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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중구 유천1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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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동산신제(柳川洞山神祭)
[정의]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동에서 행해지는 보문산 산신을 모시는 제의. 1997년 1월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동짓달 초사흘에 지내는 유천동산신제(柳川洞山神祭)는 본래 버드내산신제라 하였다. 버드내는 유천(柳川)의 한글 표기로 버들내에서 변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곧 천변에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는 데에서 천변을 끼고 있는 마을 이름이 버들내가 되었고, 버들내가 음운변화를 거쳐 발음하기 쉬운 버드내가 된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지명에 근거하여 유천동산신제를 버드내산신제라 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에 의해 마을이 확장되면서 버드내보다 유천동이란 지명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서 이곳의 제의 명칭이 버드내산신제에서 유천동산신제로 변화하였다.
[유래]
유천동은 도마동과 하천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하천은 천변에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로 인해 유등천으로 불린다. 이 유등천의 북쪽 일대가 바로 유천동이다. 이 곳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촌 마을로 유천동은 보문산 산자락에 위치한 정도에 따라 상평, 중평, 하평으로 나뉘었다. 과거의 산신제는 마을이 연합하여 지냈다.
유천동산신제는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16세기 중반, 460여 년 전부터 호환을 피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시작되었으며, 당시에는 산제당이 보문산 산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구전에 의한 것으로 입증할만한 증거는 없다. 다만 나이 많은 제보자에 따르면 1930년대에도 산신제가 있었으며, 선대로부터 지속해온 것이라고 들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유천동의 산신제는 적어도 100여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용]
유천동산신제의 주된 목적은 마을 주민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아래의 축문에도 보이듯이 질병의 화를 면하게 해주고, 물과 불의 피해를 면케 하여주며, 교통사고 등을 면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산신제의 주된 목적이다. 물론 이 외에도 소지를 올리는 과정에서 농사의 풍년이나 가축의 번성을 기원한다. 과거와 현재의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유천동산신제 축문"
維歲次 00年 十一月朔初三日00
柳鄕契選出代表幼學000敢昭告于
寶文山神靈 伏有天有靈 地有靈 人爲貴
天以日月爲耳目 地耳山川爲血? 人爲天地爲父母
惟我 寶文山神靈 鎭座畿湖之中央俯
八方之物色生育地方之人物貳千萬年矣
伏願 神靈 陣此庶裔 一免病疫之禍
二免水火之災 三免交通輪禍之亂
咸賴天地父母亡息一域安過太平
千萬幸甚謹準年例選定
祭員齋戒三日沐浴更衣略設犧牲
參神奠獻 尙饗
"현행 유천동산신제 축문"
維歲次 西紀 0000年 00歲十一月 00初三日 00幼學000은 柳鄕契員과 柳川洞民을 代表하여 敢히 寶文山神靈任께 仰告하옵나이다.
幼學等 愚昧한 本洞民들은 神靈任의 恩德을 天地爲父母하고 日月星辰照鑑下에 길이 保全하고 있사옵니다. 寶文山神靈任께서는 이곳 中都大田에 鎭座하시와 億兆蒼生을 굽어살피시고 愛護撫育하여 주심에는 衷心으로 感銘不己이옵나이다. 神靈任께서는 上通天하시고 不遠地하시며 全知全能 하신줄 믿사옵니다. 伏願컨대 우리 柳鄕契員 및 洞民들과 畜生에 이르기까지 雨順風調로 各其生業에 따라 所願成就하고 富裕한 生計를 이룩하여 有能한 英才를 많이 胚出케 하여 주시옵고 一便 疫疾의 殃禍와 水火의 災殃과 兵役中 橫厄, 交通事故 등 諸般 患難疾苦를 防禦하여 주시옵고 우리 柳川洞民 各 家庭에 幸運이 깃들게 도와주시옵기 祝願하나이다. 悚懼하옵게도 今年은 幼學이 祭典에 選定되와 沐浴齋戒하옵고 略設淸酌하와 삼가 奉行하오니 歆饗하시옵소서.
현행 축문은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업에 따라 소원성취하고 부유한 생계를 이루게’ 해달라는 것이나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게’ 해달라는 것, 자녀의 ‘병역 중 횡액’이나 ‘교통사고 등의 환난질고’를 면하게 해달라는 것은 요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천동산신제는 매년 음력 11월 중 길일을 골라 시행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에 동짓달 초삼일로 제의 일자를 확정하여 매년 같은 날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유천동산신제는 유향계(柳鄕契)가 중심이 되어 시행된다. 유향계원은 대부분 이곳 유천동의 토착민들이다. 제관은 유천동 유향계원들이 회의를 통하여 선정한다. 선정된 제관은 제주와 축관, 유사 각 1인이다. 이들 세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산신제를 지낸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제 지내기 사흘 전부터 근신생활을 한다. 각자의 집 대문 앞에 황토를 놓고, 대문에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다. 금줄은 산제가 끝난 뒤에도 일주일 정도 걸어두었다가 뗀다. 또 대문 밖 출입을 삼가며 목욕재계를 하여 몸을 청결히 유지한다. 부부간의 잠자리를 피하고 먹는 것에서도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제주와 그 일행은 제 지내기 사흘 전에 제장을 깨끗이 청소한다. 현대 유천동산제당은 도심에 위치하여 있다. 이는 시가가 확장되면서 산제당이 자연스럽게 민가에 둘러싸인 것이다.
현 대전시 중구 유천 1동 256-1번지에 위치한 산제당은 30평의 대지에 세워져 있다. 건평은 3.5평이고 단칸 기와집이다. 당의 내부에는 보문산 산신령을 모시고 있다. 당의 내부 전면 벽에 호랑이와 산신령이 함께 있는 산신도가 있다. 이 산신도는 이전의 것이 낡고 퇴색하여 1970년대 말에 다시 제작한 것이다. 건물 또한 2001년 대전광역시의 지원으로 보수하였다. 현재 유천동의 산신제는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내려오고 있다.
제장의 한쪽에 샘이 있다. 이 샘은 제의 때에 음식을 조리하는데 사용되는 샘이다. 또 산제당의 전면 오른쪽엔 수령이 100여 년 된 소나무가 있다. 본래 산제당 주변에는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 보문산에서 캐어다 심은 것들인데 주변이 주택가가 되면서 베어지고 지금의 산제당 옆에 선 소나무 한 그루만 남게 되었다.
산신제의 제물은 돼지머리, 시루떡, 탕, 명태포, 대추, 밤, 배, 나물, 술 등이다. 제물은 유사가 당일 아침 시장에 가서 구입해 온다. 유사는 제수를 구입할 때 값을 흥정해서는 안 된다. 또 가고 오는 과정에서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런데 1997년 유천동의 산신제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제의 자체가 이전보다 확장되었다. 이를테면 돼지머리 대신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리고, 그 밖의 제수 역시 이전보다 푸짐하게 준비하여 올린다.
산신제는 당일 저녁 10시 무렵에 준비하여 11시 무렵에 지낸다. 제주 일행은 제주의 집에 모여 있다가 10시 무렵에 산제당으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간 제물을 당의 전면 상에 진설한다. 이어 11시가 되면 제를 지낸다. 제의 순서는 분향- 강신- 배례-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첨작- 소지의 순이다. 이러한 과정은 각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제사와 유사한 것으로, 소지올림 과정만 제외한다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소지올림의 과정에서 대동소지를 올린 뒤 제의에 참여하거나 관계된 각각의 상인, 공사단체, 영업장의 소지를 올린다.
산신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제가 끝나면 제주 일행이 유사의 집에 모였다. 제주 일행과 유향계원이 유사의 집으로 가서 음복하며 밤이 늦도록 환담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부터는 제주 일행과 관공서 참여자, 상인들이 두루 모여 음복하고 있다.
[의의]
유천동산신제는 도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공동체 신앙이 도시화와 맞물려 소멸되고 있는 시점에서 유천동산신제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처럼 도심 속에서 산신제의 존립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토착민들이 중심이 된 유향계가 산신제를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제의 주체가 공동체 신앙의 기능에 관심을 두고 변화하는 주민들의 욕구를 제의에 담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상업이나 사업장의 번창, 교통사고로부터의 안전, 유능한 인물 배출, 군대에 간 자녀의 안전 같은 변화한 거주민의 소망을 담아내려 노력하였다. 바로 이 점이 유천동산신제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