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고속열차로 대구에 내려갔다.
독일에 사는 여동생이 아버지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동생은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뵙는다고 지난주에 귀국했다.
아버지는 눈을 반쯤 뜨고 있었으나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버지 아버지' 애타게 불러도 초점 잃은 눈동자만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코에는 산소 튜브가 꽂혀있고, 네 개의 봉지 속 액체가 줄을 타고 혈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 속에 빠져든 아버지는 그저 가쁜 숨만 몰아쉬고 계셨다.
"누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지 저렇게 눈을 뜨고 계시네요."
간병인의 말에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니 의치를 뺀 모습이 옛날 할아버지와 똑같았다.
"아버지, 기다리던 서울 언니가 왔어요."
동생의 말을 알아들으셨는지 아버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귀가 가장 늦게까지 열려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맏딸이 왔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얼마나 답답하실까. 성미 급한 아버지가 저러고 계시다니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암으로 회생이 불가능한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다. 눈물로 흐려진 내 시야에 저승사자가 왔다 갔다 했다.
요양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을 때 아버지는 정신이 또렷했고 식사도 거르지 않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 신장이 망가져 다른 장기에도 급속히 손상을 주고 있다는 주치의의 말에 억장이 무너진다.
"혹시 오늘 밤에도, 길면 2주일 정도 갈 수 있으나 마음의 준비는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울에서 다 팽개치고 달려온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시는 아버지, 아,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거치며 어렵게 살아오신 분이다. 병인년 섣달 초닷새, 평양에서 한의원이신 증조할아버지의 장손으로, 효자로 소문이 자자한 할아버지와 인자하신 할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그 당시 부유했던 할아버지께서 일제 때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등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주셨다고 한다. 그 죄목으로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가족을 데리고 몰래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 대구에 오신 할아버지는 한약재 일로 생계를 꾸리셨다. 그 당시 대구는 교육도시로, 약령시장으로 유명했다.
학생 신분인 19세 아버지는 한 살 아래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양가 부모님은 평양이 고향인 실향민으로 친구 사이인데 결혼을 서두르신 이유가 있었다. 외조부모님은 딸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한 절박한 심정에서, 외아들뿐인 조부모님은 하루빨리 손자를 보고 싶은 절실함이 서로 통해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상당한 채 진해 육군병원에 후송되었다. 그 후 사범대학을 졸업해 인동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았고 마지막 포항중학교에서 퇴임을 할 때까지 평생을 교육자로 지내셨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지만, 술과 친구를 좋아한 아버지는 친구에게 빚보증을 서 집을 팔아 갚는 등 가족에겐 그리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가 4년 전 엄마를 먼저 보내시고 건강이 날로 나빠졌다.
부모님의 사랑은 가이없다고 하지만 모성애와 부성애는 좀 다른 것 같다. 온갖 고생을 무릅쓰면서 우리들 교육에 정성을 쏟았던 엄마에게는 자식들이 늘 보답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러지를 못 했다. 엄마를 간병할 때는 1년 간 대구를 오갔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못 한 것이 후회스럽다. 아버지와의 이 세상 인연이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동안 좀 더 잘해드릴 걸 때늦은 후회가 소용이 없다. 몇 가닥 남은 하얀 머리카락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슬픔을 안고 그날로 서울 집에 돌아왔다. 며칠은 괜찮을 것 같아서다.
그런데 이틀 후 (23일) 이른 아침에 급박하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 혈압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에 놀라 고속열차가 느리다고 탓하며 대구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일 인실로 옮겨 마지막 먼 길을 준비를 하고 계셨다. 이틀 전보다 수액 봉지가 두 개로 줄었고 숨쉬기는 더 힘들어 보였다. 오후 5시가 지나자 스크린의 숫자와 그래프 모양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더니 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고요히 숨을 멈추셨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 아버지 먼 길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더구나 하나뿐인 남동생은 같은 병원에서 암 투병 중이라 산 넘어 산이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겠지.
아버지는 92세 천수를 다 했다고 하나 마지막 4년간 외로우셨다.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정성껏 49제를 올리려고 한다. 이 기간 동안이라도 나는 몸 씻고 마음 씻으며 49제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대구로 달려가련다.
2017.2.25.
첫댓글 가시는 그 날은 더 잡을 수가 없든구나.나도 78세에 아버지를 보내면서 많이 울었다.
오랜 투병생활에 지치셨고 혼수상태가 여러날 계속되어 임종을 예감해선지 엄마 때만큼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위로할 말이 없구나 . 살아생전엔 다시 없을 재회가 없다는 슬픔 이 너무 큰 상심이란 걸 이 후에야 그 슬픔이 가슴뫼게 하는지 명복을 빕니다.
왜 진작에 몰랐던지
투병생활에 지친 모습 뵙기가 안쓰러워 차라리 엄마 곁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가게 될 길이라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언니, 고맙습니다.
아직 실감이 나지않지요?
아무리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거예요. 건강 조심하시구요.
실감이 나지 않아요.
오늘부터 매주 수요일에 7회 49제를 지내러 대구 갑니다.
제행무상, 회자정리라 떠나보내드릴 수 밖에 없지요. 94세 어머니가 살아계시니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49제 잘 모셔드리시고...
첫제 모시고 방금 상경했습니다.
연세 많으셔도 건강하시면 축복입니다.
지금은 아득하기만 한 심정이겠습니다.
잦은 여행에 건강에 무리가 없기 바랍니다.
아직은 현실감이 안 납니다.
아버지 짐 정리를 두 여동생이 다 해서 나는 가서 구경만 했습니다.
형제자매가 많으니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