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시간이 빠듯합니다.
그래서 마음 먹고 일기를 쓰는 것도 어느 땐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새벽에 시간을 조금 할애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산골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80년대의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그리고 작년 연말에 조간신문에
게재되었던 기사를 원용하여 스토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제목은 '호리천리'입니다.
언제나 바쁜 일상이지만 조금씩 짬을 내서 각종 사진들과 자료들을 자주 정리하곤 한다.
아주 오래된 사진들부터 최근 스크랩까지 테마별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15년도 넘게 이어오고 있는 거의 습관같은 작업이다.
그런 작업을 할 때마다 내 블로그는 유용하면서도 넓고 깊은 추억의 저장창고가 되어 준다.
고맙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약 17,000장 이상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테마별로 정리했고 걔네들 밑에 그때 그 순간들의 追憶과 느낌표들을 세세하게 기록하려 노력했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 과정들이 삶의 긴급도는 미약할지라도 의미와 중요도는 크게 와닿는 소중한 작업이었다.
분량이 많아 한꺼번에 처리할 순 없었다.
아주 오래된 사진들은 대부분 앨범 안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잠들어 있는 형편이었다.
그 수많은 사진들을 낱장으로 스캔하여 블로그에 옮기고 각각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하는 작업은 절대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당차게 시작은 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갈길이 매우 멀었다.
그렇다고 중단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많은 정성과 시간이 소요될 뿐 결코 난해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한 개인의 긴 인생역정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인문학적 소재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점증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나의 三世와 四世들을 위해, 언젠가는 꼭 脫稿하겠다는 심정으로 매주 한 걸음 두 걸음씩 줄기차게 이어갔다.
그런 마음으로 작업을 해온 지 벌써 15년.
만만찮은 성상이 흘렀다.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발짝씩만 진행해 나갈 예정이다.
정리된 블로그는 장점도 많았고 활용가치도 무척이나 커졌다.
예컨대, 고교시절 제주도 수학여행 때 찍었던 사진들이 보고싶거나 필요하면 먼지묻은 앨범을 찾거나 뒤적거리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됐다.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원하는 자료들을 뽑아 쓸 수 있었고,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이들 유치원 때 모습들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느 특정 여행지에서의 추억들이 그리울 때면
아내와 함께 커피잔을 앞에 둔 채 같은 모니터를 보면서 대화를 이어가거나 행복한 회상에 잠길 수도 있어 그저 감사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있다는 것.
그것은 그 자료가 무엇이건 간에 그 자체로 인생의 큰 資産이자 祝福이라는 걸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사진들을 정리하다보면 2-30년 또는 3-40년도 더 지난 아주 오래된 추억들과 마주할 때가 왕왕 있다.
때로는 매우 흐뭇하고 때론 왠지 모를 저릿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캠퍼스 시절에 나도 몇개의 동아리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었다.
그 중 하나가 봉사활동 동아리였고 나머지들은 야학과 운동 동아리였다.
봉사 동아리(바인, VINE)에서는 방학때만 되면 강원도 영월군의 어느 깊숙한 산골로 달려가곤 했었다.
옛날에는 무엇보다도 교통이 매우 불편했었다.
내 지인들에게 그 지역에 대한 얘길 꺼내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만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격오지였다.
깊은 산 속 하늘 아래 첫 동네였고 진짜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산골 주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도 하루에 겨우 한두 번 정도만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정말로 순박했고 끈끈한 정이 깊고 융숭했다.
대학생들은 낮에는 주로 논일, 밭일, 도로확장 공사, 마을정비, 어린 학생들 교육 등 다양한 일들을 진행했다.
밤에는 국민학교(분교)로 지역 주민들을 초청하여 미니음악회, 장기자랑, 문예발표회, 경로잔치, 토론회 등을 열기도 했었다.
밤낮으로 모두가 열정적으로 임했다.
그런 서울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산골 주민들도 아낌없는 同參과 박수를 보내주셨다.
그렇게 서로에게 유익하고 내실있는 일주일 정도의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질 때면 주민들도 우리들도 서운함과 아쉬움에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내곤 했었다.
특히 순박하기 그지 없던 아이들은 석별을 몹시도 힘들어 했다.
먼지 풀풀 날리는 울퉁불퉁한 신작로 길.
우리들이 탄 버스가 출발하면 그 길을 따라 울며불며 눈물 콧물이 범벅인 채로 버스를 따라오는 소년들도 있었다.
부끄럼 많던 소녀들은 벽 뒤나 나무 뒤에 숨어서 소리없이 눈물을 찍어냈다.
우리들도 버스안에서 계속 눈물을 훔쳤다.
슬픈 이별 앞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쏟아내던 그 산골소년들의 순진무구한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군대 다녀오고, 캠퍼스를 떠나 사회에 진출했다.
열정적으로 일했고 결혼 후 애들 키우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는 새 30년이란 긴 세월이 그야말로 비호처럼 흘렀다.
우리가 캠퍼스에 있었던 팔십 년대 초중반, 그땐 전두환 정부의 철권통치 시대였다.
대학생이었지만 남자들은 모두가 교련복을 입어야 했고 다양한 군사훈련을 이수해야만 했다.
그때 그 사진들을 지금 다시 봐도 헛헛한 웃음이 자꾸만 흐른다.
교련복이 지금도 살갑게 느껴지진 않지만 그래도 山村에서 봉사활동을 할 땐 그 복장이 참 편하고 유용하기 그지 없었다.
지난 연말에도 짬을 내서 내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 전 강원도 산골에서 봉사활동했던 사진들을 다시 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다채로운 추억들이 내 가슴팍을 알싸하게 적시며 흘렀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우리 봉사 동아리에 대한 新聞記事를 읽었다.
2015년 12월 15일자 조선일보였다.
새벽 큐티를 마치고 신문을 펼쳤는데 우리들에 관한 감동적인 얘기들이 씌여 있었다.
'바인 봉사대'
기쁘기도 했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했고 그저 놀라웠다.
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몇번이고 탐독했다.
가슴 뭉클한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여기에 그 기사를 원문 그대로 소개해 본다.
봉사대 덕분에 아이들은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갔다.
이들은 열흘간 마을에 머물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짓기와 노래·율동을 가르치고, 체육대회도 열어 함께 뛰었다고 한다.
김씨는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에겐 화장실이나 잠자리 등에서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줬다"고 말했다.
당시 산골 마을엔 TV는 물론 전화 한 대도 없었다.
김씨는 "우리 또래에겐 방학마다 찾아오는 대학생 언니·오빠들이 바깥세상과 이어지는 '창(窓)'이었다"고 했다.
김씨가 태어나서 처음 본 '서울 사람'도 바인 봉사대 단원들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지금도 봉사대가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한 후 공책을 받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는 "평소 일기를 쓰던 공책은 누르스름한 갱지(更紙)였는데 상품으로 빳빳한 하얀 종이로 만들어진 고급 공책을 받았다"며 "그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고 했다.
벌써 40년이 지나 당시 마을을 찾은 봉사대 단원의 얼굴과 이름은 흐릿해졌지만, 함께 불렀던 노랫말과 율동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산골 소녀'가 성인이 돼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렸고, 50대에 접어들었지만 늘 바인 봉사대 대학생들과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고 한다.
김씨는 "고향(원주)에 가려고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면 저 멀리 경희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며 "그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설렜다"고 했다.
경희대를 졸업한 직장 후배에게 바인 봉사대가 아직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김씨는 기부를 결심하게 됐다.
김씨는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했다.
원래 1000만원을 기부하려 했지만 형편상 일단 600만원만 냈다.
생활비를 쪼개 돈이 모이는 대로 나머지 400만원을 다 채우는 것이 김씨의 목표다.
김씨의 기부 소식에 경희대 측은 1970년대 당시 바인 봉사단원들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연락이 닿은 초로(初老)의 봉사단원 3명과 김씨가 지난 8일 경기도 성남의 한 식당에서 43년 만에 만났다.
김씨가 바인 봉사대로부터 받은 글짓기 상장을 꺼내자, 당시 봉사대장 류근성(64)씨는 "상장 밑에 적힌 수 -->여자가 바로 나"라며 "40여 년 전 꼬마 소녀를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라고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서로의 얼굴이 낯설었지만 김씨가 40여 년 전 배운 노랫말을 선창하자 자리에 함께한 봉사단원들이 따라 불렀다.
"앞을 보고 살아가자. 보다 나은 내일 없이, 무슨 재미에 살리요. 우리도 기쓰고 일어서서 잘살아보세."
김씨가 평생 잊지 못한 노랫가락이었다.
(신문기사 원문 끝)
그랬다.
세상은 나눔이며 베풂이었다.
호리천리(毫釐千里)라는 말이 있다.
현재는 아주 작은 깃털 만큼의 차이지만 훗날엔 천리만큼의 극심한 차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의 작은 선행이나 나눔일지라도 숱한 세월이 흐른 뒤 풍성한 포도송이로 열매 맺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향기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매우 젊었던 청춘의 시기, 자신의 일처럼 적극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봉사와 나눔의 현장에서 열과 성을 다했던 '바인봉사대' 선후배님들께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또한 엉성하고 미진한 점이 많았던 우리 대학생들을 한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매번 흔쾌하게 품어주셨던 영월의 순박한 주민들께도 거듭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40여년 전의 毫釐가 千里를 뛰어넘어 구랍 세모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우리에겐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사랑하는 모든 분들.
오늘 하루도 내내 행복하시고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미소 한 번 더 건네보시길.
잔잔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한 번이 나비효과가 되어 훗날 우리 모두를 웃음짓게 만드는 큰 행복나무로 무럭무럭 자랄 것이라 믿는다.
가능한 한 입은 닫고 묵묵히 실천하며 사는 인생, 정말이지 사는 맛이 물씬 난다.
주님의 임재를 기도하면서.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