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배와찬양의 변화
지금 우리가 드리는 경배와 찬양은 그 형식과 내용(its forms and essences)에 있어서 독립적인가?아니면 그것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인가? 있다면 그 원형의 무슨 요소들이 현재의 경배와 찬양의 현장 속에 다시 회복되어져야 하는지? 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구약시대의 경배와 찬양
① 구약시대의 경배와 찬양의 형태
구약의 경배와 찬양은 크게 3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족장시대(대표적으로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 그리고 요셉이 이끌던 시기) 입니다.이 시대의 경배와 찬양을 특징지어 본다면, 비형식적(informal)이다. 이 시대의 경배와 찬양은 정해진 형식이 없고,반드시 제물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제물을 바칠 때 정해진 방법도, 정해진 장소도 없던 시대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특징을 비형식적, 가변적, 자발적 그리고 개인적(informal, flexible, spontaneous and personal)경배와찬양으로 규정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시대는 모세시대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는 출애굽 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구속사적 사건이 일어난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경배와 찬양은 유월절(Passover)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유월절 이후 유월절은(사실은 유월절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반적 경배와 찬양 속에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경배와 찬양 속에 핵심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됨)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대한 응답의 찬양이 그 중심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이 시기를 특별히 성막에서의 경배와 찬양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성막(Tabernacle)이 경배와 찬양의 중심적 역할 뿐만이 아니라 희생을 드리는 대표적 장소로서, 제사장 사역의 중심적 장소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시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 경배와 찬양이 한 장소에 집중된 시기였고 무엇보다 희생을 드림(sacrifice)이 경배와 찬양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경배와 찬양의 중심 개념(core concept)은 하나님께로의 복종(obedience to God)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시대는 성전에서의 경배와 찬양의 시대로 표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왕이 성전을 건축한 이래로이스라엘의 몰락과 귀환의 역사 속에서 성전(Temple)은 장소로서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위치로서도,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경배와 찬양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포로시기에
새로운 경배와 찬양의 모임장소로서 그리고 잃어버린 성전의 대체적 성격의 회당들(Synagogues)이 형성 되었습니다.후에 예수님 시대 때에 나타난 것처럼 회당은 경배와 찬양의 장소로서의 성격보다는 기도와 말씀을 읽는 만남의 장소로서, 또는 종교적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는 장소로서의 역할이 더 강조 되어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② 구약의 경배와 찬양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중요성
먼저 구약의 경배와 찬양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는 지금의 모습과는 외관상 현저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우리시대의 월력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든 다양하고 많은 제사들, 제사에 사용되는 낯 설은 도구들, 한 번 보아서는 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제사순서와 방법들 등 대부분의 요소들이 낯 설은 것이 사실입니다. 많이 낯설어 보이는 구약의 경배와 찬양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생각해 보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구약시대 옮겨가는 새로운 장소에서 단을 쌓고 드리던 제사, 짐승의 피를 흘리며 성막과 성전 뜰에서 드리던 제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배와 찬양은 구약에서 조차도 시간과 장소 그리고 형식이 변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경배와 찬양의 중심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의 경배와 찬양의 중심(The heart of worship)은 놀라운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경배와 찬양 속에서 교제하며 제물을 드림으로 응답하는 예배자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물을 드림에는 예배자의 중심(heart)을 담아야 함은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2) 신약시대의 경배와 찬양
① ’Panliturgism’ – a tendency to see signs of liturgy everywhere
신약시대 초대교회 속에서 경배와 찬양은 극히 제한된 정보들 만을 현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에 의해 지도되어지던 초대교회 속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그 사역을 알려주는 복음서 위주의 신약 성경을 모임 속에서 읽는 것, 주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며 같이 나누는 성찬과 애찬, 그리고 믿음을 새로 가진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들이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은 알 수 있으나 그 구체적 형태나 순서 그리고, 무슨 찬양들을 불렀었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의 복음서들을 주로 읽혀졌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Justin Martyr(2세기 중엽)는 “허락되는 한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음”을 기술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우리가 일부분 그 형태를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특히, ‘Panliturgism’에서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의 경배와 찬양은 하나의 예배의 형식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삶의 중요한 부분,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것처럼 같이 한 운명을 함께한 공동체로서, 가진 것을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그리고 같이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예배 공동체였습니다.
많은 학자들(Paul Bradshaw, Robert Webber, R. Backwith , etc.)이 주장하고 사도행전 2장에서 또한 보여 지듯이,초대교회의 경배와 찬양 안으로 유대적 예배의 형태가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이것은 무제한적으로 여과없이 수용되었음을 뜻하지는 않고 앞서 언급 되었듯이 초대교회의 주요 관심사인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사역 그리고, 죽으심에 연관성이 있는 예언서들로 주로 제한 되어졌음을 우리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구약성경을 그들의 설교 속에 인용하는 모습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른 구약의 예배적 요소들이 영향을 미친 예들을 찾아보면 로마서 앞부분은 유대인들의 중요 명절인 속죄일(Day of Atonement)을 기초하여 쓰여 졌다는 주장이나, 심지어 고린도서 안에서도 유대의 주요 명절인 유월절등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어찌하였든 신약시대의 경배와 찬양 속에서는 아직 유대교적 형태의 잔류들을 많이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그 형태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신약시대의 경배와 찬양은 그 당시의 유대교적 예배와 동일하게 취급되어 질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주 관점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더 깊이 알고, 그 구속사역을 찬양하고 전파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에 온 관심이 집중되어진 까닭입니다.
찬양의 모습만 생각해 보면, 구약의 시대에는 좀 더 다양하고 웅장하며 화려한 방법과 악기들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이 전쟁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또는 경배와 찬양의 의식 속에 나타난 것은 일반적 형태이고, 심지어는 전쟁에서는 무기로써 사용되어 지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구약의 시편 대부분이 음악적 운율을 가진 음악적 요소 속에서 표현되어지고 사용되어진 것은 우리가 모두 인지하고 잇는 부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시편들이 초기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심지어는 Apostolic Tradition of Hippolytus (A.D.236,237?)이후에 더 많이 사용되어 졌음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찬양의 표현을 쓸 때마다 대부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는 ‘시편’또는 시, 찬미는 자유롭게 표현되는 말,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음악적 운율을 포함한 찬양의 표현으로 이해 되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예배속에서는 이러한 찬양의 표현 방법들이 특별히 구별되어 지지는 않아 보입니다. 무엇보다 신약시대의 경배와 찬양의 큰 특징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중심(Focused on Christ and His work)이었다는 것과 자유로운 장소와 시간 그리고 영적 찬양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경배와 찬양을 돌아보며 신약시대의 경배와 찬양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 속에서 약화되어진 온전히 그리스도 중심의 일관성, 경배와 찬양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모습, 영적으로 충만하여 일어나는 부흥 등 이 시대에 필요하고 절실한 경배와 찬양의 요소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3) 초대교회시대 이후 종교개혁 전까지
① 초대교회 이후 경배와 찬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헌들..
주후 111-112년경 Bithynia and Pontus지방의 총독인 Pliny의 보고서에서 우리는 초기 교회의 예배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크리스챤들은 정해진 날 해 뜨기 전 모여서 찬양하고 문제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종교적 서약을 한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초대교회 이후의 경배와 찬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문서는 순교자 Justin Martyr의 변증문입니다.그는 이 곳에서 크리스챤들의 주일의 의미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② Didache
Didache는 1883년에야 처음 편찬된 문서이다. 이 문서의 원래 제목은 ‘열두 사도를 통한 이방인들에게 주는 주님의 가르침’(The teaching of the Lord to the Gentiles through the Twelve Apostles)입니다. 이 문서는 두 부분과 결론으로 되어 져 있습니다. 첫 부분은 두 개의 제목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것들은 ‘Way of Life’와‘Way of Death’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예배와 관련된 교리와 세례, 기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이 문서는 특히 초기 신약시대의 예배와 그에 관한 교리를 자세히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로 여겨져 왔습니다.
③ Apostolic Tradition of Hippolytus
Hyppolytus는 주후 3세기 경 로마의 감독이었다. 그는 예배의 실험을 시도한 철두철미한 보수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주도하에 집필된 이 예배의식에 관한 책이 ‘Apostolic Tradition’이다. 이것은 3부분으로 나뉘어져서 교역자들의 임명에 관한 것, 교육과 세례, 교회의 정기 예배 와 목회적 예배 등을 중점적으로 제시해 주고있다.이 문서는 ‘Didache’와 함께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배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중요한 문서 중 하나입니다.
④ 초기 기독교 시대의 경배와 찬양의 공통점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경배와 찬양을 보여주는 문서들에서 우리는 찬양의 모습을 극히 제한 된 부분에서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초기 교회에서는 말씀과 성찬이 경배와 찬양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찬양의 부분은 시편 또는 기도문에 운율을 붙여서 부른 찬양 이외에는 크게 묘사되어 지지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이유로는 기도문과 찬양의 구분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기도문이 상황에 따라 어떨 때에는 음악과 관계없이 단순한 기도문으로, 어떤 때는 음악적 요소와 결합되어 찬양의 성격을 띄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시기의 경배와 찬양은 말씀 그리고 성찬이 주 구성요소이였던 것 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⑤ 초기 예배의 중심지역들
사도 시대 이후 교회는 교회가 있는 그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특성들을 갖기 시작했고 그 이후 자연스러운 교류가 힘들어 짐에 따라 그 차이가 더 심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지역적으로 그 특성을 분류하여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지역(마가가 사역한 곳으로 알려진), 안디옥과 예루살렘지역(야고보의 사역지로 알려진 곳), 동시리아 지역으로 에데사가 그 중심 도시인 곳, 소아시아 가이사랴 바질 지역입니다. 그 외로는 로마, 콘스탄티노플,그리고 크게 로마나 다른 지역의 예배와 연결점이 별로 없어 보이는 암브로시아(밀란), 모자라빅(스페인),셀틱(아일랜드)등이 있습니다. 아래의 표를 참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경배와 찬양의 형식이 복잡해 지며 신학적 해석들이 더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문과 특정 성격의 이름이 붙여진 찬양들이 형식 속에 자리잡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현재까지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경배와 찬양을 이해 하는 것은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 본질적(essence) 변화와 이질성을 비교해 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종교개혁의 시기와 그 이후 현재까지의 경배와 찬양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실제 예배의 형태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실제 예배 속에서 '왜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는지?', '왜 성찬은 일년에 2~3번 하는 특별한 행사가 되었는지?', '예배 속에서 찬양하는 비율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 뒤에는 어떤 동기와 의도가 있었는지?'를 이해함이 현재 우리의 경배와 찬양의 형태의 변화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그 뒤에 드러나지 않는 동기와 의도를 정확히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구체적으로 예배의 모습들을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다양한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지는 각 교파들의 예배적 특성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위의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대체적으로 각 교파의 예배적 성격에 따라 좌익, 중도, 우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 말의 예배적 특성을 그대로 지키려는 경향을 우익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좌익은 중세적 예배의 형태와 성격을 떠나가려는 경향으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각 교파마다 그 성격을 한 형태로 이해하거나 그 형태가 시간 속에서 고정되어져 있다고 고려되어 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분류를 개략적으로 그리고 처음 시작점으로서의 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2. 종교개혁 이후 현재까지의 서양교회의 다양한 경배와 찬양의 형태와 그 변화
(1) 중세 말(종교개혁이전)과 그 이후의 Catholic 예배
전체적으로 중세 말(종교개혁이전)의 예배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비중 있는 로마 카톨릭 예배학자들마저 상당히 강하게 부정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Joseph Jungmann의 단언같이, "사람들은 독실했고 예배를 드리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에 참석만 한 것에 불과했고, 예배는 여전히 성직자들만의 예배였다…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 부정적 견해는 상당히 깊게 보여집니다.
대체적으로 예배적 관점에서 볼 때, 중세 말의 예배는 잘못된 방향으로의 경건으로 교회가 사람들을 인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형태에 너무 신비하고, 과장된 시도들이 오히려 경건의 세속화를 부채질하게 되어 종교적 개혁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다양한 형태의 대중적인 경건은 외적인 형태들보다 내적인 사상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몇몇 개신교들의 전통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James W. White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습니다. 또 다른 개혁의 원인으로는 예배 안에서 평신도들이 설교하려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시기에 개신교도들의 예배 속에서의 공통적 큰 변화는 소극적 예배참여에서 적극적 예배 참여로의 변화, 성례가 거의 전부로 인식될 만 한 예배에서 가끔씩 성례를 드리는 예배로, 설교가 예배의 부수적인 역할에서 필수적인 부분으로의 전환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약 400년 간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는 거의 전혀 교류가없이 단절된 가운데 자체적으로 그 나름대로의 예배들을 발전 시켜 왔다고 보여집니다.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의 분리는 1520년 루터에 대한 파문위협으로부터 시작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결국 분리의 시작 이후, 1570년에 이르러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는 개신교 안에서의 논쟁의 시작으로 이후 로마 카톨릭과의 대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1588년 트렌트 종교회의(Tridentine)이후 로마 카톨릭 예배는 의식 서들의 정형화와 정비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바로크시대에는 의식들이 표준규격화 되는 특징을 보여 줍니다. 또 다른 특징은 예술의 발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시기로는 계몽시대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개혁의 요구가 강해진 시대에,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개혁의 요구에 대해 더 방어적으로 변하여 개혁의 방안들에 대해 강하게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다음 시기는 낭만주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수도원중심의 변화들입니다. 상실된 중세의 보화들을 다시 재해석하는 운동이 Lambert Beauduin, Odo Casel, Vigil Michel등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다른 변화는 성가대의 재 출현과 평신도를 위한 성찬식이 자주 행하게 되는 등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강한 변화의 요구에 대해 교황 피우스 12세에 의한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Mediator Dei:1876~1958)'라는 서한으로 시작해 제2차 바티칸 회의(1962~1965)에 의해 구체화된 예배의 변화가 로마 카톨릭교회 안에 공식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내의 예배의개혁과 변화에 대해 White와 같은 카톨릭 밖의 예배학자들은 "규격화된 예배, 엄격한 제한이라는 묵은 이상들을 고수하려는 마지막 시도였으며 너무 능동적이었던 평신도 참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와 같이 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로만 캐톨릭 내의 예배학자들 속에서는 대체적으로 예배의 개혁적 변화로 보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 카톨릭예배는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영향은 개신교가 크게 영향을 미치는 나라들에서 먼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배장소의 현대화가 도입되기 시작하고, 예배 속에서 자국어의 사용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고, 말씀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는 경향을 들 수 있습니다.
위의 도표는 1940년경의 Mediator Dei이후 로마 카톨릭예배의 개혁의 변화 이후,
1963년경의 제2바티칸 회의(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의 개혁의 특성들이 개신교 교단들 중에서 특히 감리교, 루터교, 개혁파, 성공회의 예배들속에서 발견되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하는 점 들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개혁교회의 예배들이 신앙의 고백으로 시작하고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중세 말의 예배의모습들을 현재 우리의 예배 속에서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로마 카톨릭 예배로부터의 영향입니다.
(2) Luther의 예배와 Luther교 예배
마틴 루터(1483~1546)는 "교회의 바벨론 포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를 통해 거의 모든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마련하였음을 부인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루터는 성례전 중심의 예배를 말씀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계혁을 하였습니다. 비록 그 자신은 말씀과 성례의 균형에 대해 강조하였지만 말입니다.
루터의 개혁의 내용은 '평신도에게서 포도주 잔을 빼앗는 것', '변질'(성찬식을 제물을 바치는 행위로 보는 견해에 대한 공격)등 그 외 예배때 행해지는 작은 행동들에까지 변화를 추구했다. 어쨌든 루터의 개혁은 모든 개신교 교회의 예배의 기원이 되었음 에는 반대하는 이를 찾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예배개혁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평신도의 예배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려 애썼습니다. 그때까지 평신도들이 빈번히 받을 수 없었었던 성찬을 평신도를 위해 빈번히 가졌고, 언어를 라틴어에서 모국어로 바꾸어 사용하기를 노력했고, 예배에서 평신도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음악을 예배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음악예배가 되게 하였습니다. 물론 설교와 기도 중심의 예배인 것은 더 말 할 나위 없는 사항입니다.
루터의 사망 이후 루터교내에서는 다양한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흐름은 결국 루터의 관점으로 돌아온 듯한 인상을 주고있습니다. 루터교의 예배의식의 변화시기를 보면 정통 루터교 시대(1550~1700), 경건주의 시대(1700~1800), 계몽운동 시대(1700~1800), 그리고 복고주의 시대(1800~1950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개혁파 예배
1529년 10월 Marburg에서 개신교 지도자들간의 예배적 관점의 불일치가 개혁파 예배의 시발점이 되었음을 부인하기어렵습니다. 이 개혁파 예배의 대표적 주자로 쯔빙글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성찬의 본질적 의미를 '실재'에서'기념'의 의미로 강조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아람어 본문에는 있지도 않은 'This is my body'의 'is'의 해석에매달려 논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우리의 개혁교회 내에서 하고 있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이해가 쯔빙글리의 영향이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점입니다. 쯔빙글리의 놀라운 예배의 변화는 그가 예배속에서 음악을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예술은 힘이 있고, 그 힘이 예배자에게 유익한 힘이 아니라면 예술은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과 같은 원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지라도 조금 지나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예배의 내용에 있어서 간소성의 극대화를 꾀하는 듯 보였습니다.
쯔빙글리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개혁예배에 있어서 그의 뒤를 이은 이는 John Calvin(1509~1564) 이었습니다.칼빈은 그의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 "(인간의) 어떤 부분도 죄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고 인간에게서 기인하는 모든 것은 죄로 귀속된다", 때문에 예배 모든 면에 있어서 훈육과 교육이 전반적으로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지루한 예배는 이러한 목적아래 피할 수 없는 결과였을 것입니다. 또 다른 칼빈의 예배의 무리한 시도는 '매주 한 번'의 성찬을 시도한 것 이었습니다. 성찬에 대한 적절한 준비없는 빈번한 성찬은 피할 수 없는 실패의 결과를 낳았습니다.쯔빙글리와는 달리 칼빈은시편을 찬송하는 시간을 예배속에 많이 도입하였습니다.그러나 여전히 악기나 찬송가의 사용은 배제된 상태였습니다.
칼빈 이후 우리는 또 다른 개혁자 John Knox(1505~1572)를 빠트릴 수 없습니다. 존 낙스는 성찬식때 성찬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1662년과 19세기에 미국 감리교에서 다시 이 형태는 돌아 왔습니다. 어쨌든 Knox의 예배적관점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예배에 큰 영향을 미친 것 만은 사실입니다.
이후 영국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에 의해 개혁교단안에서의 예배의 일치를 시도하였습니다. 그 이후 Richard Baxter(1615~1691)의 'Savoy Liturgy'는 칼빈의 관점을 따라 성찬을 잘 규정한 것으로 평가 받기도 하였습니다.
영국 장로교의 미국 진출이후 다양한 변화들이 장로교안에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미국 동부 연안을 중심으로 찰스 피니에 의해서 교회 안에 부흥회와 같은 형태의 적극적 도입은 가히 폭발적 이었습니다. 회심을 위한 설교가 지배적이었던 19세기동안 감정적인 요소가 중요하게 됨으로서 예배는 종종 회심자를 만들어 내는 목적에 사용되어지곤 하였습니다. 최근의 개혁파 교회 내부에서의 움직임은 지나친 말씀중심의 예배에서 성찬의 의미를지금 보다는 조금 더 강조하는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4) 재세례파 예배
1529년에 Marburg에서의 개신교 내에서의 성찬과 세례에 대한 이해의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크게 분열한 것에 대해서는이미 인지하고 있는 바 일 것입니다. 이중 세례에 대한 논란으로 등장한 것이 재세례파입니다.
초기침례교의 단체들을 유심론자들(Spiritualists), 복음주의적 합리론자들(Evangelical Rationalists) 그리고 재세례파(Anabaptists)로 분류 할 수 있지만, 그들을 내용적으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나타난 멘노파(Mennonite), 암만파 교회(Amish Church) 그리고 후터파 형제단(the Hutterian Brethren)의 특징들은 지금까지그들이그 특징들을 고수해 옴으로써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세례파의 기원은 1523~1525년에 스위스 쮜리히에서 쯔빙글리와 유아세례에 관한 논쟁을 일으키고 쮜리히에서 쫓겨났던 발타살 휘브마이어와 게오르그 블라우록을 그 기원으로 일반적으로 여깁니다.
재침례파 예배의 특성을 독립교회 예배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립교회 예배란 것은 첫째,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예배를 개혁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과 둘째로는 예배순서는 각 예배공동체에 의해 지역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그특성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물을 붓거나, 뿌리는 것으로 초기에는 의식을 해하고, 후기에 와서야 물에 잠그는 침례를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적 핍박과 탄압은 일부 재세례파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회피하게 하는 반응을 나타내게 하기도 하였습니다.대표적인 그룹은 제이콥 후터의 추종자들입니다. 이들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을 결혼한 수도사들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쯔빙글리의 예배안에서의 찬송의 금지와는 대조적으로 재침례교안에서는 찬송의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왔습니다.그들의 찬송은 수난과 순교의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멘노파 교회들에서 악기 없이 찬송하듯이 악기의사용은 극히 제한되어져왔습니다. 다른 부분(성찬, 설교등..)에 있어서 재침례교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반대했던 쯔빙글리와 다르지 않은 이해를 보여왔다는 것입니다.
암만파와 후터파는 배타적으로 예배에 악기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해 왔습니다. 그러나, 멘노파는 증가된 문화의 압력에 대해 절충의 방법으로 악기의 사용이 증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멘노파 안에서도 종종 회중들은 아카펠라(a cappella,무반주) 찬송을 지켜오고있습니다. 무엇보다 재침례파 예배는 그 크기에 있어 대부분이 소규모 모임이기 때문에그 정체성을잘 지켜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5) 성공회 예배
성공회는 어찌하였든 1689년 윌리엄과 매리의 대관식을 출발점으로 정치적으로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한 개신교교단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예배의 형식에 있어서는 Roman Catholic과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 전통을 지켜온 High Anglican과 최근 복음적 노선에 있어서 현대화된 예배를 지향하는Low Anglican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측을 불문하고 Thomas Cranmer(1289~1556)의'공동기도서'는 양측 모두에게 있어서 현재까지도 예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헨리8세에 의한 수도원의 폐쇄를 통해 수도원적요소가 일반 교회의 예배로 스며들게 되었다고는 하나 운율적 찬송이 보편화 되는 2세기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전반적으로 문화적 혁명 책의 출판이 활성화 되면서 평신도들이 자기 언어로된 성경을 읽기 시작함으로인해서 예배의식의 변화도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중세예배에서 참여는 보는 것이었다면, 이때 영국에서의 참여적 변화는 듣는 것 으로의 참여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16세기의 영국 성공회의 특이한 현상은 매일 드리는 아침 기도회와 저녁 기도회의 예상치 못한 성공이었습니다.Cranmer의 개혁중 중요한 부분인 대중기도는 기도회 뿐만이 아니라 예배의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그는 수도원의 고행적 기도형식에 고대 교부들의 지시인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을 결합시켜 기도문을 통해 성경을전체적으로 읽어내려 가는 시도를 했고 그것이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악기의 사용에 있어서는 변화가 많았다고 여겨집니다. 자유공화국 시기에는 오르간을 제거하려는 결정도 있었던 것같이 교회 안에서 오르간의 사용조차 근대에서도 많은 제약들이 있어 왔다는 것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꽤 낯선 모습일
것입니다.
꽤 놀라운 것은 영국 성공회에서 감리교, 개혁파, 청교도 그리고 퀘이커 교단이 분리되어져 나왔다는 것입니다.성공회 내에서도 Joseph Butler(1692~1752)와 같은 복음주의적 그리고 성례생활을 강조한 지도자가 일어나기도 하고,그리고 19C에와서 John Henry Newman에 의해 평신도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Oxford Movement등을 통한예배 안에서의 변화가 시도 되어져 왔습니다. 그 후, 기도서에 있어서는 전통적, 찬송에 있어서는 장려되는 경향을나타내어져 왔습니다. 18C감리교가 성공회에서 찾지 못해 불만으로 여겼던 성찬은 그 이후 근대에 와서 가장 성찬식을 많이 하는 교단이 되었습니다.
예배 안에서의 찬양은 19C중엽 찬송가가 편집 출판되면서 활성화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예배 음악 자들에 의해꾸준히 발전되어온 합창 곡 등이 예배에 들어옴으로 부분적이나마 예배참석자들의 예배 안으로의 참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A.G.Herbert와 Gregory Dix등에 의한 초대 교회로의 예배의 회복운동은 그 갖는 의미가 큽니다. 악기의 등장과사용은 성공회에 있어서는 High Anglican에 있어서는 여전히 오르간에 한정된 반면, 1960년대 이후로 서서히 찬양을위해 다른 악기들(기타, 드럼, 신디사이저, 금관악기와 현악기등..)의 사용이 Low Anglican 내에서 급격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6) 분리주의와 청교도 예배
청교도들을 재세례파와 흡사한 형태로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간에는 어떤 교류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청교도는 영국 성공회의 개혁자들로부터 출발해 미국 이주민들에 의해 발전된 전통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 특성을 보면 재침례파와 같은 '독립교회'의 예배와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그러나 현대에 가까워 올수록 이러한 형태의 예배는 다양한 영향과 변화를 겪으며 그 특성을 찾기 힘들만큼 변화되어져 왔습니다. 그 변화는 초기의 성경주의에서 벗어나 많은 예배 속에서의 금지들을 풀기 시작하였습니다.특히 2차 대전 이후 예배 속에서 찬송은 심미적 한계에서 벗어나 사회와 정의의 내용을 포함한 것들도 나타나기시작하였습니다. 그 한 예가 우리 찬송가에 있는 "주 예수 안에 동서나 남북이 있으랴"(찬526)입니다.
찬송에 있어서는 Issac Watts(1674~1748)의 출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주로 다윗의 시편을 중심한 찬양들이지만 그 나름대로 재 해석된 깊이를 더함으로 그 이후에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후 C. Wesley도 그의 찬송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7) 퀘이커 예배
중세기 예배전통과의 철저한 단절은 17C에 시작된 퀘이커교도들('친구 신앙단'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으로불렸던) 속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퀘이커 예배는 그 급진적 성향 때문에 가장 좌익에 위치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안에서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 전통을 지키려는 강한 성향으로 가장 우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퀘이커 교도의 예배는 가장 금욕적이며, 외적인 자극이 아닌 오직 내적인 자원에만 의지하는 예배를 추구합니다.퀘이커 신학자 Robert Barclay(1648~1690)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만남을 강조한 신비주의적 전통의선상에 서있는 경향을 보입니다.
퀘이커 예배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된다. 가끔 지도자에 의해 설교의 형태를 발견 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시간과 형태는침묵 속에 내적인 하나님과의 교류에 집중하게 된다. 대체로 모임은 지도자인 장로들에 의해 옆에 사람에게 인사함으로 마침을 알릴 정도로 매우 정적이다. 그들의 예배를 표현하는 단어들 "전념하기(centering down)""내적 중심을 발견하기(finding one's inward center)" "하나님을 기다리기(waiting on God)"등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매우 신비주의적 요소들을 많이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퀘이커 예배는 음악을 제외한 경건을 추구하는 하나의 기도로 보는 경향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도가자연스러움에서 나온 운율적 표현이 음악적 이라 해서 도외시하는 경향은 보이지 않아왔습니다.
(8) 감리교 예배
감리교 예배는 감리교 창시자인 John Wesley와 그의 동생이며 위대한 찬송작사가인 Charles Wesley에 의해그 특징이 만들어져 왔습니다. 이들의 예배적 전통은 감리교는 물론이고 구세군, 나사렛, 그리고 성결교 교회들에서발견할 수 있습니다. 후에 오순절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초기에는 청교도와 퀘이커 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그 성격이복합적으로 나타난 것도그 특징 중 하나입니다.
Oxford의 Holy Club에서 시작된 성례와 일상기도에 대한 운동으로부터 얻어진 "규칙주의자(Methodists)"또는"성찬 형식론자들(Sacramentarians)"이라는 호칭은 그들의 주요관점과 예배의 특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특히 전도에 있어서 특이한 열심을 나타낸 이들은 거리 전도에 찬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엄청난영적 대 각성과 함께 선교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예배 속에서의 웨슬리의 개혁은 많은 부분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삶을변화함으로 바뀌어 지기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자율적인 것과 정해진 기도등 양쪽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발견되어집니다. 찬송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그 내용적 깊이도 찰스 웨슬리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분류되어 지며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는 1745년에 출판된 'Hymns on the Lord's Supper'라는 성찬과 관련된 내용의 찬송집에서 그 증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찬송의 예배 속에서의 적극적 사용은 예배를 수동적인 것에서능동적인 것으로 바꾸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특히, 성가대에 의한 찬양을 지양함으로 참석자 스스로 자기의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을 주로 함으로 능동적 참여를 꾀한 것은 예배 속에서의 찬양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의식의발전으로 여겨집니다.
미국의 감리교는 많은 변화들을 거치며 그 나름대로의 전통을 고수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감리교의 전통을 고수하는경향 속에서, Peter Cartwright(1785~1872)는 배우지 못하고 문화적 혜택을 벼로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선교의 목적으로예배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전도의 목적에 맞게 예배를 바꾸는 개혁적 시도를 하고 그 영향을 이후에 많이 남기게 됩니다. 그 후 흑인 감리교회 안에서는 변경예배의 특징과 유사한 개인 주의적 경건이 예배 찬양의 가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후 백인 흑인 영가 찬양들이 감리교 안에 급속히 들어오는데, 이것은 변경교회의영향으로 감리교식 변경집회들이 생기고 결국 Fanny Crosby(1820~1915), Ira D. Sankey(1840~1908)(무디와 같이 전도사역을 한) 와 같은 위대한 찬양 사역 자들을 생산하기에 이릅니다. 20C에 들어와서, 이전의 예전 회복을 주창하거나사회의 활동을 주창하거나, 전도에 주력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현대의 예배가 형성되어져 온 것은 다른 개신교 교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9) 변경 예배
변경예배는 교회 밖에서의 부흥 운동적 성격을 가진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빠를 것 입니다. 이 예배는 교회를 다니지않는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이기 때문에 지금 까지의 어떤 예배들과도 그 목적과 특성이 다르다고 볼 수 있을것입니다. 초기에는 세례와 성찬이 예배의 중요한 순서였습니다. 주로 회심을 위한 찬송이 이전 전통적 찬양(Issac Watts와 같은)을 단순하고 짧은 형태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Charles Finney(1792~1875)는 가장 큰영향을 미친 예배 개혁자 였습니다. 그는 부흥회식 예배를 정착시킨 일등 공로자 였습니다. 예배의 순서를 크게 세단계로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준비단계적인 찬송시간, 회심을 위한 설교시간, 그리고 수확을 위한 찬송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성가대의 등장은 변경예배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10) 오순절 예배
오순절 전통은 20C에 와서야 시작된 가장 새로운 예배의 모습입니다. 오순절 예배는 성령운동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순서의 틀을 벗어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순절 예배의 관심은 방언과 치유 성령 세례 등에
있으므로 영성의 강조에 그 특이성이 있습니다.
3. 한국교회의 예배의 기원과 그 발전
(1) 예배의 형성기(1879-1900)
이 시기는 만주, 일본, 그리고 한국 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예배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입니다.이 시기에는 선교사 주도하에 외국의 특히 미국 교회의 예배형식을 빌려온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형식은주로 선교지향적이며 비예전적인 경향을 띠었습니다. 선교적 관점의 접근은 예배를 단순화 하고 19C 미국의부흥회적 성격을 더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2) 예배의 전통과 토착화 시기(1901-1960)
선교사들에 의해 예배인도에 대한 훈련을 받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배출되면서 예배규범과 모범을 통해 예배의전통을 세우던 시기입니다. 선교사들의 영향에 의해 예배의 형식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즈음 1907년 경부터의한국교회 내의 부흥운동에 의해 예배가 설교중심의 사경회, 경건과 성령운동 중심의 기도회 등으로 더욱 단순화 하며그 틀을 형성해 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에 일제시대와 한국동란의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받아 길선주 목사님의 '말세신앙', 김익두 목사님의 '치유와 이적',이용도 목사님의 '신비신앙' 등으로 대표되는 부흥회식 예배가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형식이 되어졌다고 보여 집니다.이성봉 목사님의 '사경회'도 또한 그 시대의 특이한 예배의 특징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어쨌든 1930년 경 이후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이 심은 예전적 예배의 형식에서 탈예전적 예배의 모습으로 토착화 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기시작하였습니다.
(3) 예배의 굴절기(1961-1990)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70, 80년대 까지 계속된 경제개발에 집중된 사회적 관심과 병합하여 교회도 개교회주의적교세확장에 치중하여 교회의 양적 성장에 편중된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예배는 교회성장의한 방법으로 사용된 듯한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경 후반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대형화추세와 맞물려 교회의 양적 부흥의 도구로 예배가 전락한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특히 1970년대의 성령운동과 기도원운동은 한국교회 예배속에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전도와 헌신 그리고 성령운동을 목적으로 한 열정적인 찬양 등을 동원한 특이한 형태의 예배를 정착시키게 됩니다.
일제 시대 신사참배의 문제로 보수와 진보로 나뉘기 시작한 교회내의 분열은 또 다른 교회내의 예배에 있어서의교류를 막는 큰 장애로 대두되게 됩니다.
(4) 예배의 갱신기(1991- )
예배 갱신기라는 것은 최근에 와서 한국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식서를 정비하여 초대교회의 예전을 회복하려는경향이나, 오순절적 경배와 찬양 같은 오순절적 원형을 회복하려는 시기를 일컬음 입니다.
예전적 예배전통을 살리려는 보수교회들의 움직임은 예배 속에 말씀에 너무 치우쳐 균형을 잃은 것 같아 보이는 한국교회내에 초대교회 때,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강조되었던 말씀과 성찬의 이상적 균형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둔 것으로 보여집니다.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큰 흐름을 이루는 경배와 찬양(worship & praise)은 예배 속에 현대적인 찬양을 중심으로 예배의자유함의 극대화를 노리는 경향을 보이고, 방언과 치유 등의 성령은사 체험에 목적을 둔 오순절 예배(Pentecostal worship),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 안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하기 위한 Evangelical Worship인구도자예배(Seekers Service), 그리고 첨단 기기와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예배 속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멀티미디어예배(Multi-media Service)등 21C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예배의 시도들이 진행되어 지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다양한 예배의 현상을 따라가지 않고 그 배후에 있는 중요한 의도들을 잘 이해 하는 것이 21C한국교회 내의 예배 속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