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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산 오르면서 조망, 멀리는 점봉산, 오른쪽은 가리봉과 주걱봉
굽어는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얼마나 가렷는고
강호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 하예라
――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조선 중기 문신)
▶ 산행일시 : 2022년 5월 28일(토), 금요무박, 맑음
▶ 산행인원 : 2명(악수, 하늘재)
▶ 산행코스 : 장수대,대한민국봉,안산,큰함지박골,십이선녀탕계곡,응봉능선 1362m봉,1376m봉,음지골,버덩말,
용대리
▶ 산행시간 : 13시간 45분
▶ 산행거리 : 오룩스 맵 17.6km
▶ 교 통 편 : 좋은사람들 산악회 버스 타고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24 : 00 - 상일동역
02 : 47 - 장수대, 산행시작
03 : 18 - 대승폭포
04 : 38 - 서북주릉
04 : 53 - 대한민국봉(1,386m)
05 : 45 - 안산(鞍山, △1,430.4m)
06 : 40 - 큰함지박골 사태지역 진입
08 : 20 - 십이선녀탕계곡 두문폭포
09 : 38 - 응봉능선 1362m봉 서쪽 사면 진입
10 : 40 - 응봉능선 1362m봉 정상
11 : 26 - 1,376m봉, ┫자 능선 분기, 왼쪽은 응봉으로 감
12 : 54 - 1,240m봉, Y자 능선 분기
13 : 05 - 1,187m봉 왼쪽 사면 트래버스
14 : 07 ~ 15 : 20 - 음지좌골, 음지우골 합수점, 휴식
16 : 15 - 버덩말
16 : 32 - 용대리, 산행종료(17 : 30 버스 출발)
19 : 44 - 상일동역
2. 설악의 여명, 오른쪽부터 대청봉, 화채봉, 공룡능선, 그믐달이 아름다웠다
▶ 안산(鞍山, △1,430.4m)
보통의 경우 무박으로 설악산을 간다면서 장수대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등산객은 거의 없다. 장수대에서 서북릉
을 타고 한계령으로 간다든지, 대청봉을 넘어 오색으로 간다든지, 아니면 공룡능선까지 가는 것을 생각할 수 있
겠지만, 절경인 대승폭포를 캄캄한 밤이라 볼 수 없어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운 산행이다. 오늘밤 만차인 등산객
중 장수대에서 내린 등산객은 하늘재 님과 나 둘뿐이다. 황비홍 산행대장님이 ‘시간이 엄청 많이 남을 텐데
요’라고 하는 걱정은 당연하다. 아마 대승령을 올라 십이선녀탕계곡을 거쳐 남교리로 간다고 여겼으리라.
장수대에 내리니 이미 온 네 사람의 등산객이 더 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가리봉을 산행할 것이다.
김형수의 등산길 안내인 『韓國400山行記』(2002년)에 따르면 지금은 비지정탐방로이지만 장수대서의 가리봉
등산로를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장수대에서 자양천을 따라 17분을 오르면 임간수련장이 있고, 이곳에서
다시 한계령을 넘던 옛길을 따라 33분 정도 오르면 171번 전주가 있다. 이 지점에서 33보 걸어 우측 자양천을
건너 들어가게 되는 등산로 초입 길은 찾기가 조금 어려운 지점이다.”
장수대는 공단분소에 야간근무자가 없는지 입산시각 03시를 엄격히 통제하지 않는다. 02시 47분. 잠긴 철문 옆
의 목책을 넘는다. 낮에는 등산로 양쪽에 늘어선 노송이 퍽 아름다운 길을 보지 못하고 간다. 데크로드가 이어
진다. 이 밤중에 우리를 반기는 건 여린 소리로 골짜기를 울리는 사중폭포(四重瀑布, 폭포가 비스듬하게 4단계
로 흐른다)와 ‘홀딱 벗고’ 간드러지게 노래하는 검은등뻐꾸기다. 그와 박자 맞춰 걷는다.
예전에는 외설악을 설악산, 내설악을 한계산이라고 했다. 한계사는 장수대에서 대승령 쪽으로 200m 떨어진 곳
에 있었다고 한다. 아마 사중폭포 근처가 아닌가 한다.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9~1623)이「감파 최유
해의 호가 기록한 〈유금강산록〉 뒤에 쓰다(題紺坡 崔有海號 副墨遊金剛山錄後)」의 한 대목은 이 근방을 묘사
한 것 같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한계산(寒谿山)은 여러 봉우리에 숲은 없고 바위만 있어 온통 옥색인데, 위는 넓고 아래는 좁다. 수백 길 되는
폭포가 있고, 옥 솥처럼 움푹 들어간 웅덩이가 하나 있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넘쳐 아래 계곡으로 흘러가는
데, 길이가 또 백여 길이 되어 사람이 그 끝을 볼 수가 없고, 완만한 물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계곡 위에서 바람
이 불어오면 폭포수가 날려 안개가 되는데, 햇빛 속에서는 붉은 빛을 띠고 달빛 속에서는 흰 빛을 띤다.
바람이 잠시 그치면 한줄기의 흰 물줄기가 다시 푸른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니, 바람의 유무에 따라 폭포가 되
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내가 한계사(寒溪寺)에서 묵던 날 밤새도록 비가 내렸는데 아침에 다시 감상하니,
폭포의 물줄기가 웅장해서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았는데 참으로 천하의 장관이었다. 한계사 옛터의 형세는
동방의 으뜸가는 절경이다.”
(寒谿山諸峯無麓。皆玉色。上敷下削。有瀑流長數百丈。有一。嵌如玉鼎。瀑落而溢。下瀉於壑。長又可百餘
丈。人莫能窺其底。水勢緩而長。每風自谷上。瀑水飛作煙霞。日照則紫。月照則素。風少止則一條之白。復界
於蒼崖。隨風有無無瀑有瀑。余宿寒溪寺。終夜雨。朝而再賞。瀑勢壯。雖風不散。眞天下壯觀也。寒溪寺舊基
回勢之勝甲東方。)
장수대에서 대승폭포까지 0.9km. 가파른 오르막(거의 다 가파른 오르막이다)은 데크계단이다. 아무 볼 것이 없
어 그저 걸으니 30분 남짓 걸린다. 등로 옆에 한시를 쓴 시판을 보지 못했더라면 대승폭포를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대승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이다. 폭포 맞은편
반석에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1584)의 ‘九天銀河’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3. 설악의 여명, 오른쪽은 점봉산
4. 안산
5. 안산 주변의 기암 기봉
6. 안산 주변의 기암 기봉
7. 안산 주변의 기봉, 나이프릿지는 이런 데를 말하는 게 아닐까.
8. 안산 주변
9. 왼쪽은 설악 서북주릉, 오른쪽은 가리봉
10. 앞은 가리봉 동릉, 왼쪽은 점봉산
대승폭포도 곤히 잔다. 가만히 귀기우려 보아도 코고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서파 오도일(西坡 吳道一,
1645~1703, 조선 후기 문신)의 「한계관폭(寒溪觀瀑)」이 멋쩍다.
爲尋銀瀑上岹嶢 은빛 폭포 찾아 험한 산 오르니
危磴離天路不遙 가파른 비탈 길 하늘과 그리 멀지 않네
高處霽虹垂石竇 높은 곳 바위굴에 드리워진 무지개
中間飛散挂巖腰 중턱엔 바위허리에 떨어지는 싸락눈
雖嫌勢減雷千鼓 천의 북 울리는 우레 소리 줄어든 것은 아쉽지만
且愛形如玉一條 한 줄기 옥 같은 저 모습은 사랑스럽구나
擬待秋來山雨足 산비 넉넉히 내리는 가을 오기를 기다려
快看狂沫噴層霄 미친 포말이 하늘에서 뿜는 걸 장쾌하게 보리라
대승폭포를 지나면 등산로는 완만한 돌길이다. 어느새 우리를 뒤쫓아 와서 추월하는 등산객 한 분이 있다. 가벼
운 차림이다. 유성처럼 사라진다. 공룡능선을 갈 모양이다. 우리는 대승령 오르는 옛길을 찾느라 더듬거린다.
헤드램프 불빛이 닿은 데는 다 길로 보여 여기저기 쑤셔본다. 헤드램프 심지 돋우어 수북한 낙엽이 약간 납작
해진 흐릿한 인적을 찾아낸다. 무덤이 나온다. 봉분과 묘지의 크기, 석축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밀장(密
葬)은 아니다.
무덤 지나고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바윗길은 길게 돌아 오른다. 내내 잘난 길이다. 문득 고개 들어 주위를
살피자 동녘하늘이 붉다. 수렴 사이로 그믐달이 보인다. 나도향이 몹시 사랑한 그믐달이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
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갑자기 조급해진다. 그 요염한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고자 발걸음을 서두른다. 조망이 트일 만한 데는 서북주
릉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가다말고 서서 스틱 집은 채 몇 번 거친 숨 토하고 다시 잰걸음하기를 반복한다.
드디어 주릉에 올랐어도 당장은 하늘 가린 숲속이다. 더 간다. 대한민국봉 아래 절벽 위가 조망처다. 그믐달은
하늘금인 공룡능선과 화채봉, 대청봉 그 위 중천에 일엽편주마냥 떠있다. 가련하다.
주릉 걸음걸음이 경점이고 봉봉마다 경점이다. 대한민국봉(1,386m)은 사각의 석주에 ‘대한민국’이라고 새겨져
있어 산꾼들이 그렇게 부른다. 설악은 실루엣만으로도 장관이다. 점봉산은 원만하여 너그럽고, 가리봉은 그 심
줄이 울근불근하여 바라보는 나도 힘이 솟는 느낌이다. 이제 무박산행의 이유인 일출 보기를 기대한다. 울창한
숲속 너덜 길에 들고 발걸음이 더디다. 그런 안산을 오르는 중에 해는 이미 솟아버리고 말았다.
안산 바윗길을 오르는 중에 일단의 등산객을 만난다. 먼저 수인사 건네고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갈 길이 멀어 힘을 비축하느라 그런지 말을 아낀다. 어렵사리 맨 나중의 사람에게 들었다. 설태(설악산 태극종
주의 약칭) 하는 중인데 모란골에서 밤 11시에 출발했다고 한다. 무서운 사람들이다. 설태는 모란골 구룡동에서
시작하여 청대산을 넘어 속초 마레몬스호텔에서 마치는 57.5km에 달하는 태극 모양의 산줄기다. 대개 30시간
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11. 안산 주변, 처녀치마
12. 안산 주변, 멀리 왼쪽은 설악산 태극종주의 시작점이라는 모란골
13. 일출 직전, 가운데는 대청봉, 왼쪽 멀리는 화채봉
14. 일출 후, 멀리 왼쪽부터 황철봉, 저항봉, 세존봉, 나한봉
15. 멀리 오른쪽은 향로봉, 그 뒤 왼쪽은 금강산, 앞은 칠절봉
16. 앞은 칠절봉 능선, 멀리 뒤는 금강산
17.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봉
18. 큰연령초, 환경부 지정 보호식물이고,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이다
이어 홀로 산꾼을 만난다. 설태하시나요? 묻자 저는 공룡능선까지만 갑니다 한다. 음메 기죽는다. 모란골에서
시작하여 공룡능선을 지나 마등령, 설악동까지 거리도 장장 37.9km에 달한다. 앞으로 어디 가서 나도 산에 간
다는 얘기하기가 창피하게 생겼다. 한편, 그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첩청산을 관산(觀山)이나 할 수 있
을까 해서다. 간산(看山)하지만 눈에 가득 담아둔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안산. 무척 오랜만이다. 삼각점은 2등이다. 설악 24, 2004 재설. 바람이 제법 차다. 조망으로만 따진다면 우리가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다. 칠절봉, 향로봉 너머로 금강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사실 오늘 내가 안산에 온
것은 하늘재 님이 안산에 털진달래가 장관일 거라며 같이 보러가자고 해서 따라왔다. 그런데 털진달래는 다 졌
다. 간혹 철쭉이 보일뿐이다. 어차피 오늘은 모처럼 등정과 등로를 겸하는 일타상피의 산행이다. 큰함지박골 내
리는 길을 예의 살핀다.
▶ 십이선녀탕계곡
하늘재 님은 걸음마다 지도를 들여다본다. 십이선녀탕계곡으로 내릴 듯한 잘난 소로를 두 차례 그냥 보내고 너
덜 섞인 생사면의 잡목 숲을 뚫는다. 우리는 특히 이런 데에 익숙하다. 엎드려 기고 넘고 돌고 뛴다. 사태 난 골
과 맞닥뜨린다. 바글거리는 잡석과 함께 내린다. 하늘재 님과 가깝게 붙어 내린다. 낙석이 힘 받을 틈을 주지 않
기 위해서다. 멀리서 보면 절벽일 것 같은 내리막이 다가가면 약간 비탈졌다. 자세 낮춰 뭉개 내린다.
하늘재 님으로서는 혼겁할 일이 연속해서 벌어진다. 사태 절벽을 피해 숲길 바윗길로 들었는데 무의식중에 발
밑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덤비는 독사를 만나 깜짝 놀라기도 했고, 다시 가파른 사태 지역으로 내리다가 붙
든 바위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그냥 너덜로 고꾸라질 뻔했다. 순간 뒤따르는 나도 아찔했다.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슴 쓸며 살금살금 내린다.
지루하던 사태지역이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옥계반석과 만난다. 여태 먹은 게 변변히 않았다. 라면을 끓여 아
침을 먹자하고 날계란, 김치, 대파 등도 꺼냈다. 코펠에 옥수 담아 끓이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라이터가 없다.
만사휴의! 풀었던 배낭 짐을 다시 꾸린다. 샌드위치와 탁주로 아침을 대신한다. 큰함지박골의 너른 암반지대를
잠시 내리면 폭포가 나온다. 가뭄이 심해 계류는 암벽을 간신히 적실뿐이다.
왼쪽 가파른 슬랩을 조심스레 돌아내리면 암릉 같은 너덜이 이어지고 곧 십이선녀탕계곡(탕수골) 두문폭포다.
두문폭포 왼쪽의 비탈진 사면을 달달 기어 데크로드로 올라선다. 잘난 등로에 발걸음이 편해지니 새삼 라이터
생각이 간절하게 난다. 오가는 등산객을 만나면 사정할 요량이다. 오가는 등산객이 드물다. 대승령을 오르는 홀
로 등산객을 만난다. 수인사 건네고 대뜸 담배를 피우시냐고 물으며 라이터가 필요한 우리의 사정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라이터도 없다고 한다.
아무리 살펴도 얼마 전에 캐이 님이 응봉 안부에서 내려왔다는 데를 찾지 못하겠다. 빙 둘러 절벽이다. 대승령
가는 십이선녀탕계곡을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른 만큼 응봉(또는 그 능선)의 오르막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니 헛
걸음은 아니다. 이번에는 목교 건너기 전에 마주 오는 홀로 등산객을 만난다. 방금 전처럼 우리의 사정을 얘기
했다. 자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일행 중에 담배를 피우는 이가 있다고 하며, 뒤쳐져 있는 일행을 부른다.
홀로 등산객이 아니었다. 최근에 개방한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오는 중이라고 한다.
조금 기다리자 두 명의 등산객이 무슨 일이냐며 헐떡이며 뛰어온다. 대뜸 라이터 좀 달라고 다그치자 그 일행
은 영문을 몰라 주저하다 라이터를 꺼내주자 바로 우리에게 건넨다. 이런 고마운 등산객도 있다. 이런 맛에 산
을 간다. 이제는 설태라도 못 가랴 하고 씩씩하게 걷는다. 부디 그들에게 오래도록 행운이 있을진저! 응봉 자락
의 암벽 절벽을 다 지나고 언뜻 보기에는 1,362m봉의 지능선이 없는 넙데데한 사면이 시작된다. 잡목과 풀숲
헤쳐 오른다.
19. 뒤돌아본 안산 주변
20. 뒤돌아본 안산 주변
21. 뒤돌아본 안산 주변
22. 물참대
23. 큰함지박골 암반지대, 맞은편 산은 응봉
24. 십이선녀탕계곡의 두문폭포
25. 응봉
26. 곰취
▶ 음지골
일로직등 한다. 박새 무리 속에 숨바꼭질 하는 곰순이 찾으며 간다. 간혹 미역줄나무 덩굴의 저항이 심하면 맞
대응을 피하고 멀더라도 돌아간다. 응봉능선 1,362m봉. 사방 키 큰 나무숲이 가려 아무런 조망이 없다. 음지골
로 방향을 잡는다. 지도 살펴 한 군데 펑퍼짐한 북사면을 지목하고 거기로 질러가자 하고 그전의 봉봉을 오르
내린다. 왼쪽으로 응봉으로 가는 ┫자 능선이 분기하는 1,376m봉은 경점이다. 서북주릉이 장쾌무비하고, 그
너머 가리봉, 점봉산이 다른 산으로 보인다.
펑퍼짐한 북사면을 누빈다. 지난 견치봉 산행에서 우연히 캐이 님을 만났을 때 캐이 님이 보여준 곰순이 뜯는
시연을 너무 심한 과장이라고 여겼다. 앉은 자리에서 이렇게 동남서북 한 바퀴 돌면 한 봉지가 가득하다고 했
다. 그런데 사실이다. 또한 킬문 님이 응봉 근처에서 배낭이 묵직하더라는 말도 전혀 빈말이 아니다. 우리가 직
접 실연한다. 아울러 이런 데서는 혹자들의 충고와는 다르게 시야를 넓게 가지지 말고, 좁게 가져야 한다는 것
을 깨닫는다.
시야를 넓게 가지다가는 왼쪽의 곰순이를 뜯을까, 오른쪽의 곰순이를 뜯을까 망설이다 ‘뷔리당의 당나귀’ 신세
가 되기 십상이거나, 양쪽을 다 뜯으려고 오르내리다가는 개고생을 하게 된다. 아무쪼록 시야를 좁혀 앞만 보고
나아가도 충분하거니와 그 길이 정도다. 한껏 무거워진 배낭이다. Y자 능선이 분기하는 1,240m봉에서 오른쪽
으로 가고 이다음의 1,187m봉은 직등하지 않고 흐릿한 인적 쫓아 왼쪽 사면을 길게 돌아 넘는다.
곰순이들도 우리의 사정을 눈치 챘다. 등로 옆에 무리지어 나 죽고 너 죽자 시위한다. 더 뜯자면 배낭이 무거워
내가 죽을 판이니 고개를 외로 돌리고 줄달음한다. 음지골로 가는 1,187m봉 북릉이 멀기도 하다. 줄곧 가파른
내리막이다. 외길 급전직하로 떨어진다. 땀난다. 왼쪽은 음지좌골, 오른쪽은 음지우골이다. 아주 깊다. 양쪽 다
가팔라 내려다보기 겁이 난다. 그렇지만 아까 라이터를 얻었으니 음지골에 들어 먹자판 벌일 일이 미리 즐겁다.
음지 좌우골 합수점에 다다른다. 너덜 지나 옥계반석에 자리 잡는다. 우선 술발 받게 소에 풍덩한다. 불과 5초
를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소름 돋게 물이 차다. 삶고 지지고 볶는다. 비빔면 삶아 허기를 다스린 다음 갈비
살 구우니 삼합이다. 술은 잘 익은(5년이 넘었다고 한다) 돌배주다. 먹고 마시고 또 먹고 1시간 10분이 금방이
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도중 쉬지 않고 알뜰히 저축해서 모아 논 휴식시간이니 가외의 휴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용대리 데드라인이 17시 30분이라고 했다. 시간은 넉넉하다. 음지골을 내린다. 알지 못했던 오늘 산행의 하이라
이트가 비로소 시작된다. 협곡 양쪽의 비탈진 사면을 번갈아 내린다. 먼저 왼쪽 사면을 몇 차례 오르내리는데
능선길보다 더 굴곡이 심하다. 징검다리 만들어 오른쪽 사면을 간다. 흐릿한 소로 따른다. 거의 수직인 급사면
을 오금 저리며 좁은 테라스로 지나기 여러 차례다. 잡목이나 돌부리 나무뿌리 등 붙잡을 것이 없다. 한 발만
삐끗하면 그야말로 저 아래 골로 간다.
달콤했던 술이 확 깬다. 어쩌면 얼근한 술기운이 있어 용감히 지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음지골 2.5km. 그중
1.5km가 험로다. 버덩말 자작나무숲 지나고 휴업중인 야영장 금줄 넘어 대로다. 다시 십장홍진(十丈紅塵)에 묻
힌다.
27. 앞은 서북주릉, 그 뒤 왼쪽은 점봉산, 멀리 오른쪽은 오대산 연릉
28. 앞은 서북주릉, 뒤는 가리봉과 주걱봉
29. 안산, 가운데 골짜기가 큰함지박골이다
30. 귀때기청봉, 중간에 쉰길폭포도 보인다
31. 오른쪽부터 대청봉, 화채봉, 공룡능선 1,275m봉
32. 공룡능선 나한봉
33. 대청봉과 귀때기청봉
34. 황철봉, 저항령, 저항봉. 가운데 골짜기는 길골, ‘긴 골’이 변해서 ‘길골’이 되지 않았을까.
첫댓글 설악산. 한계산. 내설악. 외설악을 일컫는 말이었군요. 설악은 언제나 설레네요. 장관입니다.
그래도 3주 연속은 못 가겠네요.
곰순이에게 붙들릴까봐. ㅋㅋ
사진이 예술이고 글이 예술이니, 산은 절로 예술입니다.
멋집니다.
설악산 정말 아름답습니다.
평생을 설악산에서 살았던, 설악산 지게꾼 임기종씨가 부러워지네요.
그에 못지않은 하늘재님도 설악의 사나이인 것 같습니다.
설악의 여명 사진, 그믐달이 정말 멋드러집니다.
하늘재님이 찍은 그 달과 같은 달이네요... ㅎㅎㅎ
아쉽게도 일출은 보지 못했습니다.
일출 보려고 안산을 쉬지 않고 갔는데도 ㅠㅠ
기록을 살펴보니 '11.10.1(토) 음지골 좌릉-1097-1241-1336-안산-1275-1161-석황사(버들,악수,대간거사,화은,감악산,백작.가은,승현,하늘재)로 진행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진은 약 800봉 근처 전망대에서 찍은겁니다. 파릇파릇 가은, 감악산님, 저기 앞으로 선배님 아닌가요? 여튼 기억에 남는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설악을 아주 누비시는군요, 조망도 좋고, 휴식시간의 삼합도 좋고, 덕분에 저도 좋은 설악구경하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설악의 사나이 하늘재 님 덕분에 눈과 입이 즐거웠습니다.^^
설악을 두루 즐기셨습니다. 보이는 정점들이 다 가경입니다. 부럽네요.. 웬만하면 라이타는 하나 넣어 두시지요...^^
사소한 것 하나가 산행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좌우합니다.
명심할 일입니다.ㅋㅋ
성골 안부에서 성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솜다리 군락지가 있다고 합니다. 다음에 가시면 꼭 보시길~~~
희소식 감사합니다.
내년이나 기약해야겠지요.ㅠㅠ
설악부(雪岳賦)
♥박두진
1
부여안은 치맛자락 하얀 눈바람이 흩날린다. 골이고 봉우리고 모두 눈에 하얗게 뒤덮였다. 사뭇 무릎까지 빠진다. 나는 예가 어디 저 북극이나 남극 그런 데로도 생각하며 걷는다.
파랗게 하늘이 얼었다. 하늘에 나는 후~ 입김을 뿜어 본다. 스러지며 올라간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하여 외롭게 나는 태고(太古)! 태고에 놓여 있다.
2
왜 이렇게 자꾸 나는 산만 찾아 나서는 겔까? ~내 영원한 어머니…… 내가 죽으면 백골이 이런 양지짝에 묻힌다. 외롭게 묻어라.
꽃이 피는 때 내 푸른 무덤엔 한 포기 하늘빛 도라지꽃이 피고 거기 하나 하얀 산나비가 날아라. 한 마리 멧새도 와 울어라. 달밤엔 두견! 두견도 와 울어라.
언제 새로 다른 태양 다른 태양이 솟는 날 아침에 내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것도 믿어 본다.
박두진 시인도 산꾼이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3
나는 눈을 감아본다. 순간 번뜩 영원이 어린다. ……인간들! 지금 이 땅 위에서 서로 아우성치는 수많은 인간들...... 인간들이 그래도 멸하지 않고 오래 오래 세대를 이어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
우리 족속도 이어 자꾸 나며 죽으며 멸하지 않고 오래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
언제 이런 설악까지 온통 꽃동산 꽃동산이 되어 우리가 모두 서로 노래치며 날뛰며 진정 하루 화창하게 살아 볼 날이 그립다.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