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정보를 준다는 전화와 문자가 수도 없이 온다
특히 주식 관련 정보는 도를 넘는다
주식을 20년이 넘게 하는 사람으로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공짜가 좋다.
값이나 삯을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보면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공것이라도 그것을 얻기까지에는 다른 무엇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전이나 다른 재화가 아니면 시간이라든지 물질 외적인 노력 등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짜를 좋아하면서도 가령 어린이날이나 다른 특정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
무료라고 고궁이나 놀이시설을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공짜라고 미어터지는 인파로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쇠파리도 암컷과 교미하려면 먹이를 물어다 주고
암컷이 먹이를 먹는 동안에 교미한다고 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공짜는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공짜를 외치는 멜과 문자가 쇄도한다.
읽지도 않고 삭제하지만 간혹 걸려오는 전화에 응답하는 수가 있다.
`20년 후에 봅시다.`
`좀 전까지 기분이 좋았는데 이 전화받으면서 기분이 흐트러졌소이다.` 고 너스레를 떨며 답을 하는 게 다반사지만
가끔은 그들도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건데 굳이 타박하는 건 좀 그렇다는 자문자답을 하기도 한다.
아래 오래전 글을 덧붙인다.
나는 '에이즈 환자'였다.
그랬다.
내가 앓았던 병의 始發이 에이즈(?)였다.
평소에 건강했고 늘 잘 먹고, 잘 싸고(?) 잘 잤기에 내가 그런 끔찍한 병에 걸리리라곤 생각도 못 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을 하였고 언젠가는 그놈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잔뜩 벼르고도 있다.
이젠 미련하게 all in 따윈 하지 않으려 무지 노력한다.
의학분류번호(?) 054630 에이디칩스 이놈이 그 실체다. 병에 걸린 것은 2002년 4월 그 해 지수가 가장 높았던 8일을 전후해서였다. 그날 이후 꼭 1년을 내리 꽂히기만 했으니..
평소에 매월 일정액을 적금을 붓듯 (파란 물감과 노란 물감만 갖고 놀겠다고) 착실하게 한 발, 한 발 내딛던 발걸음이 갑자기 급해진 건 짧은 기간 수중에 머무르게 된 돈으로 관심 밖이었던 에이디칩스 1,000주를(46,000원)에 덜컥 사면서부터였다. 불과 10분 만에 480만 원이 넘는 수익이 생긴 것이었다. 그게 독이었던 것을 깨달은 건 2년 가까이 데이트레이딩으로 변신하고서 네, 다섯 개의 hundred million을 갖다 버리고 난 후였다. 평소에 주식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관련 책과 자료 등을 챙기며 10명 중의 9명은 깡통을 찬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며 거의 2년 이상을 준비했음에도 일순간에 얻은 수백만 원의 이익에 광분하고 말았던 것이다.
간간이 쓰디쓴 경험을 되새기며, 수순을 되짚어 보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가장 큰 적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2년 동안 거의 20년 가까이해 온 일의 거래처를 상당수 잃어버렸고 체중이 5~6kg이 불었고 남은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나 마눌이 죽었을 때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내가 취한 태도는 옳았었음에 스스로 감사한다. 남들 같으면 자살을 꿈꿀 때 남은 돈을 박박 긁어 사이버 대학에 등록하여 MT까지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6과목 중 4과목은 A+/ A/ B+/ B를 얻었고 나머지 두 개 중 하난 C 또 한 과목은 학점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어쨌든 이제, 그 폐허의 현장에서 한쪽 발을 빼고 있다. 지난 8개월 동안 초심으로 새로운 거래처를 개척하고 다듬고 있다. 언제나 쉬운 일은 없는 거지만 참으로 힘에 겨웠다. 하지만 젊어서는 '어려운 일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도 극복할 가치가 있었다. '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고 책을 보다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비지!' 따위의 글이 눈에 띄면 밑줄을 쫙~~ 긋고 '비빌 언덕을 만들어 놓고 말하자!'라고 써넣곤 했었다.
'40 이 넘어 다시 일어서기가 싶지 않다.'라는 어떤 COPY도 있지만 50 이 내일모레인 상황에서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일요일 T.V를 보는데 외국의 어떤 모험가가 폭포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모험을 즐기다가 폭포에 휩쓸려 척추를 심하게 다쳤다. 수개월을 치료하고 재활 훈련을 거친 후에 다시 그 자리에 서는 것을 보고 전율을 느낀 적이 있다. 그렇게 살지는 못할 망정 시시포스의 신화가 말해 주듯 구르는 돌을 다시 추스르는 것이 인생임을 조금은 이해하니까.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
2004. 09. 22.
길어지려는 글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다 보니 충분한 표현이 되질 않지만, 추석이 지나면 어차피 이렇게 한가롭게 자주, 오래 게시판을 점거할 일이 드물 것이기에, 좀 느슨해진 일과를 이런 잡글로 대신한다.
글:매조지 그림: 매조지 DB/ World of Business/W eb
출처: https://maejoji.tistory.com/entry/◆-나는-에이즈-환자-였다 [↘↘ 햇볕이 드는 창가]
첫댓글 공짜 뒤에는
항상 숨은 댓가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크면 클 수록 위험도가 높아지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