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프로듀서들의 고민은 한결같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대중의 취향을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가? 여기에는 어떠한 정답도 없으며 한 번 성공이 다음을 위한 밑거름이나 보증수표가 되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오직 전략과 전선만이 있을 뿐이다. 관객이라는 가변적인 상대와 싸우기 위해 프로듀서들은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매번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유행을 무턱대고 따라가기 보다는 옳다고 느끼는 것에 과감한 배팅을 하는 싸이더스(싸이더스는 '라틴어'로 별을 의미한다) 대표 차승재.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하는 그의 손끝에는 언제나 '치열함'과 '생존전략'이 동시에 묻어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싸이더스가 제작한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역도산>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그의 심정은 남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경의 이케가미혼몬지 정원 옆 양지바른 곳에 있는 역도산의 묘에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죽어서도 일본인에겐 영웅으로 기억되는 그를 왜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역도산> 제작의 시발점이었다. 기구한 삶을 살다 간 역도산은 언제나 에너지에 넘쳐서 비등점을 향해서 부글부글 끊어 올랐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에너지로, 세상에 설득당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설득하려고 했던 역도산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라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된다면 제작자의 입장으로서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일본의 한 프로레슬링 전문 사이트에서는 "당시 역도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승부가 나야만 했고, 또 거기에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프로레슬링, 그것 다 쇼인데 재미가 있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레슬링 경기의 목적이 승부 자체에 있지 않고 더 화려한 동작, 더 위험한 기술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있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는 몸뚱이 하나로 일본 열도를 삼킨 역도산의 치열했던 삶처럼, 차승재 대표가 '역도산'을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오래 전부터 '역도산'이라는 인물을 스크린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나와 뜻이 맞는 감독을 찾기가 어려웠다. 싸이더스 소속 감독들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도 말이다.(웃음) 그러다가 <파이란>을 끝낸 송해성 감독이 '역도산'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년 이상 알고 지낸 아끼는 후배였고, 그와 함께라면 내 머릿속에 있는 '역도산'이 스크린에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 국회 도서관에는 역도산 관련 책이 200권도 넘는다고 한다. 스포츠 스타로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투수 나가시마 시게오리에 이어 두 번째다. 유수의 영화사에서 여러 번 기획되었지만 번번히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의 영웅이었던 역도산이었지만, 역도산은 일본에서도 감히 다루기 어려운 거물이었던 것이다. 차승재 대표는 기획 단계부터 일본 현지 제작을 염두에 두고 함께 할 제작사를 찾았다. 마침 일본에서는 지난해 사후 40주기를 맞아 여러 곳에서 역도산 관련 작품을 기획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힘들겠구나'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미 일본에서 몇 팀이 '역도산'을 영화화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후발 주자인 우리가 과연 그들을 제치고 '역도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지 앞날이 캄캄했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시나리오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이전부터 알고 지낸 가와이 신야(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제작자)에게 각자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그 중 좋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제작하자고 했다. 결국 나중에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우리 시나리오가 선택이 됐고, 가와이 신야는 군말 없이 자신의 기획을 접고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슈퍼스타 감사용>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성공시킨 차 대표는 영화를 결정할 때 손익 여부에 더불어 대중문화라는 큰 틀 안에서 자리매김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제일 먼저 본다고 했다. 영화 제작 산업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좋은 시나리오와 관객의 트랜드를 중시하고 작품을 만들면 시장에서 외면 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당연한 이치이겠지만 그런 작품을 기획하고 발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차 대표는 자신은 글재주가 없다고 하지만 작품을 보는 눈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역도산>의 흥행 성적표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살인의 추억>(이 영화는 싸이더스가 제작한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다.) 보다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친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도 아니며, 그렇다고 스포츠 영화는 더욱더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한 사내의 이야기다. 애초부터 한국시장만 고려하고 <역도산>을 만들었다면 '역도산의 삶은 이랬다'라고 단순히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본을 포함한 해외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더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송해성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설경구의 열연에 힘입어 <역도산>은 '영웅 역도산'이 아닌 '인간 역도산'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도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영화가 되었다."
역사 속의 인물, 특히 근세를 살다가 사라진 인물을 조명하는 작업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대의 영웅 역도산을 스크린에 옮긴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 것인지 모두가 궁금해 했다. 그의 격렬했던 삶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쳐다보기에는 그 피사체가 너무 크고 강렬해서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홀홀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혹독하게 훈련을 하고, 1년에 300전 가까운 시합을 치르며 자신의 한계를 실험한 역도산은 세상을 다 가졌지만 마음껏 웃지 못했던 사나이였다.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인으로 살면서 정말 누구한테도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 못했다. 패전 후 미국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미국 레슬러들을 가라데 촙으로 때려눕히는 통쾌한 장면을 연출하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지만, 한국에서 보이는 그의 이미지는 지나칠 정도로 흐리고 미미했다. 거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이유가 있겠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대접은 지나치게 소홀했다."
확고한 자신만의 전망을 가지고 있는 차승재 대표는 '한판 승부'가 아니라 차근차근 초석을 다져나가는 제작자다. 감독에게 영화만을 생각할 수 있게 양질의 작업 환경을 제공해 주고, 아울러 제작사 입장에서 목표했던 예산과 스케줄에 맞출 수 있도록 가이드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12월 15일 역도산의 기일에 개봉하는 <역도산>은 그의 승부사 근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내가 제작한 영화를 관객들과 같이 보는 경험, 관객들과 느낌을 주고 받으면서, 그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이 눈가를 훔치기 위해서 손수건을 꺼내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일만큼 상쾌한 경험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아마도 이런 즐거움이 계속 영화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 같다."
"멈춰서 생각하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역도산>이 관객들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기억됐면 좋겠다." 차 대표의 포부는 새로운 소재, 형식, 해석을 찾으려는 의지의 표명처럼 들렸다. <역도산>은 대중들과 조우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을 만들면서도 대중과의 접점을 찾아내는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에 투지를 불태우고,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결국 그것을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그의 행보를 비추어 볼 때 싸이더스의 서른번째 작품인 <역도산>도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