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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화) 이재명 46%·오세훈 43%… 이재명 45%·홍준표 42%
오세훈 서울시장과 홍준표 대구시장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양자 대결에 나설 경우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1월 27일 중앙일보가 여론조사업체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 23~24일 이틀간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1031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 조사를 한 결과, 이재명 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맞붙으면 46%와 43%의 접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다. 이재명 대표와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결하면 45%와 42%로 오차범위(±3.1%포인트) 내 3%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다만, 이재명 대표는 오세훈·홍준표 시장을 포함한 국민의힘 대권 잠룡 누구와 붙어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과 강원, 대전·세종·충청, 대구·경북(TK), 부산·울산·경남(PK)에선 오세훈·홍준표 시장이 앞선다. 반면 인천·경기, 광주·전라, 제주에선 이재명 대표가 우세했다. 연령별로는 40대와 50대는 이재명 대표가, 30대·60대·70대 이상은 오세훈·홍준표 시장이 각각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18~29세에서 이재명 대표(43%)와 오세훈 시장(38%)은 박빙이었고, 홍준표 시장(47%)은 이재명 대표(35%)보다 우위였다.
다른 범 여권 후보 가운데에서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37%로 이재명 대표(44%)와 7% 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의원(35%)과 이재명 대표(42%)의 차이도 7% 포인트였다. 최근 보수 진영의 유력 주자로 떠오른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경우 오차범위 밖인 9%포인트(이재명 대표 47%, 김문수 장관 38%)차였다. 이재명 대표(46%)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34%)의 가상 대결에선 12%포인트 차이가 났고, 이재명 대표(47%)와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26%)은 21%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양자 대결이 아닌 전체 대선 후보를 놓고 물었을 때는 이재명 대표(36%), 김문수 장관(16%), 홍준표 시장(10%), 한동훈 전 대표(8%), 오세훈 시장(7%), 김동연 경기지사(4%), 우원식 국회의장(2%), 이준석 의원(1%)의 순서였다. 이번 조사는 휴대전화(가상번호) 면접 조사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응답률은 13.3%(7761명중 1031명)이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최대 ±3.1%포인트다.
류호정, 목수됐다 … "전직 그만하고 열심히 살 것"
류호정 전 정의당 의원이 목수가 된 근황을 전했다.류호정 전 의원은 지난 1월 26일 자신의 SNS를 통해 '설 즈음 공유하는 근황'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올렸다. 류호정 전 정의당 의원은 "취업했다"며 "작년에 기술 배우러 목공 학원을 다녔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회사에서는 경력으로도 나이로도 막내 목수고 배울 게 많아서 퇴근 후에도 공부하고 있다"며 "회사는 실내 인테리어 시공, 고급 원목가구 제작에 특화되어 있다. 원목을 가공하기 위해 직접 운영하는 목공방도 있다"고 소개했다. 류호정 전 의원은 "나무라는 소재는 자연 그 자체라 저는 휴식 공간에 목재가 많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데, 요즘 현장을 따라다니며 인테리어와 원목의 결합으로 주거공간이 한층 더 편안하고 고급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있다"며 "연락 주시면 성심껏 상담해드리겠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뉴스도 보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지며 바라보고 있지만 이제 전직과 이직은 그만하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다"며 "다들 즐거운 설 연휴 보내시라"고 덧붙였다. 한편 류호정 전 의원은 지난해 4월 총선 당시 개혁신당 후보로 성남갑 공천을 받았지만 "제3지대 정치는 실패했다. 당에서 어떠한 역할도 부여받지 못했다"라며 총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제주항공 사고 예비보고서… "활주로 2㎞ 앞 블랙박스 정지"
제주항공 사고 여객기는 무안국제공항 활주로에 약 2㎞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블랙박스 기록이 중단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고기 기체는 활주로 너머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 둔덕과 부딪힌 충격에 앞부분의 잔해가 둔덕에서 최대 200m 떨어진 곳까지 튀어 나간 것으로 조사됐다.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인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항철위)는 사고 30일째인 1월 27일 이 같은 사고 개요 등을 포함한 A4용지 5장 분량의 예비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번 보고서는 사고 이후 항철위가 처음으로 공표한 정식 조사 보고서다.
예비보고서는 사고 조사 당국이 국제민간항공협약에 따라 초기 조사 상황 공유 차원에서 사고 발생 30일 이내에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및 사고 관련국에 보내도록 규정돼 있다. 항철위는 이를 사고기의 기체 및 엔진 제작국인 미국과 프랑스 외에 사망자가 발생한 태국에 제출했으며, 항철위 홈페이지에도 게재했다. 보고서에서는 사고기의 블랙박스인 비행기록장치(FDR)와 조종실 음성기록장치(CVR) 기록이 한꺼번에 멈췄을 때의 대략적인 운항 위치가 공개됐다. 블랙박스 기록은 사고기가 무안공항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 둔덕에 충돌하기 4분 7초 전인 지난달 12월 29일 오전 8시 58분 50초부터 남아 있지 않다.
항철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사고기는 원래 착륙하려던 방향인 01활주로의 시작점(활주로 최남단)에서 남쪽으로 약 1.1NM(해리) 떨어진 바다 위를 비행하던 것으로 파악됐다. 미터로 환산하면 약 2천37m의 거리다. 착륙이 임박했던 만큼 속도는 161노트(시속 약 298㎞), 고도는 498피트(약 151m)로 낮아진 상태였다. 이때 양쪽 엔진에는 대표적인 겨울 철새인 가창오리가 빨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항철위 조사 결과 두 엔진 모두에서 가창오리의 깃털과 혈흔이 발견됐다.
항철위는 정확한 조류 충돌 시점이나 충돌한 조류 개체 수, 다른 조류가 포함됐는지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고 당시(오전 9시 기준) 바람은 110도 방향에서 2노트(약 3.7㎞)로 불고 있었다. 시정은 9천m며 구름은 4천500피트(약 1.37㎞)에 조금 있어 항공기 운항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온도는 2도에 노점온도(이슬점)는 0도, 해면 기압은 1천28헥토파스칼(hPa)로 특별한 기상 변화는 없었다고 항철위는 설명했다. 이번 보고서에는 사고 개요와 항공기 이력, 조종사 경력 등의 조사 결과 및 사고 현장 상황 등 그간 초기 조사로 파악된 내용이 담겼다.
사고기는 B737-800 기종(등록번호 HL8088)으로, 미국 보잉에서 제작해 2009년 9월 4일 유럽 저비용항공사(LCC)인 라이언에어에서 처음 인도받아 운항하다가 2017년 2월 3일 제주항공에서 리스로 도입해 운영해 왔다.기장(45)은 총 비행시간이 6천823시간으로, 이 가운데 사고 기종으로 비행한 시간이 6천96시간(기장으로서 비행한 시간은 2천559시간)이었다. 사고 직전 90일간 비행시간은 186시간으로 조사됐다. 부기장(35)은 총 1천650시간을 비행했으며 이 중 사고 기종은 1천339시간 운항했다. 사고 이전 90일 중에는 164시간을 비행했다.
사고 항공편인 7C2216편은 지난달 12월 29일 태국 현지시간 오전 2시 30분(한국시간 오전 4시 30분)께 승무원 6명과 승객 175명 등 181명을 태우고 이륙했다. 이후 한국시간 오전 8시 54분 43분, 사고기는 무안공항 관제탑과 착륙을 위한 최초 교신을 했고 관제탑에서는 01활주로 착륙을 허가했다. 착륙 허가를 받은 사고기는 01활주로로 접근 중 오전 8시 57분 50초에 관제탑으로부터 조류 활동(충돌)을 주의하라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그로부터 꼭 1분 뒤 블랙박스 기록이 동시에 중단됐다. 사고기는 그 직후인 오전 8시 58분 56초에 조류 충돌로 인한 메이데이(비상 선언)를 3회 외치는 동시에 고도를 높이는 복행을 했다. 이후 01활주로 왼쪽 상공으로 비행하다가 반대 방향인 19활주로로 착륙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선회한 뒤 활주로에 맞춰서 접근했다. 활주로19에는 착륙기어 장치(랜딩기어)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동체 착륙했고, 활주 중 활주로를 초과해 방위각 시설물(로컬라이저 둔덕)과 충돌했다.
둔덕과 충돌한 뒤에는 화재와 일부 폭발이 발생했다. 이 충돌로 두 개의 엔진은 둔덕의 흙더미에 묻혔고, 기체 전방 부위는 둔덕으로부터 약 30∼200m까지 흩어졌다. 후방 동체의 꼬리 부분은 둔덕 바로 너머에서 일부가 전소된 상태였다. 이 사고로 운항 및 객실 승무원 4명과 승객 175명 등 총 179명이 사망했다. 객실 승무원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조류 충돌이 블랙박스를 비롯한 항공기 장치 기능 이상으로 이어지게 된 경위와 복행 및 착륙 활주로 변경의 배경, 로컬라이저 둔덕이 피해 규모에 미친 영향 등은 추후 드러날 전망이다.
보고서에는 사고 현장 전경과 흙더미에 묻힌 상태의 양쪽 엔진 등의 현장 사진도 담겼다. 사고 조사 매뉴얼에 따르면 항철위는 예비보고서에 필요시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기재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문제 지적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항철위는 "조사 중 안전 및 개선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안은 내용을 검토해 긴급 안전권고를 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향후 조사계획에 대해 항철위는 "조류 충돌, 엔진 분해 검사, FDR·CVR 자료 분석, 관제 자료, 부품 정밀검사와 방위각 시설물 등을 전방위적으로 조사해 명확한 원인을 규명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 프랑스 항공사고조사위원회(BEA)와 사고조사를 협력하고 있으며,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합동으로 조사를 지속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항철위는 앞서 지난 1월 25일 사고 유가족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어 보고서에 담은 사고 조사 현황과 향후 계획 등을 미리 공유했다. 항철위 관계자는 "예비보고서에 수록된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최종 보고서에는 오류가 수정된 내용이 담길 것"이라며 "모든 과정을 공정하게 진행해 사고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손끝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 대전 이발사 이종완
- 막내 여동생 명희의 시부모인 사돈 어른들 이야기 -
간판은 이가 맞지 않은 채 마감이 벌어졌다. 출입문에 붙인 가게 이름과 전화번호는 한껏 모양을 내고 정성을 들였지만, 정확하게 제자리에 붙지 않은 자유분방함을 보인다. 이발소 사인물은 붙들고 있는 앵글에 기운이 빠졌는지 살짝 누웠어도 잘 돌아간다. 모든 ‘아귀’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대신에 여기저기 보이는 빈틈이 묘한 이완감을 준다. 이 모든 것은 세월의 힘이다.
"사실, 내가 환갑 때까지만 이발소를 하고 그만두려고 그랬어. 근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까, 너무 젊은 거야.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이나 친구들도 그만두면 무얼 할 거냐고! 계속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그런데 마침 이 동네 개발한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집이 헐릴 때까지만 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오래 했네. 지금이야 개발이 언제 될는지 알 수가 없어. 도로를 널찍하게 낸다고 바로 옆집은 조만간 뜯을 것 같던데."
◆ 열다섯 소년, 철공소 거쳐 이발 기술을 배우다
이종완씨의 고향은 조치원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신안동에서 1937년에 태어났다. 9남매 중 넷째. 호적에는 1939년생으로 올랐다. 그 시대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장질부사나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뜰까 걱정스러워 한 2년 두고 보아서 그렇다. 광복하던 해 들어간 국민학교에서는 공부도 곧잘 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종완씨가 계속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480명 모집하는 중학교 시험에 48등으로 합격했지만 위로 형들과 누나가 이미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 진학하기 힘든 가정형편이었다. 부모님은 넷째인 그도 학교를 보낼 생각으로 교복과 교모, 가방을 사 주었다. 그러나 중학시절은 한 달 남짓만에 끝나 버렸다. "월요일 아침 조회 때마다 입학금을 못낸 학생을 전부 앞으로 불러내는 거야. 그렇게 망신을 주는 거지. 처음엔 480명 중에 150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마지막에는 대략 20명이 남았어. 그때는 교문을 잠가 아예 못 들어오게 해 버리더라고."
당시 입학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내야 할 입학금이 10만 원이었다면 보결(補缺)로 입학하는 학생이 낼 돈은 50만 원이었다고 한다.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학교 입장에서는 보결 학생을 많이 받을수록 밑질 것이 없는 장사였다. "부모님께선 전쟁통에 입학금을 어떻게라도 융통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신 모양이여. 다들 어려운 세상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아버지는 친척 소개로 이종완씨를 철공소에 보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기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에 시작한 철공소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고 그 힘든 이름을 가진 공구들을 찾아오라고 할 때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하면 기술자가 들고 있던 쇠붙이로 쥐어터지기 일쑤였다. 한 달만에 철공소 생활은 막을 내렸다.
다음에 찾은 기술이 ‘이발’이다. 기술자 세 명에 면도사 한 명이 있던 신안동의 ‘신안이발소’였다. 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머리 감기는 것부터 배웠다. 그곳에서 2년 동안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다. "그 다음에 옮긴 곳이 원동에 있던 ‘청이발소’였던가 그래. 거기서 이발 기술을 완벽하게 배울 수 있었어. 이발 기술을 다 배우는 데까지 대략 5년 걸렸어. 그리고는 바로 군대에 갔지." 제대하고 삼성동 '미영이발소'에 취직했다. 그리고 1964년에 결혼하면서 그 이발소를 인수했다가 얼마 안 있어 소제동 지금 자리 건너편에 '대창이용원'을 개업했다.
큰 대(大)자에 창성할 창(昌)자를 썼다. 가게 이름은 주변 사람들이 아이 이름 짓기를 청할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있었던 아버지가 지어 주셨다. 개업 당시 소제동은 중구 대흥동, 선화동과 함께 대전에서 제법 괜찮은 동네로 꼽혔다. 이종완씨는 세 번째로 좋은 동네였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철도청 소유지였고 그들의 관사가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다 철도청이 토지와 주택을 불하했지. 시세보다 거의 3분의 1은 싼 가격으로 넘긴 거야. 그리고 남은 땅도 민간에 매각하면서 관사와 관사 사이에 일반 주택이 끼어들기 시작했어. 동네가 복잡해지기 시작한 거지."
◆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손님들 때문에 은퇴 못해
소제동 대창이발소에는 손님이 늘 넘쳐났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가 호황기였다. 그 조그만 이발소에 하루 150명에서 많게는 200명까지 손님이 들었다. 당시 직원만 다섯 명이었다. 화장실도 교대로 가야 하고, 신간 만화책과 텔레비전을 갖춘 안채 방에서는 넋 놓고 기다리다가 정작 이발도 못한 채 그냥 돌아가는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당시에 주변 대전상고나 동아공고, 계룡공고 등에 다니는 학생이 전부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갔다고. 버스 노선이 지금처럼 잘 정비되어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많이 걸어 다녔지. 회사원들도 당연히 많이 다니고. 상술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는 텔레비전도 귀하고 만화책도 귀할 때잖아. 신간 만화를 잘 구비해 놓으면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통학열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에 만화책이나 텔레비전 보고 싶어서 우리 가게를 많이 찾았지."
열다섯 살부터 60년 넘게 이발 가위와 빗을 잡으며 돈도 적잖게 벌었다. 3 남매를 두었지만, 돈이 없어 가르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입학금을 마련해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종완씨는 말한다. "이발이 내 적성에 맞았던 것 같다"고. 이날 40년 단골이 동구 가양동에서 이곳까지 어김없이 찾아왔다. 유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저 멀리 신탄진에서까지 단골손님이 찾아온다. 이종완씨가 은퇴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나에게 머리를 깎겠다고 그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어."
온수통에 수건을 담가 꼭 짜서, 머리카락을 덮어 물기를 먹인 후 이발을 시작한다. 전기 이발기로 머리 끝을 다듬은 후 본격적으로 가위질을 시작한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다. 손 면도기로 주변 잔털을 제거하고 나서야 이발이 끝난다. 헤어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털어낸 후 금세 옷을 갈아입고 염색약을 개어 온다. 염색을 다 했는가 싶었는데 이발의자를 뒤로 완전히 젖힌 후 안면에 따뜻한 수건을 덮어 놓고, 면도 거품을 준비한다. 연탄난로 연통에 면도거품 솔을 문질러 대더니 면도할 부위에 잘 펴서 바른다. 면도를 하는 손길이 세심하면서 거침없다.
면도까지 마치고 나서야 40년 단골은 이발의자에서 내려와 세면대로 향한다. 이종완씨는 물조리개에 따뜻한 물을 담아 머리에 적당히 부으며 머리 감기기를 시작한다. 이발 기술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웠던 머리 감기기가 이발 과정에서는 제일 끝이다. 40년 단골이 세수를 하는 동안 새 수건 한 장을 꺼내 연탄난로 연통에 감싸 덥힌다. 따뜻하게 덥힌 수건이 40년 단골에게 건네진다. 한 시간 남짓 걸린 이 모든 과정 중에 둘 사이에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대화는 한마디도 없었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40년 단골은 옷을 챙겨 입고 이종완씨가 건넨 요구르트를 마셨다. 이발을 끝마친 손님에게 이종완씨는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건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낡은 타이어 세 개와 유리 한 장을 이용해 만든 테이블에 펼쳐 놓은 신문지 위에는 빨대가 꽂힌 빈 요구르트병 열네 개가 흐트러뜨린 피라미드 모양으로 서 있다. 지금도 하루에 열 명에서 열다섯 명씩은 꾸준히 대창이용원을 찾는다. 이제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요구르트병은 열다섯 개가 됐다.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
05:50 설 전날 아침 KBS 1TV '내고향 스페셜' 에 나온 대전 사돈어른들 이야기
막내 여동생 명희의 시어른들..... 이종완 & 송기철
대창 이용원.....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
2025 을사년 설 연휴에 내리는 폭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