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각종 매스컴에서 혜민스님의 근황이 문제시 되는 걸 지켜보면서
그간 수많은 대중을 상대로 생활법문이다 인성법문이다 하며 회자되는
다양한 설법들의 내용을 곱씹어 봅니다.
그 내용들의 요지를 살펴보건데,
주로 현대 자본주의사회가 인간 삶에 미쳐온 각종 부정적
영향들, 즉 가족공동체 파괴나 사람들 피차간에 던지고 받는
수없이 많은 스트레스 등에 대처하는 건전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견지하고
인성을 함양하는 식의 조언이 불교 가르침의 정수라는 식의
도덕적 실천 덕목을 안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윤리적인 수준의 충고와 가르침이 어찌 불교의 정수이고,
시대마다 부침하는 긍적적 철학과 사상에 편승한 대중적 가르침이란게
어찌 붓다의 깨달음, 조사들의 선과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전 제가 살아가는 남원에 법륜스님이 대중법회 연다고 하여
참석하여 대중들 앞에서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문제시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법에 맞지 않지만,
부처님의 출가와 깨달음,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비출 때
자신의 삶이란 것을 특정하고 그에 맞는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도
법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의 행/불행이 근본에서 분별망상
일진대 삶의 실천적 의지 역시 허망한 자아의 고집에 지나지 않을까요?
붓다의 법을 설하는 자리가 대중의 심리적 안위와 실천적 결단을
촉구하는 생각과 의지를 강화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허나 개인적 일정과 생각의 변화로 참석하지 않아
던질 수 없는 질문이었고 그후 매스컴을 통해 비춰지는 대중설법들을
찾아 보며 저 스스로 이에 대한 답을 내려보곤 했습니다.
생각과 분별 그 자체가 허망하다고 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없는 것이란 말은 아닙니다.
필요와 불필요를 논할 필요도 없이 이를 통해 삶을 끌어갈 뿐입니다.
문제는 실상에 대한 체험 없이 이에 의존, 아니 빠져든 삶이
깨달은 붓다가 본 중생의 가여운 상태였던 것이죠.
깨달은 붓다는 깨닫기 위해 출가하고 수행하고 고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가엽게 여겼을 겁니다.
붓다와 조사들은 대중들에게
삶을 지혜롭게 운영하는 기법이나 윤리적 덕목을
설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욕구와 바람을 꺽고
즉시 법에 통할 수 있는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치를 깊이 추구하는 질문에 침묵하시거나
한가지에 치우친 질문과 망상 앞에 호통치셨습니다.
어쩌면 현대불교는
지금껏 심리상담사나 자기계발 지도자들이 해오던 영역을
탐내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는 또한 동아시아 불교계가 너무도 오랫동안
불이중도의 종지를 수행득도의 실천의 장에 넘겨버린 탓이기도 합니다.
‘경전연구와 투철한 참선정진, 계율이행 등의 지리한 실행 끝에
도달하게 될 깨달음’을 목표에 두고 어느덧
깨달음이란 피나는 노력과 자기 계발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정상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니 이것을 어찌 불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붓다 시대 전반에 팽배했던 요가 계열의 수행방식과 무엇이 다르며
아트만의 달성을 통해 브라만과 합일하는 외도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가끔 생각합니다.
이렇게 조사선의 가지 끝에 기적처럼 간신이 연결된 축복에 대해서...
너무도 오랜 기간 끊겼던 맥이 어쩌면 이리도 일관성 무시하고
이곳에서 꽃피우게 되었을지 현기증 나는 감사함이 밀려옵니다.
첫댓글 목수가 요리를 한다고 탓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수가 목수일을 등한히 하고 요리에 전념한다면
목수가 아니라 요리사라 해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불교 본연의 설법만 해야 함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