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시 모음> 김향숙의 '아버지' 외
+ 아버지
아버지는
태산 같은 존재
나이가 들수록 작은 동산의 둔덕
흔들림 없는
아름드리였다가
누구보다 연약한 갈대
수많은 감정들을
가슴에다 채우고
가장이라는
짐을 지고 휘청대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인 것을!
(백련 김향숙·시인)
+ 아비
연탄장수 울 아비
국화빵 한 무더기 가슴에 품고
행여 식을까봐
월산동 까치고개 숨차게 넘었나니
어린 자식 생각나 걷고 뛰고 넘었나니
오늘은 내가 삼십 년 전 울 아비 되어
햄버거 하나 달랑 들고도
마음부터 급하구나
허이 그 녀석 잠이나 안 들었는지.
(오봉옥·시인, 1962-)
+ 아버지 산소
아버지 산소는 쓸쓸한 곳
떼 덮인 그 위엔 꽃 하나 없고
소나무 숲에선 바람이 울 뿐.
아버지 산소는 쓸쓸한 곳
명절 때 식구가 겨우 찾고는
소나무 숲에선 비둘기 울 뿐.
(이종택·시인)
+ 귀여운 아버지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씨보다 무섭고,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최승자·시인, 1952-)
+ 아버지
아버지와 오랜만에 같은 잠자리에 누웠다.
조그맣게 코고는 소리
벌써 잠이 드신 아버지
많이 피곤하셨나보다.
작지만 야문 손 잡아보고
주름진 얼굴 살며시 바라보다
어느새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아버지도 사람이셨구나.
성황당 나무처럼 마을어귀 장승처럼
백 년이 한결같은 줄로만 알았는데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슬픈
아버지도 사람이셨구나.
그리고 언젠가는
내 할아버지가 가신 길을
아버지도 가시겠지.
(조현정·시인)
+ 한 벌의 양복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손순미·시인, 1964-)
+ 어린 우리 아버지
엊그제까지는 몸도 못 뒤집더니
오늘은 뒤뚱뒤뚱 어쩜 이리 잘 걸으실까
통통통 바닥을 퉁기며 다섯 발짝이나 걸었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 잘 하시네
오른발 왼발 오늘은 걸음마를 떼었으니
내일은 방 한 바퀴 돌아봐야지
아이고 이뻐라
헤벌쭉 헤벌쭉 웃는 우리 아버지
말 배우려는지 못 알아들을 소리로
무어라 혼자 종알거리고
또 꼼지락거리고
화냈다가 흐느끼다가 혼자서 마구 웃는
어여쁜 우리 아버지
그래 그래야지
이제는 아들 얼굴도 알아보고
딸한테도 알은체를 하시네
쥐엄쥐엄 하면 쥐엄쥐엄 잘 따라 하시고
밥 달게 잡수더니 똥도 미끈하게 잘 싸셨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아버지
오줌 똥 못 가려 기저귀 찼어도
과자 주스 먹을 땐
절반쯤은 흘려서 옷이 다 버려도
오물오물 밥 씹는 소리만 들려도 오져라
환하게 웃으면 온 집안이 밝아지는 우리 복덩어리
말도 잘 못하고
혼자서는 잘 걷지도 못하는 어린 우리 아버지
내 살을 갈아서라도 키워야 할
여리고 작은 내 새끼, 우리 아버지
(이대흠·시인, 1968-)
+ 아버지
어릴 때
내 키는 제일 작았지만
구경터 어른들 어깨 너머로
환히 들여다보았었지.
아버지가 나를 높이 안아 주셨으니까.
밝고 넓은 길에선
항상 앞장세우고
어둡고 험한 데선
뒤따르게 하셨지.
무서운 것이 덤빌 땐
아버지는 나를 꼭
가슴속, 품속에 넣고 계셨지.
이젠 나도 자라서
기운 센 아이
아버지를 위해선
앞에도 뒤에도 설 수 있건만
아버지는 멀리 산에만 계시네.
어쩌다 찾아오면
잔디풀, 도라지꽃
주름진 얼굴인 양, 웃는 눈인 양
"너 왔구나?" 하시는 듯
아! 아버지는 정다운 무덤으로
산에만 계시네.
(이원수·아동문학가, 1911-1981)
+ 나의 아버지를 추억함
믿음은
아버지의 깊디깊은 뿌리였다
세상이 변하고
거센 소용돌이 휘몰아칠 때도
한 발 한 발
흔들림 없이 걸어가셨다.
소망은
아버지의 굳센 힘이었다
삶이 힘들고
몸과 마음이 고단할 때도
천국을 사모하며
잔잔한 웃음 잃지 않으셨다.
사랑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다
미움이 흔한 세상
따뜻한 이해와 용서가 없는 곳에서도
부드럽고 넓은 사랑으로
조용히 평화의 씨앗을 뿌리셨다.
그분의 뜻에 합당한
아름다운 한 생을 마감하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내 맘속 늘
빛나는 별이 되셨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첫댓글 좋은 시들이군요 감사합니다
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