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열흘동안 오랜만에 다섯 가족이 같이 있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 일리노이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대학을 다니는 맏아들과 그 밑의 딸이 캐나다 밴쿠버 교외의 집에 방학이 되어 온 것이다. 위 사진은 캐나다 현지시간으로 5월22일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골든 이어스 주립공원"에서 찍은 세 남매의 사진이다. 빙하에 의해 만들어진 호수로 사람들이 보트를 차에 매 달고 와서 물놀이나 낚시를 즐긴다. 대학생인 두 자녀는 오늘 한국에 다니러 간다. 소재공학을 하는 전공하는 아들은 대기업 연구소에 두 달동안 인턴 경험을 하려고 하고 딸은 컴퓨터 학원에 다니면서 봉사활동도 한다고 한다. 최근 조기유학, 기러기가족 등에 대한 문제가 많이 기사거리가 되었다. 뉴질랜드에서 기러기가족을 하던 가족들 중 부인과 두 딸이 먼저 자살하고 그 것을 수습하러 온 아버지까지 자살한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30년전인 1980년 12월에 일본과 필리핀을 방문하여 처음 외국을 경험하였다. 그 해가 5.18 광주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국내 정치가 혼란한 시점에 외국에 나가서 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1982년 미국 버클리 대학 생물물리학 박사과정으로 입학허가를 받고 유학을 떠났다. 유학중에 이민와서 대학 학부에 다니는 한국계 학생들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해 본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이전에 이민을 온 경우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 중학교에 온 학생들이 가장 양쪽 언어를 다 구사한다. 반면에 정체성의 혼란도 많다. 그리고 고등학교 이상에서 오면 아무리 오래 있어도 한국어가 영어보다 편하다.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하기는 어렵다.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이민와서 학부과정에 다니던 여학생과 6개월간 데이트(?)를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 적이 있었다. 사춘기 감수성이 예민할 때 낮설은 곳에 와서 처음에 정서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어 영어 양쪽을 다 잘하지만 헷갈릴 때가 있었다. 어떨 때는 한국 사람같고 다른 때는 미국 사고방식에 접어들은 것 같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 생활도 하다가 1991년에 한국에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직접 경험한 것에서 외국에서 어렸을 때 지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 충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조기유학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하고 장남인 맏아들이 딱 30년 차이이다. 생일은 같지 아니하여도 생월까지 같다. 30년 차이 나는 아들이 나름대로 자기 적성에 맞게 노력할 것을 기대하였다. 중학교 때 수학, 과학을 좋아한 아들은 과학고 준비를 하였다. 2004년 화학 중등부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동상을 받았었다. 은상 이상을 받으면 과학고 자동입학인데 동상은 가산점만 있었다. 그런데 2004년 12월 과학고를 지원한 후 기대와 다르게 불합격을 받았다. 국어, 영어가 내신점수 2등급으로 감점을 받아 중학교 내내 수학, 과학은 만점을 받던 아들이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들의 성격을 잘 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체육을 빼고는 전과목을 다 잘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지만 아들은 자기가 관심이 적은 과목은 낙오 안하고 따라가는 정도로만 한다. 그러나 그 것을 꼭 비난할 수 없었다. 아들이 일반고에 진학후 수학, 과학에 대한 자기 적성을 살리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캐나다 밴쿠버 지역에 가족을 유학 보낸 선배의 소개를 받았다. 그 쪽 교육환경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남의 말만 믿고 보낼 수 없어 2004년 12월 밴쿠버 부근 여러 도시의 교육청에 직접 이메일로 접촉을 한 후 현지에 와서 교육청 담당자도 만나고 주위의 거주환경도 보았다. 그리고 나서 아들의 과학 적성을 살릴 수 있도록 과학부문에 평판이 좋은 학교를 고르다가 밴쿠버 시내에서 한 시간 떨어진 교외에 있는 애보츠포드라는 조용한 도시로 정하였다. 아들만 유학보내는 것을 고려하다가 엄마가 같이 가는 것이 정서적으로 안정된다고 하여 그 밑의 두 딸을 포함한 네명의 가족을 다 보내는 것으로 결단하였다. 2005년 7월초에 아들 및 딸 둘 그리고 처를 포함한 가족들을 전부 데리고 캐나다에 도착하였다. 현지에서 도착하고 나서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 하기 보다는 세상 넓은 것을 보여주어 자극을 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이 블로그 "미국서부여행" 폴더에 실린 것 처럼 2주동안 렌터카로 처와 교대로 운전하면서 약 일만km를 뛰어 그랜드캐년, 옐로우스톤, 밴프, 아치스 국립공원 등과 샌프란시스코, 디즈니랜드, 그리고 아빠가 공부를 한 버클리 등 미국 및 캐나다 서부 중요한 곳을 거의 다 보여 주었다.
위 사진은 2005년 서부여행에서 처음 도착한 오레곤주에 있는 백두산 천지와 유사한 칼데라 호수인 "크레이터(분화구) 국립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7월인데도 2000m 넘는 주위의 산에 눈이 남아 있다. 가족이 머무를 집을 월세로 얻은 후 대략 정리를 마치고 아쉬운 마음으로 나 혼자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혼자 오는 비행기에서 마음은 무거웠다. 나 없이 새로운 세상인 캐나다에서 가족들이 잘 적응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되었다. 그 후 2년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면서 한번에 2주정도로 매년 4,5회를 방문하였다. 방문할 때 학교선생님들과 직접 만나 아이들의 적응에 대해서도 상의를 하였다. 아이들이 현지 학년으로 10, 9, 6 학년으로 편입되었다. 캐나다는 고등학교가 4년제로 맏아들과 큰 딸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6학년인 막내가 현지 제도로는 중학교 일학년으로 인접한 곳에 있는 중학교에서 다니게 되었다. 큰 놈들은 영어는 아직 익숙치 아니하여도 수학, 과학 위주로 과목을 선택하면서 버텨 나갔다. 그러나 처음 적응 과정에서 아직 중학교라서 선택과목이 없는 막내가 더 힘들어 하였다. 학기 시작한 지 약 3개월만에 만난 막내의 담임선생님 말씀이 지금 영어 실력이 딸려 막내가 거의 수업을 못 따라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에 대해 나는 막내가 아직 어리니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니 잘 신경 좀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6개월 후 막내의 담임 선생님을 뵈었을 때 많이 나아져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년 후에는 거의 다 적응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직 어려울 때 담임 선생님이 막내에 대해 특히 신경을 많이 써 주신 것 같아 진심으로 감사하였다. 큰 아이들도 1년내에 적응을 하였다. 여기 교육제도에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개인들의 적성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 많다. 아들과 딸은 수학, 물리, 화학을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과정을 미리 공부하는 AP(Advanced Placement, 선행학습)의 과정을 거쳤다.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자녀들과 꼭 친구처럼 방과후에도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어 보면 대답하여 주시고 도움을 많이 주셨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음악에 관심이 많은데, 고등학교 졸업하기 직전까지 약 3년동안 학교에서 고전 음악 및 재즈 밴드 활동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음악반이나 밴드부 활동을 하였다고 하면 공부는 안하고 그런거나 하여 딴따라(?)가 되려나 하고 안 좋은 시각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은 공부만을 하는 학생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봉사활동, 쳬육 및 예능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한 과정을 거의 필수로 요구한다. 큰 아들은 캐나다에서 3년을 공부하고 미국 일리노이(어바나소재) 대학 소재공학과에 입학하여 재학중이다. 참고로 일리노이 대학 소재공학과가 그 전공분야에서 MIT와 함께 미국 랭킹 1,2등을 다투고 있다. 그아래 딸도 캐나다 토톤토대(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한다)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막내도 여기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잘 하고 있다. 활발한 성격으로 캐나다가 지하자원이 많아 광산분야에 강한데 광산학과(자원공학과)에 진학할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캐나다에 오게 된 것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일률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신들의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캐나다 현지 상황을 보면 아이들 혼자 기숙사 있는 사립학교를 다니거나 아니면 남의 집에 하숙하여 공립학교를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에 혼자 나와 있다 보면 공부에 집중이 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혼자 나와서도 잘 극복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도 있다. 엄마가 같이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리고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여기서도 학원에 보내고 한다. 다만 한국처럼 방과 후 학원을 지나치게 많이 보내는 엄마들도 있어 문제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사람들에게는 부부가 직장이 떨어져 있어 헤어져 사는 사람들은 있어도 자녀들 교육 문제로 가족들이 별거하여 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기러기 아빠들 경험자들과 서로 이야기 하여 보면 지금 한국이 아이들에게 지옥이라는 것이다 학교 끝나고 학원, 과외로 저녁 늦게까지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고 더구나 아이들뿐 아니라 엄마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즉 엄마의 가장 큰 임무(?)가 자녀들이 학교성적을 잘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생업을 위해 남편은 한국에 있고 가족이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결국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떨어져 살기 싫어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캐나다에 와서 언어 장벽으로 한국에서 일하던 사업이나 전문직을 영위하지 못하고 모텔이나 주유소 또는 식당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기러기 아빠 생활 2년을 하는 도중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거의 매일 인터넷으로 화상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물어 보고 하였다. 그런데도 가족과 떨어져 있는 내 생활의 빈자리는 채울 수가 없었다. 한번 사는 인생에서 이렇게 살 필요가 있는 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 2년만에 현지에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교환교수로 오게 되어 가족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캐나다의 교육환경이 무조건 좋다고 할 것인가. 그 것은 아니다. 여기 있으면 캐나다 학생들과 동화가 되어 느긋하여 지고 경쟁심을 잃는 경우도 많다. 목적의식을 잃어 버리고 헤메다가 한국으로 다시 귀환하는 경우도 보았다. 극도로 비극적인 경우는 기러기 엄마로 캐나다에 와 있다가 유방암 진단을 늦게 받아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떨어져 있다 보면 부부가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내가 이혼사건도 해 본 변호사로 냉정히 본 결과는 사이가 좋았다가 떨어져 살면서 갑자기 사이가 나빠져 갈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미 사이가 나쁜 관계에서 사실상 별거 생활을 하다가 회복을 못하고 완전히 갈라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제 정리하여 보자. 한국의 불합리한 교육제도를 피하여 캐나다로 와서 자녀들이 잘 된 경우도 있고 여기서 적응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부모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 내 개인적으로도 한국에서 변호사 및 벤처 관련 활동을 하다가 자녀 교육때문에 캐나다에 유랑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이렇게 블로그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있었으면 바빠서 이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지난 열흘동안 오랜만에 다섯 가족이 같이 있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 일리노이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대학을 다니는 맏아들과 그 밑의 딸이 캐나다 밴쿠버 교외의 집에 방학이 되어 온 것이다. 위 사진은 캐나다 현지시간으로 5월22일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골든 이어스 주립공원"에서 찍은 세 남매의 사진이다. 빙하에 의해 만들어진 호수로 사람들이 보트를 차에 매 달고 와서 물놀이나 낚시를 즐긴다. 대학생인 두 자녀는 오늘 한국에 다니러 간다. 소재공학을 하는 전공하는 아들은 대기업 연구소에 두 달동안 인턴 경험을 하려고 하고 딸은 컴퓨터 학원에 다니면서 봉사활동도 한다고 한다. 최근 조기유학, 기러기가족 등에 대한 문제가 많이 기사거리가 되었다. 뉴질랜드에서 기러기가족을 하던 가족들 중 부인과 두 딸이 먼저 자살하고 그 것을 수습하러 온 아버지까지 자살한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30년전인 1980년 12월에 일본과 필리핀을 방문하여 처음 외국을 경험하였다. 그 해가 5.18 광주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국내 정치가 혼란한 시점에 외국에 나가서 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1982년 미국 버클리 대학 생물물리학 박사과정으로 입학허가를 받고 유학을 떠났다. 유학중에 이민와서 대학 학부에 다니는 한국계 학생들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해 본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이전에 이민을 온 경우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 중학교에 온 학생들이 가장 양쪽 언어를 다 구사한다. 반면에 정체성의 혼란도 많다. 그리고 고등학교 이상에서 오면 아무리 오래 있어도 한국어가 영어보다 편하다.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하기는 어렵다.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이민와서 학부과정에 다니던 여학생과 6개월간 데이트(?)를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 적이 있었다. 사춘기 감수성이 예민할 때 낮설은 곳에 와서 처음에 정서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어 영어 양쪽을 다 잘하지만 헷갈릴 때가 있었다. 어떨 때는 한국 사람같고 다른 때는 미국 사고방식에 접어들은 것 같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 생활도 하다가 1991년에 한국에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직접 경험한 것에서 외국에서 어렸을 때 지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 충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조기유학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하고 장남인 맏아들이 딱 30년 차이이다. 생일은 같지 아니하여도 생월까지 같다. 30년 차이 나는 아들이 나름대로 자기 적성에 맞게 노력할 것을 기대하였다. 중학교 때 수학, 과학을 좋아한 아들은 과학고 준비를 하였다. 2004년 화학 중등부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동상을 받았었다. 은상 이상을 받으면 과학고 자동입학인데 동상은 가산점만 있었다. 그런데 2004년 12월 과학고를 지원한 후 기대와 다르게 불합격을 받았다. 국어, 영어가 내신점수 2등급으로 감점을 받아 중학교 내내 수학, 과학은 만점을 받던 아들이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들의 성격을 잘 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체육을 빼고는 전과목을 다 잘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지만 아들은 자기가 관심이 적은 과목은 낙오 안하고 따라가는 정도로만 한다. 그러나 그 것을 꼭 비난할 수 없었다. 아들이 일반고에 진학후 수학, 과학에 대한 자기 적성을 살리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캐나다 밴쿠버 지역에 가족을 유학 보낸 선배의 소개를 받았다. 그 쪽 교육환경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남의 말만 믿고 보낼 수 없어 2004년 12월 밴쿠버 부근 여러 도시의 교육청에 직접 이메일로 접촉을 한 후 현지에 와서 교육청 담당자도 만나고 주위의 거주환경도 보았다. 그리고 나서 아들의 과학 적성을 살릴 수 있도록 과학부문에 평판이 좋은 학교를 고르다가 밴쿠버 시내에서 한 시간 떨어진 교외에 있는 애보츠포드라는 조용한 도시로 정하였다. 아들만 유학보내는 것을 고려하다가 엄마가 같이 가는 것이 정서적으로 안정된다고 하여 그 밑의 두 딸을 포함한 네명의 가족을 다 보내는 것으로 결단하였다. 2005년 7월초에 아들 및 딸 둘 그리고 처를 포함한 가족들을 전부 데리고 캐나다에 도착하였다. 현지에서 도착하고 나서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 하기 보다는 세상 넓은 것을 보여주어 자극을 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이 블로그 "미국서부여행" 폴더에 실린 것 처럼 2주동안 렌터카로 처와 교대로 운전하면서 약 일만km를 뛰어 그랜드캐년, 옐로우스톤, 밴프, 아치스 국립공원 등과 샌프란시스코, 디즈니랜드, 그리고 아빠가 공부를 한 버클리 등 미국 및 캐나다 서부 중요한 곳을 거의 다 보여 주었다.
위 사진은 2005년 서부여행에서 처음 도착한 오레곤주에 있는 백두산 천지와 유사한 칼데라 호수인 "크레이터(분화구) 국립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7월인데도 2000m 넘는 주위의 산에 눈이 남아 있다. 가족이 머무를 집을 월세로 얻은 후 대략 정리를 마치고 아쉬운 마음으로 나 혼자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혼자 오는 비행기에서 마음은 무거웠다. 나 없이 새로운 세상인 캐나다에서 가족들이 잘 적응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되었다. 그 후 2년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면서 한번에 2주정도로 매년 4,5회를 방문하였다. 방문할 때 학교선생님들과 직접 만나 아이들의 적응에 대해서도 상의를 하였다. 아이들이 현지 학년으로 10, 9, 6 학년으로 편입되었다. 캐나다는 고등학교가 4년제로 맏아들과 큰 딸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6학년인 막내가 현지 제도로는 중학교 일학년으로 인접한 곳에 있는 중학교에서 다니게 되었다. 큰 놈들은 영어는 아직 익숙치 아니하여도 수학, 과학 위주로 과목을 선택하면서 버텨 나갔다. 그러나 처음 적응 과정에서 아직 중학교라서 선택과목이 없는 막내가 더 힘들어 하였다. 학기 시작한 지 약 3개월만에 만난 막내의 담임선생님 말씀이 지금 영어 실력이 딸려 막내가 거의 수업을 못 따라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에 대해 나는 막내가 아직 어리니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니 잘 신경 좀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6개월 후 막내의 담임 선생님을 뵈었을 때 많이 나아져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년 후에는 거의 다 적응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직 어려울 때 담임 선생님이 막내에 대해 특히 신경을 많이 써 주신 것 같아 진심으로 감사하였다. 큰 아이들도 1년내에 적응을 하였다. 여기 교육제도에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개인들의 적성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 많다. 아들과 딸은 수학, 물리, 화학을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과정을 미리 공부하는 AP(Advanced Placement, 선행학습)의 과정을 거쳤다.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자녀들과 꼭 친구처럼 방과후에도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어 보면 대답하여 주시고 도움을 많이 주셨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음악에 관심이 많은데, 고등학교 졸업하기 직전까지 약 3년동안 학교에서 고전 음악 및 재즈 밴드 활동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음악반이나 밴드부 활동을 하였다고 하면 공부는 안하고 그런거나 하여 딴따라(?)가 되려나 하고 안 좋은 시각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은 공부만을 하는 학생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봉사활동, 쳬육 및 예능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한 과정을 거의 필수로 요구한다. 큰 아들은 캐나다에서 3년을 공부하고 미국 일리노이(어바나소재) 대학 소재공학과에 입학하여 재학중이다. 참고로 일리노이 대학 소재공학과가 그 전공분야에서 MIT와 함께 미국 랭킹 1,2등을 다투고 있다. 그아래 딸도 캐나다 토톤토대(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한다)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막내도 여기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잘 하고 있다. 활발한 성격으로 캐나다가 지하자원이 많아 광산분야에 강한데 광산학과(자원공학과)에 진학할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캐나다에 오게 된 것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일률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신들의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캐나다 현지 상황을 보면 아이들 혼자 기숙사 있는 사립학교를 다니거나 아니면 남의 집에 하숙하여 공립학교를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에 혼자 나와 있다 보면 공부에 집중이 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혼자 나와서도 잘 극복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도 있다. 엄마가 같이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리고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여기서도 학원에 보내고 한다. 다만 한국처럼 방과 후 학원을 지나치게 많이 보내는 엄마들도 있어 문제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사람들에게는 부부가 직장이 떨어져 있어 헤어져 사는 사람들은 있어도 자녀들 교육 문제로 가족들이 별거하여 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기러기 아빠들 경험자들과 서로 이야기 하여 보면 지금 한국이 아이들에게 지옥이라는 것이다 학교 끝나고 학원, 과외로 저녁 늦게까지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고 더구나 아이들뿐 아니라 엄마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즉 엄마의 가장 큰 임무(?)가 자녀들이 학교성적을 잘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생업을 위해 남편은 한국에 있고 가족이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결국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떨어져 살기 싫어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캐나다에 와서 언어 장벽으로 한국에서 일하던 사업이나 전문직을 영위하지 못하고 모텔이나 주유소 또는 식당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기러기 아빠 생활 2년을 하는 도중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거의 매일 인터넷으로 화상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물어 보고 하였다. 그런데도 가족과 떨어져 있는 내 생활의 빈자리는 채울 수가 없었다. 한번 사는 인생에서 이렇게 살 필요가 있는 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 2년만에 현지에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교환교수로 오게 되어 가족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캐나다의 교육환경이 무조건 좋다고 할 것인가. 그 것은 아니다. 여기 있으면 캐나다 학생들과 동화가 되어 느긋하여 지고 경쟁심을 잃는 경우도 많다. 목적의식을 잃어 버리고 헤메다가 한국으로 다시 귀환하는 경우도 보았다. 극도로 비극적인 경우는 기러기 엄마로 캐나다에 와 있다가 유방암 진단을 늦게 받아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떨어져 있다 보면 부부가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내가 이혼사건도 해 본 변호사로 냉정히 본 결과는 사이가 좋았다가 떨어져 살면서 갑자기 사이가 나빠져 갈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미 사이가 나쁜 관계에서 사실상 별거 생활을 하다가 회복을 못하고 완전히 갈라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제 정리하여 보자. 한국의 불합리한 교육제도를 피하여 캐나다로 와서 자녀들이 잘 된 경우도 있고 여기서 적응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부모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 내 개인적으로도 한국에서 변호사 및 벤처 관련 활동을 하다가 자녀 교육때문에 캐나다에 유랑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이렇게 블로그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있었으면 바빠서 이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첫댓글석환이의 글을 잘읽어 보았네. 난 아이들땜 우리가 모든 희생을 감수 한다는게 이해가 되질않네. 나도 두아이를 미국에 보내 공부 시켰지만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음 꼭 부모가 희생할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하고자 하는 아이는 기숙사든 자취든 결국은 해낸다고 보네.아이들에게 왜 해야하는지를 깨우쳐 주는게 더중요하다 생각하네.난두아이를 다그렇게 시켰는데 나름 열심히해서 큰애는 UC계열서 학부를 마치고 의과대학원에 진학했고 작은아이는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는데 LA에 FIDM이라는 학교서2년을 열심히 하더니 본인이 알아보곤 패션스쿨중 최고라는 뉴욕 만해튼의 파슨스로 3학년 편입해 잘다니며 잘하고 있다네
외국인 한테 주지도 않는다는 장학금 까지 받아가며...자랑같이 들리겠지만 그런뜻이 아니라 자식땜 우리부부는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오실필요 없다고 이렇게 공부 시켜 주는것만도 너무 감사 하다며 최선을 다하더만. 그래서 하는 얘긴데 유학을 보내려거든 자아가 형성되고 자기판단력과 외로움을 극복하고 최선을 다할수 있는 시기를 선택해(아이들 마다 자라온 환경 집안내력 영향등에 따라 다르다고봄)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여 보내는게 좋을듯함. 우리는 우리의 할일이 있고 어렵게 만나 이룬 부부의연을 잘이어 나가야지 죽도록일하고 쓸쓸한 집에돌아와 허전함을 느끼며 생활 해야 하는건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가정의 소중함은
그어떤것 으로도 비교가 되질 않으며 사람은 혼자살수 없게끔 구조가 되어있어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 하고는 새로운 인연을 맺게되고 이로인해 큰불행을 가져올수도 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이 안될것이다. 아이들도 다 자기팔자는 타고나는것일거고 우리는 그뒷받침만 하면 되는 것이지 부부가 떨어져 살며 가정을 유지 한다는것은 아닌듯하다.여하튼 현명한 판단으로 좋은 가정 꾸리고 행복한 미래가 설계되고 보장 받을수 있게 모든 사리판단을 잘해서 살아야 할것같다.. 두서없이 생각 나는 대로 몇자 긁어 보았다
첫댓글 석환이의 글을 잘읽어 보았네. 난 아이들땜 우리가 모든 희생을 감수 한다는게 이해가 되질않네. 나도 두아이를 미국에 보내 공부 시켰지만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음 꼭 부모가 희생할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하고자 하는 아이는 기숙사든 자취든 결국은 해낸다고 보네.아이들에게 왜 해야하는지를 깨우쳐 주는게 더중요하다 생각하네.난두아이를 다그렇게 시켰는데 나름 열심히해서 큰애는 UC계열서 학부를 마치고 의과대학원에 진학했고 작은아이는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는데 LA에 FIDM이라는 학교서2년을 열심히 하더니 본인이 알아보곤 패션스쿨중 최고라는 뉴욕 만해튼의 파슨스로 3학년 편입해 잘다니며 잘하고 있다네
외국인 한테 주지도 않는다는 장학금 까지 받아가며...자랑같이 들리겠지만 그런뜻이 아니라 자식땜 우리부부는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오실필요 없다고 이렇게 공부 시켜 주는것만도 너무 감사 하다며 최선을 다하더만. 그래서 하는 얘긴데 유학을 보내려거든 자아가 형성되고 자기판단력과 외로움을 극복하고 최선을 다할수 있는 시기를 선택해(아이들 마다 자라온 환경 집안내력 영향등에 따라 다르다고봄)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여 보내는게 좋을듯함. 우리는 우리의 할일이 있고 어렵게 만나 이룬 부부의연을 잘이어 나가야지 죽도록일하고 쓸쓸한 집에돌아와 허전함을 느끼며 생활 해야 하는건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가정의 소중함은
그어떤것 으로도 비교가 되질 않으며 사람은 혼자살수 없게끔 구조가 되어있어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 하고는 새로운 인연을 맺게되고 이로인해 큰불행을 가져올수도 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이 안될것이다. 아이들도 다 자기팔자는 타고나는것일거고 우리는 그뒷받침만 하면 되는 것이지 부부가 떨어져 살며 가정을 유지 한다는것은 아닌듯하다.여하튼 현명한 판단으로 좋은 가정 꾸리고 행복한 미래가 설계되고 보장 받을수 있게 모든 사리판단을 잘해서 살아야 할것같다.. 두서없이 생각 나는 대로 몇자 긁어 보았다
자기가 어느 정도 의식이 생긴 후 즉 한국서 대학을 졸업하거나 최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도 좋겠지만 나도 졸지에 아들 때문에 캐나다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생활을 관조하면서 감수하는 것인지도.
각자 여러 선택이 있고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종훈이 큰 딸 의사되면 아빠한데 배워 비즈니스도 잘 하겠다.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