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냐, 법이냐
정목 스님
“시님! 공부도 좋지만 사람이 묵어야 사는 법 아닌교.
여기는 신도가 없어서 굶어 죽기 십상입니다. 상을 내지 마라 한 거 알지요.
그렇게 앉아서 공부하는 상 내지 말라 이거 말이요.”
그러자 내가 “그건 어디에 나오는 말입니까?”하니,
곧 받아서 “금강경 아닙니꺼. 맞지요?...... ‘일하지 않으면 묵지도 마라’했답니다.
그래서 우리 영감도 언제는 도 닦는다더니 묵어야 산다고 요즘에는 일합디다.”
그러자 내가 또 “누가 그랬어요?”하고 물으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우리 영감이 그럽디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때 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고는 “ 예, 잘 알겠습니다.
공부하면서 안 죽을 만하게 먹겠습니다.”하며 크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더니, 보살님도 웃다가 다시 “경험자 말을 듣소, 밥 안 나오는
공부 그만 두고 그 좋은 목청으로 부산 가서 염불하는 게 나을 텐데. 배도 부르고.....
잘 생각해 보소, 참 이따가 부엌에 가 보소, 간이 맞을랑가....... ”
보살님은 이런 말을 길게 흘리면서 총총 걸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마당을 몇 바퀴 돌다가 부엌에 들어가 보았더니
선반 위에 하얀 수건이 덮인 대바구니와 작은 병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바구니를 내려 보니 시골 잔치 음식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나는 아마 오늘이 아랫집 무슨 잔칫날이나
제삿날인가보다 생각하면서 바구니와 병을 들고 방으로 가서 열어보았다.
전복볶음 문어꼬치 오징어꼬치 깻잎튀김 등 그리고 병에는 맑게 달인
정종이 들어 있었다. 여기 온지 일 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 무슨 인연인지 아랫집 보살님으로부터 수차례 은혜를 입었다.
오늘은 나를 염려하며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밥과 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까지 마련해 주었으니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하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골 잔치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예전에 집에서 친척들이 모여 제사 지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종가집안의 장손이어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제삿날 며칠 전부터 정성을 드리며
“이렇게 사는 것이 모두 조상 덕이니 너희들도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고
가르치시던 아버지 얼굴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보면 할머니 아버지 모두 자식들 뒷바라지와
의식주 약값을 위해 평생 일만 하시다가 가신 것 같았다.
지금 계신 어머니도 그러하고 누님 형들 역시 다를 것이 없다.
오직 나만이 밥을 먹고 사는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법을 먹고 사는 출가생활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밥과 법을 놓고 고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날 밤은 몇 잔 마신 정종의 열기에 만 가지 상념이 교차하였고
오랜만에 포식을 한 탓에 피로하여 일찍 잠에 들었다. 다시 날이 밝아 왔다.
밤의 고마움, 일하는것 못지않게 잠을 자는일도 소중함을 느끼게하는 아침이었다
모든 일을 인연에 맡기고 편안하게 잠을 잤더니 개운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법을 먹고 살기로 한 신념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지면서 도량과 법당 곳곳을 말끔히 하였다.
청소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이곳에 온지 꼭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시간이란 바쁘면 빠르고 일이 없으면 느리게 흐르는 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나는 것을 보면 나는 바쁘게 살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 급하게 부르듯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왔다.
방에 들어가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곳에 온 후 처음 걸려온 은사 스님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정목 수좐가? 음.....내일 오전에 별일이 없으면 나에게 좀 다녀가지”
나는 “예 알겠습니다.”하였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일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므로 별일이 있어도 가야할 상황이었다.
수행자에게 “밥이냐 법이냐” 하는 문제를 제외하면 중요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밥일까? 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