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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 안 되는 시험은 없다!
참고말씀: 창22:1,2; 39:12; 출14:21,22; 삼상16:23; 욥1:12; 2:6; 시77:19; 잠27:12; 슥4:6; 빌4:13; 히4:15; 약1:2,5
읽을말씀: 고전10:13
주제말씀: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첫째,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고전10:13 상)
본문은 무엇을 단정 지어서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없다는 점, 즉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10:13 상)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하고 있습니까? 먼저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고전10:13 상) 즉 하나님은 각 사람의 신앙수준을 미리 다 아시고, 그 수준에 맞는 시험들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수준별 시험’을 치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컨대 초등학생에게 초등학생 수준의 시험을, 중학생에게 중학생 수준의 시험을, 고등학생에게 고등학생 수준의 시험을, 대학생에게 대학생 수준의 시험을 치르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신앙수준에 따라서 그 시험의 종류와 강도를 달리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만 봐도 이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대한 마지막 시험(test)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게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1,2)
그런데 만일 이 시험을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했을 때나 그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 때는 이삭이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설령 태어났더라도 그는 필시 흔들리고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수준이 되어 있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언컨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수준별 시험을 치르게 하심이 분명합니다. 즉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시며 그렇지 않는 시험들은 처음부터 배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단을 위한 테스트뿐만 아니라 무엇도 마찬가지입니까? 마귀의 유혹(temptation)입니다. 이 경우에도 각 사람의 신앙 수준에 따라서 선별적으로 제한하시거나 허락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1:12) /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2:6) /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삼상16:23 상) 참고로, 본절의 ‘시험’(히, 페이라스모스)은 신자를 범죄하게 하려는 마귀의 유혹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험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낙담할 게 아니라 의연하고 담대하며,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어째서입니까? 우리에게 닥친 시험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순전히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공급해주시는 힘과 지혜로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왜 또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초등학교 수준의 시험만 치르던 사람에게 중학교 시험지가 주어졌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이미 초등학교 수준을 넘어서 중학교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할 수밖에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젖만 먹다가 밥을 먹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고,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고전3:2 상) 낮은 수준의 시험만 치르다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는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반증임과 동시에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기회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감당이 안 되면 또 피할 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
또 무엇을 근거로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 밖에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감당이 안 되면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
무슨 말입니까?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고전10:13 중)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히4:15 상) 우리가 감당하려다가 도무지 못해낼 것 같으면, 시험 당할 즈음에 우리를 위해 피할 길을 내셔서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NIV영어성경은 ‘피할 길’을 ‘a way out’로 번역하고 있는데,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1 Corinthians 10:13) 이는 ‘나가는 길’, 곧 출구(出口)를 가리킵니다.
이를 통해 어떤 점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에게 닥친 시험은 ‘출구 없는 미로(迷路)’가 절대로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모든 시험에는 반드시 피할 길이 있으며,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형태로 나타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지금 어떻습니까? 혹 끝이 보이지 않는 길로 계속해서 내달리고 있습니까? 혹 길을 잘못 들어서 위험천만한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까? 혹 사방이 다 막히고 퇴로조차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낙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나가는 길’, 곧 출구(出口)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해 앞에 갇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지도 못한 출구를 발견하고 그리로 나아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피할 길을 얻었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출구, 곧 바다 가운데로 만드신 길을 발견하고 그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14:21,22) /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길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77:19)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같은 ‘피할 길’을 보여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우리가 진지하게 임해야 할 과정이므로, ‘나가는 길’이 보일 때까지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 같은 피할 길을 언제 내신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시험당할 즈음입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고전10:13 중) 즉 시험 당하는 과정 중에 내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금물(禁物)입니까? 섣부른 단념이나 포기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더 깨닫게 됩니까? 피하는 것도 감당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점과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7:12) /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창39:12)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 즉 우리가 정공법(正攻法)을 택하든, 아니면 피할 길을 택하든 어떻게 해서라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우리에게 당한 것이 없다는 점을 확신하면서, 무슨 시험을 만나도 온전히 감당해나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혹 감당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러도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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