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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묵상글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 사랑과 용서의 순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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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10 04:27
- 사랑과 용서의 순서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죄지은 사람이 회개하면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용서해 주기 전에 죄를 지적하며 꾸짖고
꾸짖기 전에 내가 남을 죄짓게 한 것은 없는지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용서의 순서는 오늘 말씀하신 순서와 반대입니다
누구의 죄를 꾸짖기 전에 그를 죄짓게 한 나의 죄는 없는지 봐야 합니다.
이는 옛날에 고백성사 볼 때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와
남이 나로 인해 지은 죄 있을 터이니 신부는 죄인을
도무지 벌하고 사하소서’라고 고백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을 죄짓게 하고,
그가 내게 죄지은 경우에도 내가 원인 제공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몰랐다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죄짓게 했고 내가 더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고백성사 보곤 했지요.
그러니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그를 용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에게 용서 청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의 첫 번째 순서는
용서받아야 할 나의 죄는 없는지 먼저 반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꾸짖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죄짓게 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스스로 죄를 깨닫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면
죄를 깨닫도록 일러주고 꾸짖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으면 죄짓거나 말거나 꾸짖지 않을 것이고,
사랑할지라도 그 사랑이 크지 않으면 그냥 눈감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꾸짖을 때 돌아올 그의 미움을 감수하고 감당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고,
그 미움의 고통을 내가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꾸짖는 것은 사랑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꾸짖기 전에 반드시 사랑 때문인지 성찰해야 하며,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분노 때문이니 꾸짖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꾸짖기 전에 봐야 할 또 다른 것은 나의 겸손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꾸짖는 것인지 그걸 봐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모두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은 자기 형제의 잘못을 겸손과 사랑으로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제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가 회개하기를 바란다면 용서할 것이고,
나의 꾸짖음 때문에 회개해 준 그가 오히려 고마울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사랑이게 해 준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문제는 회개하지 않을 때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니 용서할 수도 없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용서해야 합니다.
회개만 하면 언제고 즉시 용서할 마음이 있고
채비가 되어 있는 것이니 나는 미리 용서하는 셈이고,
적어도 회개하지 않는다고 분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없고 겸손도 없을 경우 우리는 종종 분노하지요.
내가 얼마나 어렵게 얘기한 것인데 그 사랑을 무시하고 몰라 준다고.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과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려고 한 것이라면
회개치 않을 때 분노할 것이 아니라 회개의 때가 그에게 오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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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선택, 사랑, 훈련, 습관”
“주님, 나쁜 길을 걸을세라 보아 주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
날마다 배워야할 것은 참 많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어느 수도영성 대가의 책 제목인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이란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책 제목일뿐 아니라 하느님만을 찾는 구도자에게 필수적 자질입니다. 공자의 호학好學 사상에서 보다시피 아마 공자의 배움에 대한 사랑을 능가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 만난 네 경우 분들 에게도 감사와 존경과 더불어 여러면에 걸처 크게 배웠습니다. 만남의 은총, 만남의 축복입니다. 매일 공동전례를 통해서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끊임없이 새롭게 회개하며 배우는 수도자들입니다.
1.고등학교 졸업후 50년간 계속 만났다는 한 형제와 세부부와 일곱분이었습니다. 검증된 우정의 사랑이요 참사람들이라 격찬했습니다. 납골당도 같은 곳으로 결정했으니 죽어서도 함께 하게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50년 우정이니 멋지게 익어가는 가을 인생처럼 참 아름다웠습니다. 70대 세 부부에게는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찬사를 보냈습니다.
2.십여년 이상 모임차 격월로 주일에 앞서 수도원을 방문하여 만남후 떠나는 두 자매의 우정과 성실함입니다. 한 자매는 지극한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운전하며 참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봉사하며 구김살 얿이 한결같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분입니다. 이 의로운 분에게는 하느님 친히 보호자 되어 주심을 깨닫습니다.
3.거의 혼자된 불우한 처지에도 온갖 성실함으로 교회에 봉사하며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뒷바라지 하는 어느 자매도 한결같은 사랑의 노력이 정말 훌륭한 자매입니다. 어제 처음으로 모녀 셋이 방문하여 단풍 화려한 정원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4.초등학교 옛 제자들로부터 해마다 받는 쌀 10kg 짜리 12부대를 택배로 선물받았습니다. 13살 때 제자들이 지금은 61세가 된 48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9명이 수도원에 보내준 쌀 선물을 어제 받았습니다. “선생님,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 카톡도 받았습니다. 10여년 동안 매가을이면 이렇게 수도원의 옛 스승에게 쌀 선물을 하는 착하고 성실한 제자의 사랑에서도 크게 배웁니다.
이런 순수한 자랑은 팔불출에서 면제되리라 봅니다. 어제 소개했던 두 예술가 수녀의 치열한 성미술에 대한 항구한 열정의 노력에도 크게 배웠습니다. 얼마전 “아펙의 성공을 위해 ‘영혼을 갈아 넣을 정도로’ 총체적 노력을 다했다”는 대통령의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이들어 세월 흘러 갈수록 배울 것은 끝없이 늘어납니다. 이런 배움에 대한 노력과 더불어 저절로 겸손도 따라 붙기 마련입니다.
제가 강론 쓰는 시간은 배움의 시간이자 공부의 시간입니다. 오늘은 성 대 레오 교황 기념일입니다. 만 61세 선종하기 까지 말그대로 명품인생을 사셨던 명품교황입니다. 이런 명품성인들이 명실공히 가톨릭교회를 명품종교로 만듭니다. 노년에 접어들수록 명품종교 가톨릭교회가 고향집처럼 참 편안하게 생각된다는 이구동성의 고백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 레오 성인교황에 대한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언급입니다. 현재 레오14세 교황이니 역대 교황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레오1세 교황입니다. 제45대 교황으로 재위 기간 동안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가톨릭교회를 넘어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로 거론됩니다. 대교황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으로, 1754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민족 대이동 시대에 국가 질서가 전반적으로 와해되고 오랜 제국의 수도가 몰락했을 때 유럽을 구하고 교회를 구한 성인의 활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비가톨릭 사람들에게 까지 이 교황이 널리 알려진 것은 교황의 재위기간중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 맨몸으로 용감히 나서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의 위엄을 크게 떨친 일입니다. 반달족의 침입이 로마 시내의 약탈은 막지 못했지만 로마의 파괴와 살육만큼 막아냈습니다.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코와 맺은 합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그리스도교 교회와 관련 시설은 손대지 않고,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2.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3.포로를 고문하지 않는다.
정통신앙의 옹호로 고대 교회 초석을 마련했고,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로마시민들은 레오 1세 교황에게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바쳐서,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로마교황들이 아비뇽으로 유수 이전까지 정치 영역에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교황은 173편 서간과 100여편 강론등 방대한 저술로 교회학자로 선포되니, 그 엄혹한 내우외환의 시기 이런 신학적 위업을 통해 성인의 믿음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명실공히 하느님의 사람이었음이 입증됩니다. 레오 교황은 반달족의 로마 약탈 이후 461년 선종합니다.
이처럼 배움의 여정중 배워야 할 것은 끝이 없습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어느 고승이 제자 승려들에게 주었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오늘 말씀은 신자들의 공동생활에서 공통적으로 ‘훈련의 필요성(the need for discipline)’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지혜서의 시작 주제는 ‘하느님을 찾고 악을 피하여라’로 시작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 한다. 지혜는 다정한 영, 온 세상에 충만한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공동체 수행생활의 훈련에 주님의 영,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게 됩니다. 정의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우선 덕목의 선택과 사랑, 훈련, 습관에 이르기까지 결정적 도움을 주는 주님의 거룩한 영, 성령입니다. 초월과 내재의 주님을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덕목을 선택했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겸손을, 정의를, 침묵을, 고독을, 순결을, 공부를, 자연을, 전례를, 미사를....이처럼 사랑해야 할 것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라 선사되는 날들입니다. 사랑에 이은 자발적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날마다의 한결같은 영적 훈련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평생 배움에 평생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될 때 진정한 덕이요 영성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 단락의 가르침입니다.
1.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대목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하며, 형제들에게 스캔들이 되지 않도록 ‘훈련된 깨어 있음(disciplined vigilance)’을 요구합니다. 스캔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깨어 경계하는 훈련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2.“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회개의 훈련, 용서의 훈련입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회개의 훈련, 용서의 훈련에 깨어 의식적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제 김수환추기경의 삶에 감명받아 70대 나이에 회개하여 세례 받게 된 형제의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의 “신자생활의 요점은 무엇이겠느냐?” 구두 시험에서 “회개와 구원”이라 대답했다는 말에 모두 성령의 은총이라 하며 감탄했습니다.
3.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의 힘이 진짜 힘입니다. 믿음의 힘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청해야 할 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제자들처럼 믿음을 청하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돌무화과나무도 복종하여 바다에 심겨질 수 있다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회개와 믿음뿐입니다. 벼락공부를 통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역시 항구한 훈련 결과 은총의 열매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훈련을 위해 날마다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훈련의 수행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온마음을 다해 참여하는 미사전례 수행보다 믿음, 희망, 사랑의 영적훈련에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필리2;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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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에서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타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하는 우리가 오히려 타인을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고 하십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혹은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제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봅니다.
“내가 죄를 지었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입니다. 타인의 잘못으로 내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내 잘못으로 타인이 상처를 입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결국,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용서받았음에 대한 ‘믿음’이 동반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이는 마치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그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거나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 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진정으로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지켜주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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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피정 중에 ‘성사는 현재의 사건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먼 훗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신부님은 성서에 나오는 3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을 찾아온 손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극진하게 대했습니다. 발 씻을 물을 주었고, 빵을 구워 주었고,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에게 아내 사라가 늙은 나이지만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내년 이맘때면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루카 복음 2장에는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마리아의 응답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루카 복음 2장에는 시메온과 한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찾아온 손님의 환대, 하느님 뜻에 대한 순종과 응답 그리고 매일의 기도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이 어릴 때 어머니는 건널목을 건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서는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좌우를 살펴야 합니다.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길을 건너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성사(聖事)’가 되기 위해서도 4가지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멈춤(Stop)입니다. 멈춤은 성찰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였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라보기(Look)입니다. 바라보기 위해서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보고, 만지고, 맛보고, 듣고,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소통하였습니다. 셋째는 듣기(Listen)입니다. 아이가 엄마라고 말하기까지는 수천 번 엄마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매일의 삶이 ‘성사(聖事)’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듣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는 행동(Go)입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을 환대했던 것처럼,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응답했던 것처럼, 시메온과 한나가 기도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 25장은 매일의 삶이 성사였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는 이제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그러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묻습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했습니까?”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매일의 삶에서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성사(聖事)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미사의 핵심은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고 너희도 그렇게 행하여라.”
매일의 삶이 ‘성사(聖事)’가 되었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본인의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기쁘게 본당 사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고, 함께 해 주신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더 성당의 물품을 아끼고, 청소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매주 교우들을 위해서 점심을 준비해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폭우가 내리는 날 성당에 오셔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서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분,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시던 분, 본당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시던 분, 기도로서 제게 힘을 주시던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했어도 끝까지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믿음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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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주의 깊은 시선은 곧 존엄과 사랑의 행위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9일 일요일- 마흔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성사적 현실
세상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의 중심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창조된 세상을 하느님의 현존으로 살아 숨 쉬는 거룩한 실재로 성찰합니다:
자연 그 자체가 첫 번째 성경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 1장 20절에서 말하듯,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신성함의 중심이며,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모든 비유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교회의 박사이며 13세기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한 해로 축소한다면, 1월 1일에 우주가 탄생하고,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12월 31일 밤 11시 59분에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교회의 등장은 12월 31일 마지막 순간의 찰나에 불과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듯, 하느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통해 처음부터 당신의 사랑과 선하심,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모든 것은 거룩합니다!
우주와 자연, 원소와 식물, 동물을 포함한 창조된 세계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은 서구 전통에 익숙하거나, 문화적으로 그리스도교적 배경을 지닌 많은 이에게 있어 커다란 인식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관점을 애니미즘이나 이교적이라며 배제해 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오직 인간에게만 국한시켰고, 그마저도 모든 인류에게 충분히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은 마치 인색하고 무능한 분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번역한 지혜서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는 그저 밖으로 나가, 나뭇잎 하나를 오래도록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정말로 알게 됩니다—그 나뭇잎이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만으로도 황홀경에 이르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현실과 맺는 관계는 사물과 사물, 주체와 주체, 내면의 존엄과 내면의 존엄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참된 관상가에게는, 무심히 떨어지는 푸른 잎 하나가 성당의 황금 감실만큼이나 경이와 놀라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 마음이 점점 더 자주 광야로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두렵기도 했지만, 그곳은 아름다움과 연결감, 맑은 공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식물과 새, 동물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고, 저는 그들의 일반 이름과 라틴 이름을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이 단순한 행위는 제게 놀라운 기쁨과 창조 세계와의 친교감을 선사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면, 저는 더 자신감 있고 낙관적인 마음으로 가족과 일을 대하게 됩니다. 가장 용기를 냈던 순간은, 따뜻한 밤에 텐트도 없이 별빛 아래 홀로 잠든 일이었습니다. 그 아침에 느낀 평화는 지금까지도 제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Elizabeth F.
References
[1]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1.47.1. Note: Edited for gender-neutral language referring to God.
Adapted from Richard Rohr, A New Cosmology: Nature as the First Bible (CAC Publishing, 2009).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Graham Mansfiel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빵과 포도주, 물이 성사 안에서 은총을 드러내듯, 자연 세계 또한 우리를 초대합니다—이미 주어진 풍요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고요하고 열린 마음으로. 심지어 고기가 잡히지 않는 조용한 하루조차도 하나의 성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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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1-2)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은 불행하다
경고 말씀에 이어서 죄지은 형제자매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죄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비열하고 불쾌한 행동들,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성내고 모욕하고 모함하고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히는 짓들이 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그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까? 어림없는 생각입니다! 어떤 악한 것도 그분한테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덕의 원천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기록된 대로(야고 3,2 참조), 나약한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불행하다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냥 못 본 척 넘어가지 않고 꾸중하시며, 벌을 각오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짓게 하는 자들을 참고 견디라고 이르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목표는 세례자 요한도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가 동경해야 할 목표입니다. 그분만이 우리가 본받고, 하나가 될 만한 모범이십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분과 같아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러한 합일에 꼭 맞는 일일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무한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하고 거룩한 성인이 하늘나라에는 없습니다. 한 성인이 쌓은 덕들은 헤아려지게 마련입니다. 그는 자신이 쌓은 덕의 등급에 따라 내세에서 평가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그의 완전성 여부는 그러한 평가로 결정될 것입니다. 실로, 하늘나라에 있는 가장 위대한 성인의 완덕을 능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덕이 훨씬 더 클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하늘나라에 있는 어떤 성인보다 더 거룩할 것이고,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살아 계신 것만큼이나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겸손하고 더 낮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더 위대해질 것입니다. 은총 안에 머무르면서 완전한 포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모든 일과 담담하게 대면할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일 것입니다. 두 번째 겸손은 영의 겸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모든 좋은 것을 돌리고,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느님이 거들어 주셔서 우리도 그렇게 겸손해질 수 있기를. 아멘.(501)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히브 3,7-19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반항하던 때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하셨는데,
듣고도 반항한 자들은 누구였습니까? 모두 모세의 인도를 받아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또 하느님께서는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화가 나셨습니까? 죄를 지은 사람들, 시체가 되어 광야에 쓰러진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또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보듯이, 과연 그들은 불신 때문에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히브 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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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갑곳성지 민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 17장 1절에서 6절의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부분입니다. 사실 용서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어려운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또 사과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닫히고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용서를 멈추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용서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또 회개하며 돌아올 때마다, 지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끝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자비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간적 잣대로만 대하신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에서 멀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넓어 우리의 연약함을 덮고 새 출발을 허락해 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단순히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자비를 나누는 행위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억지로 하려 하면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주님께 두면,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용서해야 할 관계, 풀어야 할 매듭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전히 마음속에 쓴 감정이나 오래된 상처가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맡겨 드립시다. 그리고 주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며, 그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어 줍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도움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것은 진정한 도움이 아닙니다.
금방 다시 배가 고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고 실패와 실패의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도움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과 고난 속에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해 주는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아닙니다.
진정한 도움은 스스로 강해져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진다고 그들의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픔이라는 짐을 어떻게 짊어져야 하는지 보여 주고 가르치는 것이 더 큰 도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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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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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산책하다가 귀여운 강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강아지만 잔디밭 위에서 킁킁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이 강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1) 최대한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2) 도망쳤다.
맞습니다. 2번, 도망쳤습니다. 만지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그 귀여움을 사진에 담으려고만 했을 뿐인데도 도망쳤습니다. 그렇다면 도망쳤다고 제가 화를 내며 강아지를 쫓아갔을까요? 아닙니다. 도망치는 것은 동물의 본성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왜 도망치면 비겁하다고 말할까?’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보았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서일까요? 도망치면 ‘비겁하다, 못났다, 쓸데없다’ 등의 부정적인 말이 쏟아집니다. 모든 동물의 본성은 도망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도망쳐도 본성에 맞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아닐까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본성 이상의 지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성만을 유지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로 가득 찬 상태로 들어갈 수 없어서 영혼이 정화되는 시간, 또 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본성을 뛰어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우리 본성을 뛰어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남을 죄짓게 하는 것과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죄짓게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를 저지르는 사람에게 단호한 경고(‘불행하여라’)를 하십니다. 특히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하시지요. 이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또 용서도 그렇습니다. 한 번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라고 말씀하시지요.
남을 죄짓게 하는 것과 용서 모두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냥 본성을 따르면서, 남이 죄짓든 죄짓지 않든 상관없이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주님께 도움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뛰어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란 아주 미묘해서, 열리기만을 고대했던 문을 이미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브리아나 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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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루카 복음의 앞선 장들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과 같은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과 마주하셨지만, 이제는 당신이 뽑으신 제자들과 마주하십니다. 이들은 새로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이들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이들"이란 단순히 어린이가 아니라, 복음서의 산상수훈(루카 6,20-23)에서 말하는 "가난한 이들"—곧 제자들의 돌봄을 받아야 할 이들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도 "작은 이들"은 어린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신을 믿으며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이들"(마태 18,5)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를 어린이에 비유하셨지만,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실제 어린이가 아니라 제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영적 민감성을 강조하시며, 약한 이들(작은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이들"은 단순히 나이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 가난한 이들, 믿음 안에서 의존적인 이들을 포함하는 영적인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린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이들로 비유하시지만, 그 비유는 곧 실제 제자들의 삶과 책임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말하는 맷돌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공동체를 이끌어갈 책임을 진 이들은 이 공동체에 함께하는 이들을 실망시키거나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이들의 잘못을 지적할 용기를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기꺼이 용서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심지어 같은 사람을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말입니다. 이는 곧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기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지도자들이 이 모든 것을 다 행한 후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그러니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가 "권위를 지닌 자리보다 종속된 위치에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라고 말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역할을 다했더라도 그것 역시 하느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책임을 다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께 돌리는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이를 함께 실현해가도록 이끌어간 예언자들과 현자들, 성인들,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 즉 결정적 무리(critical mass)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하느님의 일을 한 사람들인 것이고, 그들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인 셈인 것입니다.
이 결정적 무리는 자기들만 특권을 누리는 이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일깨워 주어 이 무리 안에 다른 모든 이를 모아들이는 이들인 것이고, 결국은 이 결정적 무리에 모두가 함께하도록 이끌어 주는 이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통공]이 의미하는 바인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프란치스칸 영성에서는 우리가 함께 구원되는 것을 말하지 개인의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이 기도를 함께 바쳐 보도록 합시다.
주님,
당신께서는 시대마다 당신의 뜻을 전하고 실현해온 이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언자들, 성인들, 신비주의자들…
그들은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삶으로 응답한 이들이었습니다.
저도 그 길을 걷고 싶습니다.
작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빛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주님, 저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당신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제가 맡은 자리에서,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제가 모든 일을 마친 후에는 겸손히 고백하게 하소서.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당신 은총 안에서,
저도 이 결정적 무리의 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 세상 전체를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작은 불씨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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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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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꾸짖으라는 말씀은
형제를 심판하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알려주라는 말씀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면서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잘못이 반복되곤 합니다.
잘못을 알려주는 것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위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루에도 일곱 번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쉽지 않은데
그것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용서하기는 더 쉽지 않은데
그것만큼이나 잘못을 알려주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을 알려주기보다는
심판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심판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상대방에게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은
그와 나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이임을 가리킵니다.
그는 죄인이기에
나는 그렇지 않기에
그와 관계 맺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던 내 관심 밖의 일입니다.
그에 대해 내가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에 편합니다.
잘못을 알려주는 것은
용서를 염두에 둡니다.
그것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의 지적을 받아들일지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해도 내가 흔쾌히 용서할 수 있는지도 자신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할 때
상대방이 나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반복되는 잘못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위한 노력은
그와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요즘에는 관계를 쉽게 맺고 쉽게 끊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필요해서 관계를 맺었다가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에서 또다시 멀어지기도 합니다.
사랑이 문제라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랑과 관계 맺음이 함께 가는 과정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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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7,1-6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남을 용서하기를 너무나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가 나에게 입힌 피해와 상처를 생각하면, 그로 인해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낸 걸 생각하면, 그럼에도불구하고 나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도저히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용서를 상대방보다 도덕적 영적으로 더 우월한 상태에 있는 내가 그에게 베풀어주는 ‘혜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혜택은 내가 베풀 때보다 남들로부터 받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우리는 크든 작든 저마다의 부족함과 허물을 지니고 있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다른 이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사는 동안 이미 많은 용서를 받았고, 지금 이 순간도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큰 용서와 자비의 은총 속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 남은 삶을 사는 데에도 수많은 용서를 받아야만 하지요. 그런데 하느님이, 은인들이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널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신다면 그 때 우리 마음이 어떨까요?
이렇듯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또한 내가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용서를 받았음을 기억하면 다른 이를 용서해야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지니게 됩니다. 아무리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잘 살려고 노력해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우리는, 밀접한 관계 속에 사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에게도 피해를 안 끼치겠다며 나 자신을 다른 이와 분리시키려는 태도 자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상처와 슬픔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름 잘해보겠다고 노력한 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는 일에 제한을 두거나 조건을 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가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했다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그를 용서하며 다시 형제로 받아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 게 맞는지, 혹시 속으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도 뉘우치지도 않으면서 그저 눈 앞에 닥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말로만 그런 척하는 게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야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아시지만, 우리에게는 열 길 물 속보다 더 알기 어려운 것이 한 길 사람 속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일곱 번이나 나에게 죄를 짓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가 아까 나에게 입힌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다시 또 다른 상처를 입히고는, 자기가 이미 회개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배신감과 불신에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은데 그를 어떻게 다시 내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래서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청했을 겁니다. 자기들의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좀 도와주시라고 손을 내민 것이지요.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형제를 진정으로 용서하는 일에 거창하고 대단한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느끼고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 하나면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여 화해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변화시키는 기적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과 권능으로 일으키실 테니까요. 우리는 그저 그 형제와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고 적어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기 위해, 그를 용서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면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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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탁월한 행정능력으로 교회 안팎을 아우르신 큰 성인
교황 성 대 레오 1세는 400년경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성장한 듯하다.
그는 교황 첼레스티노 1세의 부제로 여러 활동을 수행했다.
또 432년 교황좌에 오른 식스토 3세의 부제로도 봉사하며 여러 이단을 배척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440년에는 황제의 요청으로 장군과 집정관 사이에 충돌을 중재하는 임무를 띠고 갈리아로 파견되었다.
이것이 잘못되면 로마제국의 큰 문제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를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그가 갈리아 지방에 머무르고 있던 때에 식스토 교황이 선종하자
로마 성직자와 백성들은 그를 후임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성직자들이 정규적으로 강론하고, 전례 거행을 교회 공동체에 생동감 있게 도입함으로써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생활화하도록 했다.
성인은 예비 신자들을 위한 교리 교육뿐 아니라 여러 성당을 수리하고 새 성당들을 신축하기도 했다.
성인이 재임하던 때는 교회와 제국 모두 위기를 겪는 시대였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야만족들의 계속된 침략으로 붕괴 상태에 놓여있었고,
교회 또한 이런 정치적, 사회적 불안 속에서 여러 가지 이단 사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함을 부인하는
여러 이단 사상에 강력히 대처하면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였다.
또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지원을 받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수도원장과도,
여러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며 격돌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448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해
삼위 일체론을 부인하는 에우테케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단죄하고는 그의 사제직까지 박탈했다.
그는 이 결정에 불복해 교황에게 상소했으나 성인은 정통교리를 고수하고자
총대주교의 용기를 격찬하는 장문의 ‘레오의 친서’를 보냈다.
이후 이 서한은 이단 논쟁이 있을 때마다 판단 기준으로 제시되었었다.
그는 451년 훈족이 쳐들어와서 로마를 위협하자,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강화 중재를 받아 용감히 나아가 화평을 얻어내어 이탈리아의 멸망을 막았다.
455년 반달족의 함대가 테베레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도,
성벽 밖에서 가이세리크 왕을 만나 로마를 방화하고 시민들을 살육하는 것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2주간 로마는 물론 교회가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성인은 또 교황의 권한을 분명히 했다.
한마디로 그의 재임 기간은 교황권 확립의 시기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의 강론과 서간들은 신학과 라틴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과 함께 ‘위대한(大)’이라는 존칭을 받는 성인은
461년 11월 10일 선종해 베드로 성당 현관에 안치되었으나,
688년에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성당 내부 남쪽 회랑의 제단에 안장되었다.
그는 1754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인의 축일은 1969년까지는 4월 11일에 기념했지만,
1969년의 전례력 개정으로 선종한 날인 11월 10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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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먼저 받아야만 / 연중 제32주간 월요일(루카 17,1-6)
탈무드에 나오는 대체적인 용서의 순서이다.
신에게 용서받고자 하는 이는 먼저 사람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나.
이 순서를 어기면 용서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의 전통에 '대 속죄일'은 사람이 신에게 용서받는 날이다.
그러나 모두가 용서받지 못한다.
도대체 어떤 이가?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한 이다.
탈무드에는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는 신도 용서하지를 못한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께 나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찾는다.
유대인들은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의 기간을 두려운 날들이라고 하여,
사람과 신께 동시 용서받는 기간으로 정해 지킨단다.
지난 일 년 동안 잘못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는,
1월 1일부터 9일까지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는
그 끝날 10일 하루는 하느님께 마지막 용서를 구한단다.
그런데 왜 사람에게는 9일을, 신에게는 하루를 할애할까?
신은 언제든지 즉석에서 용서할 준비가 되었지만,
사람에게는 다소의 절차가 필요하고 또 거절당할 수도 있기에 그렇단다.
이렇게 용서의 문제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나.
따라서 먼저 사람을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그들의 절차다.
만일 잘못한 이가 찾아와 용서를 빌지 않으면 어떻게?
랍비들은 그이 옆에서 얼쩡거리라나.
좌우간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용서를 빌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라는 거다.
사실 신앙인일지라도 우리에게도 누군가에게 분명히 잘못한 게 있을 게다.
그러니 바로 용서를 구하자.
또 누가 용서를 빌면, 부드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자.
누군가 용서를 빌지 않는가?
옆에 가서 얼쩡거리자.
그러면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회,
원망과 원한이 없는 건강한 사회가 자연 이루어지리라.
“너희는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짓거든 꾸짖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어라.
그가 하루에도 일곱 번이나 죄짓고는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또 용서해 주어라.”
용서는 사랑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진정한 용서는 용서받는 것 보다 용서해 주는 게 더 값지다.
또 용서는 최소한 사랑과 함께한다.
사랑이 없는 용서는 어쩜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사랑과 용서가 풍만한 사회로 나아가자.
살다보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런 걸림돌 놓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다.
어쩌면 믿음이 약한 이들은 여러 스캔들에 쉽게 걸려 넘어지기도,
또 쉽게 죄를 짓기도 할게다.
그래서 지금보다는 더 많은 사랑과 용서가 넘실대는 삶이어야만 할 게다.
이는 믿음을 가진 삶이 되지 않고는 어렵다.
믿음의 본질은 조건 없는 사랑이기에 용서가 넘치는 사회여야 한다.
사실 살면서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과 충돌하는 게 종종 있을게다.
용서하는 힘은 하느님 신뢰에서 온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끝까지 보여 준다면,
상대방은 언젠가 반드시 변하고 말리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처음부터 불가능하리라는 마음을 가지면,
끝까지 불가능한 일로 남아 있지나 아닐까?
사실 사람 사는 사회 어디서나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그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일을 일삼는 일종의 걸림돌이다.
그러니 그들은 불행하다.
그러기에 불행이 없는 사회가 이룩되려면,
용서가 넘치는 사회여야만 할게다.
그러나 용서는 어렵다.
그것은 혼자 하는 게 아닌,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이기에 그럴게다.
하느님에게 용서받으려면,
먼저 사람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이렇게 신도 때로는,
‘용서를 못 하는 경우’가 가끔은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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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님
복음(루카17,1~6)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1ㄴ~2)
루카 복음 17장 1~10절은 루카 복음 9장 51절~19장 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후기 활동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최후의 순회 선교 여행을 떠나시기 직전(17,11) 베레아 지방의 활동(14,1~17,10)의 마지막 시점에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그리고 17장 1~10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1~4절까지는 성도들의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이웃과 수평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고, 5~10절까지는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 1~4절의 전반부는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에 대한 경계(1~3ㄱ절)와 형제간의 상호 용서에 관한 교훈(3ㄴ~4절)이 나오며, 5~10절의 후반부는 진실한 믿음에 관한 교훈(5~6절)과 겸손한 봉사에 관한 교훈(7~10절)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레아 지방 활동을 마감하시며, 주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주요한 덕목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면서, 루카 복음 15장, 16장에 나오는 비유들을 총정리하시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임을 밝히신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1~2절은 마태오 복음에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이야기와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마태18,1~7).
하지만 마태오 복음에서는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함으로써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소외되고 멸시받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교훈을 여러 장소에서 여러 번 주셨기에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부정적 의미를 지닌 단어인 '아넨덱톤'(anendekton; impossible)과 '스칸달라'(skandala; offences)를 사용하셔서 강조하시고자 하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신다.
새 성경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로 번역된 '스칸달라'(skandala)의 원래 의미는 '덫'(trap)이나 '장애물'로서 '올무', '부딪히는 돌', '거리끼는 것'으로 성경에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형제를 유혹에 빠뜨리거나 교리 혹은 가르침 등으로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며, 세상에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늘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다.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아넨덱톤'(anendekton)은 '가능하다', '허락하다'는 뜻이 있는 '엔데코마이'(endechomai) 동사에 부정 접두어 '아'(a)가 결합된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불가능하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다시 부정 불변사인 '메'(me)와 연결되어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그러한 유혹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에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현실 극복에 대한 강인한 지향이 있어야 됨을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강조 어법으로 제자들에게 촉구하시고 있는 것이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8장 6절과 마르코 복음 9장 42절에는 '연자매'에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 a millstone)가 나온다.
여기서 '연자'에 해당하는 '오니코스'(onikos)는 '나귀'(루카14,5)를 뜻하는 '오노스'(onos)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따라서 '연자매', '연자 맷돌'에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는 '나귀의 힘에 의해 돌리는 커다란 맷돌'을 말한다.
이것은 집안에서 사용되는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과는 달리 많은 곡식을 한꺼번에 빻기 위해 사용되는 큰 맷돌이었다.
루카 복음 17장 2절에는 '리토스 뮐리토스'(lithos mylikos; a millstone)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맷돌에 속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이것의 용도는 곡식을 가는 것인데, 때로 이방인들은 이것을 형벌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의 로마 처형법 중에 하나는, 이 돌의 구멍에 목을 매게 해서 바다에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처형 방법은 영적 세계에 무지한 이교도들이 바다에서 죽은 자들은 사자(死者)들이 머무는 세계로 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왔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들이 죽은 물 위에서 영원히 방향도 없이 떠돈다고 생각했다.
보통 맷돌에 사람을 묶어 바다에 던져도 가라앉는데, 하물며 대형 맷돌에 목을 매어 빠뜨리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음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자매에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하는 죽음은 장례를 지낼 수 없는 죽음으로써 최악으로 여겨졌다.
한편, '걸고'와 '내던져지는 편'으로 각각 번역된 동사 '페리케이타이' (perikeitai; that were hanged; that were tied)와 '에르맆타이'(erriptai; be thrown; be cast)는 중간태 내지는 수동태로서, 남을 죄짓게 한 당사자가 제3자, 즉 사법당국에 의해서 수장되는 형벌을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걸리어지는 '그 목'은 죄짓는 작은 이의 목이 아닌, 작은 이를 죄짓게 한 당사자의 목이며, 그 목에 연자매를 매고 바다에 던지는 주체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법당국이다.
그리고 '낫다'에 해당하는 '뤼시텔레이'(lysitelei; it would be better)는 본절에서 '더 좋다'(it is better)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세금을 지불하다'는 뜻으로서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작은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은 준엄한 형벌이 반드시 주어짐을 전제하는 동시에, 차라리 이러한 형벌이 더 낫다는 이중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작은 이'(one of these little ones), 즉 연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해서 내세에서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는 것보다, 바다에 수장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그 개인에게 낫다는 의미이다.
내세에서의 형벌의 막중함은 연자매에 달려 수장당하는 형벌에 비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은 남들이 보잘것 없게 여기는 작은 이, 즉 소외된 이웃이나 스스로 힘으로 설 수 없는, 믿음이 연약한 이들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시 로마 사회에서 흔히 시행되던 가혹한 형벌을 언급한 것은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을 애타는 심정으로 막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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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용서와 형제애
오늘 예수님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는 말씀으로 복음을 여십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세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악은 늘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도 그런 일을,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마음으로 또는 행동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려니 넘어간다면, 우리에게는 주님의 불행 선언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런 일을 저지르는 자!”
사실, 이웃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의 영적인 투쟁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웃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나를 조금이라도 내려놓아야 하니 말대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 남을 죄짓게 하는 자,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를 단죄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우리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우리보다 힘없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죄짓지 않도록 또는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살펴야 하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외치십니다. 우리 곁에 이러한 사람들, 이러한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이웃 사랑 실천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호소로 다가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랑으로 가르치셨고, 사랑으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셨고, 끝내 부활하심으로 사랑의 승리를 드높이셨던 예수님을 말하고 따르는 우리에게 이웃은,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야”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앞세워야 할 모습은 사랑의 행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행위인 용서입니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용서를 멀리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영적 인식이, 곧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절실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우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웃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보람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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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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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04
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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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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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Oh68KQsgak
[서울대교구 박민호 요셉(우면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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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예수님의 격려 말씀!>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나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연자매라는 표현까지 쓰신 것입니다. 연자매는 큼지막한 맷돌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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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rM-d6op_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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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어라>
찬미 예수님!
우리가 '용서'라는 주제를 만날 때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는 절망이 먼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나는 절대로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데'라는 현실의 벽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가능한 용서'에 대한 당신의 가정사를 이렇게 나누어 주십니다.
한 신부님의 아버님은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으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옆을 지키는 '아내'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단 하나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절망의 세월 속에서도 매일같이 성전을 찾으셨고,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어머니는 성전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습니다. '환희의 신비'였습니다. 1단, 2단, 3단을 지나, 4단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함"
어머니는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성껏 아기를 바치는 성모님의 마음을 따라가던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묵상 중에,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술에 취해,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남편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이나 '웬수'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다. 저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나의 '큰아들'이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원망할 수 있고, 지치면 이혼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어머니'는 병든 '아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낳아준 자식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맡기신 '큰아들'임을 깨닫는 순간, 어머니의 마음은 원망에서 '연민'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변했습니다. '상처받은 아내'가 '기도하는 어머니'로 변하자, 놀랍게도 그 가정이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평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용서에 이른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11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복수'가 법이자 명예였던 시대였습니다. 가문의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를 갚는 것(Vendetta)은 아들의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귀족 기사였던 '요한 구알베르토'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가 정적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그는 복수심에 불타올랐습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원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침내 1028년, '성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피렌체 외곽의 좁은 길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와 마주쳤습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외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승리에 찬 복수심으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제 저 자의 심장을 찌르면, 가문의 명예도, 자신의 분노도 모두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무기도 없이 홀로 있던 원수는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팔을 벌려 '십자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온 교회가 "보라, 십자가 나무"를 노래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던 바로 그 성 금요일에, 원수는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형상화하며 그의 '믿음'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칼을 든 요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고 지금 이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복수하는 자'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자'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차마,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를 찌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 앞에서, '복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칼을 칼집에 꽂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은 원수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바로 이 '불가능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가 하루에 일곱 번 너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일곱 번'이라는 것은 '무제한의 용서'를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나를 한 번 속인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일곱 번이나 나를 배신하고 돌아와 "미안해, 회개할게"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또 용서합니까?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나'로서는 '용서하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놀라운 통찰입니다. 그들은 "예, 주님. 저희가 더 노력해서 용서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그것은 저희 힘으로 안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다른 힘, 즉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은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겨자씨'는 무엇입니까? 이 '겨자씨'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체'입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질겨서 도저히 뽑히지 않는 나무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용서할 수 없는 증오심'이 바로 이 뽕나무와 같습니다. 내 노력으로는 절대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이 작은 겨자씨가 내 안에 심기면, 즉 내가 그분을 받아 모시고 '그분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이 불가능해 보이는 증오의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믿음은 11살의 작은 소녀에게서도 똑같이 증명됩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입니다. 그녀는 이웃 청년 알레산드로의 추행을 거부하다가 14번이나 칼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던 소녀에게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마리아, 너를 찌른 알레산드로를 용서하느냐?" 우리는 이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압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압니다.
하지만 이 11살 소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네! 저도 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가 천국에 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 고레티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몇 달 전, 생애 처음으로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녀는 '성체'라는 겨자씨를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알레산드로의 구원을 바라며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가 용서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겨자씨'를 받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용서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시는 성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증오의 뽕나무를 뽑아내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는 오늘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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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이번 한 주간 평일 독서로 지혜서를 읽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서는 욥기, 잠언, 코헬렛, 집회서와 더불어 지혜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빌론 유배에 이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통치라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만나면서 이스라엘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학적 결실이 두 가지 생깁니다. 지혜 문학과 묵시 문학이지요. 그 가운데 지혜 문학은 중동의 여러 지역과 문화에서 발견되는데, 유다의 현자들은 주변 나라들의 지혜 문학에서 영향을 받았고, 반대로 그들의 저서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은 크게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주로 세상의 질서 파악에 집중합니다. 인간 행위에는 반드시 갚음(상벌)이 따르는데,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은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보입니다. 잠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은 이러한 현세의 인과응보와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일이 원리 원칙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의 제기,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인간의 지혜로는 한계가 있다는 고백을 담은 두 번째 단계가 등장합니다. 욥기와 코헬렛이 대표적 작품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한계에 맞닥뜨리고 마침내 현자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지혜 문학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출발하였지만 결국 하느님의 계시로 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주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 그리고 현세를 넘어 내세의 인과응보를 말하는 집회서와 지혜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어디쯤 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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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1-6: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말씀하신다. ① 다른 이를 죄에 빠뜨리지 말라. ② 회개하는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 ③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에 의탁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1-2절)라고 단호히 경고하신다. 우리는 약한 인간이기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하지만 다른 이의 발목을 잡아 죄로 이끄는 것은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남을 죄로 이끄는 것은 자신의 죄보다 더 큰 죄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Hom. in Matthaeum 5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행동이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신자의 삶이 공동체에, 교회의 증언이 세상에 어떤 본보기가 되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여기서 “일곱 번”은 수학적 횟수가 아니라 끝없는 자비를 뜻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가르친다. “용서는 사랑의 최고 증거이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네가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께 닿지 못한다.”(Sermo 114) 우리가 받은 용서가 크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쉽게 단죄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이미 “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만 탈렌트”(마태 18,24-28)의 빚을 탕감받았음을 기억한다면,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응답이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신다. 믿음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힘의 문제이다. 가교리서는 믿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다.”(153항) 믿음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동시에 우리가 날마다 응답하며 자라나야 하는 은총의 길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다른 이를 죄로 이끄는 걸림돌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끄는 디딤돌이 되고 있는가? 나는 받은 자비를 기억하며,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는가? 나는 믿음을 내 힘으로 키우려 애쓰기보다, 하느님께 의탁하며 은총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처럼 작아 보여도, 그것이 진실로 하느님께 뿌리내린다면,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용서와 자비의 길, 믿음으로 사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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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들이고 물드는 그대, 사람아>
루카 17,1-6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믿음의 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물들이고 물드는 그대, 사람아>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사람아
그대 착하게나
착하게 물들이게
악에 물들지 않게
사람아
그대 참되게나
참되게 물들이게
거짓에 물들지 않게
사람아
그대 밝게나
밝게 물들이게
어둠에 물들지 않게
사람아
그대 믿게나
믿음으로 물들이게
불신에 물들지 않게
사람아
그대 희망하게나
희망으로 물들이게
절망에 물들지 않게
사람아
그대 사랑하게나
사랑으로 물들이게
미움에 물들지 않게
사람아
그대 살리게나
살림으로 물들이게
죽임에 물들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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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과 태산 같은 믿음은 같은 믿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1-6)
1)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사도들의 요청은, 그들이 ‘믿음’을 각 개인의 어떤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말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달라는 요청이 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믿음이란 더하거나 덜어내는 어떤 능력 같은 것이 아니고, ‘있거나 없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믿거나 안 믿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과 ‘태산만 한 믿음’은 같은 믿음’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믿기만 하면 누구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어라.”, 또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이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될까? 또 돌무화과나무가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 사실 신앙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갖고 청해서 어떤 놀라운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신앙인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일이고,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는 “너희가 믿고 섬기는 주님께 복종할 것이다.”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뭔가 이유가 있다면 초자연적인 일도 하실 텐데, 만일에 신앙인이, 그 일을 자기가 한 일이라고 착각한다면, 교만에 빠질 것이고,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2) 주님은,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죄인도 회개시켜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는 것과 회개한 형제를 용서하는 것도 주님의 자비와 권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꾸짖거나 용서하지 않고 그냥 바로 처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어떤 경우에는, 죄를 짓고 있는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이,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야 합니다.
박해자 사울이 교회를 박해할 때, 박해를 받는 신자들은 ‘사울’이라는 박해자의 회개를 위해서 끈질기게 기도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마도 당시 신자들 중에는 박해자 사울을 회개시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극적으로 회개시키시고, 또 그를 ‘사도 바오로’로 만드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은 분명히 ‘사람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것은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만일에 당시 신자들이 박해자 사울을 암살해 버렸다면? 그랬다면 그것은 살인죄를 지은 것이 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어긴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박해가 더 심해졌을 것입니다.
3)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좁은 뜻으로는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일이고, 넓은 뜻으로는 다른 사람의 회개와 구원에 관심 갖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유혹 자체는 큰 죄인데,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기도와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작은 죄는 아닙니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그 죄를 짓고 있을 때, 나를 꾸짖고 타이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이라고 원망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라고 크게 혼난 일과 같은 엄격하고 혹독한 훈육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이며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때 누군가가 꾸짖어 준다면(회개하도록 인도해 준다면), 바로 그런 일을 통해서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져서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는데도 아무도 꾸짖지 않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면, 그 상황 자체가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러니 형제가 나의 죄와 잘못을 꾸짖는 것은 크게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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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유혹은 나 자신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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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일 요아킴 신부님]
<용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보통 두세 번 용서하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를 더 늘려 잡으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하고 있는 이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그가 잘못한 것들을 일일이 공책에 적었다. 그리고 자기도 얼마간 잘못한 느낌이 들어 자기 잘못도 써내려갔다. 그런데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두 쪽밖에 안 되는데 자기 잘못은 세 쪽이나 되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상대방 잘못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며, 또 자기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닮으려면 먼저 용서하라’는 말이 있다. 용서는 ‘신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자신에게 베푸는 자비요, 상처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치유 행위이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과 증오심을 갖게 되면 그로 인해 더 큰 상처만 생긴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고 기도한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미 받은 하느님의 용서도 언제까지나 유보된 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순간마다 용서를 청하는 우리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서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랑을 나누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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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관계를 잘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이는 화롯불처럼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리 대하여서도 안 되고, 아무리 내 아내, 남편, 자식이라고 하여도 내 소유물처럼 다루어서도 안 됩니다. 친한 친구끼리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당사자가 없다고 험담과 뒷담화를 일삼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만, 그렇다고 내 잘못이 아니니 용서를 청할 필요도 없고, 굴욕스럽게 낮은 자세로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생각의 틀을 꾸짖으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용서 청하면 언제든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시고,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다고 판단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언제든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지도자인 원로와 감독이 될 수 있는 인격적 조건을 열거합니다. 흠잡을 데 없고, 가정에 충실하며, 방탕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 거만하지도 않고, 손님을 잘 대접하며, 선을 사랑하고,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굳게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사제와 주교를 선발할 때 이런 기준들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한 사도들의 기도가 우리 입에서도 나와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지닌 이들을 성령께서는 우리 세상과 교회를 바꾸는 놀라운 능력으로 채워 주시어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교회의 성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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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가족으로, 친구로, 스승과 제자로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많은 관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자라나고 성숙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친구를 잘못 만나면 인생이 꼬이기도 하고,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치면 그 제자는 잘못된 가르침을 평생 진리로 알고 살아갑니다.
내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적은 없는지를 생각하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 부정적인 영향들에도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분열입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데 대화와 타협을 하지 못하고 내 의견만을 고집할 때, 나의 명예만을 지키려고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짓밟을 때, 내가 잘못했음에도 용서를 청하지 못하고 자존심만을 내세울 때, 그리고 잘못한 형제가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데 나의 상처만을 내세우며 그를 용서하지 못할 때, 이런 것들이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은 바로 분열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바로 용서와 믿음입니다. 이들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일치와 친교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맺는 많은 관계 안에서 우리가 일치의 원동력이 되지 못하고, 추문과 악한 표양으로 분열의 씨앗이 된다면, 이것은 개인적인 선행이나 악행의 차원을 넘어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의 심장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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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의 힘!>
오늘 복음(루카17,1-6)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으라.'고 하시고, '나의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8)
어떻게 너를 죄짓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에게 잘못한 너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완전의 의미를 지닌 일곱 번씩이나.
믿음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입니다.
믿음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단순합니다.
단순하기에 그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한 아주 작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단순하고도 작은 믿음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마침내는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너를 죄짓게 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고,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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