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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도마(2)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김명혁 목사
행복한 사람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지지도 않고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고 천국이 소망되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어지고 천국이 소망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송명희 시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온 몸으로 믿어지고 예수님이 온 몸으로 사랑하고 싶어지고 천국이 간절하게 소망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내 마음을 다하여 모든 것 다하여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기까지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이 믿어지지도 않고 사람이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모나 자식이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회자가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신자는 불행한 신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사람들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는 물론 교수들도 의사들도 종교인들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치도 기준도 법도 나라도 교회도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 신약에 나타난 죄 중에 가장 크고 무서운 죄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의 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자기가 바리새인과 같은 파렴치한 죄인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찔림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27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약에 나타난 또 하나의 크고 무서운 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하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믿음은 행복인데 불신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풍조는 신약 시대에도 편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여” 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질병에 걸린 자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간질병자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니다”(마17:15,16). 그때 예수님은 그 아이를 고쳐주시면서 그 시대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17:17,20). 간질병자 아버지의 불신앙은 물론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도마의 불신앙을 중심으로 신약 시대의 불신앙의 모습을 펴보겠습니다.
1. 도마는 예수님 자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믿어주지 않을 때 부모는 불행을 느낍니다. 부모는 물론 자식도 불행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선생님은 불행을 느낍니다.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도 불행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하나님은 불행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도 불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을 살려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서 세상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네가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말하느냐” 라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네가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 라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네가 귀신의 왕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귀신을 좇아낼 수 있느냐” 라고 비난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라고 모욕하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사람들의 불신과 비난과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행이었고 사람들의 불행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물론 심지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큰 파도가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무서워하면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한 번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계시는데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함께 유대 베다니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11:8).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자포자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용기 있는 믿음의 고백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좌절과 불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그의 태도는 용감스러워보였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물론 도마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고 솔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도마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불신앙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에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며칠 전 집사님 한 분이 제 방에 들어와서 속이 상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믿지 않는 것이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 주일 장로님들과 함께 병원 심방을 다녀오면서 극동 방송에서 나오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잠시 들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 요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면서 교회를 십년 다닌다고 다 믿는 사람도 아니고 다 구원을 얻은 사람도 아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망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게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의심과 불신앙의 구름이 드리울 때가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도마처럼 의심이 많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 그럴 수도 있고, 사탄과 귀신의 공격을 받을 때 그럴 수도 있고, 죄를 지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믿음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를 항상 힘쓰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회개를 항상 힘쓰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온유와 겸손을 유지하도록 항상 힘써야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든지 교만하면 믿음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
2. 도마는 천국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다음 아버지의 집인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리리에서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신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 아버지의 집에 대한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던 도마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 도마가 불신앙의 사람이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척 하는 것보다는 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시기도 했고, 거지 나사로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올라간 이야기도 하셨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도 하셨고, 달란트의 비유도 말씀하셨고 양과 염소가 하늘 영광의 보좌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했지만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와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신자들도 천국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가인처럼 이 땅에 좋은 집을 짓고 멋지고 편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는데 오늘의 신자들은 하늘을 믿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고 땅에 대한 관심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과 사업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을 너무 웅장하게 짓고 선교의 왕국을 너무 거대하게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과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하늘을 사모했던 것처럼, 사도 요한이 계시록의 한 장 한 장을 쓸 때 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도마는 물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좇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16:9-11). 눅24:11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실 십자가와 부활은 믿기에는 모순되고 불합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온 후에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기이하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40-4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기도 했고 일부러 생선을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마지막까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심의 사람 도마였습니다. 열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주일 저녁 모임에 도마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지 친척의 결혼식에 갔는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 날 저녁 일요일 저녁 주일 저녁 열 제자들이 함계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열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반응은 단호한 불신앙이었습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였습니다. 얼마나 불행하고 무서운 고백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는 고백은 한 사람의 운명을 지옥을 떨어지게 하는 무서운 고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마의 불신앙의 고백 속에는 믿고 싶어하는 솔직한 의심과 회의가 깃들여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 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불행하고 무서운 고백을 하는 도마에게 일 주일 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자기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만지게 해 주시므로 주님의 부활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마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고백이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그 이후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하는 일에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자기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고백을 들으시고 만족해 하시면서 이 말씀을 첨부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사실 믿음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행복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고 불행은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인생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 다리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반대로 인생을 망하게 하는 세 가지 다리는 불신과 미움과 절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 집은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으로 지으신 하늘 집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소망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을 믿고 고백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불신과 미움과 절망의 세상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바꾸어가며 사시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성
김영헌 목사
말기암 환자가 의사로부터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현대과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억울하고 불쌍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내외가 외출을 하여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강도가 흉기를 들고 침입했습니다. 목에 흉기를 들이대며 “돈만 내 놓으면 목숨은 살려준다. 소리 지르지 마라, 돈만 내 놓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위협을 했습니다. 말기암 환자인 이 할머니가 강도를 향해 욕을 퍼붓습니다. “이놈아! 의사도 못 고친다는데 네깐놈이 어떻게 날 살려. 의사도 죽는다고 했는데 네 놈이 나를 어떻게 살려.” 강도는 말기암 할머니에게 따귀만 맞고 집을 나갔답니다. 농담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지 못합니다.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죽음에서 살릴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증거가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② 하나님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리십니다. ③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는 힘으로 할 수 없다(can't)는 것을 할 수 있다(can)로 살려주십니다. ④ 하나님은 실패를 성공으로 살려주십니다. 부활 후 첫 주일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셔서 이 능력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몇 명의 과학도들이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Humankind no longer needed God)는 결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대표자 한 사람을 하나님께 보내서 그들의 결정사항을 통보하도록 했습니다. 과학도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We no longer need you)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도 복사할 수 있고 여러 가지 기적적이고 불가사의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하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인내심을 갖고 친절하게 그의 얘기를 경청하였습니다. 과학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좋다. 이건 어떠냐? 우리 사람 만드는 시합을 하자”(a man-making contest) 과학도가 대답합니다. “좋습니다. 대단한 시합이 될 겁니다.” 자신감을 드러내는 과학도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웁니다. “자, 내가 옛날에 아담을 만들던 방식으로 할 것이다.” 과학도가 말합니다. “좋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한 움큼의 흙을 쥐었습니다.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려는 과학도를 바라보던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안되지. 안되지. 안되지, 너는 네 자신의 흙을 가져다가 만들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에 대해 몹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혼란을 주곤 합니다. 오늘 부활 후 첫 주일에 도마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런 갈등으로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길잡이를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famous doubter)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실증주의자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고 검증되어야만 받아드리는 타입이었습니다. 그런 도마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해소하는 길을 발견하게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과학이 없이도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하는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이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큰 숨을 내쉬며 또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2-23)
예수님의 제자들은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를 만나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도마는 단호히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제자들이 문을 닫고 집안에 있을 때 벽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건넨 예수님은 도마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님의 이 말씀에 도마는 직접 손으로 예수님의 손이나 옆구리를 만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즉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and my God!)(요 20:28)
아마도 예수님은 도마의 손을 꼭 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요 20:29)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더구나 의심 많은 도마,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가 매우 정직하고 헌신적인 제자로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의심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직접 도마의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셨습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뇌”를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신앙이 씨름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도 바로 이런 씨름을 통해서 얻어지는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빈민들을 보살피며 행려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바라보던 테레사 수녀가 수없이 하나님께 질문하며 의문에 휩싸였던 글들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죄 없이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왜 그들이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테레사수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수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She never gave up serving God).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결코 섬기는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헨리 드루먼드(Henry Drummond)라는 사람은 “의심과 불신앙”(Doubt and Unbelief)을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의심은 믿을 수 없는 것”(Doubt is can't believe)이고 불신앙은 믿지 않으려는 것(Unbelief is won't believe)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의심은 정직한 것입니다”(Doubt is honesty). 그러나 불신앙은 강팍한 것입니다(Unbelief is Obstinacy). 의심은 빛을 추구하는 것이고(Doubt is looking for light), 불신앙은 어두움에 만족하는 것입니다(Unbelief is being content with darkness).
역사를 보면 위대한 신앙인일수록 의심을 갖고 씨름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욱 헌신적인 사람들은 신앙을 갖기 위해 많은 씨름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거나 씨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정말로 예수님을 잘 섬기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매사에 의심하고 확증을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 보면 도마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수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까? 그때 도마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요 11:16)
도마는 결코 보잘 것 없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신앙을 갖기 위해 씨름하였습니다.
종종 우리는 “과학과 신앙”(Science and Faith)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로 극단적인 갈등을 보이는 것을 목격합니다. 특히 창조론과 진화론(evolution)의 싸움 때문에 학교에서는 어떤 이론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려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노력이 있습니다. “지적착상” 또는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이라고 부르는데, 과학의 증거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상을 지지하고 있다는 연구입니다. 많은 학교에서 이 연구를 받아드려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립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서로 보완하고 지지하는 시각으로 연구의 방향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좋은 시도라고 봅니다. 그들은 몇 가지 원리를 갖고 출발합니다.
첫째로 과학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다루는 학문이고, 신앙은 “왜”(Why)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은 결코 갈등이 있을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God is a God of Truth). 만약 과학이 우주의 나이가 1400만년(14million years)이 되었다고 증명했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또 만약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서 그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 택하셨다면 그것도 진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만 아는 작은 하나님(small God)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과학은 “어떻게”(How) 만들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지만, 신앙은 “왜”(Why) 만들었느냐에 초점을 맞출 뿐입니다.
극단적인 진화론자들은 모든 것들이 다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연에 의해서 진화된다면 ‘아름다움’(Beauty)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음악에서 들려오는 네 파트의 아름다운 화음은 무엇으로 설명됩니까? 그것도 우연히 생긴 일입니까? 석양의 아름다움도 우연히 생긴 일인가요? 자연의 아름다움이 모두 우연히 생긴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우주 전체를 섭리해가는 설계사가 있습니다. 과학은 “어떻게”라는 방법만을 말하고, “신앙”은 “왜”라는 목적을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것들을 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속에 깃들여져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세계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짧은 생각입니다. 한 발자국만 연구실에서 물러서서 더 넓은 우주를 바라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결코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을만한 새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마를 만나실 때 문이 닫혀 있는데도 예수님이 벽에 관계없이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요20:26). 부활의 신비입니다. 과학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의 원리는 성경에는 두 종류의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역사적 진리(historical truth)요, 다른 하나는 영적진리(Spiritual truth)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우주만물은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하나님은 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역사적 연대기(historical chronology)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연대기를 알고 싶으면 기술자나 과학자에게 물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다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빛이 있으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말씀으로 만드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레째 되는 날, 하나님이 쉬시면서 안식일로 삼았으니 하나님의 백성도 이 안식일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휴식은 히브리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창세기에는 역사적 진리와 영적진리를 함께 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600년 경에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둘레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은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Galileo)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다. 종교인들은 놀랐습니다. 시931, 시96:10, 역대기16:30에 보면 “세계는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도다”(the world is firmly established, it cannot be moved)고 말씀하셨습니다. 시104:5에도 “(하나님께서)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도다”고 말씀하셨고, 전도서1:5에도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자기의 주장이 결코 성경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서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즉 우리는 결코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며, 특히 시나 노래들은 결코 설명서(instruction)나 역사(history)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역사적 진리가 있고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도 있고, 노래도 있고, 비유도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적인 좁은 눈으로만 보려고 하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진리, 즉 역사적 진리와 영적 진리가 서로 어우러져 있는 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즉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지 결코 지식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3:12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확실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할 뿐입니다. 우리는 도마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만큼 강력한 말씀도 없습니다. 보고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은 신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보지 못하고도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유명한 코미디언인 우디 알렌(Woody Allen)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싸인을 주실 수 없을까요? 예를 들면 내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수 백 만불을 저금해 놓으시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알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답답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렇게도 애타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싸인을 주시지 않을 때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영성이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신앙과 씨름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사춘기에 머물고 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군들은 대부분이 의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가 여러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게 하십시오. 이 세계는 설계자가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도는 방법(How)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목적(Why)을 말합니다. 성경 속에는 역사적 진리와 영적 진리가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지, 지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때부터 도마는 “나는 할 수 없다”(I cannot)에서 “나는 할 수 있다”(I can)로 바뀌어졌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힘입니다.
의심하느냐
채규현 목사
할렐루야!
주님의 부활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그 주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끊임없이 전했고,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마다 그 복음증거의 핵심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였던 그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함을 입었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여기에 진정한 우리의 삶의 새로운 의미가 놓여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사건을 우리는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있는가보다 생각하지만, 사실 이 부활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라서 믿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세상 사람들도 믿지 않을뿐더러 윤회라는 것을 믿는데 이 세상에서 잘못하면 소도 되고 바퀴벌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진리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란 단지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체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모든 사람이 부활합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다시 합쳐집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부활하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그 부활은 우리가 의미하는 부활은 아닙니다. 부활한 상태에서 심판대 앞에 서죠. 사람이 한번 죽어서 끝이라면 안 믿어도 ‘그냥 없어지면 되니까….’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무서운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어서 끝이 아니고,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영혼과 육신이 합해져서 그 다음에 영원히 사는데, 어디에서 사느냐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사느냐, 아니면 심판을 당하는 영원한 고통의 지옥 속에서 사느냐,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미하는 부활은 그저 육신과 영혼이 다시 합쳐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부활은 우리 몸이 다시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입어서 천국생활 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연약한 몸, 불완전한 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어딘가는 나름대로 우리 몸에 대해서 자격지심이 있습니다. 얼굴이 뭐 좀 어떻게 됐으면, 몸매가 뭐 좀 어떻게 됐으면…. 그런데 천국가면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절대로 성형외과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몸이니까, 만족스러운 몸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해서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라 그 전에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표적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렸고 나사로도 살렸지만, 그 부활은 단지 표적적인 면이지 그들도 결국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사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사실은 안 본 사람은 믿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 처음부터 보면 “안식 후 첫날….” 바로 오늘입니다. 그 부활의 날을 계속해서 “제 삼일에…”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4복음서 전체에 공통적으로 “안식 후 첫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한 주가 시작하는 그 첫 시작에 예수님이 새롭게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려고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모이는 때가 바로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을 주의 날-주일(主日이)라고 이름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이라는 의미는 계시록 1장에도 ‘주의 날’이라고 나오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날-두렵고 떨리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나옵니다. 그 날은 심판날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받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날,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이후에는, 모든 이 세상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월, 화, 수, 목, 금, 토, 주일이 전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시간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주의 날, 안식 후 첫날,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고대하는 바로 그 날입니다. 바로 그 날에 주의 백성들이 모이는데, 특별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모이는 이 부활주일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 우리가 흰 옷을 입습니다. 흰 옷을 입는 이유는 마지막 주님 앞에 가는 그 날에 우리가 세마포 흰 옷을 입거든요. 바로 그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흰 옷을 입습니다. 마침 이번이 좋은 기회입니다. 앞으로 우리 부활주일이 되면 웬만하면 흰 옷을 입읍시다. 그렇게 해서 정말 그 날을 고대하는 삶으로서 우리가 함께 표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께서는 전부 다섯 번 나타나셨습니다. 제일 먼저, 새벽 미명에 마리아와 여자 일행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을 집어넣기 위해서 왔는데 무덤이 열려있고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너무나 그들이 놀라서(부활을 믿지 않았죠)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중간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인 줄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한걸음에 뛰어가서 무덤을 보았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뿐만 아니고, 바로 그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고, 저녁에는 열 명의 제자가 있는 곳(가룟 유다가 빠지고 도마가 없는 가운데)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예수님이 다섯 번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다섯 번만 나타나신 건 아니겠지만, 기록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제자들 가운데에 없었던 도마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저는 의심하는 도마에게 초점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도마의 의심이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다른 열 명의 제자들도 그 자리에 없었다면 누구든지 전부 도마와 똑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지금 도마가 의심하는 사건은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신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지 도마의 의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 자리에 없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의심했을 만큼 그만큼 부활은 엄청난 사건이었단 말입니다. 사실 도마는 그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열심이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그 때에 예수님의 결심을 보고 도마가 이야기하죠.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는 죽음도 불사할 생각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좇으려 했습니다. 또, 마지막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 식사하시면서 예수님이 여러 가지로 가르치실 때에 도마는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제자들의 마음도 다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도마는 표현을 했단 말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디두모”라는 말은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도마도 다른 쌍둥이 형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도마는 강하게 “부활이, 그게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이야기할 때에, 여드레 뒤에 도마가 포함된 가운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의 광경을 보면,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이 닫혀있다는 것이 사실은 좀 더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닫혀서 열지 못하고, 완전히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더 표현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때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니까 이 면에서도 주님이 부활하신 그 몸은 지금 우리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벽도 뚫고 지나갑니다. 아무리 문이 닫혀있어도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벽을 뚫고 지나가는데도 귀신은 아니에요. 만질 수 있는 몸이에요. 도마에게 주님이 이야기하십니다. “내 옆구리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내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그날, 우리가 천국 가는 그날에 우리는 영광의 몸(glorified body),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고 갑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은 완전한 몸이 아닙니다. 창 자국이 있고 못 자국이 있는 몸으로 사십니다. 우리의 완전함을 위해서 예수님은 그 몸의 완전함을 포기하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져보라, 손가락을 넣어보라.” 그럴 때 도마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여…” 여기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oJ qeov" mou(호 데오스 무)”라는 말입니다. “My God” 정확하게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또 “나의 주”라는 말도 “kuvriov(큐리오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 “여호와”라는 말이 붙을 때마다 “아도나이(adonay)”라는 말을 했거든요. “주(主)”라는 말인데 그것의 헬라적 표현이 “kuvriov(큐리오스)”에요. 이것은 보통 일반적으로 노예가 주인에게 이렇게 부르기도 했지만, 특별히 예수님에게 “kuvriov(큐리오스), 주여”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적나라하게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지금 도마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그 도마의 의심하는 것을 통해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가지고 의심하는 데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마음의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믿지 않기 위해서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그러한 종류가 있고, 다른 종류는 더욱 하나님에 대해서 간절히 알기를 원하면서 의심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후자의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한 의심은 오히려 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고 하나님의 하신 일을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마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29절에서 이야기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그런데 사실 이 책망은 도마에게만 가는 것은 너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제자들은 그러한 의심이 있기 전에 미리 봤기 때문에 다 믿었단 말입니다. 그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에 계신 동안에 본 사람들은 전부 보고 믿은 겁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이야기하시는지 그 이유가 30절,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0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성경에 있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적과 이사를 우리 주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간추려서 기록한 이유는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바로 이 말씀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보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직접 본 사람은 성경에 한 사람 나오죠. 바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봤잖습니까? 보고 눈이 멀고, 예수님의 소리도 듣고…. 그 외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 믿어요. 어떻게 믿습니까? 바로 성경을 통해서 믿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아서 믿지만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이유가 바로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 성경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전체 성경을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그 믿음-구원받는 믿음은 누구나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제 주위 사람들 중에서 60세가 넘어서 예수님을 믿고, 글을 모르고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성경 말씀을 줄줄 꿰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은 한탄해요. “보다 내가 일찍 믿을걸, 늦게 믿어서 하나님께 더 헌신하지 못하는구나.” 탄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성경을 다는 잘 몰라요. 모르지만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구원받는 진리는 그 분들이 압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식이 많고 지혜가 많은 사람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또한 아무리 이 세상에서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물론 이해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성경 전체의 기록의 목적은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에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혹시 오늘 여기에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처음에는 성경이 잘 안 읽혀질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이 말씀을 저도 이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는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여러분 마음 깊이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깨달아질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벤허(Ben-Hu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벤허의 저자가 대단한 무신론자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믿지 않는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작가였던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면 아주 기가 막힌 로맨스가 나올 것 같은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당신이라면 그것을 소설로 멋있게 쓸 것 같은데. 괜히 그 예수라는 분이 무슨 하나님이라는 둥 그런 뚱딴지같은 말 말고, 거기에서 그 분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인격적이었는가를 당신이 소설로 한번 만들어보라.”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소설이 나왔습니다. 제안을 한 사람은 잉거슬 대령이라는 사람이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소설을 쓴 사람은 루 월러스(Lew Wallace) 장군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둘 다 당대에는 아주 소문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월러스 장군이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다른 책들도 보고, 특히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게 점점 마음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안 믿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님이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어쩔 수없이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고백을 하고 나온 작품이 “벤허” 입니다. 제가 처음 이 “벤허” 영화를 본 것이 중 ․ 고등학교 때인데 참 멋있더라구요. 로마 병정의 복장도 멋있고, 벤허를 배신한 친구의 복장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전차 경기, 그래서 벤허가 마침내 통쾌하게 그 친구 메살라에게 복수하는 장면에서 “야, 멋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다시 “벤허”를 보게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제가 본 것은 전혀 다른 스토리였어요. 믿고 나서 보니까 바로 그 “벤허”라는 작품이 월러스 장군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보니까 제가 완전히 뒤집어서 봤어요. 그 내용이 뭡니까? 그 주인공인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의 극중 이름이 유다 벤허(Judah Ben-Hur)인데, 그 유다 집안은 유복한 가정이고 유대인의 가정입니다. 그곳의 총독부에 파견된 사람이 옛날에 자기와 놀던 로마인 친구였습니다. 같이 만나서 처음에는 기뻤지만, 그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서 전혀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는 죽고,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은 문둥병에 걸리고, 자기는 노예선에 팔려가게 됩니다. 온갖 고초와 환난 속에서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서 마침내 성공해서 돌아옵니다. 마침내 경기장에서 그는 복수합니다. 이겼고, 자기 친구의 재산을 다 빼앗고, 마지막에 그 친구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속의 복수와 분노의 칼은 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언제였냐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그때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유다 벤허가 만나고, 그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을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을 때, 자기 마음속에 있는 미움의 칼이 내려놓아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의 문둥병이 낫게 되는 기적도 경험하게 되지만, 결국 그 앞에 유다 벤허라는 사람이 그렇게 배신을 당해서 온갖 고초와 고통을 당하면서 그 속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의 칼날이 섰으면 섰을수록, 그것을 놓게 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더 빛을 발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안 믿었을 때에는 그게 전혀 안 보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의 어떠한 미움도 일단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없이 녹아져버린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미움의 관계, 어떤 적대관계도 전부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바로 그 미움의 관계를 녹이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백성끼리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는 것이고, 심지어는 안 믿는 백성에게까지, 우리를 배신한 사람들까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에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러한 예수님이 있다는 사실을 월러스 장군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함께 적용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든지 세상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면, 여러분이 누구든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진정한 평강과 안식과 평안이 없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 보시고, 거기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다른 것 보려고 하지 마시고, 성경 안에 나오는 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만 초점을 맞춰서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면 바로 그 가운데에서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예수님,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것은 단지 그 때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앞에도 성찬을 위해서 “나를 기념하라”고 쓰여 있지만, 이것이 기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다시 한번 고백하고 찬송할 때에 우리는 다시 그 부활의 능력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할 때에도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그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고, 이제 내 뜻대로가 아니고 주님의 능력대로 사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사실은 시험하는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하도 옆에서 말을 하니까 ‘그래 한번 믿어주자.’ 그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기왕에 믿을 것이니까 항상 내 입장만을 고집하면 상대편의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단 내 입장은 접어두고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진짜인 것처럼 한 달 동안만 한번 해보자. 그리고 이것이 거짓이고 사기면 안 믿으면 되지.’ 저는 제 지성을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주님께 잡혔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볼수록,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 모든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누구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이며,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먼저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 이것이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깊이 새겨지고 그 의미가 여러분에게 임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그 샬롬의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항상 하신 인사말이 무엇입니까? “평안하뇨(샬롬)?”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샬롬을 주십니다. 부디 앞으로의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러한 평안, 이러한 천국이 우리 모든 부활을 믿는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김명혁 목사
행복한 사람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지지도 않고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고 천국이 소망되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어지고 천국이 소망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송명희 시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온 몸으로 믿어지고 예수님이 온 몸으로 사랑하고 싶어지고 천국이 간절하게 소망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내 마음을 다하여 모든 것 다하여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기까지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이 믿어지지도 않고 사람이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모나 자식이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회자가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신자는 불행한 신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사람들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는 물론 교수들도 의사들도 종교인들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치도 기준도 법도 나라도 교회도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 신약에 나타난 죄 중에 가장 크고 무서운 죄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의 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자기가 바리새인과 같은 파렴치한 죄인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찔림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27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약에 나타난 또 하나의 크고 무서운 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하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믿음은 행복인데 불신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풍조는 신약 시대에도 편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여” 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질병에 걸린 자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간질병자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니다”(마17:15,16). 그때 예수님은 그 아이를 고쳐주시면서 그 시대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17:17,20). 간질병자 아버지의 불신앙은 물론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도마의 불신앙을 중심으로 신약 시대의 불신앙의 모습을 펴보겠습니다.
1. 도마는 예수님 자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믿어주지 않을 때 부모는 불행을 느낍니다. 부모는 물론 자식도 불행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선생님은 불행을 느낍니다.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도 불행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하나님은 불행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도 불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을 살려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서 세상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네가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말하느냐” 라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네가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 라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네가 귀신의 왕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귀신을 좇아낼 수 있느냐” 라고 비난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라고 모욕하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사람들의 불신과 비난과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행이었고 사람들의 불행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물론 심지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큰 파도가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무서워하면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한 번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계시는데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함께 유대 베다니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11:8).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자포자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용기 있는 믿음의 고백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좌절과 불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그의 태도는 용감스러워보였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물론 도마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고 솔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도마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불신앙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에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며칠 전 집사님 한 분이 제 방에 들어와서 속이 상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믿지 않는 것이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 주일 장로님들과 함께 병원 심방을 다녀오면서 극동 방송에서 나오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잠시 들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 요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면서 교회를 십년 다닌다고 다 믿는 사람도 아니고 다 구원을 얻은 사람도 아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망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게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의심과 불신앙의 구름이 드리울 때가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도마처럼 의심이 많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 그럴 수도 있고, 사탄과 귀신의 공격을 받을 때 그럴 수도 있고, 죄를 지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믿음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를 항상 힘쓰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회개를 항상 힘쓰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온유와 겸손을 유지하도록 항상 힘써야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든지 교만하면 믿음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
2. 도마는 천국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다음 아버지의 집인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리리에서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신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 아버지의 집에 대한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던 도마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 도마가 불신앙의 사람이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척 하는 것보다는 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시기도 했고, 거지 나사로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올라간 이야기도 하셨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도 하셨고, 달란트의 비유도 말씀하셨고 양과 염소가 하늘 영광의 보좌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했지만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와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신자들도 천국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가인처럼 이 땅에 좋은 집을 짓고 멋지고 편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는데 오늘의 신자들은 하늘을 믿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고 땅에 대한 관심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과 사업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을 너무 웅장하게 짓고 선교의 왕국을 너무 거대하게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과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하늘을 사모했던 것처럼, 사도 요한이 계시록의 한 장 한 장을 쓸 때 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도마는 물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좇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16:9-11). 눅24:11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실 십자가와 부활은 믿기에는 모순되고 불합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온 후에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기이하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40-4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기도 했고 일부러 생선을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마지막까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심의 사람 도마였습니다. 열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주일 저녁 모임에 도마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지 친척의 결혼식에 갔는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 날 저녁 일요일 저녁 주일 저녁 열 제자들이 함계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열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반응은 단호한 불신앙이었습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였습니다. 얼마나 불행하고 무서운 고백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는 고백은 한 사람의 운명을 지옥을 떨어지게 하는 무서운 고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마의 불신앙의 고백 속에는 믿고 싶어하는 솔직한 의심과 회의가 깃들여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 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불행하고 무서운 고백을 하는 도마에게 일 주일 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자기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만지게 해 주시므로 주님의 부활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마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고백이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그 이후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하는 일에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자기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고백을 들으시고 만족해 하시면서 이 말씀을 첨부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사실 믿음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행복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고 불행은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인생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 다리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반대로 인생을 망하게 하는 세 가지 다리는 불신과 미움과 절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 집은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으로 지으신 하늘 집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소망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을 믿고 고백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불신과 미움과 절망의 세상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바꾸어가며 사시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먹고사는 사람들
요한복음 20:25~29 / 석원태 목사
성경이 성경되게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役事)의 표현이 있습니다. 권능(능력)이란 말입니다. 표적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적(기사)이란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말들은 예외없이 하나님과 그의 역사(役事)에 관계되는 신기한 초자연적 사건을 두고 쓰여진 말입니다. 사실상 신구약 성경 전부는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기사)과 표적의 산물을 기록한 구원계시의 책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특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룩하고 있는 공동체인 교회는 사실상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과 표적을 먹고사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자연법칙을 따라 살면서도 또 한편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권능과 표적과 이적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자연적인 떡(빵)만 먹고사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마 4:4).
Ⅰ.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과 표적과 이적의 정체이십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설교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행 2:2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인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 그 자체이십니다. 그의 이 세상 화육(化肉)의 탄생, 33년간의 무죄의 삶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 자체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었습니다. 그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또 말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행 2:3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하였습니다.
Ⅱ. 예수 부활신앙이 하나님의 큰 권능이요, 표적이요, 이적의 산물입니다(요 20:19~29).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고 하는 사람은, 주께서 부활하신 첫날 저녁에 문이 닫혀있는 공간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 20:19~24).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보았던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 20:25)고 하였습니다. 그때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여러 제자들이 집안에서 문을 닫고 있는 가운데 홀연히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6)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사건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평강을 기원하셨습니다(요 20:19, 21, 26). 그리고 주님은 도마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였습니다. 그때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부활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예수를 향한 도마의 부활신앙고백은 예수께서 도마에게 베풀어주신 또 하나의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입니다. 그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신앙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요 3:3, 5) 고백되어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은 결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13). 도마에게는 순간적으로 예수 부활에 대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도마에게 있었던 인간이성과 지식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도마에게 있었던 그 자신의 이성이나 이성의 산물인 지식으로는,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세기 종교개혁은 하나님께로(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예부흥은 인간으로 돌아가라는 이성의 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한 문예부흥의 영향을 받은 영국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중심하여 경험론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라고 하는 사상을 강조하여 인간이성에 근거한 경험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에서는 르네 데카르트를 중심한 이성철학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내걸고 인간이성의 힘을 주장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칸트나 헤겔을 중심한 관념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이성주의는 결국 합리주의에 빠지고 급기야 반기독, 반교회주의로 흐르고, 마침내 무신론, 반신론, 사신론과 함께 살신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성의 최고 무기 중에 하나가 지식주의입니다. 그 지식주의는 결국 과학지상주의, 과학만능주의에 이르고 맙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믿는다’고 하지 아니하고 ‘안다’, ‘알았다’고 합니다. 과학의 세계는 오관(五官)을 통한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과학은 보이는 가시적 세계만이 연구의 대상이 됩니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세계입니다. 과학은 이 보이는 가시적 세계를 분석하고, 개발하고, 종합해서 그 결과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간 문화생활에 응용하도록 하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이러한 이성적 지식주의의 사고방식에 빠진 결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사실에 대해 회의와 불신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부활의 정체성으로 그를 접촉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인격적 신체를 보게 하고(시각적), 만져서 느끼게 하고(감각적), 주님 자신의 부활의 육성을 친히 듣게(청각적)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예수 부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성적, 지적 인식작용의 과정 어간에 영으로 그의 마음을 녹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이성과 지식보다 우선하는 신앙의 우위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나 그 이성의 산물로서의 지식은 결코 보이지 아니하는 불가견적 세계에 이르지 못함을 알려줍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세계, 말하자면 제1원리의 세계는 이성이나 지식의 영역이 아닌 신앙의 영역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2)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비의 실존적 힘과 세계를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존재하는 영적 실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결코 인간 이성의 산물인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산물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알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 1:17) 한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안다(givnwskw)는 말은 결코 이성적 산물인 지식을 말함이 아닌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이성적인 머리나 가슴의 이해가 아닌 체험적, 영적 지식인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사건은 이성적 지식의 판단보다 우선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나 사람을 관계함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노도광풍이 심한 바다 가운데서도 어린애가 어머니 품에서 잠자는 것은 그가 어머니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발소에서 칼을 들고 내 앞에 서있는 이발사에게 내 얼굴을 맡기는 것은 그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안셈(Anselm)은 말했습니다. “나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다.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믿음은 이해의 길을 열어주나, 불신은 닫아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성이 없는 믿음이나, 믿음 없는 이성은 항상 참된 구원신앙고백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 없는 믿음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나 반지식주의나 아니면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런가하면 믿음 없는 이성은 결국 인본주의에 빠져 불신앙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안에 있는 피조물로서의 이성(고후 5:17)은 지식에까지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바로 새사람의 품성입니다(엡 4:24, 골 3:9~10).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는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도 부활의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신앙에 이르는 복된 자가 됩니다(요 20:29).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먹고사는 특별한 무리들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그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정체인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 그 자체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둔한(Dunhan)이란 사람은 ‘이적은 신화의 다른 표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흄은 기독교의 이적은 자연법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부인하고, 단순한 그리스도의 교훈과 도덕만 가지고 기독교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사실상 이적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의 산물입니다. 죄로 인하여 그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연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과학자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철학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장차 나의 부활을 믿는 신앙도 인간 편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하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가능 충만입니다(마 22:29). 개미 한 마리가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인 운전사에게는 너무 간단한 문제입니다. 저 유명한 세기적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시대를 연구하고, 또 그 제자들에 대한 증거도 조사하였으나 인류 역사 중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대계 학자였던 알프레드 에델 샤인은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임스 올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굳게 서 있다. 이 위대한 진리는 수세기 동안 저 오만한 회의주의자들의 조류 속에서도 움직일 줄 모르고, 저들과 부단히 대항해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의 양식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먹고사는, 또 다른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증인들이 됩니다. 하늘에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있고(예수 보좌에 앉으심), 땅에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있습니다(교회). 바로 예수 부활신앙의 증인들이 아닌가!
무엇을 믿습니까
박기완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목적이 표적을 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들의 믿음의 근거는 보이는 것에 근거한 것이었어요.
저들은 보여야 믿어요. 다시 말하면 이 세상 것, 물질적인 것에 저들의 믿음의 근거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니까...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 왔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니... 많은 사람들이 믿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러면 믿음이 사라져요. 왜냐하면 저들의 믿음의 근거가 표적이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표적을 보여줘야 돼요.
예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시고 아시기 때문에... 더 이상의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 것에 있어요.
보이는 것은 다 헛된 겁니다. 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언젠가는 망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4:18절 말씀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하늘에 두느냐 이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삶을 바랍니다. 행복하기를 원해요.
한마디로 말하면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잘먹고 잘살면 "행복하다..." 그럽니다.
정말 잘 먹고 잘 살면 행복한 겁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잘먹지 못하고 잘살지 못하면 불행한 거 잖아요.
이런 행복관은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목표가 하늘이 아니고 땅의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생의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까요?
사람들은 지금 행복하고 잘 살기 때문에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고 믿지만, 지금 행복해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으니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생명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늘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땅의 것이 아니고 위의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가 보장되어 있어요. 그로 인해 지금 행복한 거예요. 잘살지 못하고 잘먹지 못해도 행복한 거예요.
왜냐하면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은 잠깐인데 좀 못살고 힘들면 좀 어떻습니까?...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는 있지만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것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을 보면 나중에는 전부 배반했어요.
한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았어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종려가지 나무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그러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다 변했어요.
호산나 라는 뜻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원어를 잘 살펴보면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데... '지금 당장'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지금 당장 구원해 내라는 겁니다.
지금 당장 문제를 해결해 내라는 겁니다.
지금 당장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거든요.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온 세상 사람들을 구하려고 오신 겁니다.
마태복음 12:38절 말씀에 보면,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표적만 구하니까 요한복음 12:3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랬어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도 똑같이 그러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줘야만 믿습니다. 안 그러면 실족해요.
혹시 병고침의 역사를 봐야만 믿지는 않습니까?... 지금 나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셔야만 믿지 않습니까?...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믿고, 해결해 주시지 않고 더 꼬이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믿지 않습니까?...
그런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니... 못살고 가난하고 그러면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 나는 안믿겠다"고 그런 소리나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다 잘되고... 다 형통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성경은 축복을 많이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고난에 대한 말씀도 많이 말씀하고 있어요.
오히려 고난이 축복이라는 거예요.
로마서 8:17-18절 말씀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6절 말씀에서도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그랬어요.
고난이나 고통은... 나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 거예요.
고통, 고난, 배신... 이런 것이 훨씬 나에게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나를 더 유익하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고난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문제인 겁니다(벧전 4:12-13).
야고보서 2:19절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랬어요.
머리로 아는 것은 귀신들도 다 알아요. 그러나 귀신이 구원받습니까?... 못 받죠.
머리로 안다고 구원받는게 아니에요.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도 다 거짓말이에요.
요한복음 17:3절 말씀에 보면 영생이 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랬어요.
여기서 안다는 말은 체험적인 앎을 말해요. 경험적으로 알아야 그게 아는 거지... 생각으로만 말로만 안다고 해서 아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말씀입니다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거예요.
성경이 그냥 책이 아니죠.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순종해야 되는 겁니다.
어떻게 순종해야 되느냐?
먼저 순종해 놓고 보는 거예요. 간단해요.
그런데 왜 순종이 어렵냐 하면... 생각하고 따져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내 마음에 들면 순종하고... 할 만 하면 순종하고... 좋으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보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죠.
어떻게 생각해 보고... 따져보고... 이해가 되어서 순종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해가 안되는게 얼마나 많은데... 그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가 되어서 믿습니까?... 그건 거짓말이라는 거죠. 가짜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게 전부 계산적이고... 전부 가짜가 많아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어요.
생각할 게 없어요. 계산할게 없어요.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게 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가라고 하시니까 간 거예요. 독자 이삭이라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시니 바친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이유가 없는 거죠. 아브라함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이었어요. 그보다 더 확실한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혹시 돈이 아닙니까?... 돈이 되면 하고... 안되면 안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또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눈에 보여야만 되지 않았습니까?... 막연하고 막막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안잖아요. 생각지도 않죠...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가 그랬죠. 예수님이 그렇게도 수없이 말씀해 주신 것을 믿지는 아니하고... "주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만 믿겠다!"고... 야단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도마야! 너는 눈으로 봐야만 믿겠느냐?... 보지 아니하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느니라!"(요20:29)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말씀대로 순종하면 되는 거예요. 이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세상 천지는 다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마5:18)
왜 그래요?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하시니까... 그분의 말씀도 영원한 거지요.
그래서 최근에 다시 유행되는 말이 있어요.
"선 순종!, 후 체험!"
먼저 순종하다보면 체험하게 된다는 거예요.
안 다음에 순종한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어떻게 우둔한 인간의 머리로 하늘의 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차원이 틀리는데 말이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어떤 기적을 보고 주님을 믿거나...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복인 줄로만 알고 믿는... 그런 저차원적인 믿음이 아니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며... 거기에 목표를 두고... 거기에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진짜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의 예수 증언
요 20:30-31 / 이정익 목사
오늘은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했지만 정작 오셨을 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오심을 알아야 할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지만 그들은 타락했고 세속화되어서 뇌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예수께서 왔으나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 자신도 불행하고 백성들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해서 그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오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요한이 그렇게 오신 예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공관복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비슷한 간점에서 기록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요한복음을 넣어서 4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이 4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를 소개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의 성공을 주로 다루었고 마가복음은 예수의 고난을, 누가복음은 예수의 사람됨 즉 인자됨을,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광을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그 중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요한이 기록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야고보와 형제였고 베드로 형제와 함께 어부생활을 하다가 함께 부름 받은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이었는데 다 순교하고 요한만 유독 천수를 다 누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도 순교하기 위해서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는데 기름 가마의 뜨거운 열 때문에 그 몸이 튕겨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석방되어 에베소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도요한이 후에 요한계시록과 요한 1,2,3서,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된 이유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며 예수를 믿어 그 이름으로 힘입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
마태는 마태복음 서두에서 예수님의 족보부터 먼저 소개합니다. 그리고 헤롯궁전을 말하고 동방박사를 소개하고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시원하게 “예수는 왕이다”라고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빌려 타고 가셨는데 그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다고 소개(마 21:5)합니다. 또 누가는 19장 38절에서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소리 질렀다고 기록합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런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와 나다나엘의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는 왕이시다”(요 1:49)라고 나타내며 본문을 시작합니다. 거기서 나다나엘은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요한이 강조한 주제입니다. 이는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가 공동으로 다루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사람들의 반응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이 “이 사람은 진실로 세상에 오시는 그 선지자이시다”(6:14)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그 선지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실제로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15절)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4복음서에 공히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만 다른 복음서 보다 예수를 강하게 왕으로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15절에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요한은 예수를 왕으로 분명하게 칭했습니다. 또 재판정에서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붙잡혀 갔을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마 27:11, 막 15:2, 눅 23:2-3)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라”(37절)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18:39, 19:14,15). 그런데 묘한 것은 빌라도가 예수를 왕이라고 부르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가 왕임을 부인하고 “우리에게는 가이사만 왕이라”(15절)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거부하고 로마황제를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쓰려고 하니까 대제사장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의 주문을 거절합니다. 요한은 이 대목을 놓치지 않고 “이방인인 빌라도 입을 통해 예수가 왕 되심을 증거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그 신앙의 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만일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거나 침묵하거나 우물쭈물하면 때로 사탄이 입을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을 보면 예수님이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거다라’ 땅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서 배가 뒤집힐 지경에 처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후 ‘거다라’ 지방에 도착 했을 때 귀신들린 자가 찾아오더니 “하나님의 아들이여”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제자들이 말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을 때 귀신들린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신앙이나 신학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루뭉수리하고 애매모호하며 불확실한 것은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이 나타나 제자들이 해야 할 고백을 대신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장로시취를 하는데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자 지체 없이 “4대 성인 중 한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고백이 그러니까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도 분명하고 명쾌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왕이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어중 띤 고백입니다. 그에 반해 요한은 “예수는 왕이시다”라고 확신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분명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영광
공관복음서는 미래에 나타날 예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처음부터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 14절과 17장 24절을 보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 영광은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지셨던 영광이라고 소개하고(17:5)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2:11, 11:4)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영광을 보고 예수를 믿었습니다(2:11, 12:42). 그 모습을 보고도 예수를 믿지 못함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5:44, 12:43).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가 반쯤 지났을 때 헬라인 몇 명이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12:2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획기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건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28절).
그리고 가룟유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13:31)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인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야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는데 그 배반자가 가룟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므로 영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난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때가 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이 당신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다 마침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4절). 우리들이 신앙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태는 성공에 초점을 두었고 마가는 예수의 고난에 초점을, 누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요한은 예수의 영광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었고 영광의 주님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영원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가 밤늦게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도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니고데모는 그 시대 지도자인 산헤드린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 지도자가 어느 날 밤 호젓이 예수를 찾아와서 거듭남의 도리에 대해 묻습니다. 이는 아주 획기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삶에 대해서 관심 갖기는 쉽지만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를 멀찍이에서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강조하신 영생에 대해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고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거듭남이나 중생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그것이 나중에는 예수 믿음과 영생 얻음으로 결합된다는 것을 설명(15-16절)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생이나 중생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천국은 예수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시작되지만 동시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현재에 영생을 소유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심을 받아 완전한 영생에 들어간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서는 천국과 재림을 강조하는데 특히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뚜렷하게 증거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3:16)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육신의 출생과 전혀 다른 영적출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출생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출생하지만 영적출생은 하나님에게서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출생한다(1:13, 3:3,5,6,7)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리고(1:12)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3:3,5)합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구별된 사람들이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15:19).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제가 영생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3:16)이고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6:40)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생명수이고 생명의 떡입니다. 또한 길이고 진리이시며 생명 되십니다. 그래서 그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6:35)고 말씀합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고 목마른 자가 해갈되며 미래에는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몇 가지 천국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주신 천국은 에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천국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주신 천국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 주신 천국이 죽어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영생한 자 그리고 거듭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이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서 최고의 복은 이 천국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명성황후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부인과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어느 날 명성황후가 미국이 어떤 나라냐고 묻자 언더우드 부인이 “미국은 땅이 커서 한 땅에 사계절이 다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작은 나라에서 살던 명성왕후는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때 언더우드 부인이 “그 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눈물도 없고 탄식도 괴롭히는 나라도 죽음도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라고 말하자 명성황후가 충격을 받고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나도 그 나라에 가고 싶구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천국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 영생과 부활과 천국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을 그것 때문에 보내신 것이라고 그 점을 증거 합니다. 사람은 영생과 천국 그리고 부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이기 때문에 아무나 알고 깨닫는 일이 아닙니다. 트리나 파울러스라는 사람이 쓴 “나비와 꽃들의 희망”이라는 책에는 나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비가 되기 직전의 애벌레들이 하늘을 향해 서로를 짓밟으며 탑을 쌓아 올라갑니다. 모두가 높이 올라가야 나비가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 앞의 벌레들을 밀치고 올라가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줄무늬 애벌레가 탑에서 내려오는 노란 색 애벌레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나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렵게 탑을 올라가지 않아도 기다리면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줄무늬 애벌레가 순간 귀가 열리며 새로운 길,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줄무늬 애벌레는 올라가던 탑을 다시 내려옵니다. 이것이 인생의 대전환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나비성을 소중히 품고 살아가면 언젠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 영원성과 부활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하고 부활하기 위해서 저 높은 곳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다시 내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일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굳이 예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빡빡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이렇게 매주일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주님만이 이 영원성, 부활성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생의 주인이 우리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요 20:30-31 / 김태환 목사
여러분, 솔로몬이 쓴 전도서 3장에 보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고, 시기가 있는 법이다.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고, 건축할 때가 있다. 울 때와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와 춤출 때가 있다.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들을 모을 때가 있고, 껴안을 때가 있고, 그것을 멀리할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고,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어 버릴 때가 있고, 수선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다.” (1-8절)
하나님의 일에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목회를 신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부터 시작했습니다. 34년 간의 목회를 돌아 보면 목회에도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목표를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해서 온 힘을 쏟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34년의 사역 중에 큰 일 작은 일이 있었지만, 돌아 보면 이 교회 건물을 구입하려고 뜻을 정했을 때가 하나님께서 주신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했고, 이것을 위해서 교우들을 만났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결국 그 뜻을 이루었습니다.
코스타 집회가 또 한번의 하나님께서 주신 때인 것 같습니다. 코스타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ReNew 청년 연합 집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ReNew”라는 말은 “Revive the New England Wave”라는 뜻입니다. “뉴잉글랜드의 부흥의 부흥의 물결을 다시 일으키자!”라는 취지에서 이름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이름 정하고, 로고 정하는데에도 이 지역의 많은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서로 의논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ReNew”라는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Renew” 로고를 만드는 데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디자인은 우리교회 김기은 자매가 밤을 새워가며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부터 “ReNew” 홈페이지가 오픈되었습니다.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Online 등록도 할 수 있고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renewusa.org 입니다.
제가 “ReNew” 집회에 매달리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이곳 보스턴에 청년들과 청장년들을 위한 좋은 집회가 하나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청년 사역을 1986년부터 24년 동안 하면서 마음에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 유학 와서 공부하는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귀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청년들이 이곳에서 최고의 학문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이 보스턴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시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키가 크고 성장하는 것도 시기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성장판이라고 하더라고요. 성장판이 열려 있으면 키가 더 클 수 있지만, 성장판이 닫혀 있으면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답니다. 성장판이 닫혀 있는데도 더 크려고 좋은 것을 많이 먹고 영양분을 섭취해도 키는 더 이상 크지 않고 배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 것은 크게 보면 그 사람의 전 생애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생애의 어느 시기에서는 성장이 더디고 느립니다. 성장이 빠른 때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입니다. 이 때를 지나가면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감소됩니다. 청년들이 공부를 마치고 보스턴을 떠날 때 쯤에는 신앙의 성장 속도가 감소되었을 때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 후에 사회생활 하고, 결혼생활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낳고 기르면서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청년들을 보면서 조바심을 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귀한 청년들이……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화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곳 보스턴에 청년들에게 좋은 신앙의 도전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코스타와 같은 집회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우리교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제직들이 이 취지를 잘 이해하고 후원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일을 추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사자인 청년들이 막상 이 집회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ReNew” 집회를 위해서 같이 기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처음에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성경에 “그 다음 날, 요한은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제자 두 사람은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요한복음 1:35-37)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두 제자는 이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응? 내가 머무는 곳이 어딘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냐?) 와서 보아라!” 이렇게 해서 두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을 보았고, 그 날, 예수님과 함께 그 곳에서 지냈습니다. 때는 오후 4시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9) 성경에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사람이 요한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요한이 제자가 된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동료들은 자신들이 잡은 고기를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육지에 배를 댄 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누가복음 5:9-11) 마태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또 조금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거니시다가, 또 다른 두 형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 안에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수선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도 그 즉시,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둔 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4:21-22)
분명한 것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살던 사람들에게 인생의 주인이 생기고, 인생의 목적이 주어지고, 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주인(Lord)”, “목적”, “사명”,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서는 필수적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합니다. 이런 삶의 본질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삶의 조건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행복해질거야.” “결혼을 잘 하면 내가 행복해질거야.”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내가 행복해질거야.” “아냐, 좋은 집을 가져야 행복해질거야.” “아냐, 날씨가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 내가 행복해질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삶의 본질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결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한은 성격이 매우 과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보아너게” 아니었습니까? “보아너게”라는 말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길을 내 주지 않습니다. 그 때 요한이 분통을 터뜨리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사람들을 모두 태워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요한은 이런 성경의 소유자였습니다(9:51-56).
웬 일인지 예수님은 열 두 제자 가운데 유독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을 총애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제자들 눈에 띄게 세 사람을 총애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옆으로 비스듬이 누워서 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가 식사를 할 때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은 늘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았습니다. 성경에는 요한을 가리킬 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복음 13:20, 21:20)”, “만찬에서 예수님께 몸을 기댄 채 먹던 사람(요한복음 21:20, 13:23)”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여생을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나의 어머니를 너의 어머니로 알고 잘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다.” (요한복음 19:27) 요한은 이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3년 동안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점점 변화되어 나갔습니다. 어느 새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큰 지도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사랑의 사도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기록한 요한 일서, 이서, 삼서에는 유독 사랑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23)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요한복음 13:34-35) 이 말씀도 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년에 요한은 밧모섬으로 귀향을 갑니다. 로마가 그를 두려워할 정도로 요한은 교회의 큰 지도자였습니다. 로마의 도미티안(Domitianus, A. D. 81-96) 황제도 그를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로마가 선택한 것은 그를 밧모섬(Patmos)에 유배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가 A. D. 94-96경입니다. 밧모섬은 지중해의 터키 연안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리스 영토에 속합니다. 요한은 이곳에서 18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하고, 그러다가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 96-98) 황제 때에 풀려나서 에베소로 가서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을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입니다. 학자들은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A. D. 85-90년 경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밧모섬에 유배 가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기록 연대를 A. D. 100년 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곳은 요한이 말년을 보낸 에베소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고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증언하고, 그것을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른 일은 많이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을 일일이 다 기록한다면 온 세상이라도 그것을 기록한 책을 담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24-25) 또 그는 요한일서 1장 첫 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에 대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는 교제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경험했고,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예수님에 대한 글이 이렇게 성경이 되어 지금까지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자기가 알고, 자기가 경험했고, 그분 때문에 자기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과연 그분은 누구인지를 글로 남기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적(miraculous signs)이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싸인을 보면서 그를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싸인들이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싸인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결론을 얻었고,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연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예수님의
흔적을 더 확실하게 찾아 보려고 학문적인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인 노력을 뛰어 넘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1) “주님,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고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68-69)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은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싶어서 이 사실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의 말 속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싶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런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사는, 그리고 그 열정을 다른 사람의 영혼을 향해 쏟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약의 마지막 별 사도 요한
요 20:30-31 / 김명혁 목사
오늘은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20번 째 설교를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19 번 설교를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과 포로로 잡혀갔던 작은 계집 아이를 비롯해서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교를 했고 최근에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약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오랜 동안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제일 오래 까지 살면서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명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그가 요한 1,2,3서를 기록한 목적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라”(요일1:2). 그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 요한은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더니”(계1:9). 이제 신약의 마지막 별인 사도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요한은 예수님에게 제일 먼저 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오려면 제일 먼저 오는 것이 좋습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나중에 오면 그 만큼 손해를 봅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나중에 예수님에게로 온 사람들은 마음도 몸도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저녁 예배 한번 나오는 것이 힘이 들고 새벽기도회에 한번 나오는 것은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힘이 듭니다.
요한은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튿날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요1:36,37). 요한은 종교성이 있었고 마음이 열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들을 귀가 있었고 볼 눈이 있었습니다. 스승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고 스승이 보라고 하는 어린양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발이 있었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발로 좇았습니다. 귀와 눈과 발로 주님에게로 온 사람, 귀와 눈과 손과 발과 온 몸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요한은 예수님에게로 와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요1:39).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그 후부터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요한이 있었습니다. 열한 제자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일도 있었고 도마가 예수님을 의심하고 잠시 떠난 일도 있었지만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14:50).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20:24). 그러나 요한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도, 사마리아 수가성에도, 베데스다 연못에도, 변화산에도, 나사로의 무덤에도, 겟세마네 동산에도, 십자가 아래도, 예수님의 무덤에도,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에도,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어디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밧모섬에 갇혀 있었지만 요한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항상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보니”(1:17, 4:1, 5:1, 6:1, 7:1, 8:2, 9:1, 10:1, 13:1, 14:1, 15:1, 18:1, 20:1, 21:1). “내가 들으니”(1:10, 16:1, 19:1). 요한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제일 먼저 온 사람이었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주관적인 판단이었는지 객관적인 판단이었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제자라고 확신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요한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은 요한을 가리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요19:26).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요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요21:20). 요한이 왕자 병에 걸려 있었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특별하게 사랑하신다고 느끼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사랑을 느낄 수도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요다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 마음이 닫힌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고, 베다니 마리아도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고, 눅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도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또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눕기까지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 예수님에게 어리광까지 부렸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쳤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갔습니다. 요한만이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의 사랑을 믿고 자기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기까지 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예수님은 요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디베랴 바다가에서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세 번씩이나 다짐했지만 요한에게는 아무런 다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주님이 그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분명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분명히 가장 포괄적으로 가장 잘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을 요한이 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느끼지 못한 것을 요한이 느꼈습니다. 그 중 세 가지만을 지적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요한은 예수님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알파요 오메가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태초란 말을 생각하지도 못했고 알파와 오메가란 말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분이 바로 우주의 시작과 끝이심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시간의 시작과 끝이심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그를 가리켜 말씀 곧 로고스라고 지칭하므로 그분은 유대종교의 완성일 뿐 아니라 헬라 철학의 완성이심을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또한 그 당시의 역사가 로마 황제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1:17,18). 세계역사의 전개를 기록한 일곱 인의 책을 여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일곱 인의] 책을 취하시니라”(계5:7).
2) 요한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예수님이 사랑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아마 성경 중에 사랑이란 말이 제일 많이 나오는 성경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일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거듭거듭 증거했습니다. 그 말씀 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이 요한복음 3:16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한경직 목사님이 어렸을 때 동내 어느 집 대문에 요3:16 말씀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부터 한평생 요3:16을 사랑하게 되었고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요3:16 말씀을 증거하며 전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요한 서신에서도 입을 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는 말을 거듭해서 증거했습니다.
요한은 또한 예수님이 사랑이심을 거듭해서 증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세상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수가성 여인과 간음한 여인과 같은 버림 받은 여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의 목자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자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1:5).
3) 요한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인들이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아마 성경에 믿음이란 말이 제일 많이 나오는 성경이 요한복음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의식의 종교도 공로의 종교도 행위의 종교도 아니고 믿음의 종교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기 전에 사도 요한이 먼저 증거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요한이 증거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4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9:35).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일5:1).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니라”(요일5:4,5). “믿으면 하겠네”(343장 4절). “믿음이 이기네”(397장 후렴)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요한이 갇혀 있던 밧모섬 계시동굴에 가 본 일이 있습니다. 요한은 주후 96년경 96세 경이었을 때 그가 사역하던 에베소에서 정치범으로 붙잡혀 에베소에서 50km 떨어져 있는 밧모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곳 산 중턱 동굴에 2년 동안 갇혀 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누어 있었던 곳, 일어나 앉아서 엎드려 기도하던 곳, 그리고 계시 받았던 곳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에게, 역사의 진행과 재림에 관한 마지막 계시를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주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하늘 보좌에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어린양 자신의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충성스럽게 증거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며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요한의 마지막 증거의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모습과 음성을 생생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살기를 다짐해 봅니다. 우리도 주님을 증거하는 21세기 서울 하늘의 작은 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성경
요 20:30-31 / 이정익 목사
대강절 둘째주일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큰 은혜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생활할 때 하나의 기준과 나침반이 되도록 주셨으며 그 성경 속에 하나님의 생각, 계획, 뜻을 포함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을 바이블이라고 하는데 원래 그 말은 책이라는 뜻인데 후대에 와서 이 책을 “성경”이라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 안에는 말씀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하는데 이 로고스는 곧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주제, 정신, 핵심, 주체는 예수입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였고 이 성경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대강절 기간에 성서주일을 제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신약 27권, 구약 39권으로 모두 66권이고 1,189장 31,173절 3,566,490글자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 손에 주어지기까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장기간 기록
이 성경이 기록되는 데는 1,500여 년 동안 40여명의 저자가 기록하였습니다. 이 40여명의 기록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살면서 서로 다른 표현과 논리와 특징과 상이점을 가진 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성경이 가지는 근본 주제나 목적은 예수님의 구속사를 통한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성경이 광범위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도 주제나 구심점 그리고 초점이 구속사역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 이 성경의 특징입니다. 그 말은 이 성경이 인간의 작품이 아닌 성령의 계시와 감화로 쓰인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입니다.
3,500년 동안 삶의 길잡이
이 성경이 신비한 것은 이 책은 2,000년 전에서 3500년 전의 것입니다. 그 사이에 시대나 역사나 문화가 많이 변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인류가 지나가고 문화가 변화하고 문명이 진화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세월동안 이 성경이 제시한 삶의 내용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기준이 되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세상이 종말이 올 때까지 이 성경은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 되고 나침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삶의 기준이 되는 책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특징입니다.
모든 예언 3,500여 년 동안 이루어짐
성경 속에는 예언이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예언들 중에는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오랜 동안 이룰 내용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예언의 책입니다. 성경은 이미 예언된 내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들 중에는 소망을 주는 예언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예언도 있고 주님의 재림을 약속한 예언도 있습니다. 이 모든 예언들은 모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출판하는 책이 성경이고 또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도 성경입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성서공회가 반포한 성경이 1,712,000부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만들어 세계에 수출한 반포수가 126개 언어로 105개국에 3,689,000부입니다. 그리고 새해에 수출할 수주액만도 4,150,000부입니다. 참 엄청난 반포수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를 가 보아도 성경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집마다 호텔방마다 어디를 가도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기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많이 출판되어 반포되지만 동시에 가장 안 읽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신자들도 집집마다 성경은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주일마다 손에 들고 교회에 가지고 다니지만 좀처럼 읽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또 기적입니다. 미국은 1943년 이래로 추수감사주일에서 성탄절까지를 성서주간으로 설정하고 성서를 기념하고 지냅니다. 우리 한국은 1954년 이후 12월 둘째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지만 하루만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태반의 교회들이 성서주간을 지키지 않으니까 성경의 중요성을 그만큼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특별한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중요성
1) 교훈 줌
롬 15:4절을 보면 “이 성경은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딤후 3:16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이 성경말씀은 영감으로 써졌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 책을 성경이라 했고 경전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성경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서삼경이 최고인줄 알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성경이 들어오니까 사서삼경 보다 격이 더 높은 것을 발견하고 그 이름을 “성경”이라고 번역해서 불렀습니다. 이 성경이 다시 중국을 거쳐서 일본기독교가 받아들이면서 “성경”은 중국에서 붙인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성서”라고 불렀습니다. 말은 성경이나 성서나 같은 말이지만 “성서”보다는 “성경”이 격이 더 높임말입니다. 이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교훈을 주는 기준서 입니다.
2) 변화를 줌
히 4: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끊게 해서 삶에 엄청난 변화를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를 주고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습관으로부터 헤어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과 말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에 잘라내고 찌르고 쪼개는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서울 만큼 잘라내고 찌르고 아프게 해서 그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력이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깡패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후에 전도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익두, 술 한 잔 하세”하고 술집에 가자고 유인했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가 “아니야, 나는 요즘 약을 먹고 있어”하고 거절했습니다. “무슨 약을 먹는가”하고 물으니 “술 담배를 끊게 하는 신구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성경을 읽다가 변화 받고 영적 체질개선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습관은 사람을 옭아맵니다. 술을 끊지 못해서 마시면 주사하고 미쳐버리고 마치 귀신 씌워진 사람처럼 끌려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에 중독되어 하루 두 갑씩 피워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끊지 못하고 담배가 떨어지면 꽁초를 주워서라도 피워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피울 곳이 없으니까 건물마다 계단에 굴뚝들만 모여서 담배피우는 모습을 보면 참 처량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이 그 수많은 올가미들, 습관들,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끊게 되고 벗어나게 되고 결심을 하게 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 성경책은 다른 책과 구별됩니다. 왜냐하면 기록은 사람들이 하였지만 원 저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졌기 때문입니다.
1886년 겨울 서울 정동의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손님들이 황해도 솔래에서 서울까지 천릿길을 걸어 세례를 받겠다고 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언더우드 선교사가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세례를 주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들이 두루마기를 벗더니 뒤로 돌아서서 등에 나무 십자가가 묶여 있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도를 받고 세례받기로 결심하였소, 선교사께서 솔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우리가 찾아왔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였소, 그래서 우리는 내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소박합니까. 그 말에 그만 감동이 되어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결단이 바로 성경에서 나옵니다.
1900년대 강화 북부마을에 종순일이라는 돈 많은 유학자가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고 살았습니다. 이 유학자가 복음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때 마 18:장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임금님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나오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자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둡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을 다시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종순일이 이 말씀을 읽다가 충격을 받고 며칠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기도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놓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빚쟁이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빚쟁이들은 빚을 갚으라는 줄 알고 모두 떨고 있습니다. 그때 종순일이 사람들에게 마 18장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마 18장을 읽고 충격을 받았소, 여기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았소, 나는 오늘부로 여러분의 빚을 모두 탕감하기로 하였소”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 마 19:21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읽고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여 강화주변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화에 교회가 많은 것이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왜 힘과 결단이 발생하는가 하면 이 말씀이 성령의 감화로 써졌기 때문입니다. 히 4:12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쪼개고 찌르는 이 책이 어떤 사람은 이 책을 손에 들기만 해도 잠이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성경책은 이래저래 신기한 책입니다.
영적 눈을 뜨게 함
또 이 성경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일 5:13절을 보면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하였고 요 5: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말씀은 영감으로 써졌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새로운 세계를 보는 눈이 뜨이게 합니다. 이를테면 보이지 않던 영적 세계를 보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미국의 퇴역장군 류 월래스 (Lew Wallace)라는 분이 벤허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어느 날 잉거졸이라는 친구가 찾아와 성경인물을 소재로 해서 작품을 만들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특히 예수를 소재로 해서 그곳에 로맨스를 곁들이면 인기소설이 되어 대박을 터트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 월래스가 작품을 만들려면 먼저 예수를 알아야 하겠기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동안 감동이 주어졌고 그는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나고 그 앞에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 성경은 이렇게 작용합니다. 이 성경은 성령의 감화로 쓰인 성령의 책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일으킵니다.
소중한 것을 알게 함
시 19:7-8절을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성경을 주신 이유는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알고 깨우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점을 잘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경을 생명의 책으로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이가 자라서 겨우 사물을 보면서 분별할 줄 알게 되면 먼저 토라 즉 이 성경의 율법서부터 가르칩니다. 이 성경의 율법서를 가르칠 때 성경의 표지에 꿀을 발라 입에 대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단맛에 열심히 혀로 핥아가며 율법서를 손에 들을 때 어른들이 말씀하기를 “이 꿀이 달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네 영혼에 달고 네 인생에 있어 모든 지혜를 준다, 고로 너는 죽을 때 까지 이 말씀을 읽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루에 3장씩 읽으면 20분이면 읽습니다. 그러면 해마다 한 번씩 읽게 됩니다.
꿈을 주는 책
이 성경 속에 수많은 꿈이 들어 있습니다. 꿈 중에서도 가장 큰 꿈은 우리의 미래, 장래, 천국일 것입니다. 이 천국이 꿈 중의 꿈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성경만이 우리의 미래를 말씀하고 알게 해 주는 유일한 책입니다. 요일 5:13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했고 딤후 3:15절을 보면 “이 말씀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나의 근원을 알게 하고 세상의 근원을 알게 해 줍니다. 동시에 성경은 나의 갈길, 나의 종말,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가는 길을 아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경만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종말 때가 되면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은 자신이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고 재산입니다. 성경은 나의 지난날을 말씀하고 현재를 말씀하고 가야할 미래와 종말의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요 14:4절에서 주님은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분명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에 이 책을 주신 것은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은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지혜가, 깨달음이, 영감이,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
종교개혁의 원리들
요 20:30-31 / 석원태 목사
금년 10월 31일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宗敎改革)을 일으킨 지 48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종교개혁(Reformation)이란 말은 마틴 루터로 말미암아 교회사에 기록되게 된 것입니다. 본래 개혁(改革)이란 말은 ‘기존 질서의 타당성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고 다만 그 본래로 되돌아가는 갱신(更新)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이란 말은 혁명이란 말과 구별됩니다. ‘형’(型: form)을 ‘다시’(re) ‘새롭게’(reform) 한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의 형(型)을 본래의 형(型)으로 되돌려 놓음을 의미합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으로의 환원운동이었습니다. 초대교회로의 환원운동이었습니다. 사도적(使徒的) 신앙으로의 환원운동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되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중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몇 가지 개혁의 원리를 생각함으로 오늘의 교회운동을 조명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첫 번째 원리와 모토(Motto)는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이것은 중세기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을 개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 천주교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였습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천주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들은 주장하기를 성경보다 천주교회가 앞서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천주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하지 않지만 성경이 없어도 천주교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이라도 천주교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결정하면, 성경은 그 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는 이단사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게 가르치지 아니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자체는 하나님 자신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요, 성경의 원저작자가 하나님 자신이란 말입니다. 천주교처럼 교회가 성경을 인정함으로 성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성경 그 자체가 ‘독자적 신임성’을 갖고 있습니다. 결코 교회나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인정한다고 결의하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 자신의 존재’ 문제를 말할 때 사람의 인정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신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2. 천주교는 신구약 66권 정경(政經) 외에 다른 성경 즉 가경을 갖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도비아서, 유딧서, 마카비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등 7권의 가경(ajpokrivYa)을 성경 66권에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성경이 73권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천사들의 중보, 연옥설, 공덕축적설 등은 모두 이 가경 안에 있습니다. 저들이 이런 가경 혹은 외경을 성경목록에 집어넣은 것은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30여 명의 주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날 천주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라틴어는 ‘제롬‘이란 교부가 헬라성경 70인경(LXX)에서 번역한 것인데 그것을 번역한 제롬도 가경을 정경(kanwn)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3. 천주교는 유전을 성경과 동일시합니다.
이 유전은 기록되지 않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들인데 이것을 ‘유전’ 혹은 ‘전승’,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도적 유전이 있고 또 하나는 교회적 유전으로 천주교회의 결정과 교황의 칙어(선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웃기고 재미있는 것은 성경(정경)과 가경, 유전이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천주교회는 성경(정경)보다 유전이나 가경에 더 권위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4. 천주교는 성경의 절대 필요성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성경의 모든 책과 그 사본이 몽땅 없어진다 할지라도 교회(천주교)는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를 그대로 지닐 것이며, 신약성경이 한 글자도 쓰여지기 전처럼 여전히 설교할 것이다. 무릇 이 모든 진리는 교회의 마음과 정신과 기억과 예전 생활과 성사 생활과 또 쓰여졌든 안 쓰여졌든 직접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성전(구전, 전승, 유전)속 깊이 새겨져 있는 까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이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말인가?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이 아닌가? 저들은 「성경은 폐할 수 없다」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을 반역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반역하는 사상인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예수님은 성경기록의 목적과 절대 필요성을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저들은 이러한 주님의 뜻에 완전히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심과 또 그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진리를 가르침에 절대 필요한 생명의 책입니다.
5. 천주교는 성경구독을 금지했습니다.
천주교는 1299년 톨로사회의에서 평신도가 성경을 갖는 것, 읽는 것, 해석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저들은 미사 시간에 신부가 ‘라틴어’로 성경을 읽고 강론함으로 회중은 전혀 성경 앞에 암매했습니다. 또한 1897년 1월 25일 교황 레오 13세는 천주교 이외에서 만든 성경을 금하고 특히 성서공회에서 발행하는 성경을 금했습니다. 통일교는 성경 이외에 원리강론을 갖고 있습니다. 몰몬교도 몰몬경을 갖고 있고, 여호와의 증인은 럿셀이 쓴 7권의 성서연구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감하는 것이 이단입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야말로 이단의 괴수입니다.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고 정경인 성경 외에 가경과 구전을 성경보다 앞세우고, 모든 성경은 없어져도 좋다고 하는 성경 무용론 내지 성경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천주교가 어찌 이단의 괴수가 아니겠는가? 저들은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에 해당되는 자들입니다. 성경 외의 것을 더하고, 성경에 있는 것을 제해 버린 자들로서 저주를 받고 말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의 근원과 기준을 가져다주는 것은 오직 성경(66권)밖에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죄인들에게 은혜와 구원을 전달해 주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오직 성경밖에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개혁의 봉화를 들기 1년 전인 1516년에 이미 이런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나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힌 포로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 돌아다니던 모습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행 15: ). 루터는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 가져야할 태도는 합리주의적인 비판과 연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과 종교적 문제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의 이러한 고백은 이른바 그의 ‘탑 속의 체험’이 있은 이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1513년이나 1514년 가을에 ‘탑속의 체험’이라는 은혜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영혼문제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덴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 속에 앉아서 시편 22편을 읽고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는 성경이었습니다. 루터는 이 성경을 읽는 중에 이 내용이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 이 시편 성경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당하고 있는 대신 수난의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무죄하신 예수께서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신 수난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지옥과 심판과 저주와 고통을 당하셨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루터 앞에 나타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축복의 구세주였습니다. 바로 그 탑 속에서 읽은 성경 시편 22편 말씀이 루터의 삶을 뒤집어 놓고 만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칭의의 진리도 깨달았습니다(1515-1516).
칼빈도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 서두에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혜는 타락한 인간의 이성적 본능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성경)을 제쳐놓고 다른 길로 갈 때 아무리 애써 진리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이미 처음 길을 잘못 들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칼빈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추구할 때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길에서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조명하는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을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말할 때 그의 말씀이 말하는 그 모양 이외의 모양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기독교 강요 1권 6장 3절, 13장 20절).
사도 바울은 영감 속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말할 때 말하고, 성경이 진행할 때 진행하고, 성경이 멈출 때 멈추는 삶을 견지하였습니다.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알려면 성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길가의 노동자에게서, 정치가에게서, 사업가에게 가서 그리고 문화예술가들에게 가서 물어보고, 저들의 답을 종합해 보면 바른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기타 여러 인간의 관점에서 예수를 조명하려고 합니다. 대단히 위태로운 사탄의 작동입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만 살아있는 예수, 항상 있는 예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주는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를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유는 성경은 성령 곧 예수의 영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1,000년이 넘도록 참된 진리의 성경을 떠나 온갖 유전과 이방풍속으로 참된 기독교를 변질시켜 놓은 로마 카톨릭을 떠나,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진리의 운동입니다. 진리냐, 비진리냐? 정통이냐, 이단이냐? 보수주의냐, 자유주의냐? 하는 질문의 근본적인 대답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성경관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바른 신앙을 결정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에 산재하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으로, 신앙과(구원) 행위(상급)의 유일무이한 법칙이다.」라고 굳게 믿습니다. - 아 멘 -
성경을 기록함은
강성찬 목사
로뎅이란 사람이 만든 작품 가운데 「생각하는 사람」이란 조각의 원 제목은 「지옥문 앞에서」라 합니다. 거기 보면 근육 짱의 사나이가 발가벗고 앉아서 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갈 때는 저 세상에 갈 때는 발가벗고 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옥문 앞에서 벌거벗고 앉아서 생각을 해요. 뭘 생각할까요?
짖궂은 젊은이들이 그런다고 합니다. 내 팬티 누가 가져갔을까?
우리도 생각하고 상고하고 연구 할 것이 있습니다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생활할 때 하나의 기준과 나침반이 되도록 주셨으며 그 성경 속에 하나님의 생각, 계획, 뜻을 포함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교훈을 주는 기준서 입니다.
이 성경 안에는 말씀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하는데 이 로고스는 곧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주제, 정신, 핵심, 주체는 예수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는 데는 1,500여 년 동안 40여명의 저자가 기록하였습니다. 이 40여명의 기록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살면서 서로 다른 표현과 논리와 특징과 상이점을 가진 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성경이 가지는 근본 주제나 목적은 예수님의 구속사를 통한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경이 신비한 것은 이 책은 2,000년 전에서 3500년 전의 것입니다. 그 사이에 시대나 역사나 문화가 많이 변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인류가 지나가고 문화가 변화하고 문명이 진화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세월동안 이 성경이 제시한 삶의 내용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기준이 되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세상이 종말이 올 때까지 이 성경은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 되고 나침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삶의 기준이 되는 책입니다.
성경 속에는 예언이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예언들 중에는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오랜 동안 이룰 내용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예언의 책입니다.
성경을 기록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함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던 무리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 세력에 동조한 자들을 말합니다. 바로 이들이 말씀 전파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요한의 목적은 이러한 자들에게까지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확신, 즉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믿고 영생을 얻게 함에 있다고 합니다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과 '영생'이라는 두 목적은 서로 연관되어진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 말씀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구원 목적을 보여주시고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부여하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중재가 되는 새로운 생명, 즉 인간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하고 더 나아가 이 진리를 전파하여 더욱 큰 기쁨을 누리고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래 전 시카고의 디엘 무디 목사님의 교회에 윌버 채프만이라는 18세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잘 믿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늘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디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제가 죽으면 천국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늘 불안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디 목사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읽어보자”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라고 반복하심으로써 진리를 분명히 알아들으라고 하십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고”도 아니고 “얻었으면 좋겠는데”도 아니며 “얻을지 안 얻을지 모르겠는데”가 아니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예수를 믿느냐?” “예, 믿습니다.”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었느냐?” “그걸 잘 모르겠어요.” 무디 목사님은 “다시 읽어 봐!” 하셨습니다. 다시 읽자 무디 목사님은 “너는 믿느냐?” 다시 물었어요. “제가 믿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영생을 얻었냐?” “글쎄, 제가 그걸 잘 모르겠어요.” “다시 읽어 봐라!” 세 번째 또 같은 성경을 읽혔습니다. 그래도 영생이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젊은이의 대답에 무디 목사님은 “하나님이 얻었다 하시면 얻은 것이지 네가 뭔데 감히 하나님을 의심하느냐!” 호통을 쳤습니다. 그 책망에 정신을 차린 젊은이는 ‘내가 믿는 것은 틀림없잖아. 내가 믿었으니까 영생이 있는 거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젊은이는 너무 좋아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고 신학교를 갔고 결국 무디 목사님 교회의 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사의 기록을 보니 100년 전에 한국에도 다녀가셨습니다. 그는 평생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는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게 함에 있다고 합니다
요일 5:13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합니다
복음 전도가 D.L. 무디가 65세쯤 될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평균 나이가 60세 막 넘었을 때니까 65세쯤되면 평균 나이를 지나 오늘 내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던 말년을 지낸 그 시점이었지요. 조간 신문에 무디에 관한 글이 실렸습니다. “Old Moody가 어떻다.” 늙은 무디가 어떻다. 신문에 실렸습니다. 사실 그 내용은 무디를 칭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무디는 Old - 늙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상했습니다. 주일날 강단에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신문에 보셨지요. 날보고 늙었다고 그래요. 여러분 제가 늙었습니까?” 교인들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가 곧 죽을 줄 알았던 모양이예요. 저는 100살은 살 거예요.” 교인들이 다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천년은 살 거예요. 아니 나는 만년은 살 거예요. 아니 나는 10만년의 10만년을 살아 영원히 살 영생을 얻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할렐루야!” 모든 성도들이 “아멘!”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 합니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악가 조수미씨가 이탈리아 선타 세칠리아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할 때 필란드 콩쿠르에 최연소자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유학간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잘 불렀는지 최우수상의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등은 중국인이었습니다. 심사 결과를 놓고 사람들은 '심사에 문제가 있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조수미가 사실은 일등이다'라는 말도 나돌았습니다. 그 당시 핀란드에서는 중국과 수교를 앞에 두고 무조건 중국인에게 일등을 주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일등은 맡아놓은 것인데, 빼앗기고는 조수미는 넉 달 동안 실망과 좌절, 울분 때문에 노래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좌절하고 있던 수미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 것은 그녀의 어머니였습니다. '나는 너에게 단 한번도 일등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수미야 노래는 아름다운 것이야 그런데 일등하지 못했다고 하여 질투에 찬 마음으로 노래한다면 그것은 이미 노래가 아니란다. 최고가 아니고, 일등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중요하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말씀이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900년대 강화 북부마을에 종순일이라는 돈 많은 유학자가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고 살았습니다. 이 유학자가 복음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때 마 18:장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임금님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나오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자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둡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을 다시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종순일이 이 말씀을 읽다가 충격을 받고 며칠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기도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놓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빚쟁이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빚쟁이들은 빚을 갚으라는 줄 알고 모두 떨고 있습니다. 그때 종순일이 사람들에게 마 18장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마 18장을 읽고 충격을 받았소, 여기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았소, 나는 오늘부로 여러분의 빚을 모두 탕감하기로 하였소”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 마 19:21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읽고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여 강화주변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화에 교회가 많은 것이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성경은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끊게 해서 삶에 엄청난 변화를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를 주고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습관으로부터 헤어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과 말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에 잘라내고 찌르고 쪼개는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서울 만큼 잘라내고 찌르고 아프게 해서 그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력이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깡패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후에 전도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익두, 술 한 잔 하세”하고 술집에 가자고 유인했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가 “아니야, 나는 요즘 약을 먹고 있어”하고 거절했습니다. “무슨 약을 먹는가”하고 물으니 “술 담배를 끊게 하는 신구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성경을 읽다가 변화 받고 영적 체질개선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습관은 사람을 옭아맵니다. 술을 끊지 못해서 마시면 주사하고 미쳐버리고 마치 귀신 씌워진 사람처럼 끌려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에 중독되어 하루 두 갑씩 피워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끊지 못하고 담배가 떨어지면 꽁초를 주워서라도 피워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피울 곳이 없으니까 건물마다 계단에 굴뚝들만 모여서 담배피우는 모습을 보면 참 처량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이 그 수많은 올가미들, 습관들,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끊게 되고 벗어나게 되고 결심을 하게 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 성경책은 다른 책과 구별됩니다. 왜냐하면 기록은 사람들이 하였지만 원 저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시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1886년 겨울 서울 정동의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손님들이 황해도 솔래에서 서울까지 천릿길을 걸어 세례를 받겠다고 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언더우드 선교사가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세례를 주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들이 두루마기를 벗더니 뒤로 돌아서서 등에 나무 십자가가 묶여 있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도를 받고 세례받기로 결심하였소, 선교사께서 솔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우리가 찾아왔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였소, 그래서 우리는 내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소박합니까. 그 말에 그만 감동이 되어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결단이 바로 성경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성경을 주신 이유는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알고 깨우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점을 잘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경을 생명의 책으로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이가 자라서 겨우 사물을 보면서 분별할 줄 알게 되면 먼저 토라 즉 이 성경의 율법서부터 가르칩니다. 이 성경의 율법서를 가르칠 때 성경의 표지에 꿀을 발라 입에 대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단맛에 열심히 혀로 핥아가며 율법서를 손에 들을 때 어른들이 말씀하기를 “이 꿀이 달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네 영혼에 달고 네 인생에 있어 모든 지혜를 준다, 고로 너는 죽을 때 까지 이 말씀을 읽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반포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기드온이 순방하며 함께 예배드립니습니다
구원의 말씀 인도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며(계 1:3) 반포하는 일에 협력하며 사명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