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1세는 인격자였다. 온화하고 나이보다 더 성숙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했으며 대인배였고 사생활에서도 이런저런 소문이 돌긴 했지만 후세에는 그 모든 소문들이 모두 헛소문임이 드러났다. 금발을 좋아하고 영웅주의에 심취하긴 했지만 그것이 황제로서의 본분은 물론 일상까지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알렉산더 1세조차도 고개를 가로젓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골덴바움 왕조였다. 아버지인 라인하르트 1세는 골덴바움 왕조를 혐오했다. 키르히아이스 생전에는 골덴바움 왕조란 아얘 생겨서는 안되었다고까지 말했을 정도였고 결국에는 500년 역사의 골덴바움 왕조를 없애버리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했다. 일찍 죽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죽인 자가 귀족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고 그후 아버지는 폐인이 되어 다섯살 연상의 누나가 사실상의 가장이 되어야 했는데 그 누나마저 열다섯살의 어린 나이로 사실상 황제의 성노예로 끌려가는 불합리를 맛보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인하르트가 골덴바움 왕조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없었고 따라서 그의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혐오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또한 그와 함께한 핵심공신들 또한 나름대로는 골덴바움 왕조의 불합리한 체제 속에서 피해를 본 적이 있었으며 마린도르프 백작처럼 피해는 보지 않았더라도 그 불합리를 깨달은 이도 있었기에 그들이 골덴바움 왕조를 버리고 라인하르트의 공신이 된 것은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알렉산더 1세의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증오는 특이한 사례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황제, 어머니는 황후로서 그는 골덴바움 왕조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혐오는 아버지 못지않았고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시각은 라인하르트 1세와 알렉산더 1세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면 중에 하나였다.
알렉산더 1세가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증오를 갖게 만드는데는 라인하르트 1세와 어느정도 비슷했고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 같았다. 바로 안네로제, 누나를 빼앗아간 황제에 대한 증오가 왕조 자체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 라인하르트와 비슷하게 고모가 겪은 고난은 그로 하여금 전대 왕조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했고 골덴바움 왕조 역사 500년을 배우면서 굳이 주변사람들이 골덴바움 왕조를 미워하도록 가르치지 않더라도 그 악행 자체가 어마어마했으므로 반감이 더 거세지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증오로 이어졌다.
알렉산더 1세는 아버지와는 달리 세바스타인을 용서했다. 무능한 할아버지지만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당시 황제인 프리드리히 4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혹자는 동맹으로 망명하는건 왜 생각 못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없는 자에게는 망명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이미 아내를 부당하게 잃고 심신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기에 어떻게 보면 불쌍한 면이 있기도 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지을 때 많은 고민을 했지만 세바스타인만은 고려하지 않은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은 장남의 이름을 세바스타인으로 지었다.(세바스타인 1세)
하지만 그랬기에 알렉산더 1세는 더더욱 골덴바움 왕조를 미워했다. 그에게 안네로제는 단순한 고모가 아니었다. 제2의 어머니와도 같았으며 그 나름대로 자신의 기둥이기도 했는데 그런 고모를 고생시킨 골덴바움 왕조는 아버지가 일부는 세바스타인에게 돌렸던 것과는 다르게 오롯이 골덴바움 왕조에게만 돌려졌기에 더더욱 미워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벌어진 현상은 골덴바움 황실 인사들에 대한 빈약한 대우와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격하다. 라인하르트 1세는 골덴바움 왕조를 없애고 또 싫어했지만 그래도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골덴바움 왕조였기에 막연하게 지지하는 제국민도 없잖아 있었기에 카타린 케트헨 1세 일가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그들에게 거액의 연금을 주었으며 역적일가인 브라운슈바이크 일가와 리텐하임 일가도 그래도 꼴에 황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안전보장 및 조촐하게나마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만큼 지원해주기는 했다.(어차피 자기에게 상대도 안 되니까)
이러한 처우는 힐데가르트 섭정기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라인하르트 생전의 조치들을 모두 계승하였고 우주력 810년에 행해진 은하제국 건국 500주년 기념행사에도 그래도 전임 은하제국 황제 일가라는 이유로 카타린 케트헨 1세 일가는 로엔그람 황제 일가 다음가는 의전예우를 받으며 이 때에는 뢰벤브룬 칠원수도 이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예의를 갖춰야 했었다.
여기다 유화조치 중 하나로서 본디 골덴바움 황실 직할 영지들은 로엔그람 왕조가 들어서며 일부는 영지민들에게 분배되고 일부는 로엔그람 왕조의 재산이 되고 일부는 카타린 케트헨 1세의 명의로 남게 되었는데 이 때에 힐데가르트는 일부 영지를 따로 떼서 준 것이었는데 덕분에 카타린 케트헨 1세는 로엔그람 황실을 제외하면 제일가는 땅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라인하르트 사후에도 카타린 케트헨 1세 일가는 안온하게 살 수 있었고 그 외에 브라운슈바이크, 리텐하임 일가도 제국 건국 500주년 기념특사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이전에 비해 초라한 수준이지만 약간의 영지 또한 주어졌고 적어도 전대 왕조의 일가로서는 다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알렉산더 1세는 달랐다. 이전까지는 골덴바움 왕조의 악행을 숨김없이 드러나면서도 자체적인 평가는 조금은 유보하기도 했지만 알렉산더 1세는 대놓고 격하하였고 카타린 케트헨 1세, 브라운슈바이크, 리텐하임 일가에 대한 대우도 갈수록 빈약해져갔다.(선을 넘지는 않아지만) 그리고 그 절정은 바로 우주력 851년의 '루돌프 폰 골덴바움 사망 500주년 축하행사'였다.
특정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일이라면 모를까 축하행사를 연다는 것은 완벽한 고인모독으로 실제로도 알렉산더 1세는 이제는 완전 옛날이 되어버린 왕조의 권위를 존중해줄 필요가 전혀 없어졌고 대중들도 골덴바움 왕조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고 그들의 악행만이 강하게 머리에 남았기에 그러한 행사에 비웃는 이는 없었다. 이는 25년 뒤인 876년에 열린 '라인하르트 1세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와 더불어 골덴바움 왕조 시절의 모든 것이 재평가되어 그 시대에는 호평을 받았던 것 중 많은 것들이 격하되었고 그만큼 많인 사업이 벌어졌다. 이 시기에 파괴된 동상 및 개명된 지명 등이 부지기수였고 반대로 골덴바움 왕조 시대에 좋지 못한 평가를 받던 이들 중에서 재평가를 받아 새로운 지명에 이름이 붙여지거나 동상이 세워지는 일이 많았다.
물론 알렉산더 1세는 무작정 격하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나 만프레트 2세처럼 다른 시각에서 봐도 유능했고 존경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황제들, 지금 관점에서도 배울만한 제국의 명신들과 명장들에 대해서는 호평을 내렸고 이런 명신, 명장들만을 모은 역사서를 새로 편찬하여 후대의 모범으로 보이고자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1세는 공식적으로 골덴바움 왕조를 격하한 것과는 별개로 개별 인물에 대해서는 동정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용당한 에르빈 요제프 2세와 카타린 케트헨 1세나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이용당한 엘리자베타와 지비네에 대해서는 권력다툼을 둔 희생자들이기도 하다며 그들 개인에 대해서는 호의를 많이 보여주었다.
예시로 에르빈 요제프 2세의 결말에 대해서 알렉산더 1세는 사석에서 냉정하게 결국에는 어른(라인하르트 1세)의 권력욕에 아이가 희생된 것이라고 평가했고 죄의식 비슷한 마음에 진짜 에르빈 요제프 2세가 나타날 시 카타린 케트헨 1세보다 약간 더 좋은 대우도 맞이하겠다고 공표하였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에르빈 요제프 2세를 사칭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일부는 진짜라고 인정받기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에는 모두들 가짜로 판명되어 알렉산더 1세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여튼 전반적으로 알렉산더 1세 시대는 골덴바움 왕조 격하의 시대이기도 했기에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골덴바움 왕조와 관련된 많은 것들이 관리, 보호되지 않아 실전되거나 하는 등 수난을 많이 겪었다. 그 덕분에 골덴바움 왕조 시절, 상류층의 문화에 낀 거품이 많이 가라앉기도 했지만 반대로 역사성과 가치있는 문화까지도 사라지는 등 일장일단이 있었다. 이러한 골덴바움 왕조 격하 분위기는 우주력 870년대부터야 다시금 중립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분위기로 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