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궐은 어떻게 신하들을 길들였을까
경복궁 근정전의 일화문과 월화문 그 은밀한 기능
건물의 배치와 형태는 인간의 행동양식은 물론 정신세계마저 지배한다. 이 말은 건축이 인간을 다양한 측면에서 길들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전통시대 궁궐은 왕을 제외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길들였을까. 양반집과 궁궐, 都城과 현대 건축을 응시하면서 ‘건축’이 인간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 분석한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이상현 지음, 효형출판, 2013)은 이에 대한 답을 던져준다. 저자 이상현 명지대 교수(건축학부)는 궁궐이 어떻게 왕의 권위를 드러내고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도구로 작동했는지를 흥미롭게 분석했다. ‘경복궁’ 근정전을 따라 이동하는 신하들을 길들이도록 배치된 구조를 따라가 본다.
근정전 내부는 경복궁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근정전을 차지하고 앉는 자가 가장 힘이 있고 존귀한 자가 된다. 경복궁은 건물의 배치와 형태를 조작해서 근정전을 가장 권위 있는 곳이 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곳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 질서를 자연스럽다 못해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신하가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긴 여정을 거쳐야 한다.
왕을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선 근정문 앞에서 대기한다. 근정문 앞마당은 동서남북으로 행각이 둘러쳐 있다. 사방이 행각으로 둘러싸인 근정문 앞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금천이 흐른다. 마당을 남북으로 가른 금천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직급이 높은 신하(당상관)가, 남쪽으로는 직급이 낮은 신하(당하관)가 대기한다. 금천이 마당의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는 게 무척 흥미롭지 않은가. 천을 ‘건넜다’와 ‘건너지 못했다’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천을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영역이 다르고, 이로써 명백한 구분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근정문 앞마당에서 당상관과 당하관을 구분해서 대기시킬 때, 금천이 아닌 담장으로 구분했다면 어땠을까.
▲ 경복궁 근정전, 국왕이 출입하던 중앙의 근정문(사진 위) 좌우에는 두 개의 협문이 있다. 문관이 이용하는 일화문과 무관이 이용하는 월화문(사진 아래)이다. 이 문을 통해 신하들의 움직임이 관리됐다. 사진제공 효형출판사
당상관의 입장에선 담장보다 금천을 경계로 했을 때 더 기분이 좋을 것이다. 당하관이 부러운 눈으로 지켜봐줘야 더 흥이 날 테니까 말이다. 당하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담장으로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 것보다 금천 건너에 있는 당상관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 나도 저렇게 돼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자면 방법은 왕에게 더욱더 충성하는 수밖에 없다. 금천으로 지위 고하를 구분한 장치는 이렇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길들이기를 수행한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길들여지고 싶어 안달하게 하는 교묘한 장치다. 근정전 마당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근정문을 지나야 한다. 하지만 근정문은 왕과 왕비, 세자 그리고 중국의 칙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
신하들은 근정문 좌우에 붙은 두 개의 협문을 사용한다. 근정문 동쪽에는 일화문이 있고, 서쪽에는 월화문이 있다. 흔히 세 개의 사물이 나란히 놓여 있을 경우 가운데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띠기 마련이다. 그런 경우 대체로 가운데 것은 주변 사물에 비해 규모나 장식이 특별하다. 그런데 양쪽 좌우에 있는 것들 간에도 중요도에 차이가 있을까. 좌측과 우측은 상대적 관점이다. 가운데에서 바라보는 방향을 정한 뒤에야 좌우를 정할 수 있다. 근정문 좌우에 있는 두 개의 협문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좌측이 더 중요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들어갔다가 나올 때가 문제가 된다. 나올 때는 좌측이 우측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좌측이 더 중요하다는 기준을 계속 적용하려면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각기 다른 문을 사용하게 해야 한다. 좌측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견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례가 필요하다. 좌측과 우측이라는 상대적 좌표를 사용하면 이런 불편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절대적 좌표, 동서남북을 사용하는 것이다. 동서남북에도 중앙은 존재한다.
상대적 좌표를 사용하든, 절대적 좌표를 사용하든 중심의 개념은 살아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가운데(중앙)에 두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의 좌우를 구분하기 위해서 동쪽과 서쪽을 사용하면 들어갈 때나 나갈 때나 그 판단 기준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동쪽에 있는 일화문은 누가 사용하고, 서쪽에 있는 월화문은 누가 사용했을까. 우리나라는 관습적으로 동쪽을 서쪽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동쪽으로 더 중요한 사람이 드나들도록 했고 서쪽으로는 그보다 덜 중요한 사람이 드나들도록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쪽의 일화문으로는 문관들이, 서쪽의 월화문으로는 무관들이 드나들었다. 금천으로 남북을 가름으로써 근정문 앞마당에 서 있는 신하들의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분명하게 했다면, 이동할 때는 일화문과 월화문으로 동서를 가름으로써 다시 한 번 신분과 지위 고하를 구분한다. 동서 방향에 담긴 지위 고하의 의미는 당연히 남북 방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근정문을 지나, 정확히는 일화문과 월화문을 지나 근정전 앞마당, 즉 조정에 들어선 신하들은 남북 축선으로 대열을 이루게 되는데, 당연히 왕이 있는 북쪽에 가까울수록 지위가 높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대열에서 북쪽 끝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고위 관직자다. 그 차이를 크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양끝의 물리적 거리를 멀게 하는 것이다. 까마득하게 멀다는 것은 저쪽 끝에 있는 사람이 까마득하게 높은 존재임을 뜻한다. 그런데 너무 멀면 한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잃기 쉽다. 게다가 너무 멀리 있으면 날 못 보겠지 하는 생각에 방자한 행동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거리만 멀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 눈으로 살필 수 있고, 필요하다면 직접 가서 행동을 규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리가 무한정 떨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위 고하를 깨닫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 상황에서 써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문의 활용이다. 문을 달아서 이쪽과 저쪽이 다른 영역임을 알리는 것이다. 남북 축선에 영역을 많이 만들수록 신분 차이는 확연해진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려면 많은 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은 문의 끝에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반집에서는 대문과 중문, 두 개의 문을 사용했고, 조선의 왕이 살았던 경복궁에서는 세 개의 문을 사용했다.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