고 오늘의 저를 만드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중 의심이 가장 많았던 도마가 등장합니다. 도마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직접 듣고 수많은 기적의 현장에서 목격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의심의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도마를 만나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그 말을 받아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노라." 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장사까지 지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험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이치적으로 말도 안되는 허황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것을 나보고 믿으라고? 어림도 없지? 그래서 도마는 철저히 의심했습니다. 자신의 의심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에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도마의 의심으로 가득찬 표현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님이 사단이라고 책망하셨나요? 왜 믿지 못하느냐?고 비난하셨습니까? 아니지요. 27절을 보십시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은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검증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후 네 안에 있는 의심을 극복하라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책망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격려하셨습니다.
우리는 의심이나 신앙의 회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의심이 생기면 다시 한번 확인하십시다. 의심에 대한 정직한 표현은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솟아나면 셀모임에 가셔서 표현하십시오. 성경공부시간에 그외에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십시오. 주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여러분이 안고 잇는 의심을 풀어주는 분이십니다.
결국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거장이 되어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여 인도 선교의 문을 열게 됩니다. 결국 확신에 서서 사역하다가 영광스럽게 순교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의심이 계속 꼬리를 문다면 그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도마같이 아주 유능한 전도자가 될 징조입니다.
2. 예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대개 회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믿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구체적인 신앙 체험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본문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실제로 넣어 보았다는 말슴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옆구리에 손을 넣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 도마가 보인 반응이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결국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고 주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며 엎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니까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증거를 찾지 않아도 믿어집니다. 도마가 의심꾸러기가 아니라 다른 제자들보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늦었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직접 만남의 사건이 없으면 의심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찬송중에 눈물이 흐르게하여 예수님이 여러분의 상한 마음을 만지시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셔서 안고 잇는 문제를 풀어주시고, 질병이 치료되는 등 특별한 경험을 하도록 인도하셔서 기쁨이 충만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씀은 아무 증거를 보지 못해도 무조건 믿으라는 뜻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의 축복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도마는 처음 신앙의 증거와 체험을 요구하는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확신에 이르게 되고 믿음의 용사로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회의를 극복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명확한 체험을 하면 쉽게 극복됩니다.
저는 요즘 다섯명의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제자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반원들이 모두 흥미있게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전에 해본 어떤 성경공부와는 아주 달라요, 너무 좋아요."라는 고백을 매주 듣습니다. 교재에서 요구하는대로 매일 30분 정도 공부하고서 매주 목요일 저녁에 만나 두 시간정도 삶을 나눕니다. 저는 그 주간에 공부한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질문을 매주 던집니다. 이번 주에 기도응답받은 것 있습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건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개인적으로 들은 말씀이 있습니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러면 이야기가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매주 풍성한 나눔이 있습니다. 한 주간동안 나눌만한 놀라운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면 의심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회의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삶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무디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성경을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고 의심이 생기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보통사람 같으면 "기도하시오."라고 대답할 텐데 무디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의심이 생기고 깨달아지지 않으면 뛰쳐 나가 전도하십시오. 성경책을 놔 두고 나가서 전도하고 지나가는 손수레라도 밀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봉사하고 전도하십시오. 그러고 돌아와서 성경을 읽으면 깨달아질 것입니다. 행하지 않고 읽기 때문에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살아게신 하나님을 만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의심의 구름은 다 사라집니다. 확신이 밀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의심많은 도마, 이성적인 사람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주님의 말슴을 듣고 부활의 몸을 보았을때 의심의 구름이 한순간에 물러 갔습니다. 저역시 이성적으로 깨달아보려고 노력하다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성령 체험을 통하여 성경의 모든 의문이 다 풀리고 다 믿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동정녀 탄생도, 부활도, 천국도, 십자가 사랑도, 재림의 약속도, 다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으면서 이 믿음의 항해를 계속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의심의 파도가 넘실대고 믿음이 약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심에 그대로 주저앉으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의심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혼자만 의심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를 내어 목장모임에 참석하여 의심을 말하십시오. '내가 의심이 들어 힘들다 극복하도록 도와달라.' 말하십시오. 그리고 직접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찾아 오실만한 자리로 나아 오십시오. 반드시 살아계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의심을 극복하고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