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의탁하지 아니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2:23~25
요절:“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한복음 24,25)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 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기적과 이적을 많이 나타냄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대하며 열렬히 추종하는 이들이 생겼던 상황인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며 예수님을 묵게 하기도 하며, 예수님을 위하여 후원 단체도 만들어서 예수님 팬 클럽을 만들겠다고 자청하여 후원회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식자층에서도 나타나고 일반 민중들 가운데서 많이 나타나니까 열렬한 예수님의 지원 세력이 되겠다고 자청한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으로서는 사역 초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의 협조 분위기가 큰 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에게 접근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들이 내민 손을 정중하고 조용하게 거절하고서 몇 명 제자들하고만 동행하면서 낮에는 성전에서 사역하시고 밤이면 감람산 한쪽 구석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머물며 쉬기도 하고 기도하면서 예루살렘의 남은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기 몸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호의를 덥썩 덥썩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밝히기를,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의 속을 다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사람이 예수님께 간과 쓸개라도 다 빼줄 것처럼 한다 해도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속 마음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현재의 상황도 다 알고 계시고 그 사람이 후일에 어떻게 변질될 것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사람에게 함부로 기대를 걸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말만 듣고 그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찬란한 약속도 예수님은 그대로 다 믿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한계를 예수님은 깊이 확실히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결코 속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환상을 가지고 지나치게 사람에게 기대를 갖기 쉽습니다. 사람이 뭐라도 다 해줄 것처럼 말할 때 그 사람을 다 믿고 의지합니다. 그 한 예가 일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고 유럽에서 패배의 우울한 분위기에 젖었던 독일 사람들이 정치계에 나타난 히틀러에게 그의 언변에 사로잡혀 열광하며 그를 통하여 모든 것을 다 회복할 줄 알았던 것과 같습니다. 히틀러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던 독일인들을 구해줄 구세주처럼 여겨졌습니다.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걸고 그를 통하여 놀라운 민족적 성취를 이룰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유럽은 다시 전쟁에 휘말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독일은 또 다시 깊은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불완전한 존재인 까닭에 그에게 온통 기대를 걸면 그로 인하여 쓰라린 아픔을 겪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변덕스럽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상황을 다 지배하고 이기며 그 마음의 원하는 바를 다 이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칠 마음이 있었습니다. 죽는 데도, 옥에도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가졌던 마음의 결심과 달리 상황이 급박하고 위험하게 되니까 베드로의 처음 결심은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잡히신 그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므로써 지극히 초라하고 부끄러운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큰 소리 치며 호언 장담할 때에 예수님은 그 말을 다 믿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의 면전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는 그 서글프고 가슴 아픈 일을 겪으실 때에도 깊이 상처를 받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삼일 후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 오후 나절에 베드로에게 조용히 나타나 그의 부활 사실을 알리면서 베드로를 조용히 품어주십니다. 베드로 마음의 자책과 슬픔과 상처를 싸매어주며 다시 일으켜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어떠한 착각이나 환상이 없으셨기에, 상처도 이겨내셨고 사람을 믿지 않았고 그가 실패하였을 때에도 그를 기꺼이 용서하고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에 대하여 바른 관점을 가지도록 합시다. 인간에 대한 환상을 품지 맙시다. 지혜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전도서 6:10 말씀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원문에 보면, ‘사람’이라는 단어는 ‘아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흙, 먼지라는 ‘아다마’라는 단어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 줌 흙먼지로 돌아가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한 줄기 바람이며 한 장의 나뭇잎에 불과합니다. 결국 이렇게 허약하고 약한 존재가 인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 인간을 의지하고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인간은 짧은 인간 살다가 그의 경험 안에 갇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경험과 인간의 정신적 한계 속에 갇혀서 살아가다 결국 그렇게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한계가 분명한 인간을 온전히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만물들을 지탱하며 모든 사람들을 먹이시고 가문과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하시는 영원하신 대주재이신 하나님 한분만이 참으로 의지할 자요 그의 통치의 원리인 지혜를 알고 그 지혜의 다스리심에 우리의 삶의 방식을 맡기는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하는 남편, 아내, 부모님, 자녀들까지도 연약한 사람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러할진대 사람에게 함부로 속지 아니할 것이며 그렇게 사람을 믿고서 그로 인하여 실망과 상처를 받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럴진대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없을 것이며, 사람들 때문에 절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직 살아가는 동안 완전하신 반석이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면서 우리 모두 견고하게 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한 줌 흙과 같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사람들을 더욱 이해하면서 우리 모두 자기의 자리에서 굳건히 서서 기도하며 축복하며 불쌍히 여기며 기도해주며 세워주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