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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미국신탁 정부수립
1945년 광복이후에 미국은 한국이 [유교사상] [불교사상] [기독교사상] [천주교사상] [일제앞잡이] [자칭독립군] 등등의 이념전쟁과 이기집단들의 부패욕심과 패걸이 싸움으로 인하여 한국인 스스로는 질서를 바로잡기가 힘들다는 판단으로 미국이 대신 통치하겠다고 하였다..이때부터 미국은 신탁통치를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선 반발이 거셌으나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소련이 영향권을 행사하고, 남에는 미국이 진주하게 됩니다.. 결국 북한은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의 공산당 세력이 활개를 치게되고 남한은 남한대로의 유교사상과 기독교사상이 짬뽕되면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종교사상과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한 정부를 가질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48년 남한엔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은 북한만의 정부가 수립됩니다. 결국 2년후인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2. 4. 19. 학생혁명의거와 5. 16군사 혁명의거 확산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부정으로 모은 금권력과 선거종사원들의 매수와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입니다..이러한 학생들의 혁명운동이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하자 다시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이로인해 한국이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3. 79. 10월 부산시민항쟁
1977부터 노동자들도 외국 유학생들과 언론으로부터 온갖 정보를 입수하기 시작하면서 부산 연합철강과 동국제강 동명목재 성창합판 등등의 재벌기업에서 갑짜기 소득분배민주화 원칙을 내세우면서 노사분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서민들과 노동자들은 도덕과 양심이 풍부한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나는 동명목재 조립식주택 각종 도아(창문+방문+대문+등등)분야의 팀장이었지만 기술수당이 다른 중졸기술자 보다도 적어서 고졸출신들의 임금 현실화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라도 친구로부터 대모를 하자는 제안을 수용하기로 하고는 대대적인 조직구성이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제1공장의 대모 주동자인 나모씨(호남인)가 대모가담명단을 회사측에 빼았기면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전개되었고, 그래서 기장진급심사에서 떨어진 나는 더 이상 팀장 자리를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주택기기과 과장은 공장장에게 시말서를 받아오라는 지시를 하였고, 공장장은 나에게 앞으로 대모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받아갔다...
하지만 처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장장은 각 팀장들을 모아 놓고는 앞으로 팀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하면서 왕따가 시작되었고, 나는 살아 남기 위해서 복숭아를 한박스 사서 공장장집으로 찾아갔다. 공장장은 펄떡 뛰면서 복숭아 박스를 거부하였고 그래서 대모를 하지 않을테니까 특별감시와 왕따를 풀어 달라고 사정사정을 하고는 돌려주는 복숭아 박스를 그집 부뚜막에 버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대모집행부는 다시 개편되었고, 나의 임무는 조림식주택 살문조와 아트도아분야와 그리고 비품가구조원들을 포섭하는 임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조원들이 나의 행동을 상부에 보고했고 나는 그 직원에게 진위여부를 물어보다가 다시 과장의 지시를 받은 공장장에게 사직서 강요를 받기 시작하면서 결국 회사에서 쫒겨 나왔다...
그길로 부산 수정동에 있는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의 집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더렸으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서 기술수당이 적어서 소득분배민주화 토론을 하려고 한 것이지 대모를 시도한 사실은 없다는 편지를 적어서 대문 우체함에 끼워 놓고는 6총 형님이 경영하는 부산 남포동 동명백화점과 로얄호텔 신축현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동명백화점 건물관리과장으로 취업하여 중부소방서 소방관리자격증34호를 취득하여 백화점과 호텔소방관리업무를 담당하였다. 당시 재부 창녕군 장학회장인 6촌 형님(황석출)은 엄청난 돈을 창녕군 장학회에 쏟아부었고, 또 야당과 여당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정치자금을 지출하면서도 나에게는 학비를 쫌 보태어 주지를 않아서 나는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6촌 형님은 영어실력이 좋아서 6. 25. 전쟁 때에 미군 사령부 헌병중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을 지휘하거나 한국 영관급 진급심사를 도맡아서 관리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지금의 부산 동서대학교 총수인 장성만 장교를 알았던 것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또 미군부대가 지급하는 한국군 예산까지 감시한 경력으로 박정희 장군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활을 하였다....
그래서 창녕 중, 고등학교 영어선생을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려가서는 미군들과 잘 통한다는 이유로 한국 경제를 쫌 살려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부산의 동명목재 총무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그때부터 형님은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후진국 지원자금을 끌어들이면서 동명목재를 굴지의 재벌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창녕군 재부 장학회장인 황석출 총무부장의 아이템으로 동명목재는 동명산업 동명페인트 동명중장비 등등으로 사업이 확대되면서 형님은 아들을 낳기 위하여 제2의 부인을 맞이하였고, 제2의 작은 형수는 부산로얄호텔과 남포동 동명백화점을 설계하고 있었던 때에 결혼식을 올렸다..그때부터 큰부인과 작은 부인의 앙금이 시작되었다....
내가 창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황석출 형님의 장학금을 안 받은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창녕군 재부 장학회회장 황석출은 창녕군민들은 물론이고, 모든 친척들 선망의 대상이요 우상의 대상이었음으로 나는 형님께서 대모하는데 가지말라는 명령에 적극적으로 따랐다...
형님은 창녕 사람들을 동명목재로 취업시켜 주면서 선거철만 다가오면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후원하였고 또 동내 사람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을 밀어 주도록 하였다. 그러한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이 신설장관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가 들렸다..그때 나는 형님 모르게 국민직선제를 관철하기 위하여 수시로 구덕운동장과 동아대학교 켐프부근 그리고 남포동과 부산역을 찾아가서 대모에 가담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신설된 통일부장관(추정) 자리로 간다는 6촌 형님이 그러한 대모가담사실을 안다면 나는 맞아 죽거나 직장에서 쫒겨간다는 생각으로 숨어서 직선제 민주화 운동을 했다...당시만 해도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면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이루어 질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한 희망으로 민주화 대모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민주화가 되면은 그렇지 않았다.. 뒷 구석에 숨어서 기회만 엿보던 사람들이 항상 재빠르게 권력을 잡는다..그리고는 권력을 중간에서 강탈한 그들로부터 감시를 받게된다..79. 10. 26.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6촌 형님과 우리가족들은 [정치규제] [금융규제] 등등의 규제와 감시자로 몰리면서 사업은 하루 아침에 부도처리가 되었다...
차별은 여기서 멈추지않았다. 79. 10. 26.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들어선 국가보위는 "정치규제자와 금융규제자" 들에게 외국에 이민의 기회를 열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민특혜와 권유로 6촌 형님과 나의 동생들은 전부 호주로 이민을 떠나고 나는 졸지에 실업자가 되면서 사법고시 학원으로 찾아갔다..하지만 학원비가 없어서 사법시험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경찰과 한전직원 등등에는 전부 합격하였지만 사법고시는 떨어졌다.....
민주화는 우리가 이루어 놓았는데 그러한 기회를 가로채는 자들은 엉뚱한 놈들이었다.. 지금도 그때와 다를바는 없다고 본다...노무현의 일등공신은 [기독교청년회와] [노사모]이고, 박근혜 일등공신은 [팬카패와] [영남사람] 등이다. 그런데 자리는 엉뚱한 분들이 차지한다...~<생략>~~
4. 부산시민90% 민중 총궐기의 원인제공.
1978년~ 1979년 부산에서 경찰곤봉에 맞은 대모자와 경찰서에 잡혀간 군중이 늘어나면서 나는 부산역에서 경찰차량에 잡혀갔다..당시 같이 잡혀간 사람들이 인적사항을 거짓말로 불려 주었고, 나도 이름을 거짓으로 불려 주었다..경찰서 유치장에서도 사건부로크가 접근하더니 돈5,000원만 주면은 빼어 주겠다면서 접근하였다..내 호주머니에는 단돈50원 뿐이었다. 6촌 형님의 귀에 들킬까봐서 모든 신분을 속였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직선제와 간선제의 장단점을 듣게되었고, 민주화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도 확실하게 들었다..그리고 시민들을 곤봉으로 때리는 경찰관을 단속하려면 사법고시공부를 해야 한다는 내용도 그때서야 알았다..그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지만 나에게는 정치인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시민,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항한 반 독재투쟁을 벌였다.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된 것에 자극을 받은 부산대생이 교내시위에 이어 거리로 나와 부산시청 앞에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유신철폐,독재타도,야당탄압중지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당시 부산대학은 부민동에 있었고, 동아대학은 서대신동에 있었기 때문에 양쪽 대학의 중심지인 구덕운동장과 국제시장과 중앙동 부산시청은 매일 같이 점령하려는 대모를 하였다. 경찰만으론 감당이 안되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처음에는 해병대가 배치되었다가 해병인력으로 부족하자 다시 공수부대까지 투입하였고, 그래도 시민들의 전진은 거칠 줄을 몰랐다..나는 사법고시학원 부근의 으슥한 인쇄소에서 비밀인쇄를 주문하여 배포하였다...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무력으로 진압했으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나갔고, 남포동 파출소와 광복동 파출소는 수시로 불꽃을 품었고, 경찰차량들은 수시로 전복되어서 방화되었다....이러한 열기는 마산과 창원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공수부대는 고속도로를 차단하기 시작했지만 부산대학과 동아대학교 부경대학교(부산공업대학+수산대학)와 경성대학 등등은 총궐기 하면서 부산시민90%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민심이 천심으로 변한 것이다..경남에서는 마산대생과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들과 맞서 격렬히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부마사태로 이어지기 시작 한 것이다...1979. 10.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까지 합세, 시위가 기층민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일을 기하여 위수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한 결과 엄청난 피해자가 발생하면서 이틀간의 마산시위는 약각 수그려 들었지만 그 불씨는 다시 새로운 지하에서 구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부마항쟁의 불씨는 10.26사태를 촉발 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부산 남포동과 광복동에서는 계속 대모가 이어지면서 군인 가족들의 피해까지 이어지자 군부도 점점 국민들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 같았고, 흑색 선전과 유인물이 뿌려지면서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발생하다가 갑짜기 10. 26 각하 서거사건이 보도되었던 것이다...~<생략>~ ,,..
5. 5.18 광주민주화 운동
1980년 5월에 광주지역에서 비롯된 민주화운동으로 광주민주항쟁, 5.18 광주혁명이라고도 합니다. 전두환 국보위원장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이 부산시민들이 일쿠어 놓은 민주화의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때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으며,특히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부마사태는 서울로 이어졌다가 다시 광주로 퍼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증간에서 가로채는 군사정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으며,신군부 세력은 이에 맞서 5.17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이과정에서 학생들에게 당한 공수부대는 곤봉과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국보위는 광주에 파견할 지휘자를 모집하였고, 그때 호남출신의 최모 장군이 광주 진압작전 책임자로 정해지면서 광주출신의 장군이 광주사태를 해결하는 군사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7일 새벽에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습니다...5.18민주화운동(일명 광주사태)으로 희생된 사람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66명이 사망하고 47명이 행방불명되었고, 28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신군부 세력은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선 전두환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권력을 중간에서 강탈했다거나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았다는 등등의 도덕성과 정통성에서 비난을 받아 왔던 것이다..
6. 6월민주항쟁
1987년 6월 10일을 정점으로 20여일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주화 운동입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공식 주도한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경찰은 6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전국 각지로 분산된 경찰 방어력은 커다란 한계를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시위는 거의 모든지역에서 산발적인 야간 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 투쟁의 형태를 띠었고, 특히 서울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월 15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는 항쟁의 지속과 전국적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국민운동본부는 산발적 시위투쟁을 다시 결집시키기 위해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이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일제히 시작된 이 대회에는 150여만명의 민중이 참여하였습니다
6월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여 6월항쟁의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30여만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서 불구하고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이날 경찰은 전국적으로 10만여명의 경찰병력을 배치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전국적으로 경찰서 2개,파출소 29개소,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정치논문 연구소장 올림>
첫댓글 좌파정권 10년 동안, 역사를 거꾸로 만든 내용들 모조리 재자리로 같다 놓아야 합니다.
1.유공자 재심사
2.민주투사 재심사
3.종복단체 인명록 제작
4.전교조 해산
5.종북단체- 국가보안법 발동-법대로 처벌
6.국가기관에 근무하는 종북인들 색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