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5-7 사도들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일곱을 뽑아 기도로 축복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성장하고 믿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갔다.
이전 말씀에서 사도들은 식탁 봉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두는 것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그들에게 가르치고 섬기는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섬기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일곱 집사를 뽑은 뒤 말씀이 계속 퍼져나가고 제자들의 수가 늘어갔다는 내용이다.
원어에서 5절은 "기쁨이 되었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개역은 “이 말을 기뻐하여” 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라고 번역했다. 둘 다 이 말을 목적어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이 말이 주격이다. 원어를 직역하면 "그 말이 많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기쁨이 되었다" 라는 뜻이다. 숫자가 많다는 말에 모든 이라는 말을 붙였기에 그 말이 만장일치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뜻이다. 2절에서는 하나님 기뻐 받으실 일이 아니었는데 이제 하나님 기뻐 받으실 일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들에게 기쁨이 된 것이다.
그래서 뽑은 사람 중 첫째는 스데반이다.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원어를 보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은 스데반을 수식하는 말이다. 다수는 이 말이 스데반을 수식하는 말로 해석한다. 새번역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이 모든 일곱 사람을 꾸미는 말처럼 오해하도록 번역이 되었다. 그러나 개역을 보면 스데반을 꾸미는 말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가가 스데반을 첫번째로 거명을 하고 이러한 말로 수식한 것은 바로 이어지는 그의 순교를 준비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것은 3절에서는 분명히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으라 했는데 5절에서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지혜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믿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간직하고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야고보도 말로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스데반은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7장에 보면 일곱 사람들 중에 복음 전하다가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다. 만약 음식 나누는 일로 일곱을 세웠다면 스데반은 정말 주제 넘은 일을 한 것이다. 음식 나누는 일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을 필요도 없다. 지혜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현명하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곱 집사는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아 말씀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는 일을 맡기려는 것이다. 스데반은 그 중에서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것에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 모든 회중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거명이 되고 뽑힌 것이다.
두번째 나오는 빌립은 8장에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전도한 사람이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빌립은 해외 선교사로 나간 셈이다. 음식 나누는 일 하라고 뽑아 놓았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멀리 나가는 것도 역시 주제 넘은 일을 한 것이다. 5세기 글에 의하면 브로고로는 사도요한의 조수였고 Nicomedia 교회의 감독이었는데 안디옥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음식을 나누는 일로 뽑힌 사람이 나중에 목회자가 된 것도 역시 주제 넘은 일이다. 이를 보아도 일곱 사람들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섬기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뽑은 것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니골라"는 안디옥 출신 이방인인데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이라고 설명이 붙어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모두 유대인들이란 뜻이다. 오직 니골라만이 이방인이었는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니골라는 예수를 믿기 이전에 이미 유대교로 개종을 하고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켜며 산 사람이다. 나머지 여섯은 모두 유대인이다.
일곱사람은 모두 다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스식 이름만 가지고 일곱 사람 모두 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열두제자 중에서 그리스식 이름인 빌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곱 사람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다. 이는 이방인들 사는 지역으로 나가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을 섬기며 복음 전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스말을 하는 유대인들을 뽑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 근거는 숫자에서도 볼 수 있다. 12 사도들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지만 7은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유대지역에서 행하신 기적에서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방지역에서 행하신 기적에서는 7개의 떡으로 4000명을 먹이고 7광주리가 남았다고 했다. 12은 이스라엘을 상징하지만 7은 분명히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던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일곱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하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일곱 사람은 밖으로 나가 섬기며 복음 전하게 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8:26절에서 주의 천사가 빌립을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사도들이 일곱사람을 뽑아 세운 것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한 것일 것이다. 이들을 통해 앞으로 이방지역들에 복음을 전하고 섬기도록 하실 계획일 것이다.
6절에 보면 일곱사람들을 사도들 앞에 세우고 기도를 한 뒤에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여기서 손을 얹은 것을 오늘날 안수하여 직분자를 세우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수는 이러한 기도와 안수가 오늘날 안수식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데 동의한다. 손을 얹는 것은 구약에서 축복의 의미이다. 집사라는 제도를 만들고 그 직분으로 세우기 위해 안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주시길 기도하며 일을 맡긴것이다. 당시 초대교회는 그러한 제도화된 직분이 없었다.
일곱사람을 세운 것은 출애굽기 18:13-26절과 신명기 1:9-18절에서 모세가 백성들의 지도자를 세우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신명기 1:9-10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서 모세 혼자서 지도할 책임을 질 수 없었다고 했다. 오늘 말씀에서도 역시 숫자가 많아져서 12사도들이 모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곱사람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말을 하던 사람들의 불만은 단지 자신들의 과부들을 돕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지자 본래부터 본토에 살면서 아람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다가 돌아온 그리스 말을 하던 유대인들간의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는 사도들의 손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자 이러한 갈등이 생기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흩어질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해결한 것이다.
이렇게 문제가 해결이 되자 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퍼져나갔다는 말은 계속해서 자라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만약 음식 나누고 섬기는 일만 맡기기 위해 일곱을 세웠다면 하나님 말씀이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말은 연결이 안된다. 성령과 하나님 말씀의 지혜로 가득 찬 사람 일곱이 말씀을 나누어 주고 음식도 나누어주며 섬겼기에 그 말씀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란다는 말은 누가복음 8:4-15절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염두에 두고 쓴 말이다. 이제 하나님 말씀이 성장해 나가는 것을 방해하던 가시덤불은 치워졌기에 좋은 땅이 되어 계속해서 자라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백배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계속 자랄 것이다. 또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부쩍 늘어갔다고 했다. 역시 계속해서 급격하게 늘어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성장하자 제자들의 수도 계속해서 급격하게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7절 뒷부분에는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라고 했다. 제사장들이란 사도들을 적대시했던 사두개파 사람들이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수천명의 제사장들이 있어다고 한다. 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이렇게 많은 제사장들 중에 소외된 제사장들이 믿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적대시하던 제사장들이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제사장이나 성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고위직 제사장들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소외된 제사장들만 믿게 되었다는 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다. 본문의 문맥은 계속 제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많은 제사장들까지도 믿게 되었다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으로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히 사도들을 적대시했던 사람들이 변화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두개파 제사장들중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자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파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어지는 8절에서 스데판이 체포되고 설교하다가 죽게되는 것도 많은 제사장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까지도 상당수를 빼앗겼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