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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ream Phil 원문보기 글쓴이: Dream Phil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Be vigilant at all times
말씀의 초대 |
이수철신부
에덴의 꿈
오직 사람만이 꿈을, 비전을, 희망을 지닙니다. 꿈을, 비전을, 희망을 잃어버리면 곧장 뒤따르는 속화(俗化)에 타락(墮落)입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해도 하느님 꿈을, 비전을,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믿는 이들의 꿈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 비전을, 꿈을, 희망을 새로이 하기 위해 매일 공동전례를 거행하는 우리들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해’ 미사를, 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벽성무일도 시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후렴을 계속 반복했습니다(시편136). 영원히 자애하신 하느님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온갖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꿈은 에덴의 꿈입니다. 오늘 요한 묵시록은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꿈을 환히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해피엔딩의 절정입니다. 물론 예언자 에제키엘도 되찾은 낙원의 꿈(에제47,1-12)을 잠시 보여주었습니다만, 오늘 요한이 보여주는 에덴의 비전은 더 생생하여 실감이 납니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요, 강가 양 옆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 다달이 열매를 내 놓습니다.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그분의 종들은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뵙습니다. 그 종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져 있습니다. 그곳은 밤이 없고 등불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연상했습니다. 낙원의 꿈을 앞당겨 실현시켜 맛보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이마에는 이미 하느님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고, 성부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의 옥좌를 상징하는 제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 성령이 우리는 물론 세상을 살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의 열매이자 약인 성체를 먹고 사는 우리들이요, 하느님 그분의 얼굴을 뵙는 우리들입니다.
구약성서의 언어로 ‘하느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뜻은 하느님 면전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바로 성전에서의 공동미사시간이나 성무일도 시간 그대로 주님의 얼굴을 뵙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매일 하느님 에덴동산의 꿈을, 비전을, 희망을 새로이 환기시켜주는 미사은총이 참 고맙습니다. 이 미사은총에 힘입어 우리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에덴을 실현시키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수도승들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려 모인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수도원은 되찾은 낙원인 에덴동산을 상징합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보이는 에덴동산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에덴의 비전이 꿈이 늘 생생할 때 늘 깨어 기도합니다. 방탕이나 만취, 일상의 근심에 빠져 타락하지 않고 오늘 지금 여기서 에덴의 꿈을 실현하며 삽니다. 우리가 강론 후에 있을 서원 갱신 예식, 바로 깨어 기도하며 우리의 서원에 충실하겠다는 주님과의 약속입니다. 깨어 기도하며 우리의 서원에 충실할 때 현실화되는 하느님의 꿈, 에덴동산의 꿈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은총으로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 주시고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아멘.
“늘 깨어 기도하여라.”
<사제로서의 깨어있음>
인디언들은 11월을 이렇게 부른답니다.
11월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강물이 어는 달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
작은 곰의 달
기러기 날아가는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그런대로 지낼 만 했던 달, 11월도 벌써 저물어가고 있군요. 오늘은 교회 전례력 상으로 연말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입니다. 연말에 걸맞게 요즘 계속되는 복음내용은 주님의 날,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하라는 강경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듣기 섬뜩한 말씀, 너무 지나치다 싶은 말씀 때문에 한 동안 꽤 부담스러우셨겠지요.
그러나 강경한 경고의 말씀 그 이면에는 빗나가는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 자녀인 우리들이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녀인 우리들을 향한 사랑이 극진한 아버지시기에 때로 칭찬과 격려도 하시지만, 때로 매도 드시고, 혼도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질책은 우리가 제 갈 길을 제대로 걸어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망각합니다.
계속 회개하라, 정신 차리라는 주님 말씀도 있고 해서, 저도 최근 한 가지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그간 홀짝 홀짝 조금씩 잘도 마시던 술을 끊는 것입니다. 한 몇 일 금단 현상인지 의욕도 없고, 두통이 오고 그러더니 또 몇 일 지나니 온 몸이 얼마나 가벼워졌는지 모릅니다. 덕분에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하는데 펄펄 날아다녔습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새롭게, 그리고 감사하게 들려왔습니다.
요즘 자주 훌륭한 사목자들에 대한 글이나 이야기를 자주 접합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신의 사목자들을 칭찬하는 신자들을 바라보니 저 역시 기뻤습니다. 반성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상하고, 얼마나 인정이 많고, 또 얼마나 눈물이 많은지, 신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며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는 사제, 사제서품 이후 단 한 번도 식복사를 두지 않고 홀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제, 미사 시작 1시간 전, 가장 먼저 성체 앞에 앉아 기도하는 사제, 조금의 돈이라도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 찾아나서는 사제,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의 돈도 쓰지 않는 사제, 죽기 살기로 자신의 축일행사를 마다하는 사제, 떠나갈 때 모든 것 그냥 두고, 모든 것 나눠주고 손가방 두 개만 챙겨서 떠나는 사제, 전철 잘 운행되는데 자가용은 무슨 자가용이냐며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제...
오늘 그 훌륭한 선배 신부님들로부터 다시 한 번 사제로서의 깨어있음이 무엇인지 잘 배웠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알파요 오메가의 하느님
-박상대신부-
“늘 깨어 기도하라.”(36절) 이것이 한해 전례달력의 마지막 날에 선포되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위함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재림하시는 인자(人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기 위함이다. 우리가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매일미사의 복음을 묵상한 바에 의하면 인자의 재림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재림의 순간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묵시적(?示的) 징조나 표징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둑(마태 24,43; 루가 12,39)이나 덫(35절)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거나 어느 것일까 하고 점치려 하지 말라. 잘 못 골랐다간 낭패를 본다. 그러므로 둘 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인자의 재림은 준비된 ‘바로 그 날’에 일어날 사건이 되겠지만, 사실상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듯이(루가 17,21) 인자의 재림도 반드시 미래의 어떤 사건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마태 28,20), 인자의 재림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더 이상 옛적의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를 향하여 그 여정을 시작하였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의 재림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별다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우주 계시적 사건이며, 영광의 그분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독서와 복음말씀을 통하여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발췌된 성서를 읽음으로써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서는 누구에게나 그를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성서가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으로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정형(定形)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그 마지막 또한 어떤 모양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서 있는 극히 제한된 그 자리와 시간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며, 전역사의 차원으로 극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알파(Α)요, 오메가(Ω)이시기 때문이다.
더러는 길게 살고, 더러는 짧게 사는 것이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탄생과 죽음은 세상의 창조와 종말의 의미를 가지며,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세상 전역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없으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러기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만의 삶을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으로 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 그 일을 당신 뜻에 맞게 질서 지워주시고, 용기와 지혜로써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그 마침을 채워주실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