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요순이 다스린 지역이 황화 유역이 아닌 양자강 중하류 지역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상당한 반향이 있는 듯 합니다. 이에 앞으로 몇회에 걸쳐 황화유역 중심으로 고정관념화된 역사관의 잘못을 밝혀 나가고 지나 대륙 남방 문화의 실체를 논할까 합니다.
먼저 전편의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맹자]의 이루장구 하편을 보면 순임금은 산동 동이 출신으로 구월산에서 죽었으며 창오의 뜰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월산은 오늘날 회계지방이고 창오는 지나 대륙 남방 변방입니다. 산동 동이족 출신의 순임금이 죽은 곳이 회계지방이고 묻힌 곳이 창오라면 순이 다스린 지역은 양자강 중하류 지역의 강남지방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산동 사람인 순이 어떻게 해서 남방에 홀연히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죠. 요가 순에게 제위를 물려 주었다면 요가 다스린 나라 또한 양자강 유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요와 순이 어느순간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상고시대에 동이족의 대이동이 일어난 원인을 추적하면 역시 헌원과 치우의 결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동령의 [중국민족사]의 고증처럼 치우가 남방 묘족의 나라인 구려국의 임금이었다면 헌원이 치우를 잡아 죽였다는 기록은 왜곡되었음이 분명하고 전후 상황으로 볼 때 헌원과 치우 사이의 강화조약이 맺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이족은 이후 서쪽 헌원의 세력으로 뻗어나갈 길이 막히자 남쪽 강한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 묘족의 임금이 바로 치우였으며 한단고기의 기록 (북쪽제후는 대요)을 볼 때 치우가 요임금을 남방 묘족의 임금으로 삼았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제 치우가 동이족을 이끌고 정복하여 요임금을 제후로 삼은 남방 묘족의 자취를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 역사에서 남방 역사는 전통적인 역사관(황화 유역 중심의 역사관)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것이고 언급된 역사서는 전무한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몇가지 단서로 추적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자가 증언한 [서경]과 [시경]입니다.
[시경]은 공자가 노나라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3,000여편의 시가를 300여수로 간략하여 엮은 일종의 시집입니다. [시경]의 처음은 [주남]과 [소남]으로 시작됩니다. 주 무왕 발이 은 주왕을 멸망시킬 때 미리 강한으로 군사를 보내 배후를 안전하게 했는 바 그 두 장수가 바로 발의 이복동생들인 ‘주공’과 ‘소공’이었습니다. 주자는 [시집전]에서 이남(주남과 소남)의 시가들은 주공과 소공이 강남을 순행하면서 수집한 시가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남의 시가들(피정복민의 시가들)이 주나라 왕실의 노래인 국풍이나 주나라 제후국의 노래들보다도 앞서 [시경]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헤겔이 인류상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고 칭송할만큼 주나라의 예법은 매우 훌륭했다고 합니다만 그 주나라의 예악의 편성을 보면 [시경] 에서처럼 주남과 소남이라는 악장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소남]의 시가 중에는 소공이 자신의 음부를 범했음을, 소공이 머물고, 쉬시던(?) 팥배나무라고 은밀히 폭로하는 여인의 시 [우거진 팥배나무 3장]이 있다는 점입니다. 정복자가 여인을 취했고 그 여인이 쓴 조롱의 시를 수집해간 정복자…….. 주나라 왕실의 노래보다도 높임을 받은 이남의 시가들……..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전 천인들마저도 자유롭게 시를 짓고 읊을 수 있던 사회, 그 사회가 바로 남방의 묘족 사회였습니다. 황화 유역 정복자들의 눈에 비춰진 남국의 문화 수준은 자신을 비방하는 시마저도 수집해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죠. 주나라로서는 문화 중흥의 일대 계기가 바로 주공과 소공의 수집해간 시가로부터 이루어진 것이고 주남과 소남의 시가를 [시경]의 첫부분, 주악의 첫악장에 모심으로써 기념하고 숭앙했던 것입니다. 그 사회가 바로 요순이 다스린 남방의 묘족이었던 것이죠.
한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순이 제위기간 홍수로 수해를 입자 동이족이 도움을 주었고 제위시절 순은 '동쪽 임금을 근조하였다'고 [서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기]에는 순이 우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유폐되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맹자]와 [사기]가 다른 부분인데......
두 사서 중 한쪽은 왜곡이 분명한 것이죠. 여러분들이 철썩같이 믿으시는 정사들도 왜곡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서경]의 순임금의 근조 기록은 동쪽 임금, 즉 당시 정통 동이족인 단군조선을 상국으로 했다는 기록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근'이라는 말은 제후국이 상국에 입조할 때
순과 문왕이야기는 과연 이들이 다른민족이면서 옛사람의 이름을 빌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오랑캐들과 어울려살았는지는 확실히 알수없어서 쉽게 답을 내릴수도 없겠고 서이와 동이가 같은계열인지도 의문입니다. 순의 고향은 제풍.즉,산동이고 문왕의 조상인 후직은 태땅에 봉해졌는데 이곳은 섬서성으로 거리상
문왕이 서이 사람이라고 한 것은 헌원의 족속 중 한 부류가 기풍땅에 봉해졌기 때문입니다. 지나 역사상 서쪽에 있는 夷족이기에 '서이'라고 구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뿌리는 같아도 남쪽으로 내려간 夷족은 '남이'라 불렀을 뿐이며 지나인들을 이들을 통틀어 九夷라고 했습니다.
한번 님의 말을 뒤집어서 거꾸로 말해 볼까요? 왜 지나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고대 인물들을 모두 헌원의 자손이라고 할까요? 한번 의심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님의 말대로 문왕은 헌원의 자손이면서 '서이'인데 순은 헌원의 자손이면서 '동이'라는 것이 의심스럽다면 왜 문왕과 순을 그렇게까지
헌원의 자손이라고 지나 사서가 기록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전욱이나 제곡, 요, 소호 모두 헌원의 자손이라는데.......이것은 철저한 지나 역사의 고대사 왜곡의 실태입니다. 이 왜곡은 일이년의 '동북공정'이 아닌 근 2,000년 간의 '동북공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중국의 고대사는 말이 많고 탈이 많아서 이렇다라고 확장내릴수없습니다. 그래서 사마천이 중국의 고대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것이고 한이후에 중국에서 상서, 죽서기년등의 진위논쟁으로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20세기초 중국의 의고학파는 서주이전의 역사는 단지 전설에 불과할뿐이며 심지어 우는
황제의 자손인 전욱이 초나라의 시조이고 굴원은 초나라의 왕족이었으니 전욱의 후예라고 해도 이상할것은 없지요.
그당시 치우의 세력은 황하하류 산동반도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순은 전욱의 6세손이기도 합니다. -_- 거참 이상하죠? 순이 동이 사람이라는 건 지나 사서가 다 언급하는 부분인데 그렇다면 헌원 또한 동이 사람이 되죠.
지나 학계의 [하상주 삼국도] 등을 보면 요나 순이 남방을 순행할 정도로 화화족의 영역이 큰 게 결코 아닙니다. 초딩사냥꾼님의 말대로 묘족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면 남방 전쟁터, 그것도 적의 심장부를 순행하다가 죽었다니.......상식적인 일이겠습니까?
요순이 다스린 강역이 화북지방이라면 강남을 마음대로 순행할 정도로 지나 대륙이 좁은 영토가 결코 아닙니다. -_-
한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순이 제위기간 홍수로 수해를 입자 동이족이 도움을 주었고 제위시절 순은 '동쪽 임금을 근조하였다'고 [서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기]에는 순이 우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유폐되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맹자]와 [사기]가 다른 부분인데......
두 사서 중 한쪽은 왜곡이 분명한 것이죠. 여러분들이 철썩같이 믿으시는 정사들도 왜곡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서경]의 순임금의 근조 기록은 동쪽 임금, 즉 당시 정통 동이족인 단군조선을 상국으로 했다는 기록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근'이라는 말은 제후국이 상국에 입조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동이족이 순임금에게 도움을 주고 순임금이 근조하는 사이였는데 어느순간 하왕조가 등장하면서 단군조선은 하왕조와 빈번한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따라서 순이 우에게 제위를 순조롭게 양위했다는 기록은 의심스럽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순의 자의적인 양위가 이루어졌다면 갑자기 '하'라는 국호가 등장할 리가 만무합니다. 요순의 통치를 황금시대라 하는데 요순이 다스린 나라 이름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즉 순의 제위 시절 치수담당관인 우는 당시 범람이 잦은 황화유역의 제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치우와 헌원의 대결은 치우의 승리라고 보아야 하겠죠. 아니면 '하'가 치우와 헌원의 강화 이후 세워진 독자적인 왕조였으나 요순시대를 황화 유역의 역사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순의 양위설로 둔갑, 포장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 초딩사냥꾼님 말씀대로 '하'는 분명히 황화 유역의 국가입니다. 그런데 요순이 다스린 나라에 대해서는 국가명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철저히 비밀스럽죠. 더욱이 기록이나 정황을 볼 때 가능성은 두가지로 대변됩니다.
2년전에 동아일보 과학기사에서 우가 홍수를 막았다(?)는 증거를 찾았다는 기사가 나왔었는데... 상관 없는 건가...ㅡ,.ㅡ
첫째, 우가 순의 신하였고 순은 남방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우는 화북지방의 제후로써 순임금에게 반역을 하여 그를 죽이고 '하'를 건국했으며 그것이 조선과의 우호관계를 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가능성.
둘째, '하'는 헌원이 치우와의 강화 이후 화북의 영유권을 실질적 인정받은 뒤 건설된 국가로 당시 요순의 남방 국가인 구려국과 양립되어 존재하다가 순이 우의 침입으로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그것입니다.
아..그러면 순은 동이족사람이므로 순의 조상인 전욱은 동이족이라는 거군요. 또한 위에서 이혁수님이 인용하신 맹자 이루-하에서 문왕은 서이의 사람이다라고 나옵니다. 문왕의 조상이 후직이고 후직은 제곡의 아들로 제곡과 전욱은 한집안사람인데 왜 한쪽은 동이의사람이고 한쪽은 서이의 사람일까요?
또한 요임금과 순임금사이에도 여러역사서에서 순이 요를 찬탈하고 그의 자식을 핍박했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혁수님의 요순이 삼묘의 수장이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시황제가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순수했을듯이 그들도 삼묘를 무찌르고 그지방을 순행할수도 있지요. 그리고 죄송스럽지만 서경의 어느부분에서 동쪽의 왕에게 근조했다고 나오는지 물어보고싶습니다.
환단고기는 아직까지 진서위서논쟁이 있는책입니다. 그런만큼 아직 그내용을 모두 신뢰할수는 없습니다. 환단고기를 인용하려면 그책이 위서인지 진서인지 밝혀내고 옥석을 가린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딩사냥꾼님.......남의 글을 잘 읽고 반론하십시요. -_-* 제가 언급한 [맹자]의 이루장구 하편은 순임금에 대한 고증이고 서이나 동이나 원래는 한 갈래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누누히 '동이'라고 안하고 '夷' 계열이라 쓴 겁니다. -_-
요순이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있었다고 언급한 것은 지나측 사서를 언급한 것 뿐입니다. 사실 한단고기에도 요가 순에게 임금 자리를 넘긴 것이 자의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죠. 삼묘족에 대한 연구는 더 해야하겠지만
저는 요순의 남방 묘족과 한단고기 등에 기록된 삼묘족을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묘족을 깍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날조일 수 있습니다. 고구려를 하구려라 불렀듯이.......제가 묘족이라 표현한 나라는 정식적으로는 '구려국'입니다.
순과 문왕이야기는 과연 이들이 다른민족이면서 옛사람의 이름을 빌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오랑캐들과 어울려살았는지는 확실히 알수없어서 쉽게 답을 내릴수도 없겠고 서이와 동이가 같은계열인지도 의문입니다. 순의 고향은 제풍.즉,산동이고 문왕의 조상인 후직은 태땅에 봉해졌는데 이곳은 섬서성으로 거리상
차이가 급니다. 또한 요순이 삼묘의 수장이라는 것도 전로선 납득할수 없군요.
요순이 삼묘의 수장이라는 언급 없습니다. 묘족의 나라인 구려국의 임금이라 했습니다. 삼묘는 요순시대 순을 괴롭히던 반란군? 정도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도 요순을 화북인으로 만들려고 한 왜곡의 결과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읽으십시요.
그리고 순은 전욱의 6세손이면서 전욱은 헌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님이 언급한 것처럼 기풍지역에 봉해진 제후가 바로 헌원의 조카뻘이기 때문에 문왕은 헌원의 자손이기도 합니다만 그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서이와 동이가 같은 계열에서 나온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산해경 등을 봐도 夷족은 九夷라고 견이, 풍이, 황이 등 많았다는 것은 고대사를 조금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문왕이 서이 사람이라고 한 것은 헌원의 족속 중 한 부류가 기풍땅에 봉해졌기 때문입니다. 지나 역사상 서쪽에 있는 夷족이기에 '서이'라고 구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뿌리는 같아도 남쪽으로 내려간 夷족은 '남이'라 불렀을 뿐이며 지나인들을 이들을 통틀어 九夷라고 했습니다.
한번 님의 말을 뒤집어서 거꾸로 말해 볼까요? 왜 지나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고대 인물들을 모두 헌원의 자손이라고 할까요? 한번 의심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님의 말대로 문왕은 헌원의 자손이면서 '서이'인데 순은 헌원의 자손이면서 '동이'라는 것이 의심스럽다면 왜 문왕과 순을 그렇게까지
헌원의 자손이라고 지나 사서가 기록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전욱이나 제곡, 요, 소호 모두 헌원의 자손이라는데.......이것은 철저한 지나 역사의 고대사 왜곡의 실태입니다. 이 왜곡은 일이년의 '동북공정'이 아닌 근 2,000년 간의 '동북공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중국의 고대사는 말이 많고 탈이 많아서 이렇다라고 확장내릴수없습니다. 그래서 사마천이 중국의 고대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것이고 한이후에 중국에서 상서, 죽서기년등의 진위논쟁으로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20세기초 중국의 의고학파는 서주이전의 역사는 단지 전설에 불과할뿐이며 심지어 우는
정을 장식하는 벌레의 일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단순히 중국측의 기록이라고 동북공정과 관련시켜 허위로 몰아갈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