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풍미(晋池風味)는 납전(臘前)의 봄인데
지리산 가의 초목이 새롭네
금가루 옥싸라기 달이니 다시 좋고
빛깔, 맑은 향기, 뛰어난 맛이 더욱 진기하네
경상도 관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하연(河演)(1376∼1453)이 이곳
차의 뛰어난 색. 향. 미(色. 香. 味)를 읊은 「신차(新茶)」란 시이다.
일찍이 추사(秋史) 선생은 "화개차는 중국 제일의 용정(龍井)이나
두강(頭綱) 보다 질이 낫고,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주방에도 없을 것이다."며 화개차의 우수함을 극찬하였고(최범술(崔凡述)의 『한국의 다도』 p.114), 초의(草衣) 선사도 『동다송』의
여러 곳에서 우리나라 차의 우수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다기(東茶記)』에 어떤 사람은 의심하여 우리나라 차의 효능이 중국 월산차(越産茶)만 못하다고 하나, 나 초의가 보기에는 색(色), 향(香), 기(氣), 미(味)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서(茶書)에 육안차(陸安茶)는 맛으로 뛰어났고, 몽산차(蒙山茶)는 약효가 높다 하였으나, 우리나라의 차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만약 중국의 유명한 차인(茶人) 이찬황(李贊皇)이나 육우(陸羽)가 함께 있다면 반드시 나의 말이 옳다고 긍정할 것이다.
초의가 이야기한 우리나라 차는 영산 지리산 변의 하동(화개)차를
말함이다.
하동(화개)차는 왜 우수한가? 그 과학적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개는 차나무에 알맞은 기후 조건과 다른 지방과 다른 응축된 차
향기를 갖게 하는 독특한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 세계 3대 명차(名茶) 중의 하나인 다이즐링 홍차의 산지인 인도의 다이즐링 지방은 히말라야의 해발 2,000∼3,000m의 험준한 벼랑에 차밭이 있다. 이 곳의 차나무들은 낮 동안 태양의 직사 열이 저녁때가 되면
갑자기 차가워지면서 계곡 밑으로부터 하얀 안개가 가득 피워 올라오게 된다. 이 안개와 극심한 일교차가 이 지방의 차를 세계적인 부드러운 맛과 최고 향기를 갖춘 특유의 다이즐링 홍차로 만든다. 이 곳 화개가 다아지일링 지방만은 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한 지세를 이루고 있다. 큰 산(지리산)과 큰 강의(섬진강)의
하류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화개는 평균 해발 1200m가 넘는 지리산 종주 능선이 서북쪽을 가로지르고, 남쪽은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 흐르는 해발 20m정도의
지형이다. 규모는 작지만 인도의 다아지일링과 흡사한 지형이 화개차의 향기를 좋게 하는 것 같다.
차나무 재배에 알맞은 기후는 연평균 기온 12∼18℃, 연평균 강우량은 1,400∼2,400mm이며, 영하5℃ 이하면 동해를 입게 된다. 토질은 토심이 깊고 자갈이 적당히 섞인 땅이 좋은데, 초의선사의
지적대로 화개의 토질은 차가 자라는데 최적이다. 화개의 연평균
기온은 13.8℃, 연평균 강우량은 1,538mm이다.
화개의 차밭은 최고급 차를 생산하는 자연적인 복하원(覆下園) 차밭이다. 차나무는 일조량이 많으면 쓰고 떫은맛이 늘어난다. 같은
차밭의 찻잎도 일조량이 적은 봄과 일조량이 많은 여름에는 성분
함량과 맛이 차이가 많이 나게 된다. 맛과 향기에 관계가 있는 전질소와 유리 아미노산은 일조량이 적은 봄차에 많았고, 떫은맛의
탄닌은 일조량이 많은 여름차에 많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최고급 차는 인삼밭 같이 인공적인 그늘 시설을 하여 일조량을 조절해 준다. 우리나라에도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차나무를 기르며 [양차(養茶)]」란 시를 보면 작은 동산의 반음지에서 차를 기르기 위해 인공적인
그늘 시설을 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차나무를 기르며
해마다 차나무에 새 가지 자라는데
그늘에 키우노라 울을 엮어 보호하네
육우는 다경에서 빛깔과 맛을 취한다네
관가의 과세처에서는 창기만 취한다네
봄바람 아직 불지 않아도 먼저 움튼 싹이 펴지고
곡우초가 돌아오면 잎이 절반 찢어지네
조용하고 따뜻한 땅의 작은 동산이 좋아서 뻗어나가면
비 탓으로 옥 꽃술 드러내도 무방하다
위 차나무를 그늘에서 키우기 위해 울타리를 엮어서 보호한다는
것은 인삼을 그늘에서 키우기 위해 가리개를 하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화개의 차는 차밭인지 유실수림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교목인
유실수나 대[죽(竹)]의 아래 빈 공간에 관목인 차나무가 자라고
있는 입체적인 복합림 형태의 복하원 차밭이다.
화개의 차나무들은 너무나 야생으로 내팽개쳐 있었다. 신미경(辛美慶)님은 『한국산 야생 녹차의 품질에 관한 종합적 연구』라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우리나라 야생 녹차에 대한 종합적인 성분 특성을 검토하기 위해 '화개동 계곡에서 자연으로 야생하고 있는
차'를 실험 재료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화개차가 자연의 차나무에 가장 가깝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좋은 밭에 줄지어 잘 가꿔진 차나무와 야생 그대로의 차는 인삼(人蔘)과 산삼(山蔘)의 차이라면 너무 지나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