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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에 대한 자료들 스크랩 [江湖동양학]사주명리학 韓中日고수들/지리산大學 낭인科를 졸업하다
천현갑 추천 0 조회 282 11.07.22 21: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江湖동양학]

 

차 례

[江湖동양학] 사주명리학이 '아하! 그렇구나'
장제스가 신봉하던 ‘사주의 대가’
韓·中·日 고수들 대만 웨이첸리
일본 사주의 중흥조-아베 다이잔(阿部泰山)

조선 역술가들 왕권승계 쥐락펴락
MBA 출신 vs 계룡산 출신?
지리산大學 낭인科를 졸업하다

[江湖동양학] 사주명리학이 '아하! 그렇구나'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나와 함께 동양학 세계로 떠나볼까요'


                                중앙일보 2003.07.24 

이번 주부터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의 '강호(江湖) 동양학'을 연재합니다. 음양오행.사주명리학.풍수 등 한국인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분야들을 역사적.문헌적 배경과 함께 알기 쉽게 풀이할 것입니다.

필자 조교수는 지난 15년간 한.중.일의 사찰.암자 6백여곳을 답사하는 등 천문.지리.인사의 삼재사상을 중심으로 동양학에 몰두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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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趙龍憲) 1961년생. 원광대에서 불교민속학 전공. '능엄경 수행법의 한국적 수용'으로 박사학위. 저서 '나는 산으로 간다''(1999.푸른숲).'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2002.푸른역사).'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2002.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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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에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게 마련이다. 동양학에 있어서도 강단동양학(講壇東洋學)이 있으면 거기에 대비되는 '강호동양학(江湖東洋學)'이 존재한다.

강단동양학이란 대학의 강단에서 통용되고 인정받는 동양학을 가리킨다.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논문의 생산자와 이를 읽는 소비자는 모두 교수.박사.전문연구자들이다. 강단 또는 분필과 관련돼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강호동양학은 강단 밖의 강호에서 유통과 소비가 이뤄진다. 대학과 강단이라는 보호막 없이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에서 풍찬노숙하는 동양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호동양학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강호파가 강단파와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특징은 이 '잡초 같은 생명력'에 있다.

조선 강호파의 3대 과목은 사주.풍수.한의학이다. 3대 과목은 천.지.인 삼재사상(三才思想)과 관련돼 있다. 천시(天時)를 알기 위해 고민하였던 한자문화권의 천재들이 내놓은 이론체계가 바로 사주다. 천시란 타이밍이다.

'과연 어느 때 베팅을 해야 하는가?' '내 인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사주명리학을 낳았다. 인생을 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들이다. 사주가 시간이라면 풍수는 공간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

즉 환경과 인간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극도로 추구한 것이 풍수다. 과연 인간은 어떤 땅, 어떤 환경에서 거주하는 것이 좋은가?

그 핵심에는 지령(地靈)이라는 개념이 있다. 땅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걸 받아들일 때 비로소 풍수가 이해된다. 지령이 어린 곳에 인간이 거주하면 일단은 건강해지고, 그 다음은 영성이 개발된다. 인간은 우선 건강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자유와 깊이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게 영성이다.

'건강'과 '영성'은 풍수가 추구하는 양대 목표다. 한의학은 존재의 문제다. 존재를 압축하면 인간의 몸이다. 인체라는 소우주는 과연 무엇인가를 천착한 것이 한의학이다.

강호동양학은 해방 이후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대학의 커리큘럼이란 것이 서구적인 세계관의 반영이고, 서구적인 세계관에 비춰볼 때 사주.풍수.한의학은 이해할 수 없는 매직(magic.마술)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배제되다 보니 이들 3대 과목의 맥은 재야의 기인.달사들에 의하여 그 전승이 이뤄졌다. 쉽게 말하면 '변두리 인생'들에 의하여 그 맥이 이어져 왔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1970년대 초반 경희대와 원광대에 한의학과라는 게 개설되었다. 제도권 내로 진입한 것이다. 그동안 양의학으로부터 '약초 뿌리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원시적 치료행위'로 멸시받던 한의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마침내 학문적 시민권을 딴 것이다.

시민권의 획득은 강호파의 대중적 지지도와 아울러 강단파의 권위까지도 확보하였음을 의미한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의학과는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 중의 하나로 부상한다. 한의사가 되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데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양의에 비해 스트레스가 덜하고, 평상시 동양철학까지 공부하며 살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한 탓이다.

박사학위 소지자, 서울대와 포항공대 졸업생, 대학 졸업하고 대기업에 몇년 다니다 그만 둔 사람들이 한의학과에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조직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해보니까 '인생 사는 게 별 것 아니다'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생계수단도 되면서 자유롭게 공부도 병행할 수 있는 분야가 한의학이라고 여긴 것이다.

머리도 좋고 인생경험도 쌓은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투입되다보니 앞으로 강호동양학의 대가들은 한의사들 가운데서 배출될 가능성이 크다.

풍수는 어떤가. 학문적 영주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시민권보다는 보호를 덜 받지만 영주권이라도 혜택이 많다. 풍수가 영주권을 받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다.

'묏 자리 하나 잘 쓰면 팔자 고칠 수 있는 황당한 잡술'로 여겨지던 풍수를 '동양의 고유한 생태철학'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사람이 최창조 교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울대 교수가 풍수를 연구하니까 뭔가 있기는 있다는 식으로 국민 인식이 바뀌었다.

아쉬운 것은 최교수가 대학에서 일찍 나와버린 점이다. 부대끼더라도 대학에 좀더 남아 있는 쪽이 풍수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성싶다. 문파를 하나 이끈다는 것은 그래서 힘들다.

사주는 어떤가. 불법체류자 신세다. 연금혜택도 없고, 공식적인 취업도 불가능하다. 국가와 법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미신(迷信) 종사업자'일 뿐이다.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그러니 보따리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 불법체류자들에게 영주권을 얻게 해주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문제다.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음양오행 사상을 공통분모로 하는 풍수와 사주의 세계를 week& 독자여러분과 함께 주유(周遊)해보기로 하자.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장제스가 신봉하던 ‘사주의 대가’


 

韓·中·日 고수들 대만 웨이첸리

 

인텔리 출신… 재물운·처복·관운 잘 봐


공산화로 쫓겨온 중국인들에겐


"기다리면 좋은 운 온다" 희망 줘

 

                             



한.중.일 삼국은 한자문화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바둑.삼국지.사주팔자와 같은 문화코드들이 바로 그것이다. 코드가 비슷하기 때문에 문화의 호환작용(互換作用)도 활발하게 진행된다. 호환작용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고수(高手)'의 출현이다. 이창호라는 천재의 등장이 삼국 바둑의 끝내기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처럼, 한 나라에 고수가 나타나면 다른 두 나라는 갑자기 공부할 거리가 많아진다. 사주명리학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근래 세 나라의 명리학 고수는 누구인가. 먼저 중국을 보자. 1980년대 후반에 작고한 웨이첸리(韋千里)를 꼽을 수 있다. 대만의 장제스(蔣介石)가 그를 아주 좋아하였다. 장제스는 인생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팔자가 있다고 믿었다. 장제스 총통의 사진을 보면 머리도 큰데다 눈.코가 부리부리해 대단히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운명 따위는 저리 가라고 할 성싶은 강인한 관상의 소유자가 내면적으로는 운명론자였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신상에 관한 문제를 상담할 때는 웨이첸리를 자주 만났다. 때로는 국가적인 결정에 관계되는 문제까지도 그에게 상의하였다고 전해진다. 웨이첸리는 대만의 비공식적인 국사(國師)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장제스의 부인이자 대부호의 딸이었던 쑹메이링(宋美齡)도 그를 신봉하였다. 원래 사주팔자는 남자보다도 여자들이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남자들은 당장 눈앞에 현찰이 걸려 있는 도박을 좋아하지만, 미래의 안정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점(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불안한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여자나 남자나 구분 없이 모두 미래의 운명을 알고 싶어한다.

웨이첸리가 동북아시아 명리학계의 스타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시대적인 불안이 있었다. 그 불안의 요인은 바로 마오쩌둥(毛澤東) 정권의 등장이었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로 많은 사람이 자기 근거지를 버리고 대만이나 홍콩으로 이주해야만 하였다. 졸지에 집과 직장을 버리고 객지로 쫓겨난 사람들이 직면한 감정은 불안과 상실감이었다. "내 인생은 이러다 끝나는 것인가?" "언제 다시 본토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좌절에 빠진 대만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사람이 웨이첸리였다. 짐작컨대 그가 내린 처방전의 주종은 "지금은 운이 좋지 않다. 몇 년만 참고 넘기면 좋은 운이 온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50년대 대만사람들의 집단불안을 극복하는 처방전 가운데 하나는 사주팔자였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이후 대군벌과 고급관료, 그리고 부자들은 팔자를 믿었고, 웨이첸리를 신뢰하였다. 네 기둥(四柱)에 새겨진 여덟 글자(八字)의 효과는 때때로 카를 융과 상담심리학을 능가할 수 있다.

웨이첸리는 인텔리 출신이었다.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역술가들이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었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의 대졸 학력은 돋보이는 부분이다. 영어실력도 상당하였다. 5.4운동 이전까지 상하이에 거주하면서 각국의 조계에 출입하는 서양인들과 교분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수시로 그를 찾아와 팔자를 문의하였다. 그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재물복과 처복, 그리고 관운이 언제 오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사주라고 하는 오리엔탈 어스트롤로지(Oriental astrology)의 적중력에 감탄한 서양인들 가운데는 팔 걷어붙이고 배우겠다며 제자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 명의 '코 큰'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이 사람들이 후일 유럽 본국으로 돌아가 사주를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천주교 신부들도 그 밑에서 사주를 배웠다고 한다.

웨이첸리의 대표작은 '팔자촬요(八字撮要)'다. 골방에 들어있던 명.청대의 명리학 고전들을 꺼내서 20세기의 현실에 맞게 응용한 책이다. 말하자면 고전의 이론과 현실의 '임상 경험'을 결합한 작품이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공부 좀 했다고 하는 이론가들은 거의 이 책을 보았다. 책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모모 정치가들이나 기업총수들도 60, 70년대 홍콩에 가서 웨이첸리를 직접 만나보았다는 소문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2003.07.31

 

 

일본 아베 다이잔


 

美 상류층도 '모시는' 생활 풍수의 중흥祖

 

 

 

5년 전쯤 한국의 계룡산과 같은 분위기를 지닌 일본의 이코마(生駒)산을 간 적이 있다.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현의 경계에 있는 해발 6백42m의 산이다.이코마산은 일본의 오만가지 토속신앙이 밀집된 곳이라서 일본을 깊이 알고 싶어하는 종교.민속학자들은 반드시 한번 들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토속신앙의 집산지인 이시키리(石切) 신사가 있고, 신사 주변의 골목길에는 수많은 점술집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추명학(推命學)'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집에 들어가 보았다.

점집 특유의 꺼림칙한 분위기가 아니고 여자들 들락거리는 의상실 분위기에 가까웠다. 복채는 3천엔(약 3만원). 정장을 차려 입은 50대 초반의 중년부인이 필자의 생년월일시를 묻더니만, 만세력을 보고 종이에 육십갑자를 적어 넣었다. 경쟁자(?)의 입장에서 일본 역술가의 내공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신기(神氣)는 별로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풀어 가는 방식을 보니 한국에서 사주보는 이론과 거의 같았다. 이론만 공부한 경우이다. 경험에 의하면 사주는 신기와 이론이라는 쌍권총을 차야만 적중도가 높다. 이론에 직감이 결합돼야 하는 것이다. 권총 하나만 가지고는 OK 목장의 결투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다. 한.일의 명리학 수준을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일본은 이론이 발달했고, 한국은 신기가 더 발달하였다. 이 역술가에게 "어떤 책을 보고 사주 공부를 했는가?"라고 물어보니, "아베 다이잔(阿部泰山)의 책"이라고 대답했다.

아베 다이잔은 현대 일본의 사주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중흥조이다. 유충엽 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은 과거 중국.한국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어 왔으나, 아베가 등장하면서 서열이 바뀌었다고 한다. 아베는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왔다. 그는 누이동생 때문에 사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전해진다. 결혼한 누이동생이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여기저기 병원에 다녀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어느날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한의사는 대뜸 여동생의 사주부터 물었다. 생년월일시를 보더니만 "이 사주는 아이가 없는 무자식 팔자"라고 진단했다. 약을 먹어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말이었다. 참고로 여자 사주에 식신(食神).상관(傷官)이 없으면 대개 자식이 귀하다고 본다. 추측컨대 여동생 팔자에 식신이나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베는 동생의 불임 원인이 정해진 팔자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도대체 사주라는 게 무엇인가'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베는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었다. 중.일전쟁 때 종군기자로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면서 사주팔자에 관한 중국의 고전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그가 모은 자료는 자그마치 트럭 한 대 분량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 자료를 모두 가지고 왔음은 물론이다. 전후(戰後) 아베는 이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분석하였다. 그 결과물이 22권짜리 '아베 다이잔 전집'(1963년)이다.

대만의 웨이첸리도 그렇지만 일본의 아베가 주로 활동한 시기도 1950~60년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패전 후 사회 전체가 좌절에 빠진 시기였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주를 통하여 국민들의 상실감을 달래준 것이다. 같은 신문기자 출신으로서 전후의 일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인물이 두 사람인데, 한 명은 아베이고, 다른 한 명은 산케이(山經)신문 출신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이다. 아베는 사주팔자이고, 시바는 소설이었다.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명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난세를 먹고산다.

한국에서는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친형으로 사주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이병각씨가 아베와 교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 자주 갔던 이병철 회장이 형을 통해 아베와 만났을 법도 하다.

아베 사주의 강점은 디테일에 있다. 중국의 스타일이 전체적인 구조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는 반면, 아베 이후 일본의 방식은 세밀한 부분을 밝히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오행을 색깔.방위 쪽으로 풀이한 것이 한 예다. 사람의 사주에 화(火)가 부족하면 이사갈 때 남쪽이 좋고, 옷이나 자동차를 구입할 때 이왕이면 빨간색을 택하라고 권유하는 식이다. 화는 남쪽과 빨간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베가 기초를 다진 이 분야는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몇몇 전문가들에 의하여 가상학(家相學)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는다. 사주팔자를 생활풍수와 인테리어에 적용한 것이다. 일본에서 시작된 가상학은 홍콩의 화교들에게 역수입되었고, 다시 미국의 차이나타운으로 전파된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가상학은 미국인들에게까지 먹혀들고 있다. 중국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가상학은 특히 미국 상류층이 주요한 고객이다. 3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유력지 LA 타임스의 주말섹션에 생활풍수 칼럼이 정기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찌되었거나 일본에서 시작된 가상학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베가 중국에서 가져온 트럭 한 대분의 자료가 자리잡고 있다.

원광대 초빙교수 조용헌
2003.08.07

 

 

조선 역술가들 왕권승계 쥐락펴락

 

 

한국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보기 시작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그 기원을 소급해 올라가다 보면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경국대전'이 눈에 띈다. '경국대전'을 보면 과거시험을 통해서 '명과학(命課學) 교수를 뽑았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명과학 교수란 사주명리학 전문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초시(初試)에서 4명을 선발한 다음에 복시(復試)에서 2명을 탈락시키고 나머지 2명만 뽑았다. 사주팔자 전문가를 국가에서 봉급 주는 공무원으로 선발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명과학 교수에 응시하였는가. 양반이 아닌 중인들이었다. 명과학은 천문학.지리학과 함께 중인들이 응시하는 음양과(陰陽科)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교수들이란 대학의 교수를 가리키는 호칭이 아니라, 이들 음양과 출신 교수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음양과 교수들은 정년이 보장되는 전문기술직이라서, 머리 좋은 중인들이 상당수 응시하였던 것 같다. 과거시험은 매년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만 있었다. 식년시(式年試)라고 해서 3년 간격을 두고 시행되었다. 3년에 2명을 뽑았다면 이는 매우 적은 인원이다.

'경국대전'의 성립연대가 세조 6년인 1460년에 시작하여 성종 16년인 1485년에 완성되었음을 감안하면, 사주팔자를 보는 명과학이라는 분야는 적어도 15세기 후반부터 조선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공식기록만을 가지고 추정한 연대이고, 공식화되기 전에 유행하기 마련인 비공식까지 고려하면 연대는 이보다 더 소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과학의 시험과목은 무엇이었을까. '서자평(徐子平)' '원천강(袁天綱)' '범위수(範圍數)'와 같은 책들을 외는 일이었다. '서자평'은 명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서자평이란 인물이 남긴 저서 이름이다. 흔히 '연해자평(淵海子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자평 이전까지의 명리학은 태어난 시는 보지 않고, 생년.월.일까지만 보는 삼주육자(三柱六字)의 방법에 의존하였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386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10세기 무렵 중국의 서자평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체계에다 그 사람의 태어난 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정밀도를 보강한 486 컴퓨터의 출현과 같다. 예를 들어 2003년 8월 29일 진시(아침 8시)에 태어난 사람의 간지를 만세력에서 뽑아보면 계미(癸未).경신(庚申).갑술(甲戌).무진(戊辰)이 된다. 네 기둥에다가 글자는 여덟자인 사주팔자(四柱八字)가 된 것이다. 여기서 시에 해당하는 무진을 빼면 삼주육자가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이 방법은 서자평이 창안한 방식이다. '원천강'은 관상 보는 책이다. 당나라 때 관상으로 유명했던 원천강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딴 책이다. 근래에 관상서로서 널리 알려진 '마의상법(麻衣相法)'은 송(宋)대에 저술된 것이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된 관상서가 청(淸)대에 저술된 '상리형진(相理衡眞)'이다. 요즘에는 별로 유통되지 않지만 조선초기에는 '원천강'이 대표적인 관상서로서 알려졌던 모양이다. '범위수'는 택일에 사용하는 책 이름이다. 명과학 응시자들은 시험관 앞에서 이러한 책들을 모두 암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실전문제에 응답해야 했다.

국가 공무원으로 뽑힌 명과학 교수들은 일반서민을 상대하지는 않았다. 지방출장을 다닌 것도 아니다. 오로지 궁궐 내부에서만 활동하였다. '로열 패밀리' 전용 술사였던 것이다. 이들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공주나 왕자의 혼사 때 상대방과의 궁합을 보는 등 왕실의 혼사가 주 업무였지 않나 싶다. 예나 지금이나 혼사에는 사주.관상이 중요한 예측수단으로 활용된다. 과연 두 사람이 만나 백년해로할 수 있을 것인가. 정확한 답은 살을 맞대고 살아 보아야 나온다. 하지만 살아보기 전에 미리 알자는 것이 사주.관상의 목적 아니겠는가. '지인지감'(知人之鑑 : 사람을 판단하는 감식력)에 있어서는 사주.관상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별로 없다.

명과학 교수들은 왕실 내부의 인적사항을 소상하게 알 수밖에 없었다. 왕자들과 공주들의 생년.월.일.시에 대한 정보를 모두 꿰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궐에서 출산이 있는 날에는 산실 밖에 이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사주팔자를 장부에 적어 놓았다. 그 외에 신랑 신부 합궁하는 날짜, 건물을 신축할 때 길일을 잡는 일, 임금의 명에 따라서 대신들 개개인의 사주팔자를 보고하는 일도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임금은 많은 자식을 낳았다. 법적으로는 장남에게 왕권승계의 우선 순위가 있지만, 실제로 장남이 승계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변수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명과학 교수는 왕자들의 사주팔자를 모두 알고 있으므로 대권의 향방에 관한 '일급 정보'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갑이라는 왕자가 군왕이 될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명과학 교수의 의견이 여론의 향배에 중요한 비중으로 작용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권력투쟁에 말려들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명과학 교수가 특정 대군의 사주를 조작해 유포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반대파가 그 교수를 제거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궁궐 내에 근무하는 의원과 명과학 교수는 왕권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전(?)에 개입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역대 왕 가운데 의문사한 경우가 11건이라는 통계도 있다.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궁궐의 의원은 반대파의 음식에 독약을 타고, 명과학 교수는 종종 사주를 조작했던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궁궐 내에서 근무하던 어의(御醫)는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가 개업을 할 수 있었지만, 명과학 교수는 정년퇴직하더라도 개업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만약 전.현직 대감들이 궁궐 밖에서 명과학 교수와 자주 접촉하면 역모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조선시대 명과학 교수는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주쟁이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한복판에 있었다. 정치가와 역술가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던 것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2003.08.28

 

 

 

MBA 출신 vs 계룡산 출신?

                                       

점(占)은 왜 존재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미래욕'(未來慾) 때문이다. 인간은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이 세상에 자기 앞일을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식욕.색욕.수면욕이 인간의 3대 욕구라고 한다면, 미래욕은 그 다음의 4대 욕구에 포함될 정도로 강력한 욕망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게 마련이다. 미래욕을 충족시켜주는 점쟁이는 깊은 뿌리를 가진 직업 중 하나다. BC 3천년께부터 있었다는 직업이 점쟁이다. 아직 구조조정도 없고 명예퇴직도 없는 직업이다. 실력만 있으면 흰머리가 늘수록 비례해서 복채(?)가 증가하는 직업이다.

미래의 상황을 예언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주식시세 예측하는 기술 하나 가지고 밥먹고 사는 애널리스트나 펀드 매니저도 모두 '점쟁이 과(科)'에 속한다. 21세기의 가장 세련된 점쟁이가 이들이다. 단지 포장지만 다르다. 미국에 가서 MBA라는 과정을 밟으면 '애널리스트'가 되고, 계룡산 토굴에서 정진하면 점쟁이 딱지가 붙는다. 중요한 것은 포장지가 아니라 내공이다. 내공은 예측의 정확도에서 나온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과거 선배들의 역사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점쟁이들이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5천년 가까이 축적해온 노하우는 다음의 세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이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따라서 원인을 알면 미래에 닥칠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chaos) 원리가 좋은 예다. 베이징(北京) 상공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한 여파가 캘리포니아 상공의 비구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카오스 원리다. 예리한 술사는 나비의 날갯짓을 주목한 다음, 며칠 후의 비구름을 예측한다. 모르면 카오스로 보이지만 인과를 알면 코스모스로 받아들인다. 추사 김정희가 7~8세 때 대문 밖에다 써놓은 '입춘대길'을 보고 지나가던 영의정 채재공이 집에 들어와 "저 애는 글씨로 대성하겠다"고 예언한 것도 미세한 인(因)을 보고 미래의 과(果)를 예측한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아버지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 밖에 나와서 구두를 닦다가, 구두닦이에게서 "나도 주식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케네디 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쪽 구두도 덜 닦은 채 부랴부랴 사무실 빌딩으로 올라갔다. 회사가 가지고 있는 전 주식을 팔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후에 미국의 주식은 대폭락했지만, 케네디 아버지 회사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구두닦이까지 주식을 샀다는 말을 듣고 주식 폭락의 징조를 신속하게 감지했던 것이다.

뛰어난 점술가는 사건 초기 단계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을 아주 예민하게 다듬어야 한다. 소주에 삼겹살 많이 먹으면 감각이 마모된다.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정신이 집중되면 꿈이 정확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선견몽(先見夢)을 꾸게 된다. 성공한 사업가 부인들 가운데는 영몽(靈夢)을 꾸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부인의 내조 가운데 몽조(夢助.꿈으로서 도와줌)도 무시할 수 없다.

둘째는 반복의 법칙이다. 규칙적인 반복현상은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밤과 낮, 사시사철의 순환이 바로 그것이다. 유사 이래로 밤에서 낮으로, 낮에서 밤으로의 반복이 한번이라도 고장난 적은 없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도 마찬가지다.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갑자기 동남풍을 불러일으킨 사건도 그렇다. 공명은 재야에서 공부하면서 1년 3백65일의 일기변화를 관찰한 데이터를 수십년 동안 축적했고, 이 데이터에 의해 매년 그때쯤이면 바람이 방향을 바꿔 동남쪽에서 불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공명의 '기도발'로 동남풍이 분 것이지만, 축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반복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음양오행은 이러한 반복현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사주명리학의 이론적 체계는 음양오행이고, 음양오행은 자연현상의 반복에서 도출된 개념이다.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기질과 길흉화복에까지 연결시킨 것이 사주다. 예를 들어보자. 봄은 목(木)에 해당하고, 목은 인정 많고 적극적인 기질이 있다고 해석한다. 여름은 불(火)이고, 불은 예의가 바르고 판단이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가을은 금(金)이고, 금은 의리가 있고 결단력이 있다. 겨울은 물(水)이고, 물은 꾀가 많고 융통성이 있다고 해석한다. 음양오행을 좀더 확대 적용한 것이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다. 십간은 왜 10인가?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태양계 내의 별이 10개이기 때문이다. 십이지는 일년이 열두달이기 때문이다. 행성 10개의 움직임과 열두달의 변화는 규칙적이다. 이 규칙적인 움직임을 도표화한 것이 10간 12지이고 60갑자라고 생각한다. 이 60갑자의 규칙적인 순환에 의해 매일 매일의 날짜를 기록해 놓은 것이 만세력이다. 서양 점성술에서는 출생 당시의 각 별자리 위치, 즉 천궁도( Horoscope)를 일일이 작성해야 하지만, 사주는 그 천궁도가 60갑자로 간편하게 도표화돼 있기 때문에 만세력만 보면 된다. 종합하자면 사주는 반복의 원리를 이용한 점술이다.

셋째는 귀신의 존재다. 귀신이 앞일을 알려준다. 문제는 귀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다. '업계'에서는 존재한다고 본다. '주역'의 '계사전'을 보면 '귀신합기길흉'(鬼神合其吉凶)이라고 해서 길흉을 알려면 귀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돼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귀신을 전제하고 있다.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수많은 접신(接神)과 빙의(憑依)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접신된 무당이 그 사람의 전화 음성만 듣고도 앞일을 예언하는 것은 귀신이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귀신도 등급이 있다. 등급이 낮은 무식한 귀신이 접신되면 잘 맞지 않는다. '귀신같이 거짓말한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실력 없는 귀신은 곧잘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다. 인과.반복.귀신 이 세가지가 점의 원리다. 점쟁이는 이 세가지를 모두 사용하고, 애널리스트는 첫째.둘째 것만 사용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2003.09.18

 

 

지리산大學 낭인科를 졸업하다

 

중앙일보 2003년 11월 27일


중국에는 '삼국지'가 있다. 일본에는 '대망'이 있다. 조선에는 뭐가 있는가? 중국은 땅 덩어리가 넓어서 '삼국지' 같은 대하로망의 탄생이 가능했고, 일본은 외세의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끝까지 치고받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대망'아니겠는가. 조선은 땅이 좁아서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없고, 뭐 좀 할 만하면 그때마다 외세가 끼어드는 통에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이야기가 되어간다 싶으면 중간에 주인공이 죽어 버렸던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장정'처럼 주인공이 여기 저기 도망다니면서 오래 살아야만 장편 대하소설이 가능한 법이다. 한국에서는 교도소를 탈옥해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찾아보면 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10권)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의 역사와 인물과 정조가 그려져 있다. '임꺽정'이라는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박경리의 '토지'도 나올 수 있었고,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가능했다고 본다. 관찰해 보니까 장편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타고난 아이큐와 감성에다 좌절이 곁들여져야 한다. 반드시 인생의 쓴맛을 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떠돌이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홍명희만 하더라도 충청도 괴산의 명문 사대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잘 나가는 인생을 살았지만, 한일병합이 되면서 군수였던 아버지가 자결하자, 충격을 받고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중국을 거쳐 싱가포르.미얀마.말레이시아 일대에서 7년 동안이나 방랑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경험이 불후의 명작인 '임꺽정'을 낳았다. 자고로 소설가와 예술가는 낭인생활이 필수적이다. '등 따스하고 배부르면' 작품은 없다.

제산(박도사)도 마찬가지다.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은 신동이었지만, 6.25때 피란가면서 다리를 다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자기보다 공부 못한 친구들은 모두 대학을 갔는데, 본인만 산골인 함양에 낙오되었던 것이다. 낙오된 자의 슬픔을 이기기 위하여 그는 지리산 일대를 떠돌았다. 돈 한푼 없이 춥고 배고픈 상태로 떠돌았다. 지리산 둘레는 대략 6백리다. 한국의 실크로드가 지리산 로드다. 그 골짜기마다에는 천년이 넘게 축적된 유.불.선의 향기가 어려 있다. 수많은 고승과 선비, 도사들의 향취가 배어 있는 것이다. 봐주는 사람이 없는 들풀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머리 좋은 수재가 인생에 낙오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 절망감을 보상해 주었던 것은 지리산의 영봉(靈峰)과 구름 그리고 소나무였다. 현재에도 지리산 일대에는 대략 3천명의 낭인과(浪人科)가 운집해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직업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지만 산이 좋아서 지리산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지리산에는 인삼만 빼고 없는 약초가 없다고 한다. 봄이 오면 취나물도 뜯고 고사리도 뜯고 더덕도 뜯고 당귀도 캐고 황정(黃精)도 캔다. 재수 좋으면 산삼도 발견한다. 허름한 토굴을 짓고 사니까 생활비도 별로 들지 않는다. 필자가 올 봄에 화개(花開) 골짜기 쪽에 찻잎을 따러 갔다가 지리산의 전형적인 낭인과 한명을 만났다. 40대 중반인데 독신이다. 20대 중반부터 설악산.오대산.태백산 등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다가 지리산에 정착한 지 6년째라고 한다. 의외로 얼굴빛이 밝고 소박한 표정이었다.

"이 생활이 좋은가?" "좋다. 무엇보다 신간이 편하다" "무엇을 먹고 사는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등산객들이 자주 오가는 고개마루로 나가서 앉아 있으면 먹을 것은 해결된다. 등산객들이 산을 올라올 때는 준비해온 식량을 주지 않지만, 하산할 때는 짐이 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주고 간다. 제일 어려운 시기는 지금 같은 봄철이다. 산불예방 때문에 등산객이 별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는 화개의 차 만드는 일을 도와주면서 두어달 아르바이트를 한다. 먹는 문제는 해결된다."

지리산은 이런 산이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직장의 월급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제산이 도사 수업을 받은 곳은 바로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에 이름 없이 살던 수많은 도인들과 접촉하면서 점차로 현상세계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던 것 같다. 춥고 배고프던 20대 지리산 시절에 자주 만나던 친구가 실상사 가까운 인월(引月)에서 원제당 한약방을 운영하던 노개식(盧价植.65)씨였다. 한학에 밝아서 둘이 만나면 도학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곤 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씨가 황(黃)씨일 거야.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산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노개식은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 10시쯤 되어서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까, '하수(河洙)'라고 하지 않는가. 속으로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까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에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 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 "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라는 말은 '귀신이 귀에다 보고를 해 준다'는 뜻이다. 산기도를 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이 되는 수가 있다. 접신이 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다 대고 정보를 알려준다. '지금 저 사람의 마음은 어떤 상태이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필보(筆報)도 있다. 붓을 잡으면 자동적으로 글씨가 써지는 경우다. 귀신이 알려주는 메시지가 붓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친구로부터 "자네 이보로 알게 된 것이지" 라고 추궁을 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서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내가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분석의 근거는 이랬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아침 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 마르면 먹으려고 흰 사기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 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대나무 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에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듣고 보니 나름대로 이치에 맞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쯤 어느날 제산이 남원 인월에 있는 친구의 한약방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이다. 이처럼 신비의 종착점에는 합리가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2003.11.27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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