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프리카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크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왕국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사회들로 둘러싸여 있다. 사바나 종족들 중 보다 중요한 종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집단을 이루고 있는데, 만데종족집단(세네갈·말리에 살고 있는 종족과 밤바라족·말링케족·소닝케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세누포족·로비족·구룬시족·도곤족·모시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 및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 및 고산지대에 주로 사는 비이슬람교도인 여러 소부족집단들이다. 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족(풀베족·페울족이라고도 함)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살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가장자리 지역에는 투아레그족이라고 불리는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종족집단과 차드 호의 카누리족, 셈어계 베두인아랍 종족들이 살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지역 일대의 지역사회들 역시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티브·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이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족이 살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몰려 있으며(가장 큰 종족집단은 아산티족임), 해안지역에는 에웨족·가족·판티족·아니이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족과 템네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월로프족·세레르디울라족 및 기타 종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로 가던중 해방되었거나, '신세계'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인들이 살고 있다.
이 지역은 인종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곳으로서, 북부에는 아랍계, 콩고와 가봉에는 피그미족, 그리고 보다 남쪽 지역에는 수단어 및 반투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살고 있다. 카메룬과 나일 강 사이에는 사라족·망베투족·아잔데족과 같이 수단어를 사용하는 대규모 종족이 많다. 남쪽에는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는 가봉의 팡족과 콩고 민주공화국 및 앙골라의 콩고족·몽고족·쿠바족·룬다족·초퀘족 등도 있다.
동아프리카
이 지역은 여러 종족이 섞여 사는 곳으로, 나일 계곡 일대에는 동수단어를 사용하고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는 종족들(과거 나일족으로 불렸던 실루크족·딩카족·루오족·랑고족 및 기타 종족들)이 살고 있고, 중앙 초원지대에는 마찬가지로 동수단어를 쓰며 목축업을 하는 종족들(과거 나일·함어군으로 불렸던 마사이족·난디족 및 기타 종족들)이 살고 있으며,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소말리아 반도 주변에는 쿠시어군의 소말리족과 오로족(갈라족)이 살고 있다. 에티오피아에는 또한 셈어족 계통의 암하라족·티그레족과 기타 종족들이 살고 있다. 그외 종족은 대부분 반투어를 쓴다.
중부 및 남부 아프리카
한때 코이산어를 쓰는 산족(부시먼)과 코이코이족(호텐토트족)이 살았는데, 산족은 주로 사냥을 하며 살았고, 코이코이족은 목축을 하는 종족이었다. 오늘날 산족은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 및 보츠와나의 불모지대에서만 살고 있으며, 코이코이족은 대부분 유럽 및 아시아 인종과 피가 섞인 혼혈 흑인종이 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주에 살고 있다. 이 지역에 사는 그밖의 토착종족은 모두 반투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다.
마다가스타르섬
마다가스카르 섬은 독특한 별개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인종 : 메리나족
포르투갈이 처음 만난 곳은 바로 서아프리카였다. 이곳은 인구도 많고 경제발전도 이루어져 무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아프리카 농업의 번성은 인구조밀성과 활기찬 무역활동으로 지탱되었다. 그리고 흔히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포르투갈인들이 만난 이지역 아프리카인들은 지식수준이 높아 외래인을 공포로 맞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런 아랍인과 접촉해 본적인 없는 숲속의 일부 거주민들은 유럽인과 총소리, 바다에서 왔다는 것에 놀란 건 사실이다.)
1700년에 황금해안의 한 네덜란드인 중개상은 자신의 고용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었다.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이곳 금광들을 장악하고 있어서 노예를 시켜 캐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런 보고에 접근할 방도조차 없소."(출처 : B.Davidson ,The African Slave Trade p10)
1795년 영국인 관리는 왜 유럽인들이 접근할수 없는지 분명히 밝혀준다.
유럽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침입에 수반되는 위험때문이 아니라, 백인들이 자기나라 통과를 질투하는 해안주민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유럽과의 무역에서 얻는 이익이 줄거나 다른 부족에게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거나, 내륙지방 왕국들이 무기를 얻어 위험한 적으로 될것을 우려한 탓이라는 얘기다.
포르투갈 이후의 아프리카
그럼 왜 아프리카가 유럽으로 가지 않고 유럽이 아프리카로 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기계발명도 없었고, 에디오피와 수단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인력 이외의 에너지원도 발명하지 못했으며, 풍부한 토지와 공동체적 사회조직때문에 사회적 압력이나 기술혁신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리카전역에서 소나 말이 살아남지 못해서(병충해등으로) 대규모 상업자본주의가 나오지 못한 것도 이유중 하나다.
16세기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엔코미엔타-> 하시엔다(대농장) -> 플랜테이션 의 과정을 통해 플랜테이션을 확대하면서 노예수요가 급증했고, 노예무역의 이윤도 크게 늘어났다. 스페인 왕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서' 아메리카에 팔 권리를 부여하는 면허장을 찍어서 팔았다. 1592년 고메스 레이날이라는 사람은 9년간 4250명, 도합 3만 8250명의 노예를 선적할수 있는 면허장을 사는데 금화 백만을 (단위는 두캇) 지불했다. 이런 이익때문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서아프리카 해안지방에는 약 40개의 요새가 들어서게 되었다.
노예는 동아프리카 출신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세네갈에서 앙골라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해안선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내륙에서 잡아왔고, 해안지방 주민은 거의 없었다. (해안지방에서 중간교역하는데 서로 잡을 리가 없음;)
아프리카 해안지방 통치자들은 경제적 이익때문에 유럽노예상인들을 환영하며, 교역소 부지를 임대했는데 이것들은 대체로 아프리카인들이 아닌 유럽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요새화되었다. 유럽 노예상과 아프리카 지주들은 사실상 상호의존 관계에 있어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했는데, 아프리카 지주들은 자기 소작인들은 보호하는 한편 노예무역의 중간상인 역할을 하면서 노예무역에 참여하는 내륙인들에게서 수수료를 받아냈다. 노예무역에서 유럽인들이 실어 보낸 물건들은 지주의 부하인 중계상들이 수령했으며 무역상들은 이 물건을 내륙지방으로가지고 가서 노예나 다른 물건과 바꾸었다. 만약 중계상이 빚을 못 갚으면 지주가 대신 갚아주고 그들의 가족이나 이웃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서아프리카 전역에서 백인무역상과 흑인통치자들이 협력하였고 해안지방의 흑인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중간상인 역할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유럽침략자들은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하지만 적도 이남에서는 포르투갈이 앙골라를 정복하였고 콩고왕국을 간접적인 지배하에 두었다. 이 지방에선 포르투갈인들이 직접 내륙지방에 가서 부족간 전쟁을 유발시켜 그 전쟁포로를 잡아다가 노예로 팔았다.
서구의 여러 나라가 아프리카로부터 신세계에 운반해간 노예의 수는 최저 1,500만 명에서 최대 4,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또한 신세계에 도착해서도 현지 기후에 적응하는 데 3~4년이 걸렸으며 그중 사망률이 30%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당시 아프리카의 인구를 고려한다면 막대한 수치이고, 결국 아프리카의 세계인구비중이 1650년 18%에서 1750년 13% 1850년 8% 로 내려가게 되는 결과를 나오게 한것이다. (이기간동안 유럽- 아메리카 인구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유럽은 1650년 18%로 아프리카와 비슷했지만 1750년 19% 1850년 22% 로 아프리카와는 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총- 노예사이클
노예무역당시 유럽은 무력으로 이를 감행하지 못했다. (포르투갈이 정복한 앙골라를 제외한다면) 하지만 이것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대규모 노예에 대한 필요성(스페인의 아메리카정복으로 인한) , 유럽이 압도적인 건 아니지만 다소 우세한 군사력, 아프리카 왕국과 부족들간 상호불화(위에서 보았겠지만 아프리카 인들은 단일종족이 아니다.)때문이었다.
1526년 콩고왕국의 통치자는 포르투갈 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짐이 귀국에서 보내주기를 바라는 것은 성직자와 학교선생,그리고 성찬식에 사용할 포도주와 밀가루뿐입니다... 우리왕국에서는 어떠한 노예무역이나 노예시장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짐의 뜻입니다."
(포르투갈은 1세기동안 콩고에서 50만,앙골라에서 100만의 노예를 잡아가는 것으로 이것에 대한 응답을 하였다,)
아프리카의 분열상
"무기가 공급되자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를 잡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고 무기를 사기 위해 노예를 잡는 총-노예사이클이 일어났으며 아프리카 나라들은 노예를 주어야 총을 살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방어를 위해 노예사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출처 : P.D.Curtain "The Slave Trade and the Atlantic : Intercontinental Perspectives" Key Issues in the Afro-American Experience p89)
다호메왕국: 현재 아프리카 서부 나이지리아의 베냉 남부에서 18~19세기에 번영했던 왕국.
아가야(1708-1732)는 기니 만 해안에 드나드는 유럽 무역상들에게서 열심히 무기를 사들여, 이미 유럽 국가의 요새들이 세워져 있던 알라다와 휘다를 정복했다(1724, 1727). 영토가 넓어진 이 나라는 국명을 다호메로 바꾸었으며 아보메·알라다·휘다는 다호메 왕국의 지방이 되었다. 다호메 왕국은 유럽인들에게 노예를 팔아 번영을 누렸고, 테그베수 왕(1732~74), 크펭글라 왕(1774~89), 아공글로 왕(1789~97) 때 영토를 더욱 넓혔으며, 아단도잔 왕(1797~1818)을 내쫓고
게주 대왕(1818~58)이 왕위에 오른 뒤 그 국력과 명성은 절정에 이르렀다
다호메 왕국은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절대군주국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또 영토를 넓히고 포로를 노예로 삼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노예는 전쟁무기와 맞바꾸어져 유럽인들에게 팔려가거나 왕실과 군대에 식량을 대는 궁정 플랜테이션(대농장)에서 일했다. 1680년경부터는 정기 인구조사를 실시해 징병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았다. 유럽인들에게 아마존 부대라고 일컬어진 여군(女軍)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때는 왕실 경호원으로 복무했다.
게조 왕의 재임기간(1818∼58)에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 노예를 획득하기 위해 나이지리아의 요루바족과 수차례 전쟁을 치렀다. 1857년 프랑스는 그랑포포에 진주했다. 1878년 다호메의 왕
베한진은 코토누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것을 거부, 1892∼94년까지 계속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베한진은 1894년 1월 프랑스에 항복했고, 다호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1904년 다호메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연방에 통합되었다.
(1960년 독립후 1975년 다호메는 베냉으로 국가명칭을 고쳤다. 현재는 베냉 )
우이다: 기니 만 연안에 위치한 우이다는 18~19세기에 아보메 왕국의 주요항구였다. 포르투갈·프랑스·네덜란드·덴마크·영국·미국 사람들은 효과적인 조직으로 중앙집권화된 왕국이 우이다를 통해 이루어놓은 노예와 야자유 무역에서 한몫을 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1893년에 이 지역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오요제국
지금의 나이지리아에 있던 있던 라고스 북쪽의 요루바족 국가.
전성기 때(1650~1750)는 동으로 니제르 강과 서로 볼타 강 사이에 있던 나라들을 거의 다 지배했다.
16세기초만 하더라도 오요는 힘없는 조그만 나라로서 1550년에는 북쪽에 있던 이웃나라 보르구와 누페에게 정복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말경에는 오롬포토 왕이 등장해 교역을 통해 얻은 부로 기병대를 만들고 훈련된 군대를 유지함으로써 국력을 강화시켰다. 오요는 2차례(1724~30, 1738~48)에 걸쳐 서쪽에 있던 다호메 왕국을 종속시키고, 아자세(포르토노보) 항구를 통해 해안에서 유럽 상인들과 교역했다. 나라가 점점 부강해짐에 따라 그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도 다양해졌다. 어떤 지도자들은 부(富)를 축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으며, 또 이떤 이들은 부를 이용해 영토를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견(異見)은 결론도 없이 계속되다가
아비오둔 왕(1770~89경 재위)이 치열한 내란에서 반대 세력을 정복하고 주로 유럽 상인들과의 해안 교역에 바탕을 둔 경제발전정책을 추진하게 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것은 모두 소홀히 했던 아비오둔의 정책은 중앙 정부의 통제 수단인 군대를 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뒤를 이어
아월레가 통치를 맡았을 때 계속된 지역적 반란으로 나라는 어지러웠으며, 행정부는 복잡한 공공 서비스 제도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었고, 공물을 바치던 속국 추장들의 세력도 쇠퇴해가고 있었다. 그뒤 왕과 그의 고문들 사이의 싸움으로 18세기 내내 국력은 쇠퇴해갔으며, 19세기로 들어오면서 마침내 오요는 해안으로 통하는 교역로의 통제권을 잃기 시작했다. 제국은 새로 일어난 다호메의 폰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1800년 이후 곧 북동쪽에 있던 하우살란드의 호전적인 풀라니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당했다.
동아프리카 노예무역
1836년이전까지는 큰 영향이 없었다.
1753년만 해도 포르투갈령 인도에 아프리카 노예가 도합 4399명. 별로 수익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 해안지방에는 그당시 포르투갈인 거주자가 모두 합해서 100명정도였다. 군인포함)
1836-1838년부터 빠른 선박의 건조와 서아프리카 노예공급의 감소로 동아프리카의 노예무역도 수익성을 갖게 되었고. 모잠비크에서 연간 1만 5천정도의 노예가 브라질- 쿠바로 수출되었다. (이것은 쿠바,브라질이 노예제도를 포기한 18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동아프리카 해안지방과 마다가스타르,모리셔스,잔지바르등의 플랜테이션도 노예무역발전의 원인이 되었다.
적도이북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의 육로부분을 원주민 노예상이 장악하였다면, 동아프리카에서는 내륙지방 북부는 아랍노예상들이 남부지방에서는 포르투갈+ 혼혈인들이 노예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랍제도는 먼 지방까지 확대되어 무방비 상태의 모든 작은 부락들을 문어발처럼 장악했으며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어 아물도 울타리 밖으로 나다닐수 없었다."(출처 R.M.Beachey The Slave Trade of Eastern Afroca p186)
아랍인들과 유럽인들은 무기공급 독점을 이용해서 부족간들간의 싸움을 일으켰고 통일전선을 펼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가 (노예)판매를 중지하면 나도 그만두지요. 그 자가 제일 나쁜 놈입니다... 우리를 옷감과 화약,총으로 유혹한 아랍인들 탓입니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농사나 지었으면 하지만 이웃나라에서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아가니.. 나도 그들을 막기 위해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출처 : T,Jeal Livingstone p304)
총-노예사이클로 인해 유럽노예상과 가까이 지내면 총을 얻어 내륙지방을 습격,노예를 잡아오고 이들을 팔아 더 많은 총을 사서 더욱 세력이 커질수 있었다.
탄자니아 /지도
탄자니아
18세기초에 루부마 강 이북의 소유지를 상실했는데, 이는 해안지방의 아랍인들과 오만의 지배자가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아라비아의 무역상들은 노예를 찾아 끊임없이 내륙으로 깊이 침투했는데, 그들의 주요 내륙침투로는 니아사 호를 향한 남서쪽 경로였다. 1825년경 아랍 상인들은 토착부족들의 교역로를 따라 노예 못지않게 값이 나가는 상아가 있는 니암웨지로 들어갔다. 1840년대초 아랍인들은 니암웨지로부터 탕가니카 호까지 전진하여 교역소들을 설치했다.
야오족 : 탄자니아 남단, 모잠비크 로부마 강과 루겐다 강 사이와 말라위 남부지역에 사는 반투어를 쓰는 여러 종족.
1800년 무렵에는 내륙 부족들과 동부 연안 아랍인을 중계하는 무역상으로 활동했다. 주요 무역품목인 노예를 놓고, 결국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야오족 영토를 지배하려던 유럽 강대국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야오족은 작은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었으며, 주로 군사와 상업상의 지도자였던 추장들이 다스렸다. 1900년에는 모든 추장령(領)이 독일·포르투갈·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노예무역의 영향
앙골라,콩고의 경우는 전적으로 파멸했지만 오요,아산테,다호메같은 경우엔 다른나라에 전가함으로써 영향을 적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쁜 영향이 많았는데 우선적으로 현상동결이 강화되어 새로운 정치제도나 지도세력이 발전할 수 없었다.
"노예무역은 대체로 추장등의 통치계급이 장악했다. 유럽인들과 협작하여 착취한 것은 그들이었으며 전쟁을 일으키고 노예사냥을 허가하고 범법자를 노예로 만든 것도 그들이었다." (E.Reynolds ,Trade and Economic Change on the Gold Coast 1807-1874 p13)
또한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지역간 무역을 붕괴시켰다. 노예사냥과 전쟁,파괴때문에.. 더불어 해안지방 무역통로는 포르투갈이 장악했다.더구나 포르투갈은 상아해안과 황금해안간의 카누를 이용한 전통적인 해상무역을 중단시킴으로써 그 두지역을 유럽에만 의존하게 묶어두게 되었다.
위에서 보다시피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구비중도 줄어들었고..
공업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공업육성에는 관심도 없었고 공업발달을 적극 억제하는 것이 허다했다.
1520년 에티오피아 왕실은 포르투갈인들의 총,직물,책등에 감명을 받고 이러한 물건을 만들 기술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요청이 여러번 있었으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서아프리카 지방에서는 이러한 요청과 거부가 더욱 빈번했는데
다호메왕국의 아가야는 1720년대(이때 잠시 노예무역에 제동을 걸었다.) 노예무역을 대신할 경제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고자 영국에 사신을 보냈었다.
1720년말 다호메 왕실을 방문했던 한 유럽인은 이 같은 말을 듣기도 했다. "재봉사건, 목수건, 대장장이건 누구든지 이곳에 오고자 하는 백인은 매우 후한 대접을 하겠다."(W.Rodney, How European Underdeveloped Africa p107)
하지만 아무도 이 초청에 응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 유럽의 장인들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이웃 유럽이나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민가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호메는 노예무역을 할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중엽 아산테 국왕 오포쿠 와레도 공장과 양조장을 설치할 유럽기술자를 요청했지만 역시 회답을 받지 못했다.
19세기 초 동부 나이지리아 칼라바르의 추장고 다호메의 아단도잔왕이 각각 제당공장과 무기공장 건설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호메의 속담 "화약 만드는 자가 전쟁에 이긴다"는 말도 있듯이 아프리카 사람들도 기술을 중시했지만 이점은 유럽인도 마찬가지라서 기술이전을 거부했던 것이다.(W.Rodney, How European Underdeveloped Africa p108)
또한 노예사냥 지역에서는 다른 사업이 일체 금지되어 현금작물의 재배도 지연되는 등의 문제도 존재하였다.
영국 상무성 1751년 케이프총독에게 보낸 훈령 "흑인들간에 면화재배와 공업을 도입하는 것은 본국이 정한 정책에는 명백히 반하는 것이며 그 한계가 어디까지일런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명시도 없으나 우리가 현재 식민지에서 가져오고 있는 담배,사탕등의 모든 상품이 이에 해당될 것이며 또한 현재 전쟁을 해서 생활하는 아프리카인들이 농업을 경영하며 그 노예를 이들 상품의 재배에 사용하는 것도 금지해야 할 것임"
노예무역은 본질적으로 대중과 상관없는 '부자'무역이었기 때문에 노예무역에 관련된 지역들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예의 대가역시 (무기,직물등)은 추장과 상인,그들의 부하들로만 돌아갔기 때문에 아프리카 주민들과 상관이 없었다.
물런 아프리카 추장들의 보호아래 해안지방 주민들은 농노나 멸종,소탕에 이르게 되지는 않았으며 이것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위와 같은 요소들로 인해 아프리카는 산업혁명과 이른바 문명화를 이룩할수 없었고 결국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침투과정도 만만한 과정이 아니었으며(아프리카의 저항이 없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 아프리카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과 낙후되었다는 것도 거짓이다.
첫댓글 아프리카엔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많네요. 다호메 왕국 같은 건 진짜 처음 들어봤습니다.
에티오피아 제국!!!
오요제국에서 줄쳐져있는거보고 이명박이 생각난이유는? (그리고 다음엔 라이베리아 역사좀 서술해주세요)
주류 역사관에서 벗어나있다보니 세계사 교과서에서 한문단으로 서술끝난 -_-..
유럽,양키,일본,중국 다 나쁜놈들
좋은 글 보고 갑니다 :p
개독교들을 무찌르자
얼마전 설탕의 세계사란 책을 좀 끄적거린적이 있는데 참.. 기구하더군요-_-
별 상관은 없는 이야깁니다만, 노예제가 제도로서 마지막으로 사라진건 1980년입니다. 모리타니였던가.. 하여간 얼마 안됬죠 의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