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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1. 개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아시아 작가.
― 오에 겐자부로 #
중국의 작가, 사회운동가, 사상가. 근현대 중문학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2]이자 근현대 중문학의 아버지[3]다. 그의 소설들은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근현대 중국 문인 중 가장 존경받는 작가로, 현대 중화권 최고 작가들 역시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는다. 또한 그는 오늘날에 중국의 "민족의 영혼"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루쉰(魯迅)은 1881년 9월 25일(음력 8월 3일), 절강(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성내(城內)에서 태어났다.[4]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字)는 예재(豫才)로, '루쉰'은 데뷔작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했던 필명이다. 루쉰 집안의 조상들은 원래 호남성(湖南省) 도주(道州)에 살았으나, 루쉰의 14대조 때에 농민으로 소흥에 이주했다고 한다. 루쉰의 집안은 이 때부터 부유해지기 시작했지만, 루쉰이 태어난 당시에는 약간의 논밭과 점포를 소유하고 조부가 한림편수(翰林編修)로서 베이징에 나아가 관리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봉건 소지주 가정이었다. 루쉰은 6세 때부터 가숙(家塾, 집안 내 글방)에 들어가 초보적인 독서를 하며 공부를 시작했고, 7세 때에는 삼매서옥(三味書屋)라는 사오싱의 사립학교에서 고전을 공부했다. 이 때 그의 스승은 서우징우(壽鏡吾, 수경오)라는 사람으로 고전 한문으로 쓰인 루쉰의 첫 단편에서는 소년기 경험을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수 년 동안 서우징우와 연락을 유진한 것으로 보아 그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루쉰은 사서오경을 다시 읽고 시집을 배우는 등 전통적인 과거 공부도 계속했다. 루쉰은 한시의 운율 맞추기에 능숙했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작가로서 후기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루쉰의 할아버지는 다소 진보적인 성향으로 루쉰에게 소설, 이야기, 잡문 등을 읽도록 권유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독서지도 또한 다소 파격적이어서 중국 고전 중에서도 두보와 한유를 건너뛰도록 할 정도였다.
이외에도 어린 시절의 루쉰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안고촌(安稿村) 외가에서의 생활이었다. <사희>(1922)에는 그 무렵의 생활이 회고되어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루쉰은 어린시절 여름철에 외가에 놀러 갔다가 마을 소년들과 천진난만하게 놀던 일화를 선명하게 서술하고있다. 작품속에서 그는 이 시절을 "그곳은 내게 있어서 천국이었다. 모두들 나를 오냐오냐 해주었고, 질질사간(秩秩斯干), 유유남산(幽幽南山)[5]같은 것을 외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하기도 하였는데 이 곳에서 생활할 시절의 루쉰은 마을 어디를 가나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문가의 도련님이었다.
루쉰은 뒷마당 정원에서 귀뚜라미를 잡고 식물을 기르기도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곳은 루쉰에게 엄격한 공부로부터의 안식처였다. 왕샤오밍(1992)에 따르면 그는 대담하면서도 놀이에 대한 감각을 지닌 명랑한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때때로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여름을 보내면서, 마을 농부의 아이들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연극을 보러 가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유복한 생활은 루쉰이 12세가 되던 해 조부가 투옥되고 그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아눕게되자 뒤바뀌고 만다. 루쉰의 할아버지 저우푸칭은 과거 급제자였으나, 루쉰의 아버지는 지방과거에 번번이 낙방했다. 이 때문에 저우푸칭은 시험 관리에게 뇌물을 바쳐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키려고 하였는데, 뇌물을 전달하기 위해 보낸 하인이 바보같이 영수증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뇌물죄가 드러나고 만 것이다. 저우푸칭은 체포되어 항저우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후 감형되어 1901년까지 수감되었다. 루쉰은 연좌를 피해 시골로 내려보내졌다. 루쉰의 집안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몰락하게 되고, 루쉰은 아버지의 약값을 대고 치료에 필요한 약을 구하기 위해 매일같이 전당포와 약국을 드나들게 된다. 훗날,(일본에서 현대 의학을 배운 이후) 루쉰은 그 고생이 속임수같은 한의학때문이라고 술회하는데 그 회고담은 그의 첫 작품집인 <납함>(1923)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창작집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명천>(1920)은 바로 그 기억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누구든지 먹고 살 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몹시 어려운 처지로 떨어지게 된다면, 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자서(自序)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3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루쉰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였고 장남이었던 루쉰은 새로운 삶의 출로를 찾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의 타격은 뒷날 루쉰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이 아니고 갑작스럽게 집안이 몰락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낙원의 상실은 루쉰에게 굴욕감과 강한 인상을 남겼다. 루쉰의 작품 세계에서 보이는 깊숙한 비애와 어둠은 주로 그의 불행한 소년기에 키워진 비관적인 정서와 의심적인 기질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개인적 환경은 당시 중국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루쉰을 입신양명을 꿈꾸던 명문댁 도련님에서 열렬한 문학혁명의 전사(戰士)로 변모시켰다. 루쉰이 살던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근 백년 간 중국의 역사는 영국을 선두로 하는 서양 제국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로 떨어지는 과정이었다. 또한 동시에 중국민족이 그러한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해방사이자, 열강을 따라 잡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루쉰의 전 생애와 맞물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중국사회는 암흑의 구름으로 뒤덮인, 절망의 시대였다. 아편전쟁 이후 계속 심화되어 온 정치, 사회적 혼돈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중국 사회와 중국 민족은 임종의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던 것은 중국 봉건사회의 유교적인 폐습이었다.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 내의 폐단으로 인한 국민성의 후진성이야말로 근대화의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인들을 더 깊은 나락의 절망 속으로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국민정신을 계몽하고, 개선하기 위한 문화운동이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고, 1919년 5.4운동이라는 문화혁명(신문화운동)으로 심화,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루쉰은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며, '문학'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자기 민족의 낡은 사상과 의식을 불태우고, 시대의 어둠과 절망을 넘어서려고 애쓰던 '정신계의 전사'로서 일생을 일관하게 된다.
2.2. 학생 시절
근대 중국 사회가 서구 문명과의 접촉으로 근대화에 눈을 뜰 무렵, 집안의 몰락으로 정통적인 입신의 길이 막혀 버린 루쉰은 새로운 세계의 경험을 위해 무술변법(戊戌變法)이 나던 해인 1898년 그의 나이 17세 때 난징으로 가 지역 탄광의 전망이 밝았기 때문에 징난 총독이 설립한 광산 및 철도학교(징난사관학교)로 전학했다. 그 광산은 결국 붕괴로 판명되었지만 학교는 계속 나아갔다. 이것은 루쉰이 서양 학문, 특히 과학에 처음 접촉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독일어와 영어를 공부했다. 그는 수업 준비에 시간을 거의 들이지 않았고 보통 제일 먼저 끝마쳤다. 그는 여분의 시간을 손에 쥔 채, 자극을 받기 위해 학교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말을 빌려서 난징 외곽에 있는 공원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때로는 한족으로서 그는 저주와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이 곳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좌파 학자들이 인종 민족주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묘사해 왔다. 거기서 4년간 루쉰은 물리, 수학 등 근대 과학의 기초를 배우며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학교에서의 정규교육 외에 당시 중국의 식자들간에 널리 읽히고 있던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진화와 논리》 번역)을 통해 진화론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진화론에서의 깨달음은 루쉰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과거의 풍습에 얽매여 있는 중국 민족의 낙후된 정신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량치차오의 개혁가 저널인 시우바오(Shiwu bao)와 토머스 헨리 헉슬리으의 진화와 윤리(Tiany un 假假假假)를 읽었고, 이 번역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루쉰은《수오지(假假)》라는 수필에서 이 책을 읽으며 시골 집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헉슬리가 이 책을 쓴 경험을 회고한다. 그는 또한 린 슈의 소설 번역뿐만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도 읽었다. 후자 중에서, 그는 특히 영국의 노르만 통치에 대한 색슨족의 저항을 다룬 소설인 아이반호와 중국의 노예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좋아했다.
또한 루쉰은 이 시기에 유신파(維新派)에 의해 간행되던 「시무보(時務報)」와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것을 널리 소개했던 「역서강편(譯書江編)」 등을 통해 서구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접하게 된다. 이 잡지는 1899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에 의해 편찬된 최초의 신잡지로, 주로 서구의 서적을 번역하여 실었다. 루쉰은 이 잡지를 통해 서구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장 자크 루소의 《민약론(民約論)》,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 등이었다고 한다. 루쉰은 1901년 말에 광로학당을 졸업하고 바로 다음 해인 21세 때, 일본으로 정부 장학금을 받아 유학의 길을 떠나 도쿄의 일본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중국인 유학생을 위한 어학원잉 홍문(弘文)학원 속성과에 입학한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증오심을 느꼈고, 일본에 있는 그의 동료 중국인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했다. 그가 도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의 좋은 친구이자 동료 쉬쇼우장(许寿裳)은 루쉰과 연을 끊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꺼린 것은 중국 학생들을 감독하는 일이었던 청의 관리 야오원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머무르는 2년 동안 루쉰은 일본어를 배우며 철학과 문학에 관한 책을 광범위하게 읽으며, 혁명집단인 '광복회(光復會)'에도 출입하게 된다. 이 때에 그는 '국민성'에 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중국과 중국인을 구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루쉰은 옌푸와 린슈를 계속 읽었지만, 란시퉁의《수오지(假假)》도 좋아했는데, 이것은 훗날 루쉰의 반유교사상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의례를 공격하는 책이다. 왕시칭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중요성을 과장한 우지휘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혐오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그의 길고 다작적인 번역가로서의 경력이 시작됐는데 첫번째 작품은 빅토르 위고의 아내에 의한 짧은 전기적인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위고는 댄디를 구타한 죄로 수감될 젊은 여성을 구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판 쥘 베른의 Journey to the Moon을 번역했다. 번역 서문에서, 루쉰은 그가 오락이라는 미명하에 뒷문으로 소설 현대 과학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저장차오를 위해 보이저의 일부를 지구의 중심부로 번역한다. 민족적 성격(人國的假)의 담론이 이 번역본에 들어왔고, 어느 순간 그는 리덴브록의 입에 다음과 같은 말을 넣는다: "이 겁쟁이들아, 너는 마치 부틀릭을 전공하는 중국 학생들 같다." (원문에 등장하지 않은 대사) 이 시기에 출판된 『중궈디즈힐루룬』(중국 지질학의 간략한 개요)도 지질학(땅과 영토)과 애국심(중국은 중국의 영토)이 혼재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중국을 공부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녀를 탐험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녀를 존경할 수는 있지만 탐낼 수는 없습니다." 그 에세이는 에른스트 해켈의 글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서양의 의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고, 1904년 가을 도쿄를 떠나 현재의 도호쿠대학인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루쉰은 그 학교에 중국에서 유학한 유일한 중국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현지 신문들이 그의 도착을 알리는 가운데, 매우 대중적인 환영을 받는다.
학교에 다니던 중 루쉰은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일본인 교수가 틀어준 뉴스 필름 속에서,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중국인 포로를 넋 놓고 바라보는 동포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았다. 루쉰은 그 장면을 보고서 ‘중국인은 구경꾼’이라는 정의를 얻었다. 구경꾼은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에 거리를 둔 채, 수동적이고 몰자각적이 된다. 루쉰은 자기 민족의 구경꾼 의식을 흔들어 깨우고자 육체를 고치는 의사가 되기보다 작가가 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루쉰 연구자들은 저 일화를 ‘환등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소설과 에세이에는 중국인의 구경꾼 의식을 질타하는 장면과 논설이 번번이 등장한다.
그 당시에, 저는 오랫동안 제 동료 중국인들을 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그들 중 일부가 미끄럼틀에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사진 가운데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신체적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물을 수 있는 만큼 강하고 건강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들이 영적으로 굳어지고 무감각하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 영상에 따르면, 손이 묶인 중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을 위해 일본 군대를 감시해습니다. 그는 '공적인 예'로서 목이 잘렸습니다. 그의 주변에 모인 다른 중국인들은 그 광경을 즐기러 온 것이었습니다.
많은 평자들에 의하면 이 사건은 그가 "영적 변혁을 일으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 (혹은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은 문학 및 예술을 통한 것"으로 깨닫게 되었고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을 추구하게 했다. 이 사건은 루쉰 연구에서 루쉰의 지적 발달에 있어 중요한 순간으로 간주했다.
재학 중 루쉰은 의학에 관한 전문적 지식의 습득 외에도 정치 모임에 자주 참가하면서 더한층 정치적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며, 서서히 문학의 길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유명한 '환등(幻燈)사건'으로 인해 루쉰은 의학에서 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 환등사건에 관한 일화와 그 충격으로 인한 문학에의 결심은 루쉰의 첫 작품집인 《(납함)의 자서(自序))에서 그 일면을 잘 엿볼 수 있다. 루쉰은 환등 사건으로 인해 중국과 같은 낙후된 국민에게는 건강한 체격보다 강한 국민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통감한다. 그래서 국민정신을 개조하는 데 문예를 통한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문예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작업으로 루쉰은 동인 잡지 발간을 계획한다.
1907년 루쉰은 도쿄에 있던 몇 명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신생(新生)」이라는 문예잡지의 출판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 20대의 젊은 중국 유학생들의 의욕과 패기는 인력과 재력의 부족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루쉰은 이 문학활동의 실패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지만 곧 극복하고 <마라시역설(摩羅詩力說)>,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등의 논문과 몇 편의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여 자신의 문학생활의 첫장을 열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8년 루쉰은 혁명적 논객인 장빙린(章炳麟)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의 강의를 듣게 된다. 손문, 황흥과 함께 신해혁명의 삼종(三宗)이라 일컬어지는 장빙린은 국학자로서의 성망도 있고 해서 당시 혁명 운동에 대한 영향력은 지식인과 학생들 간에 손문 이상으로 컸다. 루쉰은 동생인 주작인(周作人), 허수상(許壽裳), 전현동(錢玄同)과 함께 학자로서의 장빙린에게 접촉한 셈인데 '전투적인 문자이야말로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구적인 업적'이라고 <태염선생(太炎先生-장빙린)에 대해서>에서 말할 정도로 그 감화는 지대했다. 루쉰은 장빙린과 사귀면서 그들 조직인 '광복회'에도 자주 출입하게 되는데 그 가입 여부는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8년여에 걸친 유학시절은 루쉰의 최초의 문학활동 시기였으며, 초기 사상의 중요한 형성시기였다.
거의 유산에 얽매이지 않는 오늘날의 성과는 없기 때문에, 문명은 정기적으로 과거의 큰 흐름을 바꾸거나 때로는 저항해야 하며, 따라서 때때로 그것은 비정상적인 발전을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현재에 대한 계획을 채택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연구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물질을 공격하고, 영적인 것을 개방하고, 개인에게 자유를 주고, 대다수를 거부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킨다면, 이것은 국가들을 낳게 한다. 나뭇가지를 잡고 잎을 따고 경제, 무기, 의회, 헌법을 장려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정신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구별할 수 없다. 그들의 행동과 제안은 모두 부적절할 것이다. 게다가, 의도가 비열하지만 새로운 문명의 이름에 합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
2.3. 정치, 작가 활동
1909년 루쉰은 귀국해서 항주(杭州)의 양급사범학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이듬해인 1910년 여름에 고향인 소흥으로 돌아와서 소흥 중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1911년 이른바 신해혁명이 폭발하고 루쉰은 소흥사범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재직하던 중, 다음해인 1912년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교육총장이 된 채원배(蔡元培)의 요청에 따라 교육부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임시정부를 따라 베이징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루쉰은 기대를 걸었던 신해혁명이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제정부활운동, 장쉰의 복벽(複壁)사건 등을 통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흐르자 크게 실망한다. 1912년에서 <광인일기>를 발표하게 되는 1918년까지는 루쉰의 생애를 통해 사상적으로 가장 고난에 빠진 시기로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한 사고와 심사의 시기였다. 그는 중국사회와 사상에 관해 깊이 관찰하고, 중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중국서적에 관한 고증과 수집, 금석비첩(金石碑帖)과 불경의 연구 등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신해혁명의 붕괴로 심한 혼란에 빠진 루쉰은 새로운 중국 혁명상의 재건을 고대하며 절망과 침묵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루쉰에게 있어 청년기의 반항 없는 문학활동의 실패와 그 뒤를 이은 어두운 조국의 현실은 심한 정신적 방황과 고뇌를 가져 왔던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내면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아가 다시금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윤리적, 의지적인 자아를 확립하기 위한 정신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황과 고뇌를 뚫고 나온 작품이 바로 루쉰의 첫 작품이자, 백화문 문장으로 씌어진 중국 최초의 신소설인 <광인일기>였던 것이다. 중국문학이 비록 수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줄곧 경시되어 왔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백화소설(구어체로 된 소설)이 많기는 하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창조정신이 결여되었고 새로운 사상도 없이 묘사하는 신변잡기식 이야기였다. 따라서 진정한 신소설은 신문학운동 이후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깊은 자극을 준 것은 번역을 통한 서양사상과 문학의 영향이었다. 청일전쟁 후 변법운동(變法運動)이 대두했던 때에 한편으로는 유럽의 사상과 문학이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양서적의 변역은 그 전부터도 있었지만 종래의 그것은 양무(洋務)운동이나 기독교의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고 선택의 범위가 제한되었는데, 이 무렵에 와서는 사상과 문학의 분야까지 넓혀졌던 것이다. 양계초(梁啓超), 엄기도(嚴幾道-嚴復), 임서(林緖), 진독수(陳獨秀), 호적(胡適), 주작인 등은 문학, 사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서양의 문화를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이들의 문학혁명과 문체개혁, 서구문학의 번역소개는 새 세대들에게 문학에 흥미를 갖게 했으며, 중국 신문학의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국인들로 하여금 서양문학의 특성을 새삼 인식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 지식인들 머릿속에 수입된 합리주의 사상은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사상과 유교사상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개혁에 관한 의기당당한 거센 물결은 곧 5.4운동의 고조를 맞이하면서 전국을 석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을 통한 현대문학의 기원이 된 것은 루쉰의 소설들이었고 특히, 백화로 씌어진 소설로 1918년 「신청년」지에 발표되었던 <광인일기>였다. 루쉰은 이 백화체의 문장으로 씌어진 새로운 구성의 소설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어온' 중국의 봉건사회를 고발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장래를 위하여 '너희들, 지금 곧 개심하라. 진심으로 개심하라. 알겠는가. 머지않아 인간을 먹는 인간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게 된단 말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 뒤에 전국적으로 백화의 신문과 정기 간행물이 출현하였으며, 이에 중국의 오래 전통문학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현대문학이 그 넓은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루쉰의 <광인일기>는 당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진영으로부터의 봉건사회에 대한 최초의 도전서였으며 사상혁명과 문학혁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작품이다. 루쉰의 작품 중 가장 현실에 대한 고발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내용과 형식의 과감한 파격성으로 인해 중국의 젊은 지식인 세대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다. 작품은 13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일기체 형식이다. 끽인(吃人 - 먹는 사람, 즉 박해자)과 피끽인(먹히는 사람, 즉 피박해자)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예교(禮敎)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피해망상자의 형상을 통해서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내의 가족제도와 예교의 폐단과 피해를 과감하게 폭로하고 있다. <광인일기>는 어느 날 밤 달을 보고 '이제까지 30년 이상이나 전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광인의 이상심리, 다시 말해 유교이념의 강력한 조직에 묶인 정상인들과 달리 광인 혼자서 각성하여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암흑 속에 있는 중국사회 전체를 고발한 작품이다. 광인의 눈에 비친 사회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은 남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남에게는 잡아먹히지 않으려 하므로 서로 의심을 품고 흘끗흘끗 상대방을 감시하고 있는' 세계이다. 광인은 4천년에 걸친 중국 봉건사회의 역사책 속에서 '식인(食人)'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하고[6] 그나마 친족인 형부터 개심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 동네 사람들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광인은 어딘가로 끌려가 감금되고, 그 와중에 광인은 "형이 집안을 물려받았을 때 누이동생이 죽었는데, 어쩌면 그 때 나도 누이동생을 '잡아먹은' 게 아닐까?"라는 동족혐오와 죄책감이 섞인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광인은 '하지만 인간을 잡아먹은 적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을 구하라!'라고 마지막까지 호소하며 글을 마친다.
Lu Xun3
즉, 일본 유학시절 진화론과 프리드리히 니체, 조지 고든 바이런 등을 통해서 접한 서구 근대정신사조의 영향으로 홀로 각성하여 개혁의 의지를 품고 스스로가 '팔을 힘차게 흔들며 한 번 외쳐서 이에 응답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게 할 수 있는' 정신계의 전사라는 임무를 떠맡아 문예활동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헛되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더욱이 자신이 무한한 열의를 가지고 지지하였던 신해혁명조차도 무력하게 위안스카이와 다른 군벌들 등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서 탁본(拓本)의 수집이나 연구 등에 파묻히며 스스로를 마비시켜왔던 작가 자신이, 광인처럼 비슷한 체험을 통해 '잡아먹힌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속해 있는 중국사회의 도피할 길 없는 암흑의 구조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문학자로서의 자각을 얻어 '아이들을 구해라.'고 하는 절망의 부르짖음을 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현실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상적, 관념적인 반항과 행동의 정신계의 전사는 그처럼 자신을 시대의 저변에 편입시키는 근원적인 선택에 의해 다시금 실재하는 중국민족과 밀착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현실참여적인 문학자이자 청년층을 적극 지지하는[7] 혁명투사로 탄생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루쉰은 자신의 창작을 통해 중국사회의 엄연히 가로놓여 있는 절망의 소재에 대한 현장 검증에 헌신한다. 중국의 현상에 뿌리깊은 절망감을 느꼈던 루쉰은 '문학혁명' 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붓을 들게 되고,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인생을 위한', '인생을 개선하기 위한' 작품을 발표한다. 루쉰은 1918년 <광인일기>로부터 1925년의 <이혼>에 이르는 8년여 동안 많은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 일련의 작품들은, 비평적 선도에 의해 열려진 문학 혁명 이념을 작품상에 나타낸 최초의 작품군이었다. 이 작품들은 시기별로 각각 창작집인 《납함( 喊)》(1923)과 《방황(彷徨)》(1926)에 수록되는데 특히, 첫 창작 소설집인 《납함》(싸움터에서 양쪽 병사들이 지르는 소리, 함성)에 실린 작품들은 문학전사로서의 루쉰은 투철한 비판정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구지식인의 몰락과 나태한 근성을 지적하여 경향심을 불러일으켰던 <공을기(孔乙己, 쿵이지)>(1919), 미신과 무지로 인한 중국인의 병폐를 일깨워 준 <약>(1919)과 <명천>, 농촌생활의 암담함과 피폐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고향>(1921) 등의 시대 고발적인 일련의 작품들은 문학혁명가로서의 루쉰의 열정을 대중에게 알리며, 문학인으로서의 루쉰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쉰은 이름을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 수 있게 해 준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Q정전(阿Q正傳)>일 것이다.
<아Q정전>은 1921년 12월에서 다음해 2월에 걸쳐 주간 「신보부간(晨報副刊)」에 파인(巴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루쉰의 이름을 불후한 것으로 만든 대표작이다. <아Q정전>은 신해혁명 시기의 농촌생활을 제재로 하여 이 시기의 중국 농촌 생활상을 심각하게 파헤쳐 아Q라는 품팔이꾼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중국민족의 나쁜 근성을 지적하여 국민성을 각성시키려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루쉰은 중국과 중국민족을 절망적으로 그리고 있다.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예견하고, 희망이 있는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궁지에 몰려 소외되고 탈락되고 짓눌린 자의 모습을 집요하게 그려낸 것이다. 아Q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 더구나 신해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타성의 사회에서 사명감도 목적의식도 없으면서 부질없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디어는 무기력하고 비겁한 노예근성으로 돌아가 그 최후를 공허하게 끝마치는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다. 아Q의 성격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다혈질이다. 그는 자손심이 매우 강할 뿐만 아니라 보수적이며 우매무지하다. 그러나 아Q의 성격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관념의 흐름은 '정신승리법'이다. 루쉰이 아Q를 통하여 예술상의 '정신승리법'을 끌어 낸 것은 심각한 현실적 의의와 깊은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즉, 공허한 영웅주의와 무력한 패배주의에 침식되어 자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자기만족에 젖어 있고, 타개치 못하는 민족적 위기에 살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물질생활의 군데군데마다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정신적인 만족에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청나라 정부와 한(漢)민족에 대한 조소와 비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문호를 개방한 청나라 정부는 그들의 실패를 변명하고 감추면서 조정의 위엄을 계속 유지, 봉건 통치를 완고히 함으로써 허영과 거만한 욕구를 채운다. 이러한 상류사회의 기풍이 반봉건성, 반식민지의 중국사회에 만연되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즉, 실제는 모든 것에 패하였으면서도 정신적인 승리에 만족하는 기풍이 하나의 국민성으로 인정되었고, 이러한 국민성에 대한 것을 루쉰은 철저하게 증오하게 된 나머지, 아Q라는 인물을 내세워 심히 채찍질을 한 것이다.
2.4. 말년
루쉰은 1926년 2번째 소설집인 《방황》을 출판한 이후로는 소설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는 수단으로 문예활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잡문(雜文)을 주로 발표한다. 1926년 3월 18일,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러 모인 시민과 학생을 향해 중국 정부가 발포했고, 루쉰은 류허전을 비롯해 자신의 제자 3명을 잃었다. 가까이서 목격한 첫 번째 살육. 이후 루쉰은 수배자가 되어 도망을 치다가 돤치루이(段祺瑞)가 물러나자 집으로 돌아온다. 베이징에서 산 것도 벌써 16년째. 루쉰은 본의 아니게 유명해졌다. 학자라 호명되기도 했고, 문인이라 호명되기도 했고, 심지어 사상계의 선구자라고 호명되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루쉰은 아니었다. 루쉰은 ‘다시 살고’ 싶어졌고 베이징을 떠나기로 한다. 이때의 나이가 46살이었다.
“글은 지금까지 쓰고는 있는데, ‘글’이라기보다는 ‘욕’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게요. 이제는 나도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 마음이라오. (중략) 근래에는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소. 왜일 것 같소? 말하면 아마 웃을 텐데, 첫째는 이 세상에 아직도 내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 역시 살아서 의론도 펼치고 문학에 관한 책도 좀 내고 싶기 때문이오. (중략) 요즘 내 사상은 이전에 비해 낙관적이 되었소. 그다지 의기소침하지도 않고.”
1926. 6 리삥중에게 보내는 편지/ 린시엔즈
8월 26일, 베이징을 출발한 루쉰은 9월 4일 샤먼(廈門)에 도착한다. 그러나 샤먼은 “제기랄, 오지 말았어야 해”라고 후회할 만큼, 베이징 못지않게, 아니 베이징보다 더 적막했다. 자신을 불러준 친구 린위탕(林語堂)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더 머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샤먼 이후였다. 루쉰과 쉬광핑 사이에 오간 편지를 보면 이 시기 루쉰은 정말 헤맨 것 같다. 돈도 생활도 여자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 역사적 중간물이라는 의식은 어떤 점에서는 루쉰을 자유롭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세월과 더불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한다면 어떤 길이든 나서지 못할 이유도 없다. 루쉰은 쉬광핑이 있는, 그리고 새로운 혁명적 기운이 피어오르는 광저우(廣州)로 간다.
1927년 1월 18일. 광저우에 도착한 루쉰. 시작부터 떠들썩했다. 그는 중산대학에서도 가장 장엄하고 화려한 곳, “대종루(大鐘樓) 위에 떠받들어”졌고, “강당의 짝짝 하는 한바탕 박수”로 전사로 확정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환호와 기대, 방문의 대상이 된 루쉰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밤새 설쳐대는 20마리 가까이 되는 쥐와 새벽부터 고래고래 부르는 ‘노동자 동무’들의 노랫소리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상황이다. 루쉰이 남하할 무렵 광저우는 붉은 도시였다. 쑨원은 봉건 군벌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해 광저우를 거점으로 삼아 중국국민당을 재정비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키며(1924년 1월),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한다.(1924년 3월) 마침내 1926년 7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삼은 혁명군은 봉건군벌을 향해 북벌을 시작한다. 이들은 거침없이 북진하였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강남 대부분의 도시를 탈환한다. 삭막하고 단조로운 샤먼시절, 유일하게 루쉰에게 기쁨을 준 것도 바로 이 국민혁명의 소식이었다.[8]
루쉰은 광저우에 도착한 직후 ‘황화절의 잡감’이라는 글을 쓰게 된다. 황화절은 3·29 광저우 봉기를 기념하는 명절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루쉰은 자신이 사건의 정황을 잘 모르니 자칫하면 글에서 뻥을 치게 생겼다면서 걱정한다. 그래서 "불과 17년 전의 일이니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고 썼다. 고향에서 혁명가 추진(秋瑾)이 죽었을 때도 그랬고, 베이징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제자들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구경꾼’에게 이런 일이란 잠시 애석해하거나 안주삼아 씹어대다가 금방 잊어버리는 일이니까. 하지만 3·29 봉기는 그 자체는 실패했지만 곧 우창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의 성공 덕분에 혁명성공의 선구자가 되어 해피엔딩을 맞게 되었으니 다행이고 경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루쉰의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해피엔딩과 잊히지 않는 것, 그것이 혁명의 성공이냐는 물음이다. 혁명이 성공했다면서 꽃을 꺾거나 과실을 따먹는 사람만이 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길러주는 사람이 없다면 결과가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혁명은 끝이 없고 ‘아직 성공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황화절도 하루 정도 떠들썩하면 될 뿐, 그 다음엔 집에 가서 푹 자고 이튿날 “반드시 해야 할 하루 일과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데 루쉰이 직접 광저우에 도착해서 목격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태평’이었다. 만약 혁명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더 많은 ‘소리’와 ‘일’들이 벌어져야 할 터. 그러나 광저우에서는 어떠한 조짐도 없었다. 10여 년 전처럼 구시대의 인물은 의연했고, 신문·잡지의 문예도 여전했다. 대신 루쉰이 목격한 것은 거리에 나붙어있는 빨간 천의 구호들, 깃발을 높이 든 노동조합의 행진들, 황화절에 대한 떠들썩한 기념들, 그리고 자신들은 혁명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니 이제 성적이 나빠도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유세를 떠는 학생들의 어필이었다. 구호나 행진이나 기념이나 유세가 혁명이라면 그것은 ‘봉지혁명(奉旨革命)’, 임금의 뜻을 받들어 모셨던 구시대 관습을 리바이벌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루쉰은 엄중하게 경고했다. 구호를 혁명으로 생각하는 한 혁명의 책원지 광저우는 언제든지 반혁명의 책원지도 될 수 있다고.(1927. 12. 17, ‘종루에서’)
한편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국공합작의 약속을 깨고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체포, 살육하는 우익 쿠데타를 감행한다. 곳곳에서 백색테러가 자행되었다. 상해에서만 300명이 살해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4월 15일에는 광저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2,000여 명의 노동자와 공산당원이 체포되고 100여 명이 살해되었다. 2년 전 베이징에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이번엔 그 살육이 혁명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혁명, 반(反)혁명, 불(不)혁명, 혁명가는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반혁명가는 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불혁명가는 혁명가로 간주되어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반 혁명가로 간주되어 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아무것으로도 간주되지 않아 혁명가 또는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1927. 9. 24, ‘사소한 잡감’)
학생들이 잡혀가자 루쉰은 강하게 항의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중산대학은 ‘당교(黨校)’이기 때문에 정부방침에 반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학교 관계자들. 늘 공리와 대의를 입에 달고 살다가 어느새 장제스의 청천백일기 밑으로 기어들어간 기회주의적 문인들. 이들은 주인보다 더 사나운 ‘발바리’들이었다. 루쉰은 4월21일 중산대학을 사직하고 입을 닫는다.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실함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공허함을 느낀다”(1927. 4. 26, <들풀> 제사)고, 이 때의 , 루쉰은 썼다. 그리고 빠이윈러우(白云樓) 26호 2층. 오후에야 해가 드는 서향의 방 안에서 묵은 원고를 편집하면서 ‘살아있는 시간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냈다. 무덥고 지루한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적막한 베이징을 탈출하기 위해 찾아간 샤먼에서 더 큰 적막에 빠져버렸고, 다시 광저우로 “꿈을 안고 왔다가 현실에 부딪히자 꿈의 세계에서 추방되어 적막만 남았다.” 이것이 바로 1년 사이에 루쉰이 겪은 롤러코스터다. 혁명에 대한 2번째 좌절. 청년들에 대한 깊은 실망. 가을이 되자 루쉰은 아무 미련 없이 광저우를 떠난다. 도착할 때와는 달리 이번엔 조용하게 간다. 1927년 10월 루쉰과 쉬광핑은 상하이에 도착한다. 광저우에 더 이상 머무를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베이징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여 택한 상하이행은 어쩌면 출구 없는 퇴로, 혹은 퇴로 없는 출구다. 당시 상하이는 장제스 정권의 제2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웹스터 사전>에 동사 ‘상하이하다=to Shanghai’가 “아편으로 인해 마비되어, 인력을 구하는 배에 팔려버리다”라거나 “사기와 폭력으로 한바탕 싸움을 일으키다”라는 뜻으로(<상하이 모던>, 고려대학교출판부) 적혀 있을 정도로, 복마전 그 자체였다.
그리고 1927년 상하이에 와서 193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상해에서의 10년 동안, 루쉰은 2번 베이징을 다녀온 외에는 줄곧 상하이에서 보낸다. 상하이에서 보낸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루쉰은 9권의 잡문집과 역사소설인 《고사신편(新古事編)》을 출간했고, 문예이론, 장편, 단편소설, 동화 등을 번역했으며, 소련과 독일의 신흥목각(新興木刻)을 소개했고, 신문학운동을 제창했으며 세계 언어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행동적인 면에서는 '중국 자유운동 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 등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루쉰의 문학세계는 이 1927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 시대로 분수령을 이룬다. 루쉰의 전기시대가 단편시대라면 후기는 잡감문(雜感文)의 시대이고, 전기가 계몽적이고 사실적인 인생문학이라면, 후기는 사회비판과 문학비평을 전제로 한 정치문학이다. 전기작품에는 전통적인 애수와 낭만 그리고 풍자가 특징이지만 후기작품은 맵고 신 정공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루쉰이 후기에 정치에 관심을 보이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인간혁명, 제도혁명에 전념하게 되고, 비판문학의 영역으로 사상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말년의 루쉰은 중국의 막심 고리키라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청년 작가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헌데, 실제로 고리키가 죽은 그해에 루쉰도 죽었다. 정확히 고리키가 죽고 4달하고 하루가 지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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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으로 병상에 드러누우면서도 집필을 쉬지 않았던 루쉰은 독일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1936년 10월 19일, 향년 55세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항일 통일전선 조직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문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문단을 통일하기도 했다.
4. 특징 및 성향
루쉰의 작품들은 대개 짤막짤막한 단편이지만 그 속에 깃든 철학과 예술성으로 인해 높게 평가받는다. 루쉰의 문학은 혁명을 위한 문학이었으나, 안이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13] 루쉰이 작품 속에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슬로건이나 말뿐인 지식인 작가의 허위가 아닌,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뜨거운 정열, 그리고 상승하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또한 그의 글은 간결하다. 그의 문체는 핵심만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하는 힘 있는 간결체 문장이다.[14]
루쉰은 중국 근현대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중국 근대화의 선구자 천두슈는 근대화 과정의 필수요소를 ‘과학’과 ‘민주’라고 했다.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입을 근대화의 첫걸음으로 여겼다. 이에 호응하여 나온 것이 후스의 문학 혁명이다. 그의 문학 혁명은 ‘백화문’의 보급이다. 그는 모든 국민이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근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후 근대화의 필수 조건인 문학 혁명을 실천하고 성공으로 이끈 것이 바로 루쉰이다. 그의 소설은 중국이 봉건주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통하던 과도기에 중국인들이 체험하였던 고통과 혼란과 방황을 주제로 하고 있다. 2천여 년간 쌓이고 쌓여 왔던 봉건주의 전통 사회의 거대한 탑이 붕괴되는 현상은 중국인들로서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루쉰은 봉건주의라는 전통 사회의 미망에 빠져 있는 국민들을 문학 작품을 통해 계몽하여 봉건 윤리라는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앞장서서 중국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
평자들은 루쉰의 정체성은 반항인이라고 평한다. 그는 모든 부조리와 절망에 반항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공부한 것만 믿었으며 끊임없이 회의하고 도전하고 탐색했다. 그는 동서고금 다양한 사상가[15]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자기의 피와 살로 소화한 다음 버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20~30대에 형성된 세계관에 기대어 세계를 해석하는데 루쉰은 거의 쉰이 된 나이에도 젊은이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사유 영역을 확장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학습하고 수용한 것이 40대 후반이었다. 특정한 사고의 틀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허물을 벗고 나아갔던 것이다. 이를 변증법적 사고라고 하는데 기존에 알고 있던 것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검증하고 대체하고 변화한다. 정반합의 사고를 통해 나선식으로 계속 나아갔다. 루쉰의 연구자들은 그의 작품인 <광인일기>는 중국 역사를 식인의 역사로 규정한다. 식인으로 형상화된 국가폭력, 사회 시스템의 폭력성은 단지 1918년 중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루쉰의 글을 특정한 시대와 사회의 텍스트로만 볼 게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루쉰 사상의 근저에는 약자에 대한 속죄의식과 강자에 대한 도저한 전투의식이 있으며 몸부림치는 정신을 실천했다. 그것은 사상이라기보다는 삶의 태도다. 루쉰의 연구자들은 절망과 어둠의 시대에서 다시 일어서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내고, 쉼 없는 집요함으로 더 나은 곳을 꿈꾸는 이들, 또한 고독을 견디는 지혜를 배우고 싶은 인물들이 루쉰의 책을 읽기를 권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잣대를 가졌다. 사람과 사건을 동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따뜻하기보다 잔혹하다. 누구에게나 내리쬐는 햇볕처럼 내남 없이 모두를 ‘깐다’. 그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낙관 성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로 평가받는 〈광인일기〉는 현실을 고발하지만 어둡다 못해 절망적이다. 그는 전통과도 평행선을 긋는다. ‘인의 도덕(仁義 道德)’의 행간에 숨은 진짜 글자는 식인(食人)이더라는 진술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폭로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 유학과 마르크시즘을 두루 비판하는 ‘진실주의자’인 그를 상층부의 기득권자들은 불편해했다. 반대로 청년들은 허위와 과장을 혐오하는 그를 ‘인간 자석’이라고 부르며 쇳가루처럼 끌려갔다. 1930년대 이미 루쉰의 사유형태를 변증법이라고 평가하는 이가 있었다. 사유의 경계를 줄기차게 밀어나가는 것은 좋게 해석하면 끈질긴 집요함이라고 표현하겠지만, 어떤 이의 눈에서는 융통성 없음으로 비칠 수 있었다. 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내던 루쉰은 1926년 천안문에서 매판적인 돤치루이 정부에 항의하던 시위대 47명이 학살당한 이른바 ‘3·18 참사’ 때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군벌을 비판했다가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후에 대학을 떠나 잡문과 강연을 통해 우익에 대한 비판적 정치적 입장을 계속 글로 썼다. 그는 중국좌익작가연맹에도 참여했고, 판화운동도 전개했다. 그는 권력도 싫어하고 사람 많은 곳도 싫어했지만, 그의 삶은 정치적이었다. 루쉰의 철학 사상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사상의 출발점은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 한다’라는 것이다. 루쉰은 자신을 ‘중간물’이라고 했다. 생명의 사슬에서 지금 여기 존재하는 중간자인 것이다. 삶이란 중간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 출발점이었다. 루쉰은 봉건 시대의 끝에 태어나 70여년간 중국의 구국운동이 실패한 것을 목격했다. 아편전쟁 패전부터 양무운동, 변법유신운동, 신해혁명의 실패까지. 그는 전통에서 다음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변화하여 새 시대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그의 혁명사상이 있게 된다. 그가 생각하는 혁명은 중국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이었다. ‘미완의 혁명을 위해서 계속 나아가는 사람’을 진정한 혁명인이라고 했다.
이욱연 서강대학교 중국문화학과 교수는 그의 사상을 중간물 사상이라고 평했다. ""루쉰 사상의 독특한 점은 자신은 어둠의 마지막 인물이며 새 시대의 주인공이 못 된다는 생각이죠. 그는 내가 새 시대를 열어주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어둠과 같이 쓰러질 터이니 청년들이 새로운 세상에 서라고 했어요. 자신을 포함해 어른들은 아무리 깨끗한 척해도 때가 묻어 있다는 거죠. 죄인 의식 혹은 희생 의식입니다. 역사가 발전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죠. 지금 한국 청년들은 어른들에게 그런 의식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학생들은 루쉰의 이런 생각이 담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인가’ 같은 산문을 보며 통쾌해 하죠. 루쉰은 다수의 힘을 누구보다 믿지만 다수가 가진 어둠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민중이 떨치지 못한 노예 정신 같은 게 대표적이죠" 16] 그 때문에 다수 민중이 건설뿐 아니라 파괴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수의 빛과 그늘을 늘 같이 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죠. 루쉰은 또 자기다움을 강조해요. 특히 생각의 자기다움이죠. 옛날부터 그래 왔고, 다수가 옳다고 해서 옳은 일이냐는 거죠. 요즘 사람들이 과잉 정치화하면서 자기 판단이 중지되기도 하잖아요. 루쉰은 모든 문명에는 다 편향이 있다면서 근대도 역사의 한 시기일 뿐이라고 해요. 그래서 근대도 성취와 그늘을 함께 봐야 한다고 하죠. 이런 통찰은 청년들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욱연 교수는 루쉰 문학의 가장 위대한 점을 “위선이 없는 거죠. 어둠 자체가 루쉰의 문학입니다. 삶이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둠이죠. 삶의 어둠 자체를 계속 드러내는, 절망적인 항전의 문학이죠. 계몽문학과 다른 점이죠.”라고 평했다.#
루쉰은 중국에선 마오쩌둥에 의해 신격화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루쉰 전집은 살아남았다. 중요한 것은 루쉰의 의도와 상관없이 루쉰의 이미지가 넘사벽의 위인으로 화석화됐다는 거다. 마오쩌둥은 루쉰 정신으로 식민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 루쉰은 공산주의자 이미지가 돼버렸다. 루쉰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뒤 공산당중앙은 루쉰을 ‘공산주의 소비에트운동의 친애하는 전우’로 일컫고, 서거 1년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마오쩌둥은 루쉰을 ‘공산당의 조직원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 행동, 저작은 모두 마르크스주의화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에서 루쉰을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 혁명가’로 자리매김한다. 이건 루쉰을 문화적 아이콘으로써 선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 루쉰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중국공산당의 혁명적 자원으로 독차지한 셈이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사상가임을 중심으로 부각된 루쉰 때문에, 문인으로서 그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때문에 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에서 '문인으로 루쉰을 더 자세히 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기도 하다. “먼저 루쉰이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자”라는 기치 아래, 소설의 창작에 큰 영향을 주는 그의 내적 모순과 다양한 갈등을 분석하기 위한 작업도 중시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도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루쉰 작품이 전해진다. 1948년 이후 한국에선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중국과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은 금기시됐고,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루쉰에 대한 편견도 오랫동안 유지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받아들인 루쉰의 모습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1920년대는 무정부주의자로, 1930년대는 ‘좌파’ 작가로, 1960~1970년대 오면 실천적 지식인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평자들은 읽는 사람의 환경과 사고의 스펙트럼에 따라 루쉰을 굉장히 다양하게 읽게 된다고 평한다.[17]
루쉰의 작품은 중국 밖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그의 작품은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권에서도 널리 애독되고있다. 일본에서도 중학교의 모든 국어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수록 되어있다.# 서양권에서도 유명하며 가장 인지도 높은 근현대 중화권 소설가다. 그의 소설 광인일기는 노벨연구소 선정 세계 100대 문학에 포함됐다.[18] 1986년, 문학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모든 제3세계 문학이 취하는 "국가적 우화" 형식의 "최고의 예"로 "광인 일기"를 인용했다. 문해 비평가 글로리아 데이비스는 루쉰을 프리드리히 니체와 비교하면서 두 사람 모두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대 건축에 갇혀 있었다"고 말한다. 비평가 레오나르도 비토리오 아레나의 말에 따르면, 루쉰은 니체의 스타일과 컨텐츠가 과도하기 때문에 니체의 매력과 거부감이 뒤섞인 니체에 대한 모호한 관점을 선택했다고 평했다.
한편 루쉰은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와 비교되는데, 루쉰이 중국 민중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무지함과 천박함을 그대로 묘사했다면 톨스토이는 정반대로 기독교 이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민중들을 현실보다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2. 국내 번역
루쉰 소설의 번역의 최고봉은 김시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로 꼽힌다. 김시준 교수가 번역한 루쉰 소설 전집은 1996년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번역됐고, 2008년 을유문화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루쉰이 일생 동안 발표한 소설들을 엮은 소설 전집은 <납함>, <방황>, <고사신편> 3권에 수록된 작품들을 모두 번역한 완역본 소설 전집을 냈다. 가격도 저렴하고 번역도 훌륭해 루쉰의 문학 세계가 궁금하면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김시준 교수는 평생을 중국 현대문학 연구에 천착하여 유려한 문체로 루쉰 소설의 감동을 되살렸다.[33] 김시준 교수의 번역은 전공자들의 루쉰 소설 번역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서 있다. “아직도 이 번역을 능가하는 후학자들의 번역이 드물다”라고 평가될만큼 국내 루쉰 번역에서는 단연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무엇보다 루쉰 문학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장 표준적인 번역’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으며, 번역의 정확성 역시 큰 신뢰를 얻고 있다. 이 번역은 교수 신문이 뽑은 최고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루쉰의 소설 전집은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목록#, 서강대학교 필독서 목록에도 올라와 있다.#
2011년 고인돌 출판사에서 '한 권으로 읽는 루쉰 문학 선집'을 공개했다. 루쉰의 수많은 저작 중에 소설집 <납함> <방황>을 제외하고 가려 뽑아 1권에 5책을 담은 '선집'이다. 5책은 <잡문>, <수필집>, <서한집>, <양지서>, <고사신편>이다. 1책 '잡문'에는 루쉰이 일생 동안 가장 많이 쓴 '짧은 비평', 그가 쓴 사회비평과 문화비평 뿌리를 이루고 있는 글이 실려 있다. 2책 '수필집'에는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쓴 산문 모음이다. 3책 '서한집'은 편지글 모음이며, 4책 '양지서'는 루쉰과 그가 사랑했던 애인 쉬광핑과 나눈 서간집이다. 5책 '고사신편'은 루쉰 최후 창작집인 '고사신편'에 실린 역사소설들이다.
'1권 5책'이란 표현을 쓴 것은 5권을 1권으로 묶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영남대학교 박홍규 교수가 '루쉰 문학 선집' 해설을 쓰고, 옮긴이 송춘남이 '영원한 루쉰'을 썼다. 글을 뽑은 잣대는, 루쉰의 저작 가운데 널리 읽히는 글들만 뽑은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펴낸 고인돌 출판사 정낙묵 대표는 "<한권으로 읽는 루쉰문학선집>은 일반 독자들이 방대한 루쉰의 문학과 사상에서 '숲과 나무', '전체와 부분'을 아울러 볼 수 있게 기획되었다"라며 "그동안 단편적인 부분 번역 출판은 '나무는 보되 숲을 볼 수 없었고', 루쉰의 방대한 저술을 다 번역 출판한다 해도 연구자들에게는 유용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숲을 보지만 나무를 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이 책을 펴낸 까닭을 설명했다.
루쉰전집 입체 합성 이미지1
2018년 그린비 출판사에서 국내 중문학자들로 구성된 루쉰전집번역위원회가 '루쉰 전집' 총 20권을 완간했다. 2007년 번역에 착수해 2010년 1차분으로 3권을 출간한 뒤 11년 만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번역은 중국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펴낸 루쉰 전집 1981년판과 2005년판 등을 저본으로 삼았다.
6. 어록
6.1. 그에 대한 언사
루쉰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중국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여겨진다.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중국의 가장 위대한 현대 작가.
― 컬럼비아 대학교#
현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
―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
독창성의 원천. 중국 민족 문화의 원천. 루쉰은 셰익스피어가 영국에서, 톨스토이가 러시아에서, 괴테가 독일에서, 타고르가 인도에서의 위치와 같다.
― 첸리췬 (베이징대학 문학 교수)#
중국 현대문학의 누구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조차도 ‘루쉰의 영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후 역사에서도 루쉰 정신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류즈취안 (난징대학 문학학원 원장)#
중국 문학 경전에서, 루쉰은 찰스 디킨스와 제임스 조이스가 하나로 합쳐진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무자비하게 예민한 관찰자; 그리고 언어와 형태를 다시 만든 사람.
― 더 가디언#
현대 중문학의 아버지.
― 더 뉴요커#
루쉰은 틀림없이 현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작가이며,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현대 중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 펭귄 북스#
루쉰의 꾸밈없는 문체, 폭넓은 생각, 진보적인 자세는 중국 문학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했다.
― 타임지#
중국의 가장 위대한 반체제 작가.
― 뉴욕 타임스#
현대 중국의 걸출한 문인으로 널리 알려진 루쉰은 한 나라의 양심의 목소리로 존경 받고 있으며, 위상과 영향력 면에서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에 필적하는 작가다
루쉰은 여전히 모든 중국 학생들에 의해 읽히고 있는 작가이며,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현대 작가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 BBC#
루쉰은 중국의 첫 번째 성인(聖人)이다. 중국 최초의 성인은 공자도 나도 아니다. 나는 현명한 사람으로, 성인의 학생이다.[34]#
루쉰은 이 새로운 문화 세력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용기 있는 최고 사령관이었습니다. 중국 문화혁명의 최고 사령관인 그는 문단의 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습니다. 루쉰은 고집불통이나 비굴함에서 벗어나 고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질은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민들 사이에서 매우 귀중합니다. 국가의 대다수를 대표하는 루쉰은 적의 성채를 침입하여 습격했습니다; 문화적 전선에서 그는 가장 용감하고 올바르며, 가장 확고하고,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열렬한 국가적 영웅이었고,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길은 중국의 새로운 국가 문화의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 마오쩌둥[35]
오늘날 중국 문인들이 그를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루쉰 선생'이라고 하며, 마오둔, 바진, 선충원, 차오위, 라오서, 빙심 등에 대해서도 그렇게 직접 그 이름을 부르지는 않는다. (중략) 루쉰 선생은 중국인의 보편적인 존경을 받았는데, 단지 그가 걸출한 작가, 문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정신은 '작가'라는 호칭을 훨씬 능가한다. 그는 인생에서 한 마디도 한 번도 쓰지 않더라도 여전히 중국 국가에서 위대한 인물이다. 하늘을 가엾게 여기는 그의 마음 때문에,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민중을 일깨우는 일에 매진하였기 때문에, 비참한 중화민족을 진흥시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이러한 위대한 사람을, 중국인들은 '지사인인[36]'이라고 부른다.
― 김용#
루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중국인 작가다.
―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감상의 풍부함, 관찰의 깊음, 경지에 오른 의미 심장함, 자구의 정확함, 타인이 고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의 지식이 얼마나 뛰어난가!
― 차이위안페이#
나는 오히려 진실한 루쉰이 신도 아니고 개도 아닌 개인이고, 문학적 천재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천두슈#
중국에 신문학 운동이 생긴 이래 누가 가장 위대하냐고 묻는다면? 누가 가장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을까?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쉰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루쉰의 소설은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이 방면의 모든 걸작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수필에 얽힌 잡감은 옛사람과는 달리 뒤쫓을 수 없는 풍격을 제공하는데, 먼저 그 특색이 관찰의 깊이, 화술의 날카로움, 문필의 간결함, 비유의 묘미, 그리고 유머가 넘치는 분위기에서 독주를 마셔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처절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는 데 열심일 때 그는 이미 고금동서를 장악했다. 중국의 민족정신을 전면적으로 이해하려면 《루쉰전집》을 읽는 것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
― 위다푸#
루쉰은 자유주의자로, 결코 외부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루쉰은 우리의 사람이다.
― 후스#
내 마음속에서 루쉰 선생은 탁월한 문체가이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문체가는 문학인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다.
― 무신 (화가)#
20세기 동아시아 문화지도에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작가.
― 김양수[37] (동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한국 중문학회 회장)#
루쉰은 20세기에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작가이다.
― 볼프강 쿠빈 (독일 본 대학교 동양아시아연구소 소장)#
대략 18년간 루쉰은 중국 문단의 중심적 위치에서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문단의 중심으로 뚜렷이 인식한 것은 그가 죽고 나서였다. 생전에는 그를 찬성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이 반반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비난하는 쪽이 많았다. (중략) 살아생전 그는 문단 생활의 많은 부분을 논쟁 속에서 보냈다. (중략) 불량 학자, 타락 문인, 위선자, 반동분자, 봉건 유물, 독설가, 변절자, 돈키호테, 잡문장이, 매판, 허무주의자 등 오로지 루쉰을 비방하기 위해 고안해낸 이 수많은 조롱들은 그가 사용한 필명에도 뒤지지 않을 다채로움으로 논쟁의 격렬함과 성격을 암시한다.
― 다케우치 요시미 (중국학자)#
19세기에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와 스탕달이 있을 것이고, 대영제국에는 찰스 디킨스가 있을 것이고, 인도에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있을 것이고, 독일에는 프리드리히 실러가 있을 것이고, 러시아에는 레프 톨스토이가 있을 것이고, 미국에는 마크 트웨인과 에밀리 디킨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중국은 어떨까요? 그의 문학적인 업적과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저는 모든 중국인이 루쉰이라고 답할것라고 생각합니다.
― 중국의 세기의 거장들#
6.2. 본인 어록
앞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무리 선명하고 보기 좋은 깃발이라 할지라도, 무릇 언동이나 사상 속에 그것을 빙자하여 자기 소유로 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자는 도적이며, 그것을 빙자하여 눈앞의 하찮은 이익을 차지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자는 노예이다.
젊은 영혼들이 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그들은 벌써 거칠어져 있거나, 거칠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 피 흘리면서 아픔을 견뎌내는 영혼을 사랑한다. 내가 인간 세상에 있음을,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 마음 유난히 쓸쓸하다. (중략) 이전에 내 가슴속에도 피와 쇠붙이, 불꽃과 독기, 회복과 복수의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 찬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홀연히 이런 것들이 모두 공허해져버렸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속이는 덧없는 희망으로 그 빈자리를 메워보려 했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이라는 방패로 그 공허한 가운데의 어두운 밤을 막아보려 애썼다. 하긴 이 방패 뒤에는 여전히 어두운 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나의 청춘을 소진시켰다.
말없이 누워 때때로 찾아 오는 고통스런 생각과 마주한다. 이런 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꼭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최후의 진통이 평온한 것이 아니라 해도 내 일생에 한번 일어나고야 말 일이라면 나는 죽음을 받아 들일 수 있다.
천재란 깊은 숲속이나 거친 들판에 절로 나서 자라는 괴물이 아니라 천재가 생겨나고 자랄 수 있는 민중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민중 없이는 천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튼튼한 나무가 있기를 바라고 고운 꽃을 보기 원한다면 반드시 좋은 흙이 있어야지요. 흙이 없으면 꽃도 나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꽃이나 나무보다 흙이 더 중요합니다
먹으로 쓰인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을 수 없다.
상술한 1926년 3월 18일, 천안문에서 시위대 47명이 학살당한 '3·18 참사' 당시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군벌을 비판하며 쓴 글의 구절 중 하나.[38]
지금은 아주 절박한 시기이다. 작가는 해로운 사물에 대해 즉각 반응하거나 항의하고 투쟁하는, 느낌과 반응의 신경, 공격과 방어의 수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편 대작에 마음을 두고 앞으로 세워야 할 문화를 설계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현재를 위해 항쟁하는 것 역시 현재와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현재를 잃는다면 미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길은 아직 얼마든지 있다. 나는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떻게 해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지를 모른다. 때로는 마치 그 삶의 길이 한 마리의 회색빛 뱀처럼 스스로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기다리며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자 갑자기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비평할 때는 반드시 우선 자신을 비평하고 또 거짓으로 하지 말아야만 비로소 말이 말 같아지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면목이 설 것이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아직 있다면, 그들은 먼저 큰소리로 말하고, 웃고, 울고, 울며, 화내고, 비난하고, 싸워야 한다. 그들은 적어도 이 저주받은 장소에서 그 저주받은 분위기를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발전이 고개를 넘으면 퇴폐가 시작된다.
먼저 대담하지 않으면 뒤에 가서는 할 수도 없고, 더 뒤에 가서는 당연히 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게 된다.
흙은 천재에 비하여 당연히 보잘 것 없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잘 참아 내지 않으면 흙이 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게를 먹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거미를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맛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에, 사람들은 그것들을 먹는 것을 중단했다. 이 사람들은 또한 우리의 진심어린 감사를 받을 만하다.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항상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 다른 사람을 먹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기도 마찬가지로 노예로 부려지고 먹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망각한다.
진정한 투사들은 인류의 슬픔을 감히 맞닥뜨리고, 끊임없이 유혈 사태를 바라본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러나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주의 공통적인 장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창백한 핏자국과 막연한 고통만을 남긴 채 오래된 흔적들을 씻어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이러한 반인간적인 세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무뚝뚝하게 살아가게 한다.
공로 선생은 “자기만 못한 사람을 벗 삼지 말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력과 이익을 따지는 이러한 안목은 오늘날 세상에도 아주 흔하다.
비굴한 자일수록 주인의 사랑을 받는 법이다.
사자라면 얼마나 비대한지를 자랑한다고 해도 문제 되지 않지만, 돼지나 양이라면 비대하다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나는 이제 우리 스스로가 무엇과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팔아버릴 수도 있다.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미 스러져 간 그 쓸쓸한 시간들을 정신의 실오라기로 붙들어 매어 둔들 또 무슨 의미가 있으랴.
타인에 대해서는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공리를 요구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저승에서까지도 사정을 봐주기를 바란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리는 아주 현묘하다. 마음은 물론 살아야 하거니와 지나치게 살아서는 안 된다.
분명 나는 종종 남을 해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더 사정없이 나 자신을 해부한다. 조금만 발표해도 따뜻함을 몹시 좋아하는 인물들은 이내 냉혹함을 느껴 버리는데, 만약 내 피와 살을 전부 드러낸다면 그 말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말을 하는데 그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반응이 없는 것보다야 그래도 행복한 일이다. 세상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오로지 스스로 마음 편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날의 생명은 벌써 죽었다. 나는 이 죽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일찍이 살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벌써 썩었다. 나는 이 썩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공허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에 오로지 추억만 남아 있다면 아마도 그 생애는 무료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나, 하지만 때로는 추억마저도 없을 때가 있다. 중국에서 글을 짓는 데는 규범이 있으며, 세상일도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
우리 삶을 구원하는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다.
나는 지금껏 내가 슬픔에 빠져 있다고 해서 홀연 색깔을 바꾸는 가을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번잡함을 좋아하든지 고요함을 좋아하든지 간에 바람이 불어야만 대해가 울부짖었다.
펜촉이라면 날카로워야 하고 뚫을 수도 있어야 한다.
'돌진하기'는 가장 시원스러운 전법이다. 자동차 대열이 종횡으로 돌진하여 적들로 하여금 바퀴 아래에서 죽거나 다치게 하니 얼마나 간편한가.
옛날 위세가 당당했던 사람은 복고(復古)를 주장하고, 지금 위세가 당당한 사람은 현상유지를 주장하고, 아직 행세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혁신을 주장한다.
복고하는 사람이나 피난하는 사람은 지혜롭거나 어리석거나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 간에 모두 벌써 300년 전의 태평성세, 즉 ‘잠시 안정적으로 노예가 된 시대’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듯하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지상 위에 놓인 길과도 같은 것이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39]
물에 빠졌건 빠지지 않았건 사람을 무는 개는 때려야 한다.[40]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길이 없는 것이다.
나 역시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참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체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중략) 하지만 나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이 인간세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뿐이다. 40여 명 청년의 피가 주변에 흘러념쳐 숨이 막히고 보기도 힘든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 비분을 글로 쓴다 해도 그것은 아픔이 가라앉은 뒤라야 할 것이다.(중략) 나는 나의 더 없는 애통을 이 비인간적인 세상에 공개하여 그것으로 나의 고통을 위안할 것이며 이것을 죽은 자에 대한 약소한 제물로 삼아 영전에 삼가 바치리라.
자식은 자기의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져 있기에 또한 인류 속의 사람이다. 자기 것일진대 더욱 교육에 의무를 다하고 그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하고 또 내 것이 아니기에 해방시켜야 하고 모든 것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해주어야 하며 하나의 독립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청춘시대에 갖가지 우행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중년이 되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청년 시대에는 불안이 있더라도 비관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맞서 싸우고 또한 자기를 지켜라.
나는 중국인에게는 쌓이고 쌓인 원망과 분노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그 분노는 물론 강자의 유린을 받아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강자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약한 자한테 터뜨린다.
중국에서는, 특히 도시에서, 누군가가 병에 걸려 길에서 쓰러지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면, 많은 행인들이 구경하고 즐기기 위해 서 있을 것이지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국가로서, 중국인들은 타협하고 중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방이 너무 어둡고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확실히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붕을 제거할 것을 제안하면, 그들은 중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창문을 여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부자가 된 후에 2가지 다른 방향들 중 하나로 갈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볼 것이고, 그리고 인도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전의 고난은 그들에게 세상이 잔인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될 것 입니다. 일부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중국에는 아마도 이기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나는 왜 중국인들이 오래된 환경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고 우울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은 현재와 타협하지만 새로운 것에 완벽을 요구합니까.
이전에, 나는 사람들이 유죄이기 때문에 처형되거나 수감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악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너무 오랫동안 마스크를 쓴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얼굴에서 자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다시 벗기고 싶다면, 당신의 피부를 찢고 뼈를 부러뜨려야 할 것이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고 해서 맞는 말인가?
유럽 사람들은 임종 시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라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의식을 행한다. 나는 원한을 산 사람들이 많은데, 신식 인물들이 내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끝에 나는 결심했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41]
사나운 짐승들은 항상 혼자 걷는다. 소와 양만 무리를 지어 모이면 된다.
루쉰: "가령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그런 방 말이야. 만일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면, 얼마 안 가서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러나 잠을 자다가 죽은 것이니까 죽어가는 고통을 느낄 수는 없을 걸세. 그런데 자네가 크게 소리쳐서 잠이 덜 든 몇 사람을 깨워놓는다면, 그 불행한 몇몇은 임종의 쓰라린 고통을 피할 수 없을 터인데, 그러고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신: "아닐세, 몇몇 사람이 깨어났으니 그 무쇠 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네."
이미 완전히 다른 현실이지만 전혀 어둠이나 빛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중국의 문인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만사에 눈을 감고 잠시나마 스스로 속이고 남도 속인다. 그 방법은 바로 감춤과 속임이다.
역사서에서 (오대, 남송, 명말 등등) 기록한 것을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비슷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유독 우리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하다. 현재의 중화민국은 여전히 오대요, 송말이요, 명말이다.
현상을 바꾸지 않고도 흥성할 수 있고 진실로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 그렇기만 하다면 야만적인 삶도 너무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길인가? 그것은 바로 길이 없던 곳을 밟아서 생겨난 것이고 가시덤불로 뒤덮인 곳을 개척하여 생겨난 것이다. 예전에도 길이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길은 생길 것이다.
진정한 전사들은 감히 인생의 비참함을 직시하고, 흘러내리는 피와 맞서 싸운다.
나는 시대의 폐단을 공격한 모든 글은 반드시 시대의 폐단과 더불어 사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혈구가 종기를 생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거되지 않으면, 다시말하면 자신의 생명유지는 바로 병균이 여전히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통과 인생이란 항상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고통이 잠시 사라질 때가 있다면 단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뿐입니다. ‘오만’과 ‘냉소주의’는 깨어 있는 동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뿐이지요.
살면서 벗 하나를 얻는다면 무엇을 더 바라리(人生得一知己足矣).
이 세상 마땅히 같은 마음을 품고 바라보아야 하리(斯世當以同懷視之).
凡是愚弱的國民,即使體格如何健全,如何茁壯,也只能做毫無意義的示眾的材料和看客,病死多少是不必以為不幸的
무지한 인민들이여,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힘이 강력한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오직 목적없는 진열대나 감시자처럼 섬길 수만 있다. 우리는 그들이 죽거나 병에 걸렸을때 슬퍼할 필요가 없다.
横眉冷对千夫指
俯首甘为孺子牛
매서운 눈초리로 뭇 사람들의 질타에 맞서며
기꺼이 머리숙이고 대중을 위해 봉사하리라.
아이들은 커서 재능이 없다면, 조그만 직업들을 택해서 살도록 하라. 절대로 실속 없는 문학자나 음악가나 미술가 등이 되지 말도록 하라.
장례식을 위해 어떤 기념행사 비슷한 짓도 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일은 잊고 각자의 생활에 정신을 돌려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바보다.
유언
나는 하나의 종착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에 있다. 물론 길은 한 가닥이 아니다.
루쉰의 묘비명
희망은 허무한 것이다. 마치 절망이 그러한 것처럼.
실은 혁명이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일이다.
사람이 적요(寂寥)를 느낄 때, 창작이 생긴다. 공막을 느끼면 창작이 생기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사랑할 것이 없으므로, 필경 창작은 사랑에 뿌리박는 것이다.
漢字不滅,中國必亡。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
모든 문학(문예)은 선전이지만, 모든 선전이 문학(문예)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곧 모든 꽃이 다 색을 지니고 있지만 색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꽃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혁명이 구호나 표어, 포고, 전보, 교과서 외에 문학(문예)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문예)이기 때문이다.
7. 기념
상하이 훙커우구에 위치한 루쉰공원(鲁迅公园, 루신궁위안)은 루쉰의 묘와 기념관, 윤봉길 의사 추모관인 매원(梅园)이 있다. 이 곳은 과거에는 훙커우공원(虹口公园, 홍구 공원)이라고 불렸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우리에게 유명한 홍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다. 공원 내부에 루쉰 기념관도 같이 있다. 기념관에는 그가 소장한 생필품, 사진, 예술품 20,000여점의 물품이 있으며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루쉰의 문학작품이 있다.
上海鲁迅纪念馆
루쉰 기념관
루신공원은 1898년 조성되었으며 1956년 루쉰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루쉰기념관이 들어서면서 홍커우 공원에서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7년 루쉰은 장제스의 국민당 혁명 후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상하이로 이주 후 여유가 있을 때마다 루쉰공원을 즐겨 산책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중국인들은 루쉰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고 공원의 이름도 루쉰 공원으로 바꾸었다. 상하이루쉰기념관(上海鲁迅纪念馆)은 1950년 봄에 화둥군정위원회(华东军政委员会) 문화부(文化部)의 건설계획으로 셰단루(谢旦如)가 건설기획을 담당해 산양로(山阴路) ‘상하이루쉰옛집(上海鲁迅故居)’ 근처에 설립했고, 1951년 1월 7일에 정식으로 개방했다.
당시 저우언라이가 관명을 썼다. 이 기념관은 1956년 9월에 훙커우공원(虹口公园), 지금의 루쉰공원(鲁迅公园)으로 이전했다. 또 루쉰 서거 20주기인 10월에, 루쉰의 묘(鲁迅墓)도 만국공묘(万国公墓)에서 이장했고, 현재의 비문을 당시 마오쩌둥이 썼다. 상하이루쉰기념관은 1층에 문화명인 지원센터인 조화문고(朝华文库), 학술세미나실 서우런탕(树人堂), 테마전람실 분류예원(奔流艺苑) 등이 마련되어 있어 루쉰 문학 및 문화 관련 행사 겸 전시실로 사용되고, 2층은 ‘루쉰생평진열청(鲁迅生平陈列厅)’이다. 현재 루쉰 기념관에는 대략 20만 건의 자료가 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루쉰이 상하이에서 10년 동안 활동했던 내용들로 주를 이룬다. 전시관 안에는 루쉰의 대표작과 그가 잡지에 기고한 기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그의 중편소설인 《아Q정전》은 관련 영화 상영과 함께 소설 줄거리를 미니어처로 제작해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진열된 전시물을 따라 쭉 거닐다 보면 루쉰이 쓴 에세이들을 비롯해서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을 볼 수 있다.디시 유저의 인증
Grave of Luxun
루쉰의 묘지
기념관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는 루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루쉰의 시신은 만국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가, 1956년 루쉰 사망 2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의 루쉰공원으로 옮겨졌다. 루쉰의 부인 쉬광핑(许广平)과 자녀인 저우하이잉(周海婴)이 묘 양 옆에 심은 2그루의 전나무가 있다. 공원은 상하이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공원이다. 개방시간은 오전 5시부터 19시까지이며 입장료는 없다.
루쉰 중국 1
고향 사오싱의 루쉰 생가 겸 기념관
8. 기타
그의 이름을 딴 루쉰문학상은 마오둔문학상[42]과 함께 중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루쉰문학상은 종합 문학상이다. 장편소설과 중·단편소설, 번역, 시 등 4개 부문을 3년마다 시상한다.#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인 모옌, 옌롄커, 위화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다. 위화는 "루쉰의 중국 사회에 대한 조롱을 보면 매우 유쾌하다"며 "루쉰이 아직 살아 있다면 차도 마시고 담배도 피면서 함께 이야기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어중문학과 학생들에게는 끝판왕급 인물이다. 국어국문학과의 정철, 영어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 일어일문학과의 나쓰메 소세키, 독어독문학과의 괴테, 불어불문학과의 빅토르 위고, 노어노문학과의 톨스토이, 서어서문학과의 세르반테스 같은 존재. 중문학도들에게 도저히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루쉰이다.[43] 중문학과 학생들은 루쉰 소설을 읽지 않고는 전공 수업을 들을 수가 없는 급이다. 왜냐하면 중국 근현대문학사를 다루는 모든 전공 수업에서 그의 출현 빈도가 엄청나게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문학과 학생들에게는 너무 자주 나오다보니 악몽과도 같은 인물이다.
해외소설을 대거 연환화로 만드는 작업에 나선 적이 있다. 다만 중국 내에서 연환화 작가는 일반적인 만화가와는 따로 취급하는 듯.
가장 좋아한 러시아 소설가는 니콜라이 고골이다. 루쉰은 고골의 작품 '죽은 혼'의 영향을 받았다.
2012년 루쉰은 중국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10대 작가 중 한명으로 뽑혔다. 이외의 작가로는 모옌, 김용, 한한, 경요, 라오서, 궈징밍, 조설근, 바진, 빙심이 뽑혔다.#
또한 오늘날 중국 대중들에게 가장 위대한 현대 작가 질문을 하면 첫번째로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 ## #
생전에 루쉰은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후스를 치고, 가장 훌륭한 산문가 셋 중의 하나로 린위탕을 꼽았다.
루쉰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본래 저우(周)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본명으로 알려진 수런(樹人)은 그가 17세 때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바꾼 이름이다. 루쉰은 그가 작가 활동을 하면서 지은 필명으로, 제정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의 소설 <루딘>의 주인공인 청년 지식인 '루딘'[44]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다른 설로는, 루쉰 생전의 절친이었던 쉬서우장(许寿裳)이 말하기를 자신이 루쉰에게 필명에 대해 물어봤고 루쉰은 루(鲁, 노씨)가 어머니의 성씨고 쉰(迅)은 자신의 아명이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필명을 지음으로서 "우둔하지만 빠르다(愚鲁而迅速)" 라는 의미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생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 다른 근현대 중문학의 중요한 인물 궈모뤄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나팔수’였던 반면, 루쉰은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차이는 궈모뤄가 희곡에 공을 들인 극작가이기도 했으나, 루쉰은 희곡을 쓰지 않았을뿐더러 연극을 증오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루쉰에게 두 동생이 있었는데 훗날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큰동생 저우쭤런(주작인(周作人), 1885~1967)은 루쉰처럼 문학을 공부했으며 신문화운동에도 함께 참여한다. 저우쭤런은 문학이론가,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그 명성은 훼손된다. 전쟁으로 베이징 등 주요 도시의 일본군이 진주하자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등 많은 대학의 교수들은 협력을 거부한 채 낙향하거나 쿤밍에 세워진 시난연합대학으로 강단을 옮긴다. 그러나 베이징대학에서 일하고 있던 저우쭤런은 베이징에 남아 베이징대학 총장, 왕징웨이 정권의 교육청 독판(교육부 장관)을 지낸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기도 한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1남 2녀를 얻었는데 전쟁 중 보여준 그의 친일적 행보로 인해 종전 직후 국민정부는 저우쭤런을 한간으로 처벌했다. 14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했는데 같은 친일 한간으로 총살당한 딩모춘을 기리는 시를 썼다가 더 욕먹어야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한간이라고 욕먹으며 복권되지 못한 채 1967년 삶을 마무리해야 했다. 반면 1888년생으로 막내인 저우젠런(주건인,周建人)은 생물학을 공부했는데, 국공내전 중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중공 수립 이후 고향인 저장성의 성장과 교육부 부부장,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등 여러 요직을 맡으며 존경받다가 1984년 만 95세로 눈을 감으며 장수했다.
후스 등과 함께 한문 대신 상대적으로 쉬운 백화문을 쓰자는 백화운동을 벌여 중국에서 한문을 몰아내고 북경어 백화문에 기반한 표준 중국어(글말)를 쓰게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본인부터가 문학작품을 한문이 아닌 백화문으로 썼다.
루쉰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57년에 누군가가[45] 마오쩌둥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만약 루쉰이 살아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마침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던 무렵이라 문화계 인사들의 행로가 화제에 올랐는데 마오쩌둥이 상하이를 방문한 틈을 타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
실제로 루쉰이 마오쩌둥 집권기까지 장수했다면 십중팔구 감옥 신세였을 것이다. 루쉰 성격이나 행보를 보면 마오쩌둥의 정치 방식에 동조할리 만무할 테니까.
자기 나라의 중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인을 이기적이고 허세와 정신승리를 잘 드러내며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고 쓸데없이 외래문화에 배타적이라고 주장했다.[46] 루쉰이 생각한 중국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아Q정전〉이다. 그런 시각에서 한자 폐지 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다.
漢字不滅,中國必亡。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작 외국인이 중국인을 이렇게 비판하면 그건 또 싫어했다. 펄 벅을 비난하고 그녀 대표작인 《대지》를 비난한 것도 바로 루쉰이다. 펄 벅의 경우 당시 서구(특히 미국) 문단에서 대표적인 중국통 작가로써 긴 중국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실상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글을 많이 저술했다. 《수호전》 등의 중국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중국의 문화적 전통을 서구에 널리 알리고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근거없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비하하던 당시 서구의 태도에 일침을 가했으며, 그러한 비하적 태도를 가진 이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중일전쟁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면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평생에 걸쳐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벅에 대한 루쉰의 이런 박한 평가는 좀 너무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루쉰이 이와 같이 벅에게 적대적인 대응을 보인 이유는 크게 2가지 정도로 지적되는데, 1) 벅의 작품에는 리얼리즘 관점에 따라 중국인 대중의 어리석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부분도 적지 않고, 이러한 부분에 대해 루쉰은 (자기 자신도 그런 어리석음에 치를 떠는 입장이긴 했지만) 국외자인 벅이 중국인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는 설이 있고, 2) 하필 루쉰이 구해 읽은 《대지》가 중역본이라서 중역으로 인한 의미 왜곡으로 벅이 반중적인 작가라고 오해했다는 설도 있다.
이 중 1)의 설, 즉 중국인 자신이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 중국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는 설의 경우 흥미로운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대지》의 3부 분열된 일가를 보면 주인공격인 왕옌이 미국 대학에서 중국 농민으로 분장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공연한 중국인 학생들을 보고서 '중국인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격분하여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대지 1부의 출간 이후 한국의 재미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였던 강용흘이 왕룽이 이화를 돈으로 사서 첩으로 삼는 장면을 두고 '중국에는 이런 일이 없다'고 벅이 중국인의 도덕적 품성을 비하했다고 공격하다가 '중국에서 만난 노부인들이 자신들이 실제로 겪은 일을 들려준 증언에 기반한 내용'으로 그저 '원론적인 도덕론을 내세워 분명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려는 태도는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우월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처참하게 역관광당한 사례가 있다.[47] 중국이나 한국의 유교적 도덕 원칙과는 별개로, 실제로 최근까지 매매혼이나 축첩이 있던 것 자체는 부정하기 힘들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비판이나 풍자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의 문제이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사건에서 '우리는 샤를리 엡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인 서구 지식인 중 하나였던 《팔레스타인(만화)》의 작가 조 사코의 '가끔 어떤 집단은 조그만 풍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발언처럼, 방어적인 입장에 몰린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한 조그만 풍자나 비판에도 격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서구 열강[48]의 침탈과 문화적인 비하에 시달리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향한 비판이 설령 사실에 근거하고, 정당성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루쉰 자신 역시 펄 벅이 지적한 문제와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비판하고 있었음에도, 외국인[49]이 이를 지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었다. 이게 꼭 루쉰만의 문제도 아니고, 루쉰을 존경하는 인물로 유명한 리영희가 젊은 시절 미국으로 교육연수를 받으러 겪었던 일을 회상한 일화 중에 미국 언론이 북한에 호의적인 기사를 싣자 동료들이 해당 언론사에 항의하러 몰려갔고, 해당 언론사의 책임자는 한국 언론인들이 해당 기사에 항의하러 몰려온 것을 보고 '거짓이 아닌 이상 언론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냐'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좋은 기삿거리가 있으면 가져오라. 그러면 실어주겠다'고 타일러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생전에 리영희가 매우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자서전 격인 《대화》를 보면 루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한국 한자음인 '노신'으로 읽지 않으면 느낌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루쉰 전집의 정장 기념본 초판은 200질만 만들었는데 예전부터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저우언라이가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에게 선물해 줄 한 질을 구하지 못해 애먹었을 정도다. 마오쩌둥 역시 한 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중국엔 루쉰문학관이 6개나 있다. 베이징·상하이·사오싱·난징·광저우 등에 루쉰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 중에서 사오싱이 가장 크고 볼거리도 많다. 사오싱은 루쉰의 고향으로, 루쉰 생가 일대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다. 심지어 단편 ‘공을기(孔乙己)’에서 주인공 ‘공을기’가 자주 들락거린 식당 ‘함형주점’(咸亨酒店)도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다음으로, 상하이가 볼 만하다. 상하이는 말년의 루쉰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루쉰이 숨진 곳이기도 하다. 문학관 2층 입구 벽에 ‘뭇사람의 비판에 차갑게 대하고 고개 숙여 민중의 소가 되겠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루쉰 산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1942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옌안(延安)강화’에도 등장하는 문구다.#
다자이 오사무가 루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석별〉(惜別)을 발표한 적이 있다(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일본유학 시절의 루쉰의 모습을 회고하는 형식. 문제는 이 소설이 쓰여진 것이 일본이 한창 전쟁 막바지에 다다랐던 1945년이었고, 집필 동기도 전시 어용문인 단체인 문학보국회[50] 의뢰를 받아서 지어진 소설이다. 실제로 다자이는 1944년 1월 30일에 도호 영화사 프로듀서 야마시타 료조에게 쓴 편지에서 "새해가 되자마자 문학보국회에서 대동아 5대 선언을 기초로 한 소설을 쓰라는 어려운 명령을 받아, 이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다른 일을 제쳐두고 이 일에 매진하는 중입니다."라고 밝혔다. 소설 후기에서도 "써달라는 의뢰가 없었어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료를 모으고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자이 자신이 당시 일본문학보국회에 소설 개요를 제출했던 소설가 50명 가운데 선발된 6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본문학보국회의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평론가들은 작품에 그려진 루쉰의 모습과 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지극히 피상적이라면서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간주했다고.[51]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 의거로 우리에게 유명한 홍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다. 공원 내부에 루쉰기념관도 같이 있다.
이육사가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기도 했다.
루쉰의 일기를 보면 루쉰은 하루에 대단히 많은 양의 글을 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루쉰은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태도로 쉼 없이 일했다.[52]
중국의 소설가 위화는 수필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한 친구와의 사소한 논쟁에서 불현듯 떠오른 "루쉰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던 그 친구의 입을 다물게 한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루쉰이 기본적으로 반유교, 반전통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서양으로부터의 혁명 사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텍스트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목적 차원에서 적극 권장될 만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는 위대한 문학인이자 또한 위대한 사상가였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한창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어수선하던 시대였는데, 그 서슬퍼렇던 문혁 시절조차 루쉰의 이름이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그러나 개혁과 개방 이후로 점점 사회주의적인 인력이 약해지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재고가 일어나면서 노신의 위상도 예전보다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무협소설로 이름났던 김용도 자신의 《천룡팔부》 등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보면서 "중국이 서양중심적 문학에서 다시 전통문학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와사등」, 「외인촌」, 「설야」, 「추일서정」등으로 수험생들에게도 익숙한 시인 김광균이 「노신」 이라는 시를 썼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인이자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 해야하는 가장이기에,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시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화자는 노신을 떠올리며 그가 굳은 결심으로 고난를 헤쳐나간 것처럼 마음을 다잡는다.
루쉰 구글
2011년 루쉰 탄생 13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나왔다.
북대최초로고
베이징대학의 로고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A sticker about ...
번역:
위키백과는 쓰레기야! —루쉰
나 그런말 한적 없어. —루쉰
중국에서는 지식인의 상징같은 인물이기도 하고 많은 명언을 남긴 인물이라 그의 이미지에다가 출처가 불분명한 명언을 써놓기도 한다.#
루쉰은 삼국지연의를 "유비의 후덕함을 나타내려 했으나 오히려 위선자처럼 되어버렸다."고 평가했다
사기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53]라고 극찬했다. 또한 홍루몽을 《홍루몽》이 나타난 이후로 전통소설의 모든 사상과 작법이 타파되었다.”라고 평했다.
루쉰에 관심이 있다면 먼저 루쉰의 전기나 평전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읽을 만한 루쉰의 전기나 평전이 꽤 출간되어 있다. 일반 독자들이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왕스징(王士菁)이 지은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다섯수레, 1992)를 권한다. 1949년 초판이 발행되었던 터라 다소 딱딱하고 경전화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루쉰의 인간적인 면모를 맛보고 싶다면 루쉰의 아들 저우하이잉(周海O)이 지은 <나의 아버지 루쉰>(강, 2008)을 읽는 게 좋다. 루쉰의 자질구레한 가정사로부터 문단의 일사까지 두루 맛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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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황허강 72 열사 공원 묘지에는 (왼쪽부터) 광저우 출신인 홍수전, 쑨원, 루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가 80년 전 쓴 편지 한 통이 2013년 경매에서 약 12억원에 경매에서 낙찰되기도 했다. 21일 중국 청두상바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6일부터 닷새간 열린 자더 경매에서 루쉰이 1934년 6월 8일 쓴 220자 분량의 '타오캉더에게 보내는 편지'가 655만 5,000위안(약 11억 5,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원래 감정가인 180만~220만위안보다 3배 높은 가격이다. 한 글자당 가치가 3만위안(약 520만원)에 달하는 셈이다.#
2019년 루쉰의 말을 인용한 트위터 계정이 폐쇄됐다고 보도 됐다. 중국에서는 현재 트위터가 차단되고 있지만, 중국의 많은 사용자들이 VPN을 사용하여 SNS에 접속하고 있으며, 2018년 중국 관리들은 그것의 사용을 점점 더 단속하여,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게시물을 검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루쉰의 말을 인용한 @luxunbot25라는 사용자는 트위터에 선전 경찰이 자신과 대화할 것을 요청했다고 Quartz는 보도했다.#
2020년대에 중국의 청년실업률이 20%를 넘길정도로 심각해지면서 단편소설 쿵이지(공을기 孔乙己)가 재조명을 받아 큰 인기를 끌고있고, 패러디 문학도 유행하고 있다. 대학정원 증가와 교육열로 대학에 진학하는 청년들은 크게 늘어났지만, 야간자율학습과 과도한 사교육까지 받으며 밤 늦도록 공부하고, 가오카오 시험을 뚫어서 어렵사리 대학 졸업해도 질 좋은 일자리는 경제성장률 저하로 그만큼 증가하지 않아서, 기대했던 대기업이나 공무원에 취직하기는 더럽게 힘든데, 그렇다고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공장에서 일하거나, 건설직에서 일하는것을 대학에 간 매몰비용이 아깝다며 기피하거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좋은직장에 취직하라고 닦달거리면서 별수 없이 가망이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대기업에 입사 지원서를 수없이 내거나 합격률이 매우 낮은 공무원 시험에 인생을 걸며 응시하고 낙방하는것을 반복하거나 그마저도 포기하고 별수없이 저임금직이나 3D업종이라도 취직해서 비싼 생활비를 감당하는 모습을 과거 시험 장수생인 쿵이지에 비추며 풍자하거나 자조하는것이다. 이런 패러디 글들을 '쿵이지 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 당국에서 이런글을 삭제조치하기도 하지만, 취업난이 해소된것도 아니고, 당국에서 제공하는 일자리가 땜빵용이라 대체적으로 질이 낮기 때문에 회자자체는 계속 되는 중이다. 같은 중화권인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에서는 예전에 겪어왔던적이 있거나 겪고있는지라 딱히 특별하지 않다는 반응이다.
루쉰은 쿵이지를 통해 오랜시간 존속했다가 폐지된 과거시험에 목숨을 걸다가 몰락한 지식인이 밥벌이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체면만 차리는 모습을 풍자했다.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서 몰락한 주인공 쿵이지는 매우 궁핍하며서도 고급 문체를 남발하고 지적 허세를 부리지만 돈벌이를 하거나 신체 노동은 하지 않는다. 선비 신분을 상징하는 낡은 장삼을 끝내 벗지 않고 다니지만 결국 생계를 위해 도둑질까지 하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종적을 감춘다는 식의 내용이다. 한국으로 치면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과 비슷한 작품인 셈인데,[54] 중국 교과서에서는 많이 실린 작품인지라 인지도 자체는 높았고, 종종 패러디되기도 했다.
랴오닝성의 대학교인 루쉰미술학원은 루쉰의 이름을 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