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
1. 문체반정이란?
연암 시대 조선 지식인 사회의 주요 사건 중에 문체반정이 있다. 문체반정은 도(道)가 없는 신식 문체(文體)를 도(道)가 있는 옛 문체로 바꾸자는 운동이다. 조선 정조(正祖)는 고문의 엄격한 틀에서 벗어난 소품문1)이 유행하자 이에 격분해 과거 시험을 포함한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해 대대적 검열에 나선 사건이다. 연암은 그런 글쓰기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보는 바와 같은 참신한 문장에 대하여 그것이 소품 소설이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서 나온 잡문체라 규정하여 정통적 고문(古文)인 황경원(黃景源) 이복원(李福源) 등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게 하였다. 이 방침을 실행하기 위하여, 첫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둘째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잡서(雜書) 등의 수입을 금하고, 셋째 주자(朱子)의 시문(詩文)을 비롯하여 당 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문(文)과 《5경발초(五經拔抄)》 및 두보(杜甫)의 《육유시(陸游詩)》 등을 신간(新刊)하였다. 이와 같은 관권의 개입은 모처럼 싹트려 하던 문학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조선 후기문학의 저미(低迷)를 가져오게 하였다.
1) 영남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소품문을 이렇게 정의한다. 첫째, 글자 그대로 분량이 짧은 글이다. 둘째, 감정에 호소하는 산문이요, 기존의 문체와는 다른 기발하고 새로운 문장을 시도하는 산문이다. 셋째, 그 출현과 유행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중국 소품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소품문은 조선에서는 16세기 허균 등에게서 싹을 보이다가 18-19세기에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소품문 작가로는 연암 박지원과 박제가, 이덕무, 이용휴(李用休), 노긍(盧兢), 이옥(李鈺), 조희룡(趙熙龍) 등을 들 수 있다. 소품문은 체제지향적 고문에 대한 반발로서, 조선왕조가 금기시한 비판정신을 드러내게 된다
2. 정조의 탕평책 속 문체반정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쟁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문체반정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문교 정책으로 출발한 것이지만 이를 이용하여 사색당파(四色黨派)를 상호 견제시켜 탕평의 실효를 거두려는 고도의 정치 술수였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사색은 무너지고 정조를 지지하는 시파(時派)와 정조의 노선을 반대하는 벽파(酸派)의 양당 체제가 형성된 것으로 이해한다. 탕평 정치를 계승하고 노론, 소론, 남인의 보합 정치를 펼치는가 하면, 채제공의 독상 정치로도 정국을 이끌었으며, 다시 노론 시파와 남인의 갈등이 심해지자 채제공을 삭탈관작하여 문외출송하고, 노론 시파의 정권을 출범 시키면서부터는 노론의 남인에 대한 공세를 늦추기 위해 문체반정으로 노론을 견제한다.
노론의 상징적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공자나 맹자 주자 같이 송자로 격상시키고는 노론계 문신들의 문체가 정통적 문체와 거리가 있다 하여 노론을 제압해 나가니 문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빌미로 노론의 입지를 약화시킨 것이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는 즉위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2)을 추구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걸게 된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였으며,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2) 잘못된 일이나 부정 따위를 바로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