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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2장 강해의 전제
-형식구조(나라는 인간,건물과 조직으로서의 교회)로서 성경은 설명할수가 없게 됩니다.
죽음의 세력을 우리가 너무 얕잡아보고 있어요. 죽음은 우리가 조절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세력아 제발 좀 가만 있어다오. 네가 벌써 튀어나오면 내가 곤란해. 내가 죽을 때가 되면 그 때 발휘하고 아직은 잠잠히 있어.’ 라고 명령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것이 연세가 들면 들수록 정신적, 육체적 연약함이라든지 하는 지층을 뚫고 죽음의 세력이 수시로 튀어 나옵니다.
죽음의 세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 자아를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여기고 자유롭게 활동을 해요. 이 죽음의 세력은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도 발휘가 되요. 죽음이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막을 수 없어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소유로 공간 이동이 되어서 우리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안치되어 있습니다. 마치 납골당에 죽은 자들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의 능력을 근거로 우리 생명을 따로 챙겼어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언약적 자기 숙제 때문에, 자기 백성 건지는 것은 자기 과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사람을 이 세상에 방치해버리면 막강한 죽음의 세력이 자아를 가공물로(허위지요) 해서 부셔버려요. 이렇게 되면 인간은 죽음에 쫓기듯이 살아가면서 또 다른 공간을 찾아가면 여기까지 찾아와서 또 공격하고 또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곳까지 찾아와서 공격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이래봬도 서울대학에 합격했다. 서울대로 피신하는 것입니다. 서울대로 피신했는데 여기에 또 죽음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서울대학에서도 장학생이다. 이런 식으로 또 자아를 구축해요. 그러면 또 공격을 하지요. 나는 서울대학 학생이면서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한다. 새로운 자아상을 또 구축해요. 그러면 끝까지 따라와서 공격합니다. 나중에 나는 검사다. 폭탄주 마시고 성 추행했다. 이렇게 따라오지요.
죽음의 세력을 끝까지 따라붙어서 우리를 붕괴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너는 처음부터 나의 밥이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노래를 잘 한다. 이것은 나중에 늙으면 허무해지고. 나는 골프 천재다. 노래 잘하는 나. 골프 잘 치는 나. 앞의 것들이 나를 수식하지요. 그런데 ‘나’가 붕괴되니까 앞의 것들도 다 무너져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죽음의 세력에게 쫓기는 삶을 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런 쫓김을 청산시킵니다. 더 이상 죽음에 의해 시달릴 이유가 없게 만듭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지요. 만약에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아팠는데 계속 살아 있었다면 죽음에 쫓기는 입장이 되요.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죽도록 버려두지요. 그리고 죽고 난 후에 찾아 가잖아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사로로 하여금 더 이상 죽음에 안 쫓겨도 되는 상태로 만들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마르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죽음의 능력을 이겼다는 사실을 오빠를 되살려 내면서 그들 눈앞에서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스스로 너 자아를 사수할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뭐든지 사수한다는 말은 그 전에 뭔가를 내 것으로 소유한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내 것이란 것이 있으면 여기에 마귀가, ‘나’라는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죽음의 세력이 있으면 ‘나’라는 것을 만들어 놓아도 겁이 나지요. 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내가 학교에 가다가 죽어 버리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내가 죽을까봐 겁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는 서울대학 학생이다. 서울대학에 간 것은 내 소유다.’ 라고 사수하게 되면 마귀가 이것을 먼저 알아요. 마귀는 내 것이라고 여기는 곳에 가차 없이 찾아와서 공격을 해 댑니다. 이렇게 되면 ‘그래, 나 이제 서울대학 학생 안 할래. 대신 노래 잘 하는 나로 바꾸자.’ 이렇게 도피하면 또 따라와서 ‘너보다 노래 잘 하는 사람 많아.’ 이렇게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
뭐든지 사수하고 지키려 하면, 이것은 항상 마귀의 시험에 미끼를 거는 식이 됩니다. 얘가 만약에 둘이다. 그러면 저 자식은 내 자식이다. 이렇게 나오면 거기에 마귀가 찾아오지요. 내 얘가 어떻게 되면 안 되지. 결코 안 돼. 어떤 경우라도 저 아이는 다치면 안 돼. 이런 식으로 밤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 여기면 항상 거기서, 원래 자식은 하나님의 것인데, 여기에 ‘나’가 들어가면 나를 겨냥해서 죽음이 찾아옵니다. 원래 내 것이 없는데, ‘나’라는 것은 가공물 즉, 허구란 말이에요. ‘나’는 허구에요. 허구인데 ‘나’라는 것을 따로 만들어요. 이것을 어려운 말로 ‘형식구조’라고 합니다.
‘형식구조’란 말은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식구조’예요. 사람은 내용은 없으면서도 형식은 잘도 만들어 내요. 하루 눈뜨면 형식구조라는 목표로 상상을 동원해서, ‘나는 이렇게 되어야 해. 나?이런 모습이어야 해.’
형식구조 속에는 반드시 소유, 내 것이란 것이 들어 있어서 이것이 날아가 버리면 형식구조도 바뀌고 그렇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음부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오늘 고린도후서 2장을 하는데 여기서 뭘 느끼는가 하면, 나로부터 출발한 형식구조로서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것이 성경에 보면 쫙 깔려 있습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뭔가 세상을 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전혀 설명이 안 되는 그런 것이 많은데,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5장을 봅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뭐냐 하면, 내 것이라고 사수하면 반드시 마귀가 그것을 알고 같이 달려든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란 말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면 마귀는 여지없이 달려듭니다.
그러면 내 것이라 여기지 않으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내 것은 이미 하늘나라에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내 것은 주님이 알아서 내 것이라고 따로 마련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다시 내 것이라는 형식구조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의 표적으로부터 벗어나지요.
고린도전서 5장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문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신비로워요. 몸은 떠나 있으나 뭐는 함께 있다? 영으로 함께 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신앙이란 현재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그런 어떤 용어를 동원해도 신앙은 그것과는 다른 별개의 원칙 아래서 딴 세계가 구축되어 있어요. 세계가 전혀 달라요.
그래서 이 세상을 가지고 신앙 세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이 세상의 것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신앙은 물론 이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세상의 개념으로는 영원하다든지 하는 신앙 세계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신앙세계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사건에 우리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어요. 사건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돌발적으로 터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잖아요. 이처럼 천국은 사건이에요. 그러기에 물질로 이동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려면 물질이 사건으로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아마 제가 지금까지 한 말 중에 제일 어려운 말일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이 분해 되어 사건화 되어야 그 사건이 저 천국이란 사건과 만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망치로 때리면 몸이 산산조각 나지요. 산산조각 나봐야 분자가 되고 원자가 될 뿐이지 사건화 되지는 않아요. 우리 몸을 부수는 사건은 주님의 십자가 영이 와서 부술 때 비로소 우리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건이 되어서 천국 사건과 만나서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건으로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은 뭐냐? 이 몸은 죽음의 세력에 그냥 맡겨야 합니다. 죽음이 마음대로 유린하도록 맡기세요. 치매 걸리면 치매 걸리고, 늙으면 늙도록 하세요. 예수 믿는다고 늙어서 똥, 오줌 안 삽니까? 다 삽니다. 어차피 우리의 육체는 껍데기이기에 죽음에 넘기면 되요. 허물을 아까워하면 안 되지요. 땅에 속한 것은 마귀에게 맡기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었을 때는 하늘에 속한 사건이 찾아와서 그 사건 속에서 만날 때 우리는 늘 느끼고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성령께서 사건으로 우리에게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사건으로 찾아오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사건에 대상이 됩니다. 우리 몸, 우리 운명 자체가 사건의 대상이 되요.
제가 mbc리포터입니다. 오 목사님께 ‘얘들은 오늘 왜 안 왔습니까?’ 라고 물었지요. 그 때 “얘들은 집에 있습니다.” 라고 했지요. 제가 물으니까 답변을 했잖아요. 이것은 다른 김 목사님, 이 목사님은 두고 오 목사님께 물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오 목사님은 mbc리포터에게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채택된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개입을 못해요. ‘왜 내게는 안 묻노?’ 그것은 리포터 마음이지요.
‘성령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것은,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보여주는 밑받침으로 당신의 인생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는가 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가 잘남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런 사건을 일으키고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전위대가 되지요.
그런데 성령은 바람 같아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따라서 우리에게 나타난 모든 주의 일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mbc에서 와서 오 목사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것이 어제 오후 3시라고 합시다. 혹시 오늘 오후 3시에 mbc에서 오지 않을까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요. 왜? 종잡을 수 없으니까. mbc리포터가 오후 3시에 찾아 왔다면, 다음에는 새벽 2시에 올 수도 있고, 파자마입고 인터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침 10시에도 올 수 있고. 이것은 누가 마음대로 입니까? 이것은 리포터 마음대로예요.
이것은 소유화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성령을 소유할 수 없어요. 만약 성령을 소유해 버리면 내 물질세계 속에 있는 물질이 되지요. 누가? 성령이 물질이 되 버려요.
인간이 ‘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라 반드시 뭔가 안에 내용물을 소유할 때만 ‘나’라는 것이 구축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조롱하면서 하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본인은 본인이야.” 하거든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데, 본인은 ‘나’를 말하는데, ‘나’가 ‘나’되려면, ‘나는 육군 소장이었으며’ 뭔가 내용물이 있어야지요. ‘자식은 몇 명이고, 아내는 어떤 여자이고’ 이런 내용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본인이야.’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나’가 있지요. 어린 얘들도 ‘나’가 있잖아요? ‘나’를 느끼면 그냥 ‘나’가 아니라, ‘나는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어’ 이렇게 되면 권리를 소유하게 되지요.
항상 내용물을 담고 있는 이것을 ‘존재권’ 혹은 ‘존재의 소유권’이라고 하는데, 존재의 소유권이 있을 때만 존재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가지고, ‘우유적 속성’이라고 하는데, 뭐냐 하면, 또 오 목사님을 예로 들겠습니다.
오 목사님은 키가 몇 센티다, 오 목사님은 얼굴이 검다, 바람불면 넘어질까 위험하다. 뭐 이런 속성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한데 모여서 오 목사님을 구성하지요.
내가 만약에 구원을 받고자 하면, 성령이 나에게 속성으로 들어와 버려요. 사건이 아니고 내 존재 속으로 들어와야 해요. ‘나 성령 받았다.’ 사수하고 소유화 하려고 하지요. 내가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가 뭘 노린다고요. 반드시 사수하고 소유한 것에 대해서 악마가 죽음의 세력으로 다가오면서 하는 말이 ‘너 죽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니?’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데카르트는 말했지요. 나는 나인데 내가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내 죽으면 그만이지. 나는 이미 없는데 하나님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방식이 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든 삼위일체 하나님이든 나를 위해서 구원을 해야 하고, 내가 납득이 가는 식으로 온다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납득이 된다는 말은, 나는 물질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데, 내가 납득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나에게 하나의 속성으로서 내 속에 들어왔다는 그러한 느낌이 와야 비로소 나는 예수를 믿는 흥미를 느끼겠다는 것이지요.
예수여 당신 살아있다면 나에게 보여 다오. 여기에서 본다는 것.
조금 이해가 된다는 눈치를 보이고 있는데 감사합니다.
‘나’라는 것이 뭘로 되어 있다? 속성으로 되어 있지요.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봤잖아요. 혹은 병이 나았다든지, 기적을 체험했다. 그 체험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속성 중 하나에 포함이 되요. 그러면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우려먹는 거예요. 계속. 이것은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는 이런 속성,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는 속성 덩어리기 때문에, 이런 속성들이 ‘나’를 ‘나’되게 했기 때문에, ‘나’를 건드리는 것은 주의 사자를 건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마귀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2년 전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어요. 그런데 2년 후 또 암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기도해도 안 나은 거예요. 이렇게 되면 다른 무슨 기적이 일어나서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계속 확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자아가 구축됩니다. 이렇게 구축된 자아를 누가 건드리면 폭발하지요.
이곳으로 차타고 오면서 김 집사님과 이야기 했지만, 목사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목사라는 것, 왜 내가 목사인가? 본인은 본인이야. 이것으로 끝나요. 나는 목사이니까 목사라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거지요. 이런 인간들은 완전히 마귀의 밥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청해서 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건이 다가오는데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인가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하면, 이 십자가 사건은 새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거든요.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는 의미가 뭐냐?
요한복음 6?5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세계 WBC 경기 일본과 한국이 준결승전을 하고 있는데, 우리교회 권사님이 이런 이야기해요. ‘목사님, 우리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이기게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죽음의 세력 앞에 놓인 인간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 자기 속성을 강화시키는데 그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세계 야구대회에 준결승전에 올라간 팀의 국민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우리 팀이 준결승에 올라갔다는 것이 자기가 죽음을 이기는 속성으로 그것이 포함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런 것을 예수님이 아시기 때문에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야구팀이 결승에 올라가고 안 올라가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은, 목표가 뭔가 하면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에만 생명이 있고 그 이외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사건을 벌이기 이전에는 모든 것이 그냥 생명이 없는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자기가 하는 일로 자신이 파괴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사라면 교사 열심히 해서 교사로서 파멸 되요. 목사는 목사일 열심히 하다가 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든 교사든 죽음의 티를 내야 해요. 티 안 내는 죽음은 없어요. 죽음에서 어떻게 생명으로 나아갈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죽음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하늘나라 갈 때는 어떤 강도가 와서 그 집 주인을 꽁꽁 묶고 그를(세간을) 약탈해 와서 하늘나라에 넣어 줍니다. 이 말은 스스로 세간이 움직여서 그 집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를 하든 뭘 하든 우리는 죽음인데 생명은 어디 있는가? 생명은 없는 거지요. 없다는 것을 전재로 해야 돼요.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없다. 이것이 정답이에요. 없어요. 없는 생명을 금방지게 왜 쳐다보느냔 말이지요.
나에게는 생명이 없는데 저쪽에서 따로 만들지요.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로 따로 만들어요. 이것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많은 사람이 새 언약을 이룰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가 없어요. 새 언약을 이루는 것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죽음에서 살아난 능력이에요.
죽음도 부활한테는 못 이겨요. 왜? 죽었는데 밟고 일어났습니다. 그 힘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찾아올 때 사건으로만 찾아온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은 바로 십자가의 영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오는 영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6장에 있습니다.
사건이 임하게 되면, 죽어있던 사람이 뭘 느끼느냐 하면, 이제는 사수한다든지, 자신의 존재를 채운다든지 이것 자체가 바로 부질없는 자기 대책. 자아란 것이 있어서 자아가 죽음을 대체하는 방법이 보다 더 나은 자아가 되면 죽음이 따라오다가 지쳐서 안 따라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지요.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잖아요. 요 사건이 능력을 가지고 그대로 우리에게 오면 동일한 능력이 일어납니다. 죽어도 괜찮다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오게 되면 이제는 그 부활의 능력으로 인하여, 내가 지금 나이가 54세인데, 60이 되든, 70이 되든 그 자체가 죽음이란 사실을 압니다. 80을 살아도 생명이 아니고, 90을 살아도 죽은 것이에요.
이처럼 60, 70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면, 5, 6세 때도 사는 것이 아니겠지요? 미래가 사는 것이 아니라면 5, 6세 때도 죽음이지요. 이것을 가지고 전도서에서는 “헛되다”고 합니다. 전도서 11장 10절에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이것을 어린 아이들이 압니까? 모르지요.
얘들의 심리는 지평선 즉, 공간적 심리예요. 공간적 심리가 뭔가 하면, 저 산 넘어가면 희망이 있다. 저 지평선 넘어가면 희망이 있다. 밤에 몰래 엄마 지갑에서 돈 훔쳐서 차타고 서울로 가면 거기에 희망이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지금 있는 공간만 벗어나면 거기서 새로운 희망의 파랑새가 나를 반길 것이라 생각해요.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를 보면 캡슐을 묻고 10년 후에 파보자고 해요. 10년 후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 만날까? 제가 젊은 시절 그런 책도 있었어요.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까] 이런 비슷한 제목이었는데.
그런데 10년 뒤에 안 나옵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어릴 때 한 짓들이 다 부질없는데 그런 부질없는 짓에 다시 말려들 이유가 없지요.
TV프로그램에 헤어진 가족, 친구들이 만나는 것이 있잖아요. [TV는 사랑을 싣고]
만나고 나면 그 때부터 후회가 되지요.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다 깨지고, 정수기 한대 사 달라, 돈 좀 빌려 달라. 골치 아파요.
수요일 마다 헤어진 가족 찾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들이 만나고 나면 후회를 합니다. 차라리 안 만나고 그냥 사는 것이 나았지 하고 후회를 해요. 괜히 만나서 짐을 떠안고 고생이지요.
왜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헛되게 만드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헛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사건의 지뢰밭입니다. 우리가 한 발 한 발 내 딛을 때마다 새로운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것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언약 사건들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게 만드는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국은 성경 말씀대로 됩니다.
어릴 때와 청년의 때 모두 헛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아하, 과연 헛되구나.
지금 젊은 사람들이 노는 것을 보면, 연세 많은 분들이 보면 서글프지요. 얘가 학교 간다고 해 놓고 계속 이옷 저옷 갈아입어요. 이것을 입을까, 저것을 입을까? 나이 든 사람이 보면 다 상관없는데, 아이들에게는 심각한 거예요.
이처럼 노인의 입장에서 젊은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참 한심스러운데,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볼 때 얼마나 한심스럽겠느냔 말이지요. 각자는 인생의 지혜를 배웠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저것도 인생이가? 죽음의 한 양상이지 그것이 사는 것이냐? 얼마나 부질없는 고민과 근심을 하고 있는지, 그냥 죽으면 되는데 살려고 발버둥치고, 그래도 결국은 죽을 것인데.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으로 우리를 꾸중하십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이것은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족한 줄 알아야 해요.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관점이고, 지금 헛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사람한테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지요.
김달원 목사님 설교 중 이런 대목이 있어요. 10년 전에는 20평 아파트만 해도 참 하나님께 감사했고, 축복받았다고 했는데, 요즘 신혼부부들은 20평 살면 부끄럽다고 집떨이도 안 한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옛날에 집에 화장실 2개 있으면, 주여 이제 이것으로 족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화장실 2개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화장실에 비대도 있어야 되요. 누가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었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자아가 허구인데 마치 실재인 것처럼 간주해서 계속 자아를 채우려고 부치기는 악마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값어치가 떨어졌어. 다른 아파트로 옮겨야 해. 계속해서 더 품위 있는 자아를 만들도록 악마가 자아의 속성을 추가시켜놓고, 또 벌벌 떨게 만들고. ‘다른 사람이 이만큼 갔는데 너는 쳐졌잖아’ 하고 속삭이지요.
우리에게 맡겨두면 이런 꼴 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그때 마다 ‘먹을 것 입을 것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사건을 담고 우리를 방문하시는 분이 계시지요. 그래서 말씀이 사건화 됩니다. 이 때, ‘아! 말씀이 다가왔구나.’ 말씀을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내가 다 이루었다, 생명은 네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내 살과 피가 생명이다.’ 이런 독특한 성경 말씀을 참된 현실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그런 사건을 우리에게 유발시킵니다.
이런 것이 다가오게 되면, 천국이 주는 기쁨에 우리는 잠시 빠지게 되지요. 그러나 성령은 바람 같은 분이기에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같아요. 우리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다만 가끔 찾아오신다는 것이 너와 나는 남남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은 버려야 합니다. 내 존재가 천국이라는 영토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완전히 엉터리입니다. 만약 그렇게 천국을 간다면 들어가도 내 소유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큰 일 납니다. 내 소유는 여기서 작별해야 합니다.
주님이 살과 피로 생명을 주시므로 말미암아 그 생명에 걸맞은 하늘에 속한 형상,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영광을 말하는데, 그 영광으로 덧입혀 지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 만들기를 주님께 일임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다’는 말씀처럼, 나의 나 됨을 주님의 살과 피로 저분이 만들도록 이 땅의 나는 해체과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해체 되도 괜찮아요. 사건으로 해체 되요.
그렇다면 우리가 자살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건화 시킴으로 말미암아 대외적으로 우리로 홍보효과를 노립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을 받은 홍보요원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은 사람은 강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이 사람은 이런 짓을 해도 주님의 용서로 구원 받았다는 홍보용 사람이 되어 마지막으로 죽었습니다.
보통 점포를 새로 오픈하면 젊은 아가씨들 불러서 짧은 치마 입혀 몸을 흔들며 홍보를 하지요. 이처럼 우리를 이 땅에서 주님은 홍보용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2장 14-15절에 보면,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향기’를 다른 말로 하면 ‘향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향수. 이것이 더 좋지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수병이지요.
16절에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우리 몸에 향수를 뿌려서 그것으로 냄새를 피운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행동 하나하나를 주님 사건으로 변화시키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아이쿠 이 인간아. 그래가지고 무슨 재미로 사노?’ 나는 구원 얻은 기쁨으로 산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과 의식이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서 우리에게 이미 살과 피로 생명을 주셨음을 드러내는 향기로써 퍼지도록 세상에 계속 사건으로 활용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나는 향기를 맡고 환영을 하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고후2:15에 “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망해야만 하는데 구원 받기 위해서 교회로 몰려옵니다. 교회 자체가 형식구조이기 때문에 옵니다.
교회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형식구조로서의 교회와 다른 하나는 사건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사건으로서의 교회는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형식구조의 교회는 장로 있고, 집사 있고 등등의 형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 받기 위해서 형식을 찾아옵니다. 그래야 자기 존재에 교회 다닌다는 속성이 추가되니까. 그러면 내 존재는 강해지고, 강해지면 마귀가 달려들어도 나는 강한 사람이 되어 구원 받을 수 있다. 라고 스스로 자기를 사수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에 와서 자기 인격을 높이고, 소위 성화라고 하지요. 그래서 마귀도 못 이길 정도로 단단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형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집사, 장로, 성만찬 등등.
이 세상에 형식구조 아닌 교회가 있는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교회는 형식구조로서의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다 형식구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참된 교회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형식구조화 한 일곱 교회(이 교회 다 망했거든요)를 내세우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다 이루었다’를 성취하기 위한 그 배경이 바로 율법을 형식 구조화시킨 가운데서 박차고 승리하셨거든요.
그 악한 형식구조라는 배경과 그것을 박차고 승리하신 그것이 두개가 합쳐서 하나의 십자가 사건을 형성합니다. 그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우리도 형식구조로 완벽하게 깔려 있는 이 세상에 놓여 있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형식에 얽매였는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내가 고난 받고난 후 죽고 부활한다고 했지요. 고난 받고, 죽은 후에 그 다음에 부활이잖아요. 고난 받고 죽음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음의 길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것은 예수님과 결별이지요. 예수님은 죽음으로 가고 남은 것은 형식구조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냥 죽지 않고 어떻게 죽는다? 고난 받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고난 받게 한 원인 제공자가 뭡니까? 형식구조지요. 율법 아닙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예수 당신은 사이비야.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야. 우리의 형식구조에 의하면 당신은 완전히 가짜야.’ 라고 억울하게 고난 받고 침 뱉음 당하고 죽고 난 뒤에 이것으로 끝났으면 예수님이 가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옳고 예수님은 가짜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기에 이제 누가 가짜란 말입니까? 고난을 유발시킨 형식구조가 하나님보시기에 전혀 먹히지도 않는 엉터리란 것이 폭로되지요.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활의 능력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요 사건을 그대로 유발시킵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교회란 것을 통해서 교회 아님을 봐야 되지요.
이 형식구조에 누가 오는가 하면, 많은 자들이 기독교라는 형식을 걸치면 구원 받는 줄 알고, 성찬식 떡 먹으면 구원 받는 줄 알고 오지요. 천주교가 대표적이고 나중에 개신교도 다 변하고 말았습니다.
망하는 자들이 이런 형식구조에 와서 구원 받고자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건을 일으키지요. 이렇게 사건을 일으키면 망하는 자들이 아무리 교회 와서 구원 받고자 해도 놀라운 것이 뭐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기적입니다.
저 사람은 복음만 제대로 전하면 구원 받겠는데 하고 전하면 이상하게 돌아서고. 이렇게 돌아서는 것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는 것만 놀라운 능력인 줄 아는데, 구원하는 동일한 능력이 양발차기로 건질 자는 건지고 멸망할 자는 멸망시키는 능력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구원 얻을 자에게는 향기로, 멸망할 자에게는 악취로 다가옵니다. 이런 사건을 누가 일으키는가? 주님께서 일으키시지요. 주님은 지금도 이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로 말미암아 악취가 나오도록. 그렇게 지금 사용하십니다. 많이 악취 피우시기 바랍니다. 악취가 나야합니다.
그래서 네가 천당 가면 나는 안 간다는 말이 나오겠끔 그렇게 조치를 해야 합니다.
조금 쉬었다 계속 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