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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1월 8일 금요일]
『대동야승』 제11권
[기묘록 속집 (己卯錄續集)] 이종익(李宗翼) 신원소장(伸冤疏章)
생원 이종익은 관직을 갖지 못했지만 상소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다섯 번의 상소를 올렸다. 그 첫 번째가 1529년에 올린 다음 상소인데, 기묘사화 때 유배되거나 파직된 신하들의 원통함을 호소하며 용서해 줄 것을 은근히 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는 2년 전에 남곤은 죽었지만 심정과 김안로가 호각지세를 이루는 때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화를 입어 절도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귀양 가서도 꿋꿋하게 상소를 올렸으나 김안로가 득세한 1532년에 마지막 상소를 올리고 귀양 간 곳에서 분통이 터져 죽었다고 한다.
「기축년(1529년)에 생원 이종익이 찬적의 원통함을 신구함[己丑生員李宗翼伸竄謫之冤]
신은 들으니, 우(禹)와 탕(湯)은 자기를 죄주었기 때문에 그 흥함이 신속했고, 걸(桀)과 주(紂)는 남을 죄주었기 때문에 그 망함이 빨랐다 합니다. 아, 남과 더불어 충성을 하되 자신의 진실을 다하고, 처신을 공평하게 하되 다른 사람에게 완전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이나 불초한 이가 서로 권하는 바요, 치란(治亂)이 나누어지는 원인입니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품으로서 중흥의 운명을 개척하였으므로 사직에는 걱정거리가 없고 종묘에 경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오히려 또 친히 능침(陵寢)에 거둥하시니, 조상을 받드는 효성이 지극하고, 몸소 적전(籍田)을 가시니 백성을 거느리는 어짊이 깊습니다.
윗사람의 것을 덜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는데, 먼저 조세를 감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고, 분함을 징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다시 서방을 정벌하는 의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위대하도다, 천하의 으뜸되는 착함이 모두 전하의 몸에 집중되었음이여. 오히려 하늘의 견책에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글을 내리어 자신을 죄주어 전전긍긍하면서 잠시라도 편안히 있지를 않고 겸공(謙恭) 숭고(嵩高)한 높음을 지키어 여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산림의 무리에게까지 미쳤으니, 이것은 또 대우(大禹)가 좋은 충고를 듣고 엎드려 절하고, 성탕(成湯)이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은 성대한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좋은 습속이 이루어지는 교화를 또다시 오늘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을 당해야 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임금이 있는데도 한 포의(布衣)의 선비조차 성명의 뜻에 응하여 고황(膏肓)에 맺힌 병을 고치려는 이가 없으니, 이것이 신이 분수 넘게 죽으려 하는 까닭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저도 소년 때에 경서를 읽었고, 전하와는 일찍이 반면식(半面識)이 있으므로 자나 깨나 그리워하였습니다. 세월이 그럭저럭 흘러서 20년이 홀연히 지났는데도 사업은 이미 텅 비었고, 또 지기(志氣)마저 잃어서 몸도 바로잡지 못하고,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죄와 허물이 한 몸에 운집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책망하여도 소용이 없고, 뉘우쳐도 도리가 없으므로 달게 자포자기하여도 소문조차 나지 않으니, 이 세상에서 무용한 존재가 된 줄을 안 지가 꽤 오랩니다.
오늘날, 전하의 은혜는 부모의 은혜와 같습니다. 은혜가 이미 이와 같다면, 신이 감히 한 가지 어리석은 소견으로써 구중(九重)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과 행실이 서로 맞는 것은 대인의 일이요, 말이 행실보다 앞서는 것은 소인의 하는 짓입니다. 신은 한갓 말만 할 뿐이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의 신분을 구별하여 그 말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출관직방(出關直方)의 의논을 돌아보지 않아 엎어지고 넘어져도 뉘우치지 않는 것을 전하께서는 허락하시겠습니까. 신은 신의 말이 반드시 옳다는 것이 아니오니, 전하께서는 좌우 대신들과 그 득실을 따져 보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만으로 아뢰겠습니다.
□□ 유자광(柳子光)이 또한 간사하여, 김종직(金宗直)에게 원한이 있다고 속으로 죽여 없애려는 뜻을 품었다가 그 일을 모함하게 되매, 드디어 당세 임금의 살벌한 화단(禍端)을 만들어 내어, 사직이 거의 동요할 뻔하였습니다. 아, 종직이 전연 그른 것이 아니고 자광이 옳지 못한 것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함께 격물(格物)의 학문을 의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번 내세우면 신더러 미쳤고 어리석다 하겠으나 10년 동안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 스스로 믿는 바가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앞으로 올 화가 종직의 때보다 더 클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렵니까.
처음에 전하께서 김식(金湜)ㆍ김정(金淨)ㆍ조광조를 전혀 잘못 시험하시어, 즐거이 왕을 보좌할 신하인데도 서로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전하께서 인재를 볼 줄 아시는 명성을 세인의 이목으로부터 어긋나게 하시고, 오늘날의 쇠퇴한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그것은 실로 김종직으로부터 잠재해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밝게 보는 임금과 때를 구제하는 대신이 없다면 거의 위태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벌을 감하여 지나치지 않게 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이 함육(涵育)할 뿐이겠습니까. 후일에 젖내 나는 무리들이 당시 대신들에게 허물을 돌리어,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큰 죽음을 당했으니, 이것은 신이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 광조의 마음 쓰는 것이 원래 그러하지 않았는데 조두(俎豆 예의(禮儀))를 잘못 배워서 그 화가 이러한 것이니, 신하 된 자로서는 거울삼을 만한 일입니다. 유자광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사이사이 빠진 것이 있다. 신이 이미 이전의 두어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겠지마는, 다시 그때에 탄핵을 당한 사람은 모두 쓸만하다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은 들으니, 요(堯) 임금은 조정에 사흉(四凶)이 있다고 해서 원개(元凱)의 어짊을 버리지 않았고 주(周) 나라는 집에 이숙(二叔)이 있다고 해서, 노(魯) 나라와 위(衛) 나라와의 친교를 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두어 사람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세대의 인물을 다 무고할 수 있습니까. 아, 저 사람은 마땅히 벌을 줄 것과 또 이 사람은 버리지 못할 것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함께 궁리(窮理)의 학문을 의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마는 받아들인다면 제 말이 천하를 횡행하더라도 좋습니다.
이제 신이 가만히 지금의 정세를 살펴보고 자세히 물정을 추리해 볼 때, 오늘의 조정이 갈라져서 조개와 황새의 형세가 되어 백 년의 환을 끼쳐 주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모름지기 전하의 밝으심과 재상들의 넓은 도량으로 잘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대체로 인정이라는 것은, 이것을 높이면 저것을 억누르고, 저것이 강해지면 이것이 약해지니, 신이 어떻게 하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사람을 얻어서 그와 함께 넓고 크게 도를 의논할 수 있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격물궁리(格物窮理)의 학문을 추구하사 선악의 큰 근원을 밝히시고, 솔선수범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시고, 공평정대하게 더욱 왕자의 도량을 열어서 조정의 기운을 화하게 하시와,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드신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조목조목 열거하여 진달하오리다.
신은 들으니, 제왕이 법을 운영하는 것이 미덥기는 사시(四時)와 같고 굳기는 금석과 같아서, 이것으로 조종(祖宗)의 법을 전하고, 이것으로 한때의 호령을 행하나니, 그런 뒤에야 백 가지 폐단을 없앨 수 있고 백 가지 이익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사면(赦免) 전에 있는 자는 비록 무거우나 반드시 석방하고, 죄가 사면 뒤에 있는 자는 비록 가벼우나 반드시 살필 것입니다. 공경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이 처음부터 그사이에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 아니오니, 이것이 왕자(王者)의 정치입니다.
옛적에 당 나라 절도사 우적(于頔)이 들어와 조회하자, 헌종(憲宗)이 총명과단하여 여러 사람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으므로 회채(淮蔡)의 공을 이룬 것이 이런 까닭입니다. 지금에 와서 사면이 지났는데도 반드시 죄를 주고자 한다면, 반드시 말하기를, 법률에 어긋나게 죄를 다스리느니, 또는 위로부터 지나치게 엄히 징계하느니 할 것이므로 이것은 모두 그릇되고 망령된 주장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평하게 의논하십시오. 어찌 한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형벌은 받고 덕은 입지 못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또 조정에서는 마땅히 충후한 신하가 부족한 것을 근심할 것이요, 형벌이 심하지 못한 것은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일찍이 무거운 법을 쓰는 세상을 지내셨으니 말을 하자면 더욱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후사에게 법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신은 들으니, 궁한 음기가 차게 엉기면 만 가지 물건이 드디어 폐색되었다가 따뜻한 봄에 한 번 움직이고, 맑은 기운이 바야흐로 형통하면, 곤충(昆虫)ㆍ초목ㆍ날짐승ㆍ물고기ㆍ동물 심지어 식물 등이 모두 한 원기 밑에 나타나고자 하거늘 더욱이 만물보다 영험한 존재로 태어나 밝은 시대를 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전날 탄핵을 입은 사람들을 보건대, 평생에 모두 군자로 자처하였으니, 그 가운데에 어찌 분발하고 힘써서 스스로 공을 세워 전 허물을 속(贖)할 자가 없겠으며, 일찍이 시종에 출입하다가 물러가 초야에 처하여 있으니, 어찌 바람을 임하여 회상하면서 섭섭하게 대궐 뜰을 바라보는 자가 없겠습니까. 대개 착한 생각은 항상 우환에서 생기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이 안락에서 잃는 것이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천지가 만물을 소생시키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서 크게 왕자의 법도를 잇는다면, 산 사람은 천지에 유감이 없을 것이요, 죽은 사람도 귀신에게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공자도 말하기를, “재주 있는 사람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였는데, 지금에 그 인재를 폐하여 두고 매양 인재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니, 이것은 이른바 비록 염파(廉頗)ㆍ이목(李牧)을 얻더라도 능히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마음에 얻지 못하면 정열이 집중되고 그 정열이 불평한 기운에 집중되면, 유명(幽明)을 통하여 울결(鬱結)ㆍ상승(上昇)합니다. 그래서 음기가 이기면 서리와 우박이 되고 양기가 도우면 가뭄이 되니, 이것은 이치의 필연적인 것이어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감옥 속과 매질 아래서 정상이 혹 상달되지 못하고 일이 혹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어찌 죄 없이 잘못 죽는 자이겠습니까.
또 사방을 돌아보건대, 귀양가는 사람이 서로 잇따르고 하늘을 바라보며 원통함을 부르짖으며 간 자는 돌아오지 않고 귀양오는 자는 오히려 계속되니, 사람이 한 세상에 나서 그 수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제왕이 사람의 충성을 허여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는 뜻이겠습니까.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사마시(司馬試)의 장원에 들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10년 동안 초나라의 물과 단풍 숲 밑에서 / 十年楚水楓林下
오늘 밤 처음으로 장락궁의 종소리를 듣노라 / 今夜初聞長樂鐘
하였으니, 10년 만에 나라로 돌아오는 것이 예전에도 전례가 있었으나, 광명을 보지 못하고 거의 일생을 마칠 때까지 영락하여 마침내 전하의 위대한 도량을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은 듣건대, 우리나라의 인심과 풍속이 대개는 중국과 같으나 혹 같지 않은 것도 있으니, 한 사람이 벼슬을 하면, 칠족(七族)이 부양되어 함께 근심과 즐거움을 표하여 서로 관계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중국의 풍속이요, 낳아서 머리털에 물이 마르면 사람마다 각자의 마음을 가져서 재물을 나누어 각각 살고 혹은 서로 숨기는 것은 우리나라의 인심입니다. 이때문에 한 사람이 악한 일을 지으면 친구가 서로 연루되어 화를 당하는 자는 천하에 많이 있으나, 꾀를 함께 하고 흉한 일을 같이 하고도 우연히 천벌을 벗어나는 자는 고금에 다만 두세 사람뿐일 것입니다. 또 김처례(金處禮)같은 자는 역적 처의(處義)의 아우인데, 사형을 면하고 탐라(耽羅)로 귀양 갔다가 7년 만에 돌아왔으니, 이것은 세조(世祖)께서 한 세상을 뒤흔들던 솜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황제(高皇帝)의 《대명률(大明律)》이 천하에 통행되는 것을 폐할 수가 있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덕을 공경하는 공적을 받아들여 법률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되 수시로 그 은택을 베푸신다면, 이것이 어찌 인정과 법을 아울러 위엄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제왕으로서 어찌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 임금의 근심은 9년의 물이요, 탕 임금의 근심은 7년의 가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 근심할 것은 마땅히 근심하고 마땅히 근심하지 않아야 할 것은 근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재와 한재가 우와 탕의 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선왕들과 하늘에 제사하던 마음을 진실로 상상할 만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우와 탕의 근심으로써 근심을 삼지 않고 한갓 피부로 느끼는 말단의 일에만 구애되신다면, 이것은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잡는 것 같아서 차라리 근심할 줄을 모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전하의 용맹한 생각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신이 부지런히 간곡하게 되풀이하여 진달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까? 또 기다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 조정의 큰 의논이 이미 정해진 바에야 초야의 미미한 자취로 어찌 감히 이론을 제기하겠습니까. 천고의 재앙됨이 오늘과 같은 적은 없어서 1년에 부지런히 움직여 얻는 것은 적수공권(赤手空拳)이니 천도(天道)는 막연하고 인사(人事)는 공평을 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구구한 저의 작은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 세상에 나서 조정의 근심을 품고, 분수를 모르고 당세의 일을 논하였으니, 신의 참람하고 망령된 점 진실로 죄를 피할 수가 없음을 아나이다. 전하께서 자신을 책하고 여론을 갈구하는 오늘날을 당하여, 무릇 신하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귀를 가리고 입을 다문 채 시기(時忌)를 피하고 고식(姑息)적인 태도만 취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주장을 내세워 전하의 바람을 외롭게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자(臣子)가 군부를 떠받드는 것이 조정에 있고 초야에 있다고 해서 더하고 덜함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밤중에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의지하여 길이 탄식하고 재차 누웠다 다시 일어나서 끝내 묵묵히 참지 못한 것입니다. 다행히 전하께서 보신다면, 큰 쇠북의 한 소리가 반드시 추상(秋霜) 같은 엄숙함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마음에 간절한 충심과 성의를 감출 수 없어서 삼가 백 번 절하고 만 번 죽음으로써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부언 : 공의 이런 주장이 부당하다 하여 당시 재상의 비위에 거슬렸으므로 멀리 바다 섬으로 귀양갔다가 그 뒤에 병이 되어 분통이 터져 두 번째 상소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한국종합고전DB]
[참고자료 1] 작서의 변 (灼鼠之變)
조선 중종 대에 발생한 궁중 저주사건으로, 경빈 박씨와 복성군 모자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폐서인되고 쫓겨난 사건이다.
'작서(灼鼠)'란 '불에 탄(灼) 쥐(鼠)'를 의미한다. 불에 탄 쥐의 시체를 누군가가 세자(인종)의 동궁 북쪽 나무에 매달아 놓았음이 사건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敬嬪 朴氏)는 중종의 맏아들인 복성군(福城君)을 낳아 총애를 받았다. 당시 왕비였던 장경왕후가 원자(인종)를 낳고 1주일만에 사망하자 경빈은 왕의 가장 많은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서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며 스스로도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정광필만은 경빈의 집안이 미천하고 장차 원자(인종)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하며 반대하였다. 마침내 경빈의 뜻은 저지되고 중종은 문정왕후를 새로운 왕비로 책봉하였다.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는 왕의 총애를 업고 사화에 관여하며 개입하였는데, 사림들은 이들의 행동을 왕의 성총을 흐리는 행동이라며 비난하였으며 사간원과 사헌부의 대신들을 비롯하여 사관들 또한 이들을 성품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다.
1527년(중종 22년) 2월 25일, 당시 왕세자였던 인종의 12번째 생일날에 누군가가 죽은 쥐를 가져다 사지를 찢고 불에 지져 세자의 침실 밖에 매달아 놓았다. 이 일은 세자의 생일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난 3월 말에 세자의 외조부인 윤여필이 심정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심정이 좌의정 이유청에게 알렸으며 이유청이 최종적으로 중종에게 아뢰어 사건의 주모자를 죄줄 것을 청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의정부에서 범인을 즉시 색출할 것을 청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세자궁을 저주한 자를 찾아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사건 현장을 처음 목격한 중종의 또다른 후궁인 상궁 안씨(창빈 안씨)의 여종 내은덕(內隱德)을 시작으로, 세자궁의 시녀 은금(銀今)과 중월(仲月) 및 무수리 현비(玄非) 등이 공사를 받았다. 누군가가 쥐의 눈, 코, 입을 지지고 꼬리를 반쯤 자른 것을 세자궁뿐만 아니라 대전 근방에도 두었는데, 왕실을 저주하는 주술 행위는 역모죄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이 사건은 옥사로 확대되었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귀인 홍씨(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 또한 용의선상에 오르며 궁인들에게 거론되었다.
4월 14일, 자순대비(정현왕후)는 언문(한글)으로 교지를 내려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의구심이 드는 부분 등을 전하며 경빈 박씨가 자신이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 불만을 갖고 욕지거리를 했으며, 경빈의 둘째 딸인 혜순옹주의 계집종들이 인형을 만들어 '쥐를 지진 일을 발설하면 이렇게 죽이겠다' 하며 인형을 참수하는 흉내를 내며 저주하였다는 얘기를 전했다.
이에 경빈 박씨와 혜순옹주의 계집종들을 붙잡아 6번이나 형신을 가했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았다. 대간과 삼사가 계속 경빈 박씨와 복성군에게 죄를 주고 내쫓으라고 주청하자 4월 21일 중종은 박씨를 폐서인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승정원이 교지를 작성하기로 했는데, 박씨가 범인이라고 자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작성하기를 힘들어하여, 중종에게 지침을 내려달라고 했다. 이때 중종은 '대비께서 경빈이 의심스럽다는 글을 내리셨으니 그에 의지하라'며 슬쩍 책임을 대비에게 돌렸다. 4월 23일, 정현왕후는 중종에게 비망기를 내려 '내가 비록 경빈을 의심하긴 했어도 범인으로 확정지은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날 대간이 합사하여 경빈을 내쫓을 것을 열한 번이나 아뢰었으나 중종은 경빈에게 죄를 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4월 26일, 중종은 마침내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을 폐하여 서인으로 강등하고 경상도 상주로 추방하였으며, 경빈의 아버지를 비롯한 인척들 역시 파직되었다. 작서의 변 사건 때 혜순옹주의 계집종들이 문초를 받았고,(『중종실록』 22년 4월 15일) 혜정옹주의 남편인 홍려는 이 사건으로 신문을 받던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중종실록』 28년 5월 26일),(『중종실록』 28년 5월 26일),(『중종실록』 28년 5월 26일)
이어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는 작서의 변으로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사사됨과 함께 폐서인되었으며, 혜순옹주의 남편 김인경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어 변방으로 유배를 갔다.(『중종실록』 28년 5월 26일)
1532년 유생 이종익(李宗翼)은 중종의 장녀인 효혜공주의 남편 김희가 아버지 김안로의 사주를 받아 작서의 변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묻혀버렸다. 하지만 이후 김안로가 사사되고, 이 사건의 주모자가 경빈 박씨(敬嬪 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이 아니었음이 밝혀지며 복성군(福城君)은 1541년(중종 36) 복권되었다.(『중종실록』 36년 11월 9일) 또한 혜순옹주와 혜정옹주, 두 옹주와 김인경도 신원되었다.(『중종실록』 36년 11월 9일) [위키백과]
[참고자료 2] 가작인두의 변
1533년(중종 28년), 동궁(東宮)의 빈청 남쪽 바자(把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 형상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붙이고 이목구비 등을 새겨 목패에 단 다음, 목패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中宮)을 참(斬)할 것' 과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는데[11], 이 저주사건으로 인해 6년 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연루되었다.
5월 23일,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경빈 박씨가 마침내 사사되었다.
이후 홍문관과 시강원, 대간의 대신들이 복성군과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 홍려의 사사를 요구하였으나 중종은 강하게 거부하였다. 반복된 주청 끝에 복성군은 결국 사사되었으며, 두 옹주 역시 옹주의 작호를 박탈당하고 폐서인되었다. 조선 역사상 재위 중의 국왕이 아들을 죽인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혜순옹주의 남편인 광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고,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 홍려는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32년, 유생 이종익(李宗翼)은 작서의 변은 인종의 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와 김희의 아버지인 김안로가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조정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진 않았다. 이후 인종은 중종에게 '박씨가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미(복성군)가 연루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복성군의 작호와 신분을 신원해달라고 청하였다. 이후 복성군은 물론 폐출된 두 옹주의 신분도 신원되었으나, 경빈 박씨가 작서의 변의 진범이 아니라고 공적으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억울하게 죽었다고 암묵으로 수긍한 것 같다.
[참고자료 3] 《중종실록》의 사관은 중종과 경빈 박씨, 작서의 변과 중종의 치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 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다. —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4월 26일 (임신)
사신은 논한다.
미(嵋, 복성군)가 작서의 변이나 목패를 매단 모의에 간섭하고 참여하였다면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죄이므로 드러내어 처형해도 애석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간흉의 무리들이 거짓 공론을 빙자하여 군부를 협박, 임금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면서도 조정으로 하여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26일(무진)
사신은 논한다.
상(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려 견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 단경왕후)를 내치고 박빈(朴嬪, 경빈 박씨)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11월 15일 (경술) [위키백과]
[팔경논주]
이종익이 마음은 절실하지만 아직 때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문장을 다듬어 은근한 비유를 들며 상소를 올렸지만 현실은 아직 심정과 김안로 등 조광조와 사림파를 미워하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었다. 중종은 자기가 저지른 학살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하지만 이종익의 상소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결과가 한 편의 상소에 대한 귀양 처벌이었다. 한 편의 글이 귀양이라는 극한의 처벌을 불러왔지만 이종익은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귀양지에서 1532년에도 상소를 올렸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 72권, 27년(1532) 3월 1일 경술 1번째 기사에는 기장機張으로 유배된 생원生員 이종익李宗翼이란 사람이 올린 상소가 실렸으니, 그 내용은 박운朴雲·이행李荇·이항李沆·김극성金克成·조계상曺繼商·유여림兪汝霖을 다시 등용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서 이종익은 임금한테 충성하다가 나중에 억울한 일을 당한 역사상 인물들을 거론했거니와, 그네들 처지를 빌려 임금이 그런 충신들을 물리쳐서는 안 된다는 요지다.」
「그 뒤 1532년 이종익(李宗翼)의 상소에 의해 진범이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안로는 심정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원한을 품어오던 중 아들 희를 시켜 작서의 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아들이 부마로 있음을 계기로 정권을 농단하다가 권세를 잃게 되자 권세를 만회하고자 한 김안로의 음모로, 당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이종익이 상소를 통해 <작서의 변>의 진범을 밝혔지만, 1532년은 1530년에 복귀한 김안로가 한창 권력을 장악했을 때다. 김안로는 세자인 인종 누나의 시아버지로서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작서의 변을 조작하고 남곤과 심정 등 방해되는 세력을 제거했다. 그러니 종사를 위한 사건이었다는 명분 아래 작서의 변이 묻힐 수밖에 없고, 김안로를 공격한 이종익의 상소는 무시되고 이종익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왕을 능가하는 지나친 권력 때문에 김안로는 1537년 중종에게 숙청당했다.
중종 시대는 세자 자리를 둘러싼 살벌한 권력투쟁의 연속이었고, 그 와중 속에서 조광조 등 수많은 신하들이 희생되었다. 중종 초기엔 박원종과 성희안 등 반정공신이, 이어서 조광조가, 이어서 기묘사화로 남곤이, 이어서 복성군파인 심정이, 이어서 세자파인 김안로가 집권하였다.
경빈 박씨 소생이나 연장자인 복성군 이미(李嵋 1509 ~ 1533)와 폐비 단경왕후 신씨에 이는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소생인 세자 이호(李峼 1515 ~ 1545)는 치열한 경쟁자였다. 딸이 홍빈 홍씨인 홍경주와 경빈 박씨와 가까운 심정은 복성군 편을 들고, 김안로는 사림파와 함께 세자 편을 들었다. 김안로는 1527년에 ‘작서의 변’을 조작하여 복성군과 경빈 박씨를 쫓아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여 1533년에 ‘가작인두의 변’을 조작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 이로써 세자 이호의 지위는 탄탄해졌다. 그러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늦게 왕자 이환(李峘 1534 ~ 1567)을 낳음으로써 세자 구도가 꼬이게 되었다. 이밖에도 후궁들이 낳은 아들이 많았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7개월 만에 죽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세력의 등살에 얼마나 시달렸겠는가. 그래서 독살의 의혹도 있다. 그 뒤를 아우인 이환, 명종이 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렇게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권세를 누린 명종 시대가 끝나고, 정작 왕위를 이은 것은 후궁 창빈 안씨 소생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 이연(李昖)으로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였다. 선조는 조선 최초의 후궁 소생 방계 왕족 출신 국왕이다.
고려 의종 때 무신정변을 일으켜 150명 문신을 단숨에 학살한 이의방 아우인 이린의 혈통인 태종과 세조에 이어 많은 신하들과 선비들을 학살한 중종의 때부터 그 업보대로 조선 왕가는 원기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조선의 백성들은 갖은 신고를 겪게 되었다.
이종익은 절해고도에서 억울하게 죽었지만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기묘록 보유 하권』에 있는 <이종익 전(李宗翼傳)>은 다음과 같다.
「이종익은 □□생이며 자(字)는 □□이고 정묘년에 생원이 되었다. 공은 기질이 억세고 비분강개하는 성품이었다. 병술년 가을에 재변 때문에 조정에서 구언(求言)하자, 공이 상소하기를, “신이 가만히 시세(時勢)를 보고 물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오늘날 조정이 갈라져 방휼지세(蚌鷸之勢)로 되었으니, 앞으로 백 년의 근심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또, “전날에 논죄 받은 사람들은 평소에 모두 사군자(士君子)로 자처하였던 사람들이니, 그중에는 다시 분발하고 부지런히 힘써 공(功)을 세워 전에 진 죄과를 속죄할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일찍이 시종(侍從)으로 출입했던 사람들도 강호(江湖)에 물러가 있으니, 때로 옛일을 회상하고 하염없이 대궐을 바라보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방으로 귀양가는 자가 잇따르니 그 원성이 하늘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간 자는 돌아오지 못하고 새로 귀양 온 자가 잇따라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시들어 거의 다 죽으니 끝내 전하의 위대하신 도량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가 만물을 살리는 마음을 본받으시어 무시로 혜택을 내리시면, 이 어찌 인정(人情)과 법을 아울러 쓰시고 재앙을 멎게 하시는 큰 기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것이 직분을 벗어나 일을 논한 무엄한 짓이라 하여 해도(海島)로 귀양보냈는데, 울분이 병이 되었다. 또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언하였더니, 그때의 재상이 크게 노하여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죽이려 하였다. 임금이 홍문관과 육조(六曹)의 참의(參議) 이상 관원들에게 의논을 모으도록 명하였는데, 오직 홍문관 정자(正字) 이준경(李浚慶)과 참판 이사균(李思鈞)만이 죄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을 뿐, 나머지 관원들은 모두 대간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으므로 마침내 죽이고 말았다.
명종이 대사간(大司諫)으로 추증(追贈)하였다.」
해도로 귀양가서 울분으로 죽었다는데, 귀양을 보낸 자가 김안로이다. 아마 음모에 능한 김안로가 보낸 자객이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림파들이 구하고자 했지만 권력을 장악한 김안로에게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종직은 생원으로서 강강한 성격으로 다섯 번의 상소를 올렸다. 올라온 상소는 대부분이 정승들이 읽고 전결 처리하는데, 내용이 무겁고 중요한 것은 임금에게 올린다. 이종익이 올린 상소는 중종이 모두 읽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로 1529년 중종 24년 10월 16일에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가 있다.
「우리 세조조(世祖朝) 적에 어떤 대신이 김종직(金宗直)을 천거하자 세조께서 친히 만나보시고는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다. 등용할 것 없다.’ 하였습니다. 이에 종직은 발끈 화를 내고 물러가서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비방했습니다.
대개 군신이 만나는 것은 풍운(風雲)의 모임으로, 요행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필요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를 어찌 다 셀 수 있겠습니까? 이런데 굴원(屈原)은 잘못 멱라수(汨羅水)에서 죽었고, 가의(賈誼)는 장사(長沙)에게 통곡했으니, 또한 망령된 짓이 아닙니까?
하물며 예부터 중흥(中興)한 군주는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요기(妖氣)를 소탕한 뒤에야 선왕의 대업(大業)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당시 임금이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고서 신하가 갑자기 옛일을 인용하여 역귀(蜮鬼)처럼 헐뜯는다면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상고해 보니 세조 9년에 종직이 이파(李坡) 등과 십오 학사(十五學士)의 선(選)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세에 진출하기 위해 주선한 지가 오랬습니다. 이미 북면하여 신하의 의(義)를 맺은 사람이 다시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전국 시대의 비루한 선비도 하지 않던 것입니다. 먼저 그 임금의 선조를 헐뜯고 다시 그 조정에 벼슬하는 것은, 인정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으니, 이것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그치지 않는 까닭인 것입니다.
이는, 신하로 칭하지도 않고 녹봉도 받지 않으면서 일월(日月) 같은 충의를 지닌 자와 높은 지위로 국사를 맡고 있으면서 털끝만큼도 동요되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종(成宗)께서는 그의 문장을 아껴서 한 번 군수(郡守)에 제수(除授)했고 다음은 감사에 제수했고 그 다음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했습니다. 그러나 번다한 첩보(牒報)와 소장(訴狀)을 침체시킨 채 처리하지 못했으니,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종익의 이 상소문은 논란을 야기하였고, 도리어 이종익이 전처 유씨를 유씨의 외척과 자주 만난 일로 이혼한 것을 지적하며 문제 삼았다. 결국 1530년 10월 1일 당시 영의정 정광필이 이종익의 이혼과 김종직에 대한 비판을 함께 언급하며, 미친 사람이라 본래 정상이 아니니 처벌할 이유가 없다 하여 논란이 종결되었다고 한다. 정광필이 이종익을 구하기 위해 편법으로 말했겠지만 ‘미친 사람’이란 말은 아무래도 지나쳤다. 상소문을 보면 자기 생각과 주장을 상당히 논리정연하게 진술하고 있으며 논지가 분명하다. 김안로만 안 만났으면 크게 쓰였을 아까운 인물이다.
1529년이면 기묘사화 10년 후로 중종의 분노가 많이 누그러지고 기묘명현들에 대한 추모와 신원 분위기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할 때다. 그런데 이종익이가 사람파들이 종장으로 떠받드는 점필제 김종직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니 얼마나 미웠겠는가.
그럼 이종익이 왜 김종직을 비판했겠는가. 교산 허균도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꼰 것을 두고 <김종직론>이라는 글을 통해 조롱하였다. 현대 정보의 바다가 워낙 넓고 깊어서 김종직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 <잡학 반대와 세조와의 갈등>
1463년(세조 9년) 여름 그는 불사(佛事)를 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464년(세조 10) 7월 그는 세조에게 음양오행 등 잡학을 장려한다고 질타했다가, 분노한 세조로부터 호되게 질책당하였다.
세조가 '능력이 있는 문신을 천문, 지리, 음양, 의학, 사학, 시학, 율려(律呂) 등 한 분야에 배속시켜서 익히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는데 김종직은 그만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이고 미신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라며 반대한 것이다.
세조가 듣지 않고 물리치자 그는 같은 내용의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그러자 분노한 세조는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라며 용서하지 않았다.
사물의 진리를 밝히는 학문이 성리학이니만큼 천문, 지리, 의학 등의 실용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문신이 앞장서 익혀야 하는데, 김종직이 섣불리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김종직은 곤장을 받고 투옥되고 파직되었다. 공신 세력은 사림파의 존재를 거슬리는 존재로 취급하여 사림의 당수인 그를 엄하게 처벌하려 하였지만, 여러 공신들의 발호를 견제하던 세조는 그를 고신 박탈과 곤장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이듬해 복직하고 경상도 평사로 부임하였다.」 [위키백과]
세조의 말이 맞다. 소위 잡학을 평범한 신하들이 집행하는 것보다 유능한 문신이 책임자가 되어 관리하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런데도 오로지 성리학만 정학이고 나머지 천문, 지리, 음양, 의학, 사학, 시학, 율려(律呂) 등은 잡학이고 미신이라는 김종직이 이후 수백 년 동안 종장으로 추앙받는 사림파들의 기본 생각이 조선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겠는가. 현실에서 보면 조선의 유명 문중은 명당을 찾아다녔다. 명당 개념은 풍수지리설로 김종직이 비판하는 음양오행 등 잡학에 속한다. 그런데 음양오행이 곧 유학의 기본 이치가 아닌가. 김종직은 잡학과 미신을 분별하지 못한다. 미신은 마땅히 청소되어야 하지만, 우리 민족 고유의 민속신앙은 오전히 보존되어야 하며, 잡학이란 말로 대충 얼버무리기에는 ‘천문, 지리, 음양, 의학, 사학, 시학, 율려(律呂)’ 등이 백성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크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더 정하게 다듬어서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지식인인 양반사대부들의 할 일이요 도리가 된다. 그러니 세조와 이종익, 허균 등이 김종직을 일러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들’ 때문에 이후 조선은 오로지 정자와 주자의 말씀을 달달 외워서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의 지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하는 인생관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잡학은 중인 이하 계급이 하는 학문이라고 천시하였다. 그러나 서양은 근대부터 그 잡학을 크게 발전시켜 문명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조선의 옹졸과 쇠퇴가 김종직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종직은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서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을 지냈다.
즉 세조 때 등과하여 이조좌랑 벼슬까지 올랐다. 그만하면 세조의 신하이다. 그런데 세조 찬탈을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지었다. 그 글을 개인 문집에 넣어두면 될 것을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로 격상하여 올림으로써 무오사화의 화근이 되었다.
세조가 단종을 폐하여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할 정도면 아예 매월당 김시습처럼 과거를 보지 말아야 한다. 과거를 보고 세조 치하에서 벼슬길에 나섰으면 세조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심을 품고 <조의제문>을 쓴 것을 정당하지 못한 처신이다.
제자인 김굉필은 스승인 김종직이 좋은 벼슬길에 집착함을 경계하는 시 한 편을 지어 보냈다. 그러자 김종직은 김굉필을 제자에서 내쳤다. 김종직이 유명한 이유는 서인-노론의 종장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 집권 노론 세력에 의해 김종직이 과대포장 되었고, 그 영향이 해방 이후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유학사는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 김종직 외에도 그 시대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고, 그들의 학문을 이어온 학자들이 후세에도 맥을 이었다.
이런 김종직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이종익은 역사적 인물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눈을 갖고 있다. 후인들도 이종익의 상소를 통해 김종직의 흑역사를 볼 수 있다.
이종익의 상소를 논하다 보니 곁가지로 흘러 김종직에까지 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이종익의 상소는 계속된다.
「생원 이종익(李宗翼)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자질로 신민(臣民)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신 지 20여 년간 조심하고 두려워하시며 날로 새롭게 하여 시종 변함이 없으니, 의당 인의(仁義)가 점점 닦여지고 덕택에 미더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음양(陰陽)이 화합하지 않고 재변이 그치지 않으니, 신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천지는 몸체요 인물은 심장과 혼백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지와 서로 유통하기 때문에 사람이 화하면 기(氣)도 화하고 저것에 감동하면 이것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기는 상서를 가져오고 여기(戾氣)는 재앙을 부르는 것으로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옛부터 한재(旱災)는 반드시 원통한 기운이 있어 일어나는 것으로, 원통한 기운이 생기는 것은 실로 옥송(獄訟)과 수계(囚係)가 많은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효부(孝婦)의 무옥(誣獄)169) 이 있자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원안(袁安)이 초(楚)나라의 정성으로 옥사(獄事)를 결단170) 하니 비가 내렸습니다. 사람으로 하늘을 징험하고 옛일로 지금 일을 징험하여 보건대, 오늘의 재변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폐조(廢朝) 때에 나인(內人)에게 빌붙어 폐단을 부리던 자들에 대해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즉시 그 가운데 극심한 자를 가려내어 모두 외방으로 귀양 보냈는데 지금껏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방환(放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식한 사부(士夫)로 같은 죄를 졌던 자들은 현달한 벼슬에 올라 금대(金帶)를 두르고 옥관(玉冠)을 썼는가 하면 혹 천발(薦拔)되기도 하였으니, 어찌하여 문책(問責)이 군자에게는 박하고 소인에게는 후합니까?
전번 야인(野人)들을 몰아낼 때 군법을 범한 사람이 귀양가기도 하고 파면되기도 하였는데, 어째서 그 죄는 같은데 처벌은 다릅니까? 주부(州府)와 군현(郡縣)에서 각 역(驛)에 이르기까지 유배(流配)된 사람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성명(聖明)한 세상에 어찌하여 죄인이 이리 많고 선인(善人)이 이리 적습니까? 지금 다시 듣건대 도형(徒刑) 이하의 미결수는 다 사면(赦免)한다 하니, 지극한 은혜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미 귀양간 자는 죄가 있고 아직 귀양가지 않은 자만이 죄가 없겠습니까? 이미 판결된 자는 원통함이 없고 미결자만이 원통함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죄의 대소와 정상의 애매함을 조사하여 연좌(連坐)로 유배(流配), 정속(定屬)된 사람도 모두 소방(疏放)하여 하자(瑕疵)를 척결함으로써 천의(天意)에 응답하도록 하소서.
신은 듣건대 임금은 사직과 생민의 주인이요, 형제는 천륜(天倫)이니 더욱 독실하고 친후하게 하여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성종 대왕(成宗大王)은 다자 다남(多子多男)하여 본지 백세(本支百世)의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폐주(廢主)에 이르러 혐의를 품고 용납지 못하여 그릇 두 아우를 죽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습니다.
전하께서 어지심으로 사나움을 제거하고 다스림으로 어지러움을 바꾸던 날에 다시 전철(前轍)을 뒤따라 드디어 견성군(甄城君)으로 하여금 죽을 곳을 얻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몸이 재상이 되어서 사특한 생각을 진압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전하에게 말세의 일로 권고하여 전하로 하여금 아우를 죽인 이름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당시 대신의 수치였습니다. 지금 또 영산군(寧山君)을 간사한 사람의 입에 올랐다 하여 해변의 음습(陰濕)한 고장으로 내쫓았는데 이것이 어찌 영산군이 참여하여 아는 일이겠습니까?
만일 영산이 돌아오지 못하고 병사(病死)한다면 동기를 해친 누명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떻게 하늘에 계신 성종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영산을 소환하여 처음과 같이 대우하신다면 한 집안에 즐거움이 융융(融融)할 것은 물론 하늘도 즐거워할 것입니다.
지난번 김식(金湜)과 조광조(趙光祖)의 무리가 귀신이 호리듯 당을 지어 천청(天聽)을 기망(欺罔)하였고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궤격하게 속이고 사정(私情)을 써서 조정의 정사를 탁란시켰으니 의당 형벌을 받아야 할 것으로 용서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다음 가는 자로서 남아 있는 자는 5∼6인에 불과합니다.
신은 듣건대 10년이면 반드시 변하는 것이 하늘의 도(道)라고 합니다. 저들도 사람이므로 8∼9년간에 피눈물 흘리고 허물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재출발할 날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문을 활짝 여시어 중죄에 처한 자는 가볍게 해주고, 멀리 귀양 보낸 자는 가까운 곳을 옮겨주어 원통한 기운을 없애도록 하소서.
지금 광조의 일에 연관되어 한산직(閑散職)에 버려진 자가 많고 관직을 삭탈당한 자 또한 많습니다. 신이 광조의 사람됨을 살펴보건대 실로 변변찮은 그릇으로 진실로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같이 웅걸(雄傑)스런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식견이 천박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광조를 선인(善人)으로 여겼기 때문에 혹 겉으로 화합한 자도 있고 혹 양단(兩端)을 가진 자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그에게 모두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겠습니까? 하건만 지금 이들을 모두 실절(失節)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수용(收容)하지 않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괴이하게 여깁니다.
신이 지금 말한 것이 혹 채용할 만하여 급히 시행하신다면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고 화기를 부를 수 있음은 물론, 가뭄을 변하여 풍우가 알맞게 내리게 할 수 있고 흉년을 변하여 풍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단지 기양도사(祈禳禱祀)하는 말단의 일만을 일삼는다면, 신은 그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또 듣건대 나라가 나라 꼴을 이루는 것은 기강과 체통이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대신과 대간(臺諫)이 서로 득실(得失)을 논하고 시비를 다투기 때문에 체통이 존엄해지고 기강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옛부터 임금이 골육의 변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오직 재상의 처치가 어떤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근자에 쥐를 지진 일에 대해 대신이 진청(陳請)한 것은 진실로 깊이 그 체통을 얻은 것이요, 대간이 논주(論奏)한 것도 깊이 그 기강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즉시 청단(聽斷)하지 않으시어 육조(六曹)의 낭관(郞官)과 육시칠감(六寺七監)175) 은 물론 유생(儒生)까지도 소요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먼저 간언을 막아서 체통과 기강을 훼상시킨 것입니다.
신이 또 보면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지방은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쇠잔한데도 오히려 이엄(耳掩)을 만든 털과 몸을 따스하게 하는 모물(毛物)을 수없이 구색하여 끝없이 징렴(徵斂)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권관(權管)·만호(萬戶) 등이 날마다 갈퀴질을 일삼고 있으므로 깃털 하나만 떨어져도 그것을 기화(奇貨)로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므로 내지(內地)의 군졸은 궁마(弓馬)와 갑주(甲胄)를 죄다 갖추고 있었지만, 갈려 돌아올 적에는 허리에는 빈 전대만 차고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오는 형편입니다.
신은 본시 무인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따라 관서 지방(關西地方)에 가서 몸소 겪고 보고 들었습니다. 전일 야인(野人)을 몰아낼 때에 조정에서 의논하여 큰일을 일으키는데도 귓속으로 서로 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게 했습니다. 이래서 평안도 사람들은 호령(號令)을 몰라서 반신반의 하면서 추위를 막는 도구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인을 몰아내게 되자 인마(人馬)가 추위와 주림에 지쳐 삼대처럼 쓰러졌고 그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도 손가락이 끊어지고 피부가 터져서 모두 병자[病夫]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안도는 다행히도 그때의 주장(主將)이 좀 어질었기 때문에 이런 화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야 깊은 구중궁궐에 계시니 어찌 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랑캐의 거처는 지금도 예전 그대로이고 여독(餘毒)도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강산(江山)이 역질(疫疾)을 겪은 후이고 인물이 굶주려 죽다 남은 처지인데 갑자기 풍진(風塵)이 일어난다면 국가에서는 어떤 계책으로 대처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대신들과 소복(蘇復)시킬 방법을 도모하여 길이 만세토록 안전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소서. 남방의 삼도(三道)는 천부(天府)의 땅인데 호남일대(湖南一帶)는 더욱 부유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백성이 궁핍하고 재물이 다하여 떠도는 자가 잇달고 있어 지금은 양계(兩界)의 곤폐(困弊)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연분(年分)의 등제(等第)는 절로 상규(常規)가 있는데 어사(御史)를 보내어 허실을 알려 하면 곡식이 잘 되었다고 원근에서 와전(訛傳)하므로 호부(戶部)의 관원들이 마음대로 억측(臆測)하여 중(中)을 상(上)으로 매깁니다. 이로 인하여 호남 사람들은 파산(破産)하여 가면서도 세금을 충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세금을 못내도 도망하면 한 집안이 함께 화를 받게 됩니다.
신은 듣건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가 12가지인데 형벌을 늦추는 것이 세 번째에 들어있고, 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두 번째에 들어있다고 합니다. 공자(孔子)도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되 용도를 아끼고 사람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반대로 흉년을 당하여 절검(節檢)을 힘쓰지 않고 더욱 가혹하게 백성의 고혈을 착취한다는 말은 못들었습니다.
대저 방금의 형편은 사람이 부종(浮腫)을 앓아 허리와 배가 북통처럼 팽창하여 겨우 생존하고 팔다리가 가늘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약(藥)을 잘 제조하여 혈맥을 고르게 한다면 부기가 빠져 해가 없을 것이지만, 겨우 생존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럭저럭 시간만 끌면 반드시 뭉개지고 터져서 구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민생이 이미 극도로 초췌한 상태에 있으니 손과 발이 가늘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익이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니 허리와 배가 팽창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에 있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주식(酒食)의 복이 남아돌아 즐겁게 노닐면서 사치와 탐오한 풍습에 빠져 그치지 않고 있으니 갑자기 의외의 변이 발생한다면 장차 어찌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체통을 엄히 하고 기강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고 억울과 침체를 풀어주고 세금을 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사치를 억제하고 탐오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뜻에도 맞고 백성도 소생할 것입니다.
대저 임금은 천하의 근원이요 마음은 또 임금 한 몸의 근본입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예운(禮運)에 ‘왕은 중앙에 위치하여 무위(無爲)한 마음가짐으로 지정(至正)을 지킨다.’ 하였으니, 진실로 마음이 연못처럼 고요하여 물결이 일지 않고 북돋아 심어 흔들리지 않는 나무같이 되면, 천리(天理)가 쉬지 않고 유행하고 외물(外物)이 스스로 물러가 잡되지 않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늘을 섬기면 하늘이 응하고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이 잘 육성됨은 물론 군신·부자·형제·부부의 윤리까지도 모두 다 질서가 있게 될 것이고, 일에 대응함에 있어도 조처에 따라 마땅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천자(天資)가 고명하시니, 비록 변고를 당해도 중용을 체득하여 끝내는 해롭지 않은 데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독공(篤恭)의 공(功)에 혹 지극하지 못하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변이(變異)가 발생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말에 ‘임금은 좋아하는 것이 치우쳐서는 안 된다. 좋아하는 것이 일단 치우치게 되면 소위(所爲)가 선하더라도 아랫사람이 반드시 엿보게 되어 그 해가 반드시 부정(不正)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궁궐에 계실 적에는 매우 화(和)하시고 사당에 계실 때는 매우 공경하시도다. 드러나지 않은 데서도 선조의 신령이 임어(臨御)하신 것같이 조심하고, 싫어함이 없이 늘 지키는 바가 있도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잘 체득하여 힘써 행하시면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상소의 내용이 매우 타당하다. 영산군의 일은 내가 매양 다시 의논하려 하였지만 이미 조정으로 더불어 의논하여 정한 것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였다. 지친(至親)이 오래도록 밖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겠느냐는 말이 매우 마땅하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당초 영산군을 이배(移配)할 때에 조정이 국가의 대계를 위하여 죄를 정한 것입니다. 지금 세월이 오래되었다는 것으로 위에서 방환(放還)시키려 하시니 이는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찌 일개 유생의 말로 경솔히 조정에서 이미 결정한 의논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상소 중에는 말해서는 안 될 것이 많이 있고 또 잘못 말한 것도 있으니, 취실(取實)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이 상소의 말은 공사(公事)로 만들 수 없으니 정원(政院)에만 두어두도록 하라.“
【태백산사고본】 30책 59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57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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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논리정연하고 백성들의 삶을 동정하는 마음이 녹아있는가. 이 한편의 상소를 통해 조선의 선비, 비록 높은 벼슬자리에 앉지는 못한 백두의 선비이지만 그의 흉중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정이 얼마나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종익의 상소가 모두 임금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종도 글을 배워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소의 취지는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중종실록 72권, 중종 27년 3월 26일 을해 3번째기사 1532년 명 가정(嘉靖) 11년
지평 허항이 이종익의 죄를 명시하여 중외에 효유할 것을 아뢰다
지평 허항이 아뢰기를,
"이종익은 이제 이미 처결되었습니다. 그가 한 말은 바로 이행·이항·조계상의 의논으로서 진실로 일조 일석의 일이 아니라 그 근원이 깊습니다. 종익의 죄는 마땅하나 다만 이 일을 종익 한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제 종익의 뚜렷이 나타난 죄로 전형(典刑)을 명시함으로써, 한 사람을 징계하여서 모든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을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위키백과]
생원 이종익은 『국조인물고』에 오를 만큼 유명하거나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아니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설도 있지만 정확하지 않고, 관향이나 생몰연대를 모른다. 그러나 그가 올린 상소는 어느 누가 올린 상소보다 역사에 더 깊이 남았다. 정승 정광필로부터 공식적으로 ‘미친 사람이라 본래 정상이 아니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암과 충암 신원 상소 한 편 때문에 『기묘록 보유』에 芳名, 아름다운 이름 석 자가 남았다.
『대동야승』을 읽으며 조선 시대를 살고간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중에서 이종익은 벼슬보다는 상소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행동은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만 언어는 간접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직접적인 영향력은 단기간이지만 간접적인 영향력은 장기적이다. 이종익, 대단히 깐깐하고 집요한 성격을 가진 사람 같다. 공자가 종합한 유학을 시대에 맞게 적용하려고 노력한 올바른 선비정신을 가진 인물이 아닐까?
명종이 대사간으로 추증한 것이 오히려 ‘생원 이종욱’ 이름값을 깎아내리는 게 아닐까?